요즘 인기리에 종영한 드라마 <일타 스캔들>. 나도 이 드라마를 즐겨 보았다. 여주, 전도연과 남주, 정경호의 합에 대하여 분분한 의견이 있었기에, 둘의 합을 지켜보는 재미가 있었다. 어느 영역에서나 희열을 느낄 때는 예상을 빗나갈 때, 많은 우려를 뒤로 하고, 이미 리즈 시절을 지난 여배우, 전도연은 나이에 맞지 않는 상큼한 캐릭터의 로맨스를 잘 실현해 주었다. 상큼하다는 말로는 부족할 것 같다. 일단 중년쯤 되는 여인네의 상큼함이란 씩씩함 속에 감춰진 인정머리가 특색이라고나 할까. 자폐장애가 있는 남동생과 언니가 두고 간 조카와 함께 살아가는 모습이 구질구질하지만 않아서 시청하는 재미가 있었다.
일타 강사의 위력이 이 정도인 줄은 몰랐다. 준 재벌, 1조원의 남자라니. 여태 재벌 집 아드님만 백마 탄 왕자인 줄 알았더니, 이제는 일타 강사도 힘든 가운데 씩씩하게 살아가는 여자 주인공의 왕자가 될 수 있다는 것, 이 시대를 반영하는 시류의 드라마임이 분명하다. 신데렐라 버전의 드라마에서 학원 강사가 백마 탄 왕자로 등장할 줄 누가 알았겠는가. 학원과 그리 친하지 않았던 나는 도리어 드라마를 시청하며 현실 세계를 인상 깊게 인식했다.
게다가 로맨스에 미스터리나 스릴러 장르의 긴장감을 비벼 넣는 것이 트렌드 인가 싶다. 로맨스의 갈등과 긴장을 최대치로 끌어올리는데 꼭 어떤 미스터리적 인물을 가미하는 드라마가 꽤 있었던 것 같다. 매우 영리한 장치이지 싶다. 이야기란 모름지기 긴장감이 유지되어야 지루함의 바다를 건널 수 있는 것, 긴장감을 촉발하는 데는 뭐니 뭐니 해도 미스터리 스릴러 캐릭터 삽입이 제격이다. 게다가 그런 캐릭터는 대부분 반전이 반드시 내장되어 있다. 일타 강사의 그림자처럼 움직이며 충실한 보조자 역할을 감당했던 ‘지동희’는 극의 후반부로 갈수록 그 존재감을 드러내며, 주인공들의 갈등과 긴장의 원인으로 작용했고, 잘못된 욕망의 결과물로서의 섬뜩함을 감당해 주었다. 그의 마지막 대사, ‘이제 그만하고 싶다, 지쳤다, 쉬고 싶다’에 내재된 의미는 문장의 길이보다 훨씬 많은 의미를 내재하고 있다.
나는 차라리 지동희의 죽음을 극의 중반부에 배치하고 이후 여주, 남주가 어떻게 그 상황을 극복하고 해결해 나가는지를 보여주었으면 어땠을까 싶다. 마지막 16회를 보고, 실망스러웠다. 물론 이 장르는 명백하게 로맨스이고, 로맨스의 주인공이 학원 강사이다보니, 극의 갈등을 가져올 만한 요소로써 기성세대의 욕망이 배출한, 왜곡된 학습의 희생자를 등장시키는 것은 개연성의 측면에서 매우 적절하다. ‘지동희’는 극에서 충분히 제 역할을 한 것이다. 그러나 지동희의 죽음 이후에도 여전히 또 다른 지동희는 존재하고 있다. 민재와 수아. 그 가족들의 결핍과 탈선과 왜곡.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동희는 죽이고 이들은 살렸다.
살기 척박한 세상에서 드라마의 해피엔딩은 카타르시스로서의 역할을 한다. 16회라는 분량에서 로맨스의 서사는 충분했고 해피엔딩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시청자들 또한 이런 결말을 바랬을 것이다. 나 또한 해피엔딩을 바라는 시청자의 한 사람으로서 두 주인공의 로맨스가 해피엔딩으로 끝나길 바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못내 아쉬운 점이 있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로맨스는 해피엔딩이라도, 유사 동희들, 즉 수아나 민재 등의 인물들은 열린 결말이었으면 했다. 성장통을 겪고 있는 청춘으로, 실패와 좌절 가운데 있는 청춘으로 말이다. 이들의 해피엔딩은 지동희의 죽음을 지나치게 개인적으로 해석하게 만드는 우를 범한다. 실은 유사한 상황이었다. 지동희, 민재네, 수아네가 말이다. 그런데 한 편은 새드엔딩이고 한 편은 해피엔딩이다. 이 둘의 차이가 무엇이기에?
지동희의 죽음이 남은 자들에게 반성적 기회를 주었다고 하는 것은 지나친 단순화다.
물론 개인의 윤리적 문제이기도 하다. 같은 상황에서 누구나 일률적인 선택을 하는 것은 아니니까. 그러나 동희의 왜곡된 선택의 배후에는 거대한 시대적 파도가 있다. 과열 입시 경쟁, 각자도생, 서열의 세계에서 살아남기 등, 아이들이 정신적, 정서적, 육체적으로 건강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거대한 구조적 흐름이 있는 것이다. 동희 한 사람에게 모든 책임을 돌릴 수는 없다는 얘기다. 물론 드라마의 작가가 의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왜곡된 인물들의 결과를 해피엔딩 함으로 동의의 탈선은 지극히 개인적인 것으로 ‘암암리’에 고착화 되고 만다. 부지불식간에 침투된 사고가 무서운 것이다. 스스로 인식하지못하는 사이에 뿌리내린 생각들은 문화처럼 깊숙이 침투해 부러 성찰적 사고를 하지 않는 한, 무조건 옳은 것이 되고 만다.
우리는 개인의 죄악과 윤리에 대해서는 엄격한 잣대를 겨누면서, 사회적이고 구조적인 죄악에 대해서는 너무 쉽게 함구하거나 그 안에 함께 매몰된다. 불로소득이 자랑거리가 되는 세상이다. 하나님은 수고한대로 거두는 것을 복이라 하셨는데, 우리는 수고하지 않아도 얻는 것을 복이라고 여긴다. 그래서 누구나 불로소득을 꿈꾼다. 부동산 투자를 해서 쉽게 번 돈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는다. 자본이 자본을 재생산하는 것을 와타나베 이타루는 ‘부패하지 않는 돈’이라 했다.
“시간에 의한 변화의 섭리로부터 벗어나 있는 것이 하나 더 있다. 돈이다. 돈은 시간이 지나도 흙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영원히 부패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부패는커녕 오히려 투자를 통해 얻는 이윤과 대금업을 통해 발생하는 이자로 인해 끝없이 불어나는 성질마저 있다. 바로 이 부패하지 않는 돈이 자본주의의 모순을 낳았다”(<시골 빵집에서 자본론을 굽다> 80p)
자원과 재화가 부족했을 때 인간은 기술을 발달시켰다. 재화가 풍부해지면 모두가 풍요로울 것이라 기대했지만, 이 예측은 엇나갔다. 풍부해진 재화를 팔아서 거둔 이윤이 노동자의 몫으로 재분배될 줄 알았건만, 또 다시 자본가의 것일 뿐이었다. 돌고 돌아서 돈이라던데, 선 순환을 만들지 못하고 고이기만 하는 돈은 부자의 호주머니만 불리는 형국이니 저자가 말한 그대로 ‘부패하지 않는 돈’이 되는 것이다. 한 알의 밀이 떨어져 썩어야만 생명은 순환되어 오래 오래 살아갈 텐데 말이다.
부패하지 않는 돈을 사랑하는 것은 자본주의의 미덕이다. 우리가 이런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러니 나의 부패하지 않는 돈이 이웃의 고통의 원인이 된다는 것을 의식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거대 악의 배후 속에 우리가 함몰되어 있다는 것을 눈치 채는 것은 어찌 보면 세상 바보로 살아가기를 촉구하는 일이기도 하겠다. 하여 일부러 외면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 나도 그랬으니까. 아파트 당첨이 된 것이 나의 헌신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여겼다. 아이들을 엘리트로 키우기를 욕망하면서도, 그 욕망을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위한 것이라고 스스로를 설득했다. 두 아들이 일찍이 나의 욕망을 채워주지 않아서 감사할 일이다. 만약 그 녀석들이 나의 욕망을 채워줄 만큼 유능했더라면 어떤 짓을 저질렀을지 나도 모르겠다.
당연히 그리스도인으로서 세상의 윤리 이상을 살아내야 하는 도덕적 삶을 살아야 하겠지만, 개인의 경건 윤리에 갇힌 신앙에만 머물러 만족할 수 없게 되었다. 개인적으로 주일 성수를 하고, 기도를 하고, 십일조를 철저히 하는 일은 오히려 쉬운 일이었다. 도리어 어려운 것은 거대한 물결로 흐르는 세상의 주류가치를 거슬러 살아가는 것이다. 이는 다윗이 골리앗을 상대하는 것과 다를 바 아니다. 하물며 이 주류를 거슬러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내고자 하는 것은 감히 나설 일이 아니다. 불가능한 일이다. 필연코 절망이 예상되는 길이다.
루쉰鲁迅은 그의 소설 고향故乡에서 이같이 말한다. “我想:希望是本无所谓有,无所谓无的。这正如地上的路;其实地上本没有路,走的人多了,也便成了路”(나는 생각한다. 희망은 있다고도 없다고도 할 수 없다. 이것은 지상의 길과 같다. 사실 본래 길은 없다. 걸어가는 사람이 많으면, 그것이 바로 길이다.)
루쉰은 절망에 저항하라고 한다. 희망한다고 해서 반드시 희망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기필코 꽃길이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니다. 도리어 희망하던 길에 낭떠러지가 있을 지도 모를 일이다. 더 깊은 절망이 도사리고 있을 수 있다. 하여 그는 절망을 맹목적으로 부정하지 않는다. 한 술 더 떠 희망 속에 절망이 도사리고 있음을 인식한다. 그의 절망에 대한 인식은 이렇듯 극사실주의처럼 세세하고 정밀하다. 그렇더라도 걸어가자고 한다.
“앞길에 무덤이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면서도 기어이 가는 것, 바로 절망에 대한 반항이다. 절망하지만 반항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며, 희망으로 인해 전투를 벌이는 사람보다 훨씬 용감하고 비장하다고 본다”(자오치원致赵其文에게 《书信》)
희망이 허무하다면 절망 또한 허무하다. 하여 다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길을 가는 것이다. 세상의 주류 가치를 거스르는 일이 거대한 파도에 응전하는 일이라 할지라도, 발걸음을 떼는 것은 그 길의 끝을 보고자 함이 아니다. 다만 도상道上의 사람으로 살아가고자 함이다. 희망이나 절망의 가늠자는 결과가 아니다. 나는 도반道伴이었는가, ‘나를 따르라’고 이끄시는 그분의 길동무였는가, 이 질문을 잃어버릴 수 없기 때문이다.
첫댓글 전체적인 글은 따질 것도 없이 전문가의 손길을 타고 난 것 같아 독해력에 많은 도움이 된 것 같았습니다. 한 인간이 타인의 영역에 들어가 그 사람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서는 사회성을 벗어나지 않은 윤리의식이 바탕이 되어야 하는데, 무의식적으로 점철된 사고. 그러니까 배경에 기인하여 본 시각이 어느 영역에서는 오류가 될 수 있다는 뜻이네요. 자신에 대해 자신이 잘 알지 못하는 것이 있으므로 자기인식의 영역을 확대하는 습관은 필수라는 데에 동감합니다. 최근에 새로 얻은 집에 대해서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거기에 들어간 돈은 국가에서 나온 것도, 제가 직접 번 돈도 있지만 과연 그것이 온전히 깨끗한 돈인가에 대한 질문이었는데요.
종교로 포커스를 두어 생각의 기로를 살짝 바꿔보았습니다. 기존에 소속되었던 종교를 벗어난 저의 '자의적 무신론자주의' 선언에 심히 양심이 찔렸답니다. 결국 부패하고 남은 건 돈 뿐만이 아니라 절망속에 희망을 찾던 신앙을 향한 자아가 있었더라죠. 삶은 어쩌면, 윤회의 울타리에 소속된, 고인 돈에서 희망을 찾는 자신과 손을 마주잡는 하나의 게임이 아닐까 싶습니다. 허무하지만 기쁘기도 하네요. 아마도 루쉰이 말한 절망의 정의가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