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일찍 사마르칸트를 출발하여 부하라로 가면서 사마르칸트에서 아쉬운 것이 레기스탄을 보지 못하고 가는 것이다.
그리고 아프라시압에서 한 가지 더 보고 싶었던 것이 있었는데 구약성서에 나오는 다니엘(DANIEL)의 묘를 모지 못한 것이다.
기독교(예수를 구세주로 믿는 종교로서 천주교 개신교 등을 총칭함)를 믿는 사람들은 구약(舊約)의 4대 선지자인 다니엘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사람이다.
이곳에서는 호자 다니에르(Xo ja DONIYOR)라고 부르는데, 기독교의 선지자들은 마찬가지로 이슬람교에서도 존경을
받고 있다고 한다.
아프라시압 정착지 옆에 있는 다니엘 묘
다니엘의 묘지 간판...우즈베키스탄에서는 호자 다니에르이다.
다니엘의 관...18미터라고 하는데 관이 이렇게 큰 것은 성자의 유골(팔뼈)은 성장을 한다는 것 때문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곳에 이스라엘 사람인 다니엘의 무덤이 여기에 있다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는데 무덤이 여기에 있게 된 사연은 이렇다.
다니엘은(BC605~530)의 유다왕국 사람으로 예언자(정치가)였으나 유다왕국(이스라엘) 여호야킴 왕 때 네부카드네자르 2세
치하의 바빌로니아에 포로로 끌려갈 때 같이 같이 끌려가서 그곳에서도 능력을 인정받아 재상을 하였는데, BC 538년
아케메네스제국의 키루스 대왕이 바빌론을 점령할 때 까지도 다니엘은 바빌론에서 활동하였다고 한다.
다니엘이 죽은 곳은 특정되지 않았지만, 유대인들과 아랍인들 사이에 전승(傳承)되기로는 그가 이란 서부의 도시 수사(Shush)에 묻혔다는 것이다.
그런데 다니엘의 무덤이라는 것이 수사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이란에만 해도 말라 아미르(Mala Amir)라는 곳에 하나 더 있고,
이라크에는 바빌론, 키르쿠크, 모술, 묵다디야에 있고, 터키 남부 타르수수,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인 이곳에도 있다고 한다.
사마르칸트에 다니엘의 무덤이 있게 된 사연은 선지자의 유해가 자신의 제국의 번영을 이뤄줄거라는 믿음 때문에,
티무르 대왕은 페르시아 원정길에 다니엘의 무덤을 파헤쳐서 유해 일부분(팔과 다리뼈)를 수도인 사마르칸트로 가져왔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기록에 의하면 실제로는 아랍인들이 수사를 점령하였던 640년경에 이곳에 다니엘의 유해가 든 관이 있긴 있었다지만
이후의 동네 사람들 끼리 그 유해를 가지고 다투는 통에(영험한 힘이 있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당시 지배자에 의해 강물에
수장(水葬)이 되었다고 한다.
이란의 서부도시 수사에 있는 다니엘의 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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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르칸트에서 부하라로 가는 길은 실크로드의 메인 도로로서 오랜 세월 동안 많은 사람들이 이 길을 다녔으며,
중앙아시아를 제패하기 위해서 또는 침략하기 위해서 수 많은 군대들이 지나갔던 도로이다.
사마르칸트에서 부하라까지는 300㎞정도로 자동차를 타고 가면 4시간 정도면 갈 수가 있지만 그 때 그 옛날 사람들은
낙타와 말을 타고 짐을 싣고 가면 하루에 50㎞를 간다고 하더라도 6일을 가야 하는 거리이다.
우리가 가고 있는 이 길이 사실은 무척이나 유명한 길이니 감회가 남달라야 하는데 자동차로 가서 그런가 아쉽게도 그런 감동이 없다.
사마르칸트에서 부하라로 가는 길
실크로드 가운데 있는 사마르칸트와 부하라...파란 색은 뱃길이다.
사마르칸트를 벗어나면 곧바로 농촌풍경이 나타나며 중간 중간 도시들이 보인다.
가는 도중에 나보이라는 도시를 지나가게 되는데 나보이라는 도시는 우즈베키스탄인이 존경하는 문인을 기리기 위해서
도시 이름을 지은 것으로 우리나라의 세종시와 같은 의미인 셈이다.
사마르칸트를 지나가는 제르파샨 강
초등학교...우리나라도 초등학교는 이렿게 알록달록하게 지으면 어떨지...이슬람 지역에는 대부분 유치원이나 초등학교는 금방 알아 볼 수 있다.
목화밭과 뽕나무...사마르칸트에서의 뽕나무는 인견과도 관련이 있지만 종이와도 연관이 많은 나무이다.
사마르칸트는 중국밖에서 처음 종이를 만든 곳으로 그 재료는 뽕나무였었다.
이곳은 목화로도 유명한 곳이다.
길가의 가로수가 뽕나무인 곳이 많은데 이곳도 그렇다.
길가에 보이는 메타 아마도 자동차 가스 충전소로 자동차연료를 휘발유 대신에 가스로 사용한다.
논에 일하는 여자들...남자는 어디가고???
무슨 농사를 짓기에 사람들이 저기에 있는지...
길가에 보이는 무덤...한 아주머니가 가족의 무덤에 서 있는데...사진을 확대해서 보면 비석을 만지면서 울고 있다.
무덤의 주인은 남편인지 자녀인지...무덤이 새 무덤도 아닌데 저리 슬퍼하는 것을 보면 아마도 자녀인 듯...
나보이라는 주(州)를 나타내는 표시 나보이는 우즈베키스탄의 민족 문학가로 그의 이름으로 된 도시가 있고 주가 있다.
나보이(14441-1501)
나보이를 지나 한 시간쯤 더 가면 사마르칸트와 부하라의 부하라 쪽 1/3지점에 라바티 말릭 카라반 사라이(Rabati Malik Caravanserai)가
있는데 실크로드 50㎞마다 하나씩 있는 대상(隊商)들의 숙소로 이 곳에는 물탱크(Cistern)가 별도로 있는 곳이다.
물탱크 옆에는 커다란 물주전자를 만들어 길 가에 세워 놓았고 물탱크 옆에는 사무실 같은 것으로 쓰였을 것 같은 건물이 있고
길 건너편에는 숙소나 마을이 있었던 곳이 있어서 이곳을 지나가는 사람들은 반드시 들러서 구경을 하고 간다.
목화밭과
발전소도 보이고...
앞에 있는 흰 것은 화덕으로 샤슬릭을 파는 곳이다...안에 평상도 보이는 것으로 보아 간이 레스토랑 같은 곳으로 이런 곳들이 많다.
라바티 말릭 카라반 사라이 물탱크(Rabati Malik Caravanserai Cistern)...50㎞마다 있었던 카라반 사라이 중에 물탱크가 있었던 곳
지하에는지금도 물이 차 있다...
들어가는 곳
흰 색을 띠고 있는 곳까지 물이 차 있었던 흔적이 보인다....바닥에 고여 있는 물은 먹어도 될 만큼 맑다.
물탱크 옆에 있는 건물 ...아마도 카라반 사라이 사무실로 쓰였을 듯
물항아리
이 항아리는 나중에 만들어진 것으로 카라반 사라이 물탱크를 상징하기 위한 것이다...칠이 벗겨졌는데 칠 좀 하지...
물항아리 길 건너편에 있는 라바티 말릭 카라반 사라이(Rabati Malik Caravanserai) 저 문안으로 들어가면
집터가 나온다....이곳이 숙소였던 셈이다.
아침 9시에 출발하여 부하라에 도착한 시간이 두 시 반으로 호텔에서 숙소를 정하고 가이드에게서 부하라의 관광지 약도를
하나씩 받고는 각자 오후 일정을 시작한다.
세베로-자파니야 베트카 라는 긴 이름의 운하
부하라를 들어가는 입구에 있는 크라잉 마더 상...2차대전에 참전하여 희생된 자녀들의 어머니를 상징하는 동상이라고....
도심으로 들어가는 길에 보이는 자투리땅의 공원??
드이어 도착한 숙소...벽에 걸린 시계가 서울 대신 도쿄로 되어 있다....쯥
우리는 숙소가 3층에 배정이 되었는데 엘리베이터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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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리쉐리 나보이(Alisher Navaiy)(1441~1501)는 티무르 왕조 때 차가타이-터키어(지금은 사어(死語)의 시인이며 정치가이고 화가였다.
러시아의 푸쉬킨과 같은 우즈벡의 민족문화의 아버지로서 우즈벡어로 된 아름다운 시와 문화 발전에 큰 공헌을 하였다.
나보이는 아프가니스탄 헤라트 출생으로 헤라트의 영주 호사인 바이카라의 궁정에서 여러 관직을 거쳤고 학문과 예술을 보호하였다.
또한 호레이즘 칸국의 장관으로서 학교, 병원 등을 지워서 서민들에게 인기가 높았으며 문학, 예술인 등을 지원하였다.
또는 그는 우즈벡의 국민시인으로서 함사(Khamsa)라고 불리우는 다섯 편의 시를 남겼다. Confusion of Righteous (1483),
Leyli and Medjun (1484), Fafkhad and Shirin (1484), Seven Planets (1484), The Wall of Iskander (1485) 등이다.
우즈벡 민족의 대표적인 지식인 "나보이"는 단순한 시인이 아닌, 민족 정체성을 고양한 위대한 인물이자 민족의 정신적 지도자로 전국민적 존경을 받던 거대한 인물이다.
우즈벡 국민들은 나보이를 우즈벡 문화의 원류이자 민족 아이덴티의 창시자로 보고 거리, 학교, 도서관 등 많은 시
설물에 알리쉐리 나보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있다.
나보이는 또한 타지크어(語)의 저작도 있으며, 문학 이외에 철학 언어학 등 다방면의 연구를 행하였고, 또 음악이
나 회화에도 능하였다.
현재 우즈베키스탄는 그를 추모하여 예술 극장의 대표적인 이름으로 사용하고 있다.
(인터넷)
그는 ‘이보다 많은 글을 쓴 사람은 없다’라는 평가도 받고 있는데, 실제로 생애 60년 동안 그가 남긴 작품은 17만 단어에 이른다고 한다.
괴테가 5만 2천 단어, 푸시킨이 6만 4천 단어밖에 되지 않는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