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레터 62/‘양딸’들의 행진]김장김치 풍년!
왕년에는 어느 가정이든 연중 가장 큰 행사가 김장김치 담그는 것이었다. 1년내내 먹을 수 있는 김장김치, 가족 일원이 총동원되는 이 행사는 맛과 색의 '오케스트라 향연'이었다. 작업 끝 무렵, 막 삶은 수육에 가닥김치를 쭉쭉 찢어 입에 마구 몰아넣기도 하고, 찬밥에 김치를 얹어 땀을 뻘뻘 흘리며 먹기에 바쁘다. 풍속도가 제법 바뀌긴 했어도, 요즘 주말 마을회관 넓은 앞마당에 주차된 승용차 서너 대를 보면 ‘오늘 어느 집 김장하는구나’ 알 수 있다. 어머니가 살림에 손을 완전히 놓기 전인 15년 전만 해도 전국 각지에서 4남3녀 아들며느리, 딸사위가 한날 한시에 모여 배추 100여포기를 절여 김장을 했다. 뚤방(토방)에 차곡차곡 쌓이는 김치통이 60개가 된 적도 있었다. 아버지는 하루종일 ‘시다바리’에 바쁘셨다. 백년손님 사위들은 갓 삶은 수육에 막걸리타령만 하면 되었다. 참, 이제는 다시 볼 수 없는 풍경으로 추억의 한 페이지를 장식할 뿐이지만(며느리와 딸들은 입을 삐죽거려도), 그때 그 시절이 그립기까지 한다.
지난 일요일 우리집 툇마루에 김치통이 바리바리 쌓인 얘기이다. 내 밑으로 여동생이 셋이니, 우리 부모는 아들 넷, 딸 셋을 낳았다. 그런데도 어찌된 일로 맨 위로 큰딸, 맨 아래로 막내딸이 졸지에 생겨 딸이 다섯이나 된 딸부자집이 되었다. 사연인즉, 길다면 길지만 짧게 말하자. 나보다 일곱 살 많은 S-누님은 사귄 지가 15년도 넘었다. 가방끈도 짧은데 혼수로 책 1상자를 갖고 왔다는 누님은 최명희의 <혼불>을 스무 번도 넘게 읽어 ‘혼불박사’가 되었다. 그게 소문나 남원시는 누님을 특채, 혼불문학관 해설사로 일하게 했다. 대학 홍보위원으로 있을 때 문학관 관람을 하고 명함 한 장 주고받은 후 편지왕래를 수차례 하면서 누나 동생이 되었다. 내 졸문의 팬이 된 데에서 더 나아가, 우리 부모를 아예 당신의 친정부모처럼 섬기기를 다 하여 오늘에 이른 것이다. 전라선 간이역 ‘서도역’을 없애려 할 때 "혼불의 주요 무대이니 보존해야 한다"며 온몸으로 막아 한겨레신문에 대서특필되기도 한, 옹골차고 당찬 시골 아줌마이다. 동네 이장을 20여년 한 남편에게 인계받아 6년도 넘게 하고 있는 ‘부부이장’. 그 누님이 김장김치를 가져가라는 전화를 했다. 손이 얼마나 큰지 김치냉장고에 들어가는 가장 큰 통 두 개에 갓 담은 김치를 몇 포기를 넣은지도 모르게 꾹꾹 눌러주고도 모자라 고들빼기와 쪽파를 섞어 담근 김치도 한 통 주었으니, 우리집은 김장할 필요가 없게 된 것이다. 오매- 맛 있것는거! 군침이 마구마구 돈다. "아우는 유명헌개 서울에서고 어디서고 손님이나 친구가 많이 오잲여. 지(김치)는 필수여" 말씀도 찰지게 하신다. 전라도 표준말로 완전히 ‘홍자를 만난’ 것이다. 홍자는 횡재橫財의 사투리일 것이고, 영어로 windfall이다.
전남 광주에 사는 50대 중반의 S-동생 막내누이가 있다. 인근 동네에 사는 누님에게서 푸짐하게 김장김치를 받아 툇마루에 올려놓은 그날 오후, 마침 그 누이가 시댁에서 김장하고 가는 길이라며 두 딸과 손자를 데리고 졸지에 나타났다. 물론 손에 배추김치 몇 포기와 파김치한 봉지를 들고. 게다가 꽃무릇 구근을 100개도 넘게 가져와 꽃밭에 그걸 심는데 두 시간여 걸렸다. 야-, 두 딸의 선물로 김장김치 풍년이 되었다. 김치냉장고가 꽉꽉 차버린 이 행운과 감동을 어찌 전하지 않을 수 있을까. 광주누이를 사귀게 된 것은 2016년 11월 방영된, 우리 부모가 주인공으로 출연한 휴먼다큐멘터리 <총생들아 잘 살거라>라는 ‘인간극장’ 덕분이었다. 5부까지 유심히 본 그 친구가 우리집이 자기 시댁과 가까운 곳임을 알고 야구르트 한 상자를 갖고 대문을 두들기며 수양딸 되기를 자청한 것이다. 쉬운 일은 아니었을 터. 희한하다면 참으로 희한한 인연이다. 이 친구도 내 졸문의 열성독자이다. 흐흐. 2019년 어머니가 돌아가신 직후 내 여동생 셋과 누님과 막내누이, 딸 다섯이 한자리에 모여 식사를 같이 하며 홀로 남은 아버지를 즐겁게 해드렸다. 이것도 사실 신문에 날 일이겠다.
아무튼, 철 따라 안부전화는 물론이고 수시로 들러 반찬과 입성까지 챙겨주니, 이보다 더 고마울 데가 어디 있겠는가. 누님은 완전히 19세기 조선여인이다. 지금 세상에 유과와 백산(쌀과자)을 누가 만들고 생강을 일일이 잘라 설탕을 뿌린 편강片薑까지 만들어 명절때마다 친정처럼 나들이를 한다. 막내누이도 친딸처럼 아버지 티셔츠나 모자 등을 사갖고 시댁 다녀가는 길에 불쑥불쑥 들른다. 이것은 아버지로선, 아니 우리 자식들로서도 숫제 홍복洪福이다. 하여 그날 저녁을 먹으면서 아버지께 말했다. “아버지는 오늘 좋았겠네. 졸지에 큰딸과 막내딸이 다녀가고 김장김치를 몽땅 갖고 왔으니” 빙긋이 웃기만 하지만 어찌 그러지 않겠는가. 그 딸들을 보면 하실 말이 얼마나 있겠는가. “고맙네. 그저 언제나 즐겁게 사소”라고 할 뿐이다. 언젠가 어머니 돌아가시기 전에 내가 말했다. “어무니, 내가 큰딸과 막내딸 만들어줬제? 그려? 안그려? 나한테 고맙다고 혀이” 말수가 적은 어머니는 말없이 빙긋 웃지만, 왜 모르시겠는가? <인간극장>에 나오게 된 계기는 2016년 아버지 구순생신과 어머니-아버지 결혼 72년을 기념하여 펴낸 가족문집 <총생들아 잘 살거라>라는 비매품 책이 인간극장 프로덕션 팀장의 눈에 띈 때문이었고, 그 프로로 ‘기특한’ 막내누이를 얻게 되었으니 하는 말이다. 아무리 백세시대라고 해도 결혼생활 70년 넘은 부부가 어디 흔한 일인가. 누님이야 혼불문학관을 다녀온 후 내가 펜팔로 사귀었으니, 두 분은 나와 불가분의 관계일 수 밖에. 흐흐.
누님과 누이의 김치선물 자랑은 그만하자. 바로 옆집 이모할머니 손부인 두 분 형수의 김장김치 두 통도 나의 일기장에 빠트리면 안될 미담으로 기록되어야 한다. 알싸한 고들빼기 뿌렝이와 함께 버무린 쪽파, 입안에 넣어보시라. 행복의 향기가 입안 가득 퍼진다. 눈이 저절로 스르르 감긴다. '행복의 향기'를 아시는가? 맛본 적이 있는가? 어디 그뿐인가. 우리 할머니의 질부는 볼락매운탕을 한 냄비 그득하게 가져와 새벽 창문을 두들겼다. 덕분에 아버지는 조금 맛만 보라고 드리고, 꾀복쟁이 친구들을 불러 즐거운 오찬을 했다. 참으로 고맙고 또 고마운 인연들이다. 아버지가 “니가 혼자 있다고 여기저기서 챙겨주는구나”라고 하길레 “아버지 때문에 그러지, 내가 예뻐서 그러간디요? 내가 아버지 덕 시방도, 아직까지 톡톡히 보는 거랑개”라며 한마디 덧붙였다. “긍개 아버지는 그저 건강하게, 이런저런 일로 스트레스 받지 말고 신간(마음) 편하게 사시기만 허면 된당개요. 내일모레가 백수요. 우리집 기록을 깨네잉. 할아버지는 30세, 상할아버지는 환갑도 못쇤 60세. 두 양반 나이 합친 것보다 오래 사시잔녀. 백수허먼 동네 큰잔치 열어줄랑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