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석이 가끔 이야기하는 이문열 소설의 ‘우리들의 일글어진 영웅’ 에 대해 말하고 싶다.
이문열의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은, 그의 대표작이자 우리 현대 문학사에 있어서도 빼어난 수작이다.
그가 비록 작가 정신을 망각하고 권력과 기득권층에 잠시 한눈을 팔은 적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가 거둔 문학적 성과에 대해서는 과찬할만 하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은, 문학 자체로서도 단편 소설의 백미를 이룰만한 스토리의 긴장감과 문체의 간결성과 복선은 그의 문학적 재능에 대해서도 찬사를 금치 못하지만, 그 보다 이 소설이 가지고 있는 권력에 대한 뛰어난 형상화다.
권력의 문제를 이토록 적나라하게 또는 섬세하게 솔직하게 표현한 소설을 나는 한 번도 보지 못하였다.
그리고, 이 소설 속에서 그가 바라보는 권력의 본질에 대해서 또는 민중들의 시선에 대해서의 다른 시선이 그가 좌파와의 갈등을 겪을 수 밖에 없는 단서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폴라니의 뚜꺼운 책, 거대한 전환을 사놓고 열심히 읽어가다가, 여름 피서철이 지났고 바로 김장 배추 심는 절기가 다가왔다.
책을 손에 내려 놓을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일을 하면서도 내내 폴라니의 거대한 전환이 내 머리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리고 문득, 오래전에 읽었던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과 함께.......
그 이유는 권력이라는 화두 때문이었다.
‘거대한 전환’은 경제학자들의 시선으로는 시장의 횡포에 대한 것이지만, 아나키스트의 시선으로는 시장과 함께 그 뒤에 숨어 있는 권력의 문제였다.
시장이 모든 것을 지배하기 전의 사회는 권력의 사회였다. 시장은 권력 마저 지배하고 있는 것 처럼 보이는 듯 하다.
그러나, 권력은 시장에 가려져 잠시 호흡을 가다듬고 있을 뿐, 그 포악함의 날카로운 발톱은 잠시 감추고 있을 뿐이다.
폴라니의 사회는 권력에 대한 이야기다.
권력의 집중과 분권에 대한 문제다. 그에 따른 옵션으로 시장은 발생했을 뿐이다.
폴라니가 이야기하는 '사회'에 대해 말하기에 앞서, 자유주의와 마르크스주의를 비교해 보자.
자유주의 사상에서는 단위가 개인이다. 개인을 단위로 삼아 모든 설명이 이뤄진다. 반면, 마르크스주의에서는 단위가 계급이다.
그런데 이 두 사상에는 공통점이 있다.
개별 단위의 움직임을 경제적 동기로 설명한다는 점이다.
자유주의 사상에서는 개인의 경제적 동기로 모든 것을 설명하고, 그렇게 설명할 수 없는 요소는 비합리적 선택으로 취급한다.
마르크스주의에서는 생산관계를 둘러싼 인간집단, 즉 계급을 중심으로 모든 것을 설명한다.
경제적 동기를 가장 중심에 놓는다는 점에서는 자유주의와 마찬가지다.
폴라니의 사상이 돋보이는 것은 이 대목에서다. 폴라니는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사회다“
라고 말한다. 개인도, 계급도 아니다. 사회다.
예컨대 노동자들은 극단적인 노동력 상품화 조치에 맞서서 각종 사회 입법을 추진했다.
노동시간을 단축하고, 최저임금을 설정하는 등 조치다.
흔히 이런 조치는 사회주의자들만의 힘으로 이룬 성과라고 여긴다.
마르크스도 그랬다. 법정 노동시간을 못 박은 조치에 대해 "사회주의 운동의 위대한 승리"라고 예찬했다.
하지만, 이는 역사적 사실과 다르다. 노동시간 단축 등 사회입법 조치 가운데 상당수는 부르주아에 대해 반발하는 봉건 귀족 세력의 협조를 통해 이뤄졌다.
그리고 이런 조치가 도입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사회의 자기 보호 운동이 있다.
얼마 전, 쌍용차 문제를 비롯한 한국의 노동 운동의 투쟁과 성과는, 계급 투쟁의 성과이자 결과인가. 그것은, 오로지 시장이 허용해 주는 조건에서 이루어졌을 뿐이다. 우리가 거부할 수 없는 자유시장이라는 사회의 보호 본능에 의해 노동 조건은 향상되었을 뿐이다.
엄석대의 부당한 권력에 아부하고 복종하고 그래서 안주하던 반 아이들이, 6 학년이 되고 담임이 바뀌고 엄석대의 권력이 하루 아침에 모래성이 되자, 아이들은 엄석대를 짓 밟아 버렸다.
그리고 반은 민주주의 사회가 되어 갔다.
권력에 복종하고 아부하던 아이들에게 어떻게 그런 능력이 있었는지 주인공 한병태는 소설 속에서 놀라워 하고 있었다.
아이들의 민주주의는, 자유시장의 확보와 사유재산을 지키기 위해 법을 만들고, 그것을 기반으로 근대시민국가의 민주주의와 무엇이 다른가.
민주주의는, 또는 맑스의 사회주의는 과연 계급투쟁의 쟁취물인가. 오로지 사회의 요구에 있어서, 그리고 사회의 보호 본능 때문이었다.
맑스의 계급 투쟁론은 이제 수정되어야 한다.
폴라니의 거대한 전환과 이문열의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과 오버 랩 되는 것이, 내 자신에게도 황당하게 여겨진다.
까맣게 잊어버렸던 이문열의 소설이,
더구나 이문열에 대해 지독한 혐오를 가지고 있던 내가 아니었던가.
그 이유는 오로지 권력에 대한 문제였다.
사회를 이루는 모든 구성 요소는 권력이 기반이 되는 것이다.
마치 모래와 자갈과 시멘트가 모여서 벽돌이 되듯이, 사회의 구성 요소의 기초 단위는 권력인 것이다.
권력의 집중과 세분화가 민주주의를 가름하는 기준이다.
그에 따라, 시장 또한 마찬가지다. 시장의 집중과 분화 그리고 자급자족.
이것이 말로 앞으로의 사회가 고민해야 할 가장 중요한 화두가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