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331
12월6일 [대림 제2주간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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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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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oqT7xO7i8iw (양성일 시메온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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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하느님 당신 자비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었을 우리임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갑작스레 기온이 급강하해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스산한 저녁, 야외 식당 화목난로에 소나무 장작을 잔뜩 넣어 불을 지폈습니다. 혼자 있기 뭐해서 평소 사이가 그리 좋지 않은 강아지 두 녀석 한번 화해시켜보려고 난로 옆에 데리고 앉아 기도 중입니다.
첩첩산중 시골에서 시골 영감으로 지내고 있자니, 얼마나 힘들고 답답하냐고 하시는 분들도 많은데, 따지고 보니 소소한 기쁨이 사방에 널려있습니다. 어디 있든지, 마음먹기 나름입니다. 어디에서든 여기가 꽃자리려니 하고 감사하며 지내다 보면, 그곳이 천국입니다.
잠깐 바깥에 나와 하늘을 올려다보니, 세상에! 셀 수도 없이 수많은 별이 쏟아져 내릴 듯합니다. 몇천 년, 몇만 년, 셀 수도 없을 정도로 오랜 세월 전부터 저렇게 저 자리에서 빛을 발하고 있는 별들을 보니, 인간 만사 참으로 보잘것없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습니다.
대림 시기 이사야 예언자는 지속해서 우리에게 묵상 주제를 던져주고 있는데, 오늘 독서 말씀은 더욱 각별하고 큰 의미로 다가옵니다.
영원할 것 같은 우리 인간의 권세와 힘, 건강과 젊음, 힘과 에너지는 사실상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에 시드는 한 송이 꽃과도 같음을 강조합니다. 오늘 우리가 난다긴다하면서 잔뜩 어깨에 힘을 주고 있고, 틈만 나면 내가 누군 줄 알아? 하고 떵떵거리지만, 돌아서서는 눈물 흘리는 나약한 인간이라는 것을 잘 파악하고 있었던 이사야 예언자의 외침이 참으로 은혜롭습니다.
“우리 인간은 풀이요, 그 영화는 들의 꽃과 같다. 주님의 입김이 그 위로 불어오면, 풀은 마르고 꽃을 시든다. 진정 이 백성은 풀에 지나지 않는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들지만, 우리 하느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 있으리라.”(이사야 예언서 40장 6~8절)
대림 시기는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을 위해 이 땅에 강생하신 은혜로운 대사건을 기억하고 기념하며, 감사하고 묵상하는 가슴 설렘의 순간입니다. 이 시기 동안 우리는 정말이지 아무것도 아닌 우리, 티끌이요 먼지인 우리들의 본래 모습을 기억해야겠습니다.
그리고 아무것도 아닌 우리에게 크신 자비와 은총을 베푸셔서 생명의 숨결을 불어넣어 주시고, 이 땅 위에 살게 하시며, 사랑스러운 인연과 더불어 살게 하신 하느님께 백 번 천 번 감사드려야겠습니다.
하느님 당신 자비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었을 우리임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그분의 축복이 아니었으면, 한순간 솟아올랐다가 순식간에 사라지는 한 줄기 연기요, 안개였을 우리임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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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aS78fO9hOs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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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잃어버린 양을 찾아 나서지 못하는 이유>
오늘 복음은 마태오 복음의 잃어버린 양 한 마리 비유입니다. 루카 복음에서 양 아흔아홉 마리를 광야에 버려 둔 채 잃어버린 양을 찾으러 가는 것과는 달리 마태오 복음은 매우 교회적이고 사목적입니다. 일단 양들은 ‘산’에 둡니다. 산은 기도하는 장소이고 하느님을 만나는 장소입니다. 양들이 스스로 하느님을 만날 수 있게 되어서 더는 신경 쓸 필요가 없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때가 되면 잃어버린 양을 찾아 나서야 합니다. 이때를 잘 모르고 산에 있는 양들에게 집중하면 오히려 양들을 잃게 될 우려가 있습니다.
저도 본당에 와서 일단 양의 우리를 손보고 양들이 빠져나가지 않을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을 첫 번째로 보았습니다. 일단 그물코가 단단히 이어져 있어야 물고기를 잡을 수 있는 것처럼 우리를 손보는 것이 먼저인 것 같습니다. 오늘 복음으로 말하면 저희 본당을 산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스스로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 시스템. 이것은 공동체에 들게 만들어 그 공동체의 친교가 신자들을 잡아 놓고 성장시키고 행복하게 만드는 방향이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언제까지 내실에 힘을 쏟아야 할까요? 언제 잃은 양을 찾으러 나가야 할까요? 이것이 고민입니다. 만약 너무 이른 타이밍에 양들을 찾아 나서면 지금 있는 양들도 잃게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만약 너무 늦은 타이밍까지 내실만 기하려다 보면 쓸데없는 간섭을 하게 되는 경우가 발생합니다. 이 타이밍을 아는 것이 지혜인 것 같습니다.
‘금쪽같은 내새끼’에서 엄마가 아이를 믿지 못하여 CCTV로 감시까지 하는 내용이 나왔습니다. 아이는 엄마의 간섭에 ‘새’가 되고 싶다고 말합니다. 엄마에게 자신은 필요 없는 존재라고 여깁니다. 스스로 할 수 있는데 간섭하니 잘한 것도 엄마의 공로가 됩니다. 엄마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다고 합니다. 아이는 엄마의 간섭에 공부는 하지 않으면서 끊임없이 거짓말을 합니다. 엄마는 그것이 걱정입니다. 하지만 엄마는 자녀에게 시선을 돌려서 자녀를 스스로의 힘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믿어주는 것이 필요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간섭하는 만큼 아이의 자존감은 추락합니다.
이와는 반대로 정은표 씨 가족은 아이들을 방임하는 느낌입니다. 하지만 훨씬 아이들이 건강하게 잘 성장합니다. 어쩌면 생각보다 빨리 스스로 힘으로 자신의 길을 갈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저는 어머니께서 일곱 살까지만 키워주는 것이라 하셨을 때부터 그래도 나의 인생에 책임을 지려 했다고 생각합니다. 학교에 가고 크게 엇나가지 않았습니다. 아마 성당에서 아흔아홉 마리의 양들이란 사제의 간섭 없이도 주일미사에 참례하고 영적으로 성장해 나가는 신자들일 것입니다. 만약 대부분이 단체에 가입해서 그 안에서 성장하고 기도하며 봉헌 생활과 성체를 영하는 정도가 된다면 그때는 시선을 밖으로 돌려야 할 때일 것입니다. 저는 이것을 한 단체에 가입하고 감사일기를 쓰는 것으로 정했습니다. 신자 대부분이 이렇게 자신의 힘으로 성장할 수 있을 때 저는 잃어버린 양을 찾으러 나갈 것입니다.
사제가 잃어버린 양을 찾을 때 신자들의 자존감은 배가합니다. 자신을 믿어주는 것을 느끼기 때문이고 자신들이 잃어버린 양처럼 사제가 목숨을 바칠 정도로 귀중한 존재임을 믿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주님의 우리 안에서 스스로 성장합니다. 이때를 알지 못하면 큰일입니다. 어느 때부터는 무관심이 사랑입니다. 그러나 무관심할 때도 자녀들은 자라고 있어야 합니다. 그런 곳이 양 떼를 풀어놓는 산입니다. 그 산에는 데려다 놓아야 합니다.
그러나 어떤 때는 양들이 산에 있어도 내가 믿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내가 산에 있어 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산에서 스스로 성장해본 적이 있다면 그렇게 하면 스스로 성장할 수 있음을 압니다. 목자는 그래서 언제 양들을 산에 놓아주어야 하는지 압니다. 정은표 씨 부부는 스스로 성장할 줄 알았던 분들인 것 같습니다. 그러니 어떻게만 해주면 자녀들이 스스로 성장하는지 압니다. 저는 하.사.시.와 성체조배였던 것 같습니다. 스스로 진리를 찾으려 하고 은총을 찾으려 하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그러나 거기까지 오게 만드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의인은 목자가 없어도 스스로 산에 머물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자입니다. 그러한 공동체에 속할 줄 아는 자이고, 은총과 진리로 목자가 없어도 스스로 성장할 능력을 지닌 자입니다. 그런 공동체가 형성되면 이제 목자는 잃어버린 양들을 찾아 나서야 합니다. 이때 양들을 신경 쓴다면 양들은 더 피폐해집니다.
신애라 씨는 딸 둘을 입양했습니다. 그리고 그 입양 사실을 숨기지 않고 말해주었습니다. 아이들도 그것을 잘 받아들였습니다. 이는 차인표, 신애라 씨 부부가 이 정도면 아이들이 자기들 스스로 클 수 있음을 알았기에 입양할 수 있었습니다. 그녀에게 누구도 뭐라 할 수 없는 것은 친자녀가 너무나 잘 자라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자신이 입양한 딸들이 입양되지 못한 아이들이 너무 불쌍하다고 하자 수많은 아이의 엄마, 아빠가 되어주기로 하고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자녀를 잘 키우는 방법입니다. 이렇게 할수록 친자녀는 부모가 믿어줌을 알아 더 잘 자라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먼저 목자의 도움 없이도 잘 자랄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목자의 자격을 얻게 됩니다. 왜냐하면 언제까지 함께 있어 주어야 하는 줄 알고, 그때 무엇을 해주어야 하는 줄 알며, 또 언제 그들을 떠나 잃어버린 양을 찾으러 나가야 하는 줄 알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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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1986년 1월 31일은 제가 군에 입대한 날입니다. 1988년 5월 4일은 27개월 군 생활을 마치고 제대한 날입니다. 군에 입대할 때는 한겨울이었습니다. 군 생활을 잘할 수 있을지에 대한 두려움과 걱정도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힘들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요령도 생겼고 말년 병장 때는 나름 지낼 만했습니다. 그러다 제대 날이 다가왔고 따뜻한 봄바람과 함께 무사히 전역하였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위로하여라. 위로하여라. 나의 백성을 위로하여라. 이제 복역 기간이 끝나고 죗값이 치러졌으며 자기의 모든 죄악에 대하여 주님 손에서 갑절의 벌을 받았다고 외쳐라. 골짜기는 모두 메워지고 산과 언덕은 모두 낮아져라. 거친 곳은 평지가 되고 험한 곳은 평야가 되어라. 이에 주님의 영광이 드러나리니 모든 사람이 다 함께 그것을 보리라.” 그날이 오면 유배가 끝날 것이라고 합니다. 그날이 오면 평등의 세상, 자유의 세상이 올 것이라고 합니다. 더 이상 아침 점호도 없고, 구보도 없고, 유격훈련도 없고, 상명하복의 계급도 없듯이 그날이 오면 모두가 하느님의 구원을 볼 것이라고 합니다.
그날은 군대라는 공간을 떠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날은 유배지를 떠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날은 장소의 이동이 아닙니다. 제가 살았던 서울도, 지금 사는 뉴욕도 그날이 아닙니다. 골짜기가 깊다면 서울도 뉴욕도 그날이 아닙니다. 언덕이 높다면 제대해서 복학했던 신학교도 그날이 아닙니다. 골짜기가 메워진다면, 언덕이 평평해진다면 군대에서도, 유배지에서도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그 날이 됩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도 분명 골짜기가 있습니다. 학력, 지역, 이념, 직업, 계층의 골짜기가 있습니다. 너무 깊어서 넘어가기도 힘들고, 넘어오려는 사람의 손을 뿌리치기도 합니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들듯이 우리의 삶도 짧은데 우리는 골짜기를 메우기보다는 더 깊게 만들곤 합니다. 이런 골짜기를 메우는 길은 영원하신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도 산과 언덕이 있습니다. 권력, 재물, 명예라는 바벨탑이 있습니다. 바벨탑은 교만, 욕심, 허영, 위선, 가식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이 탑을 낮추어 평평하게 하는 길은 영원하신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잃어버린 양’을 찾는 착한 목자 이야길 하셨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성공도 실패도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기쁨과 슬픔도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부유함과 가난함도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행운과 좌절도 있습니다. 그러나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께서는 길 잃어 방황하는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우리 마음 안으로 들어오시려고 기다리십니다. 그러기에 신앙인은 ‘희망’을 가지고 이 세상을 살아갑니다.
“주님의 날이 가까이 왔다. 보라, 주님이 우리를 구원하러 오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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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18,12-14: 목자와 길 잃은 양
“너희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여라.”(10절) 하시고 나서 길 잃은 양의 비유를 말씀하신다. 백 마리의 양 떼 가운데 한 마리가 길을 잃었다. 그것은 목자가 잘못해서가 아니라, 양이 무리에서 벗어난 것이다. 이 양은 태초에 주님께서 당신의 모습대로 창조하신 인간 아담이다. 그 아담이 죄를 지어 천사들의 무리에서 벗어났다. 그 때문에 인류 전체가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졌다. 주님께서는 인류를 죽음에서 삶으로 다시 부르신다. 그분의 죽음은 바로 우리를 위한 것이다. 착한 목자는 길 잃은 양을 어깨에 메고 나머지 양 떼가 있는 곳으로 돌아온다. 목자는 길 잃은 양을 구원하기 위해 하늘에서 내려오셨다. 그것은 죽었던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였다. 그분은 아흔아홉 마리 양보다 길잃은 백 번째 양을 찾으면 더욱 기뻐하시는 분이시다. 이처럼 하느님께서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어느 하나도 멸망하지 않기를 바라신다.
당시 이스라엘에서는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죄인들, 윤리적으로 죄를 지은 사람들은 버림받은 사람들, 저주받은 사람들이었다. 예수께서는 바로 이런 사람들에게 각별한 사랑을 보여주셨다. 이렇게 사회로부터 냉대받고 소외된 사람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때면 그들과 함께 기뻐하신다. 그것은 예수님뿐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더 기뻐하시리라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우리 가운데, 우리 공동체에 어떤 사람이라도, 어떤 처지에 있더라도, 차별 없이 신앙의 위기에 처해 있는 것을 볼 때는, 그가 멸망하지 않고 구원되도록 모든 교우가, 특히 교회의 지도자들이 힘써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것이 하느님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이다.
우리는 회개가 필요하지 않은 아흔아홉 마리의 양들이 아니라,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많은 경우에 이런 처지를 생각 못 하고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한다고 하면서 조건이나 기억을 가지고 대한다. 그러나 하느님의 모습은 전혀 다르다. 회개한 다음에는 기쁨만이 있다. 우리도 이러한 사랑을 갖고 살아가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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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수원교구 정진만 안젤로 신부님]
제자 공동체를 위한 예수님의 긴 설교문을 담고 있는 마태오 복음 18장은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에 대한 두 번째 예고(17,22-23 참조) 이후에 자리합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이러한 이야기 배열 순서로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이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알려 주고자 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려면, 고난과 희생으로 얼룩진 십자가의 길을 함께 걸어갈 준비가 필요합니다.
오늘 복음의 중심 주제는 작은 이에 관한 관심입니다. 이 주제는 마태오 복음 18장의 전반부(1-14절 참조)를 관통하며, 12-13절에서 길 잃은 양에 관한 비유로 강조됩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14절에 나오는 ‘작은 이’를 길 잃은 양 한 마리에 비유하는데, 이는 제자 공동체 구성원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표현은 앞서 18장 6절과 10절에서도 사용되었으며, “어린이”(18,2-5)라는 낱말로 그 의미를 보충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짧은 비유를 통하여 제자들 모두 매우 약한 존재라는 사실을 상기시키시며(10,42; 25,40.45 참조), 공동체 구성원 가운데 누구도 길을 잃지 않도록 돌보라고 제자들에게 당부하십니다. 작은 이를 향한 관심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 말씀은 하느님 아버지께서 우리 가운데 어느 하나도 놓치지 않고 돌보신다는 확신을 줍니다. 동시에 우리도 하느님께서 보여주신 작은 이를 향한 관심을 가지도록 요청받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우리에게 전하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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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민경철 안토니오 신부님]
제게 누렁이란 개가 있었습니다. 목숨을 바쳐 주인에게 충성을 바친 놈이지요. 본당을 떠날 때 이 녀석과 헤어져야 했던 아픔이 되살아나는군요.
어느 날 사제관에 침투한 동네 건달 진돗개 두 마리를 응징하기 위해 혈투를 벌였습니다. 안타깝게도 다리를 심하게 다쳤더랬죠. 동물 병원에 데리고 갔는데 수술을 하든가 아니면 안락사를 시키든가 결정을 내려달라 하더군요. 막상 수술비가 아깝게 느껴졌습니다. 이 똥개 팔아도 사료비도 못 건지는데 이 녀석이 뭐가 대단하다고 돈을 들여야 하나? 하지만 곧바로 수술시켰지요.
인간적인 계산으론 어리석은 행동일지 모르지만 한 가족이 되어버린 녀석을 잃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생각… 계산해보니까 아흔아홉 마리 중 또 다른 녀석에게 문제가 생길 것 같아 길 잃은 녀석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잃어버린 양 하나도 소홀히 할 수 없는 소중한 자식이기에 찾아 나서시는 것입니다.
저처럼 잠시라도 수술비 아깝게 생각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주님은 우리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셨던 분입니다.(루카 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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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안봉환 스테파노 신부님]
오늘 독서에서 예언자는 백성이 놓인 유배 상황에 체념하거나 낙담하지 말라고 위로의 말을 전합니다. “위로하여라, 위로하여라, 나의 백성을. …… 예루살렘에게 다정히 말하여라. 이제 복역 기간이 끝나고 죗값이 치러졌으며, 자기의 모든 죄악에 대하여, 주님 손에서 갑절의 벌을 받았다고 외쳐라.
”믿는 이들은 나약하고 불확실한 삶을 성찰하면서, 도와주러 오시는 주님께 시선을 돌려야 합니다. 광야에 길을 곧게 내어 주님께서 우리 마음의 문까지 오시게 하는 일은 우리의 몫입니다.
“너희의 하느님께서 여기에 계시다. …… 보라, 주 하느님께서 권능을 떨치며 오신다.”라고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는 모든 이가 위로의 말씀을 듣게 말해야 합니다.
“기쁜 소식을 전하는 시온아, 높은 산으로 올라가라. 기쁜 소식을 전하는 예루살렘아, 너의 목소리를 한껏 높여라.” 주님께서는 권능을 떨치며 부드럽게 “새끼 양들을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 먹이는 어미 양들을 조심스럽게 이끄시는” 부드러움으로 가득 찬 목자처럼 오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내적 친밀감의 표현인 당신 마음의 온유함과 겸손함을 드러내십니다. 목자의 표상을 당신 자신에게 적용하십니다.
“어떤 사람에게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가운데 한 마리가 길을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남겨 둔 채 길 잃은 양을 찾아 나서지 않느냐?”
예수님께서는 강생의 비밀, 곧 작은 이들에 대한 아버지의 자비를 우리에게 알게 해주십니다.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
잃어버린 양들에게 부드럽게 행동하실 뿐만 아니라 양들을 위하여 당신 목숨을 내어 주시는 주님께서는 착한 목자이십니다.(요한 10,11-18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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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류한영 베드로 신부님]
“모든 인간은 풀이요, 그 영화는 들의 꽃과 같다.” 이 구절은 인생의 허무함을 잘 말해 줍니다. 이 세상에서 몇십 년 부귀영화를 누린다고 하더라도 우리 인생은 결국 풀같이 말라 버리고 꽃처럼 시들어 버릴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겪은 칠팔십 년의 세월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으로 말하기에는 무엇인가 빠진 듯합니다. “우리가 정성 들여 살았던 날마다 시간들이 그저 허무 속으로 사라지는 것일 뿐입니까?” 하고 묻게 됩니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들지만, 우리 하느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 있으리라.” 이 구절에는 삶의 허무함을 구원으로 이끄는 가르침이 담겨 있습니다. 날마다 허무 속으로 사라지는 우리의 시간들이 하느님의 말씀 속에 머무르게 되면 그것들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가치를 얻게 됩니다.
양을 키우는 목동이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았을 때, 얻는 기쁨이 크다고 합니다. 길을 잃지 않은 다른 양들은 안전하고 풍성한 초원에서 은총의 풀을 뜯고 있어 걱정이 되지 않습니다. 안전한 양들은 하느님의 우리 안에 들어와 있는 영혼들을 표상합니다. 길 잃은 양 한 마리는 구원이 위태로운 한 영혼을 표상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의 영혼이 구원받기를 바라십니다. 아무리 작고 보잘것없는 사람이라도 그의 영혼은 하느님의 구원을 받을 만큼 소중하고 존귀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죽음의 골짜기에서 방황할 때 우리를 찾아오시는 구세주의 사랑이 언제나 우리 가까이에 있음을 기억합시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주시는 구원의 빛은 매우 하찮고 허무한 일들 속에서 솟아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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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하나>
마태오 18,12-14 (되찾은 양의 비유)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떤 사람에게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가운데 한 마리가 길을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남겨 둔 채 길 잃은 양을 찾아 나서지 않느냐? 그가 양을 찾게 되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는데, 길을 잃지 않은 아흔아홉 마리보다 그 한 마리를 두고 더 기뻐한다. 이와 같이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
<하나>
하나는
하나입니다
하나는
하나이어야 합니다
하나는
하나이기에
하나를 잃으면
모두를 잃는 것입니다
둘 가운데 하나도
이 분의 일이 아니라
하나입니다
둘 가운데 하나도
이 분의 일이 아니라
하나이어야 합니다
하나는
하나이기에
둘 가운데 하나를 잃으면
하나가 있어 둘인
모두를 잃는 것입니다
백 가운데 하나도
백 분의 일이 아니라
하나입니다
백 가운데 하나도
백 분의 일이 아니라
하나이어야 합니다
하나는
하나이기에
백 가운데 하나를 잃으면
하나가 있어 백인
모두를 잃는 것입니다
만 가운데 하나도
만분의 일이 아니라
하나입니다
만 가운데 하나도
만분의 일이 아니라
하나이어야 합니다
하나는
하나이기에
만 가운데 하나를 잃으면
하나가 있어 만인
모두를 잃는 것입니다
하나는
하나입니다
하나는
하나이어야 합니다
하나는
하나이기에
하나를 잃으면
모두를 잃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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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하나가 소중하다>
한 생을 내 마음에 드는 사람만을 만나면서 살 수는 없습니다. 분에 넘치도록 좋은 사람도 있지만 기대와는 다른 사람, 전혀 예기치 않은 사람도 만나게 됩니다. 때로는 골치덩이를 만나서 아파하기도 합니다. 다시는 만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원하든 원하지 않던 그런 사람들과 뒤섞여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니 마음이 크고 넓지 않고서는 화병이 나기도 합니다. 레지오 마리애 교본에 보면, “전혀 손을 쓸 수 없을 만큼 나쁜 사람도 없고 완벽한 사람도 없다” 적혀 있습니다.
사실 지금 완벽한 사람도 자신의 연약함 때문에 얼마든지 걸려 넘어질 수 있는 가능성을 안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못된 사람도 결코 미래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과거 없는 성인 없고, 미래 없는 죄인 없다” 고 합니다. 결국, 한 사람, 한 사람 모두가 다 소중한 존재입니다.
되찾은 양의 비유를 통해 예수님께서는 한 사람 한 사람이 소중하다는 것을 일깨워 주십니다. 길을 잃은 것이 자신의 부주의 탓이든, 경솔함의 탓이든, 아니면 남의 탓이든 상관없이 길을 잃고 방황하는 이가 있다면 그를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이든, 골칫덩이든 그 한 사람이 하느님께서 귀하게 여기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마태 18,14)하고 말씀하십니다. 한번 길을 잃고 헤매는 양을 생각해 보십시오. 아니, 길을 잃었던 자신을 생각해 보십시오. 누군가 한시라도 빨리 나타나 안내해 주기를 소망하지 않습니까?
골칫덩이일수록 큰 사랑을 가진 사람이 필요합니다. 보기 싫은 사람일수록 예수님의 손길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구원에서 멀어지는 것은 아버지의 뜻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길 잃고 방황하는 이를 외면하지 마십시오. 그를 구원하는 도구로 바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선택하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살다 보면 내가 길 잃은 양이 될 수도 있습니다. 아니 지금 길을 잃고 방황하는 이가 바로 나일 수 있습니다.
가정이든 직장이든 어떤 공동체이든 골칫덩이는 있게 마련이고 따라서 서로를 소중히 인정해 주는 노력이 요청되고 있습니다. 되찾은 양으로 말미암아 누리는 기쁨을 간직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잃은 양을 찾는 마음이 가득한 곳에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잊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때론 내가 바로 길 잃은 양이라는 것을 생각했으면 좋겠습니다. 양은 목자에게 의존하는 특성이 있었습니다. 우리도 우리의 목자인 주님께 온전히 의존해야 하겠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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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아는 부부가 찾아왔습니다. 오랜만에 만난 것인데, 형제님께서 커피를 무척 좋아하셨던 것이 기억났습니다. 그래서 커피를 두 분에게 대접했습니다.
하지만 형제님께서 커피에 손도 대지 않는 것입니다. “커피 좋아하시잖아요? 이 커피 맛있습니다.”라고 말씀드렸더니, 자매님께서 “이이가 속이 좋지 않아 병원에 갔는데 커피를 마시지 말라고 했어요.”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순간 실수했다고 생각되었습니다. 어쩔 수 없어 마시지 못하고 있는데 커피를 내놨으니 얼마나 힘드셨을까요? 아마 커피 마시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셨을 것입니다.
과거의 경험이나 선입견 때문에 그릇된 판단을 내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과거의 모습 그대로가 아닌데, 자신이 기억하는 과거에만 맞추는 실수를 얼마나 자주 반복하고 있습니까? 저 자신도 과거와 지금이 완전히 다릅니다. 예전에는 쫄면, 짬뽕, 매운 닭발 등의 매운 음식을 너무나 좋아했지만, 지금은 그리 좋아하지 않습니다. 예전에는 수학을 좋아했지만, 지금은 책 읽는 것을 좋아해서 국어가 더 좋습니다.
저도 이렇게 많이 변하는데 남에게만 변화되지 않기를 바라는 것 자체가 큰 욕심일 것입니다. 사람들과의 관계가 틀어질 때, 상대방의 변화를 탓하는 것 자체가 큰 오류 속에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다인의 격언이 마음에 와닿습니다.
“모든 만남이 첫 만남이다.”
이 격언처럼 모든 것을 매번 처음인 듯 대하면 후회할 일이 줄어들며, 관계가 깨지는 것도 막을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 변하지 않는 것은 오로지 주님뿐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향해 전능하신 하느님이라고 고백할 수 있게 됩니다.
불변하지 않는 사랑으로 다가오시는 주님께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잃어버린 한 마리 양도 포기하지 않는 주님의 사랑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 모범을 본받아 비록 불완전해도 사랑을 실천하는 데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위로하여라. 위로하여라. 나의 백성을”(이사 40,1)이라며 하느님의 말씀을 전해주십니다. 이렇게 당신 백성만을 향한 사랑에 집중하시는 하느님이신 것입니다. 그 사랑을 바라볼 수 있다면, 우리도 사랑을 실천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불완전해도 포기하지 않고 완전한 사랑을 닮아가며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부족한 사랑이지만 계속해서 실천해 나갈 때 좀 더 완벽한 주님 모습에 가까워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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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작은이라도>
“이 작은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
오늘 복음은 제가 참으로 생각을 많이 한 복음이고, 강의 때도 수없이 얘기한 복음입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한 번도 주목하지 않은 말이 오늘 눈에 들어왔는데 다름 아닌 <작은이들 가운데 하나>라는 말입니다.
작은 이라!
잃어버렸다!
그것도 하나를 잃어버렸다!
이렇게 말들을 조각조각 내뱉었는데 그것을 모아 보니 작은이이고 하나이기에 잃어버리는 거라는 말이 되었습니다. 사실 크면 잘 잃어버리지 않을 것이고, 잃었을지라도 쉽게 찾겠지요.
그런데 우리가 다시 주목해야 하는 것이 오늘 얘기 중에 앞에서는 <길 잃은 양>이었는데 뒤에서는 <잃은 양>이 되는 점입니다.
그런데 <길 잃은 양>과 <잃은 양>은 주어가 다릅니다. 귀책 사유, 곧 책임이 다르다는 얘깁니다. <길 잃은 양>은 양이 주어이고 양이 길을 잃은 겁니다. 이에 비해 <잃은 양>은 목자나 공동체가 양을 잃은 거지요.
우리는 목표를 잃고 방황할 때 길을 잃었다고 하고 그것은 개인의 책임이고 잘못이라고 생각합니다. 더욱이 가정의 경우에는 부모가, 수도회의 경우에는 공동체가 목표와 방향을 제시했음에도 그것은 싫다고, 자기의 길을 가겠다고 뛰쳐나가서는 길을 잃고 방황하는 경우 더더욱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렇습니다. 자기 인생은 자기 책임이고 누가 어떻게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책임을 냉정하게 개인에게 돌리고 공동체는 책임에서 쏙 빠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공동체는 분명 인간적으로 사랑의 공동체가 아니고 신앙적으로도 공동체가 함께 주님께 가는 그런 공동체가 아니지요.
이런 공동체에서는 인간적으로나 신앙적으로 성숙한 사람이나 목소리가 큰 사람만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어린이나 어른이어도 어린이처럼 미성숙한 사람은 이 공동체에서 소외 또는 도태되거나 주변으로 밀려나게 되지요.
그러므로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작은이란 공동체 안에서 소리가 작은 사람, 비중이 작은 사람입니다. 아무리 소리를 내어도 그 소리가 공동체에 들리지 않고, 공동체 안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너무도 작아 공동체 안에서 자기의 존재감을 느낄 수 없습니다.
전에 제가 관구 봉사자를 할 때 한 형제가 수도원을 떠나겠다고 찾아왔습니다. 제가 왜 떠나려고 하느냐, 어떻게 해주면 되겠냐고 하니 이제 와 뭘 어떻게 하겠다는 것은 이미 늦었다고, 이미 마음이 떠나서 어쩔 수 없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이제 나가려고 하니까 왜 떠나느냐’, ‘어떻게 해주면 좋겠냐’ 하는데 평소에 자기 목소리를 한 사람이라도 진지하게 들어주고 자기를 존중해주었다면 이렇게 떠나지 않았을 거라고 말하는 거였습니다.
이런 경우 개인이 떠난 것이지만 실은 공동체가 한 형제를 품지 못해 떠나게 한 것이고 잃은 것이며, 그 이유가 작은 소리를 듣지 못하고 무시하였기 때문이지요.
말썽이나 소란을 피워야지만 소리가 들리는 공동체, 애들은 가라거나 애들은 가만히 있으라는 공동체는 잠재적으로 길 잃은 양과 함께 사는 공동체임을 묵상하는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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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착한 목자 영성>
- 하느님 닮기 -
인간이 물음이라면 하느님은 답입니다. 인간의 궁극 목표는 하느님을 닮아 참나의 실현에 있습니다. 하느님을 닮아감으로 참나의 사람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착한 목자 예수님이 그 전형적 모범입니다.
그래서 오늘 강론 제목은 ‘착한 목자 영성-하느님 닮기-’로 정했습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은 어떤 분이실까요? 바로 이런 하느님을 닮아가는 것이요 예수님이 그 좋은 본보기입니다. 오늘 제1독서와 복음을 중심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위로의 하느님입니다.
위로의 책이라는 제2이사야서는 “위로하여라”로 시작합니다.
“위로하여라, 위로하여라, 나의 백성을.-너희의 하느님께서 말씀하신다.-”(이사 40,1) 고린토 2서에서 주님은 바오로를 통해 말씀하십니다.
“그분은 인자하신 아버지이시며 모든 위로의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환난을 겪을 때마다 위로해 주시어, 우리도 그분에게서 받은 위로로, 온갖 환난을 겪는 사람들을 위로할 수 있게 하십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치듯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내리는 위로도 우리에게 넘칩니다.”(2코린 1,3-5)
위로의 하느님입니다. 궁극의 위로는 하느님뿐임을 깨닫습니다. 우리가 이런 하느님을 닮아갈 때 비로소 “위로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사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충고나 조언보다는 위로나 격려이겠습니다. 어제 절식을 중단한 저에게 도반 형제의 따뜻한 위로도 잊지 못합니다. ‘말 한마디 천 냥 빚을 갚는다’ 했습니다.
“몸에 안맞는 단식하느라고 생고생만 하셨네요. 예, 쉬시고 내일부터 영양식사로 기운 회복하시길 바랍니다.
둘째, 정의의 하느님입니다.
정의의 하느님께서 평화롭고 차별 없는 공정한 사회를 이루라고 우리 모두를 격려하십니다. 다음 말씀은 평화롭고 정의로운 사회를 상징합니다.
“너희는 광야에 주님의 길을 닦아라. 우리 하느님을 위하여, 사막에 길을 곧게 내어라. 골짜기는 모두 메워지고, 산과 언덕은 모두 낮아져라. 거친 곳은 평지가 되고, 험한 곳은 평야가 되어라. 이에 주님의 영광이 드러나니, 모든 사람이 다 함께 그것을 보리라.”(이사 40,3-5)
얼마나 고무적인 격려인지요. 대림시기 주어진 과제가 이처럼 “정의의 사람”입니다.
셋째, 연민의 하느님입니다.
언젠가 사라져갈 불쌍하고 측은하고 가엾은, 짧고도 슬픈 인생에 대해 연민의 마음을 지닌 “연민의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시편 말씀도 기억할 것입니다.
“인생은 기껏해야 칠십 년, 근력이 좋아야 팔십 년, 그나마 거의가 고생과 슬픔이오니 덧없이 지나가고, 우리는 나는 듯 가버리나이다.”(시편 90,10)
어제 수원에 사는 어는 모르는 자매님의 부탁도 참 안타까웠습니다. “친척 오빠의 갑작스러운 비보 소식에 미사 신청합니다. 56세로 비신자이며 외아들이고 정말 착한 오빠입니다.”
다음 이사야서의 말씀에서 연상되는바 연민입니다.
“모든 인간은 풀이요, 그 영화는 들의 꽃과 같다. 주님의 입김이 그 위로 불어오면,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든다. 진정 이 백성은 풀에 지나지 않는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들지만, 우리 하느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 있으리라.”(이사 40,6-8)
풀같이 덧없는 인생임을 생각하노라면 저절로 겸허해지고 동료 인간들에게 연민의 마음을 지닐 것입니다. 60대 부부가 불쌍해서 살고 70대 부부가 고마워서 산다는 것도 이런 연민의 사랑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풀같은 우리 존재가 영원히 살 수 있는 길은 하느님의 말씀인 파스카 예수님과의 일치뿐임을 깨닫습니다. 무지와 무의미, 허무에 대한 답은 하느님의 말씀뿐입니다.
넷째, 사랑의 하느님입니다.
오늘 복음의 되찾은 양의 비유가 참으로 디테일에 강한 주님의 사랑을 잘 보여줍니다. 길을 잃지 않은 아흔아홉 마리를 놔두고 길을 잃은 양 한 마리를 기어이 찾아 나서는 하느님입니다. 길을 잃었다는 것은 길이신 예수님을 잃었다는 것이나 이보다 큰 재앙도 없을 것입니다.
혹시 살다보면 때로 길을 잃고 방황할 때가 있을 때마다 우리를 찾아나신 주님을 생각할 때 정신이 번쩍 날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드러나는 하느님의 사랑이 참 단호합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는데, 길을 잃지 않은 아흔아홉 마리보다 그 한 마리를 두고 기뻐한다.”(마태 18,13)
바로 이것이 하느님의 기쁨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환히 드러나는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이어 주님은 모두에 대한, 특히 작은 이들 하나하나에 관한 관심과 사랑을 강조하십니다.
“이와 같이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마태 18,14)
하느님 아버지의 마음에 정통한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이심전심”이 아니라 “하심예심:입니다. 하느님 마음이 예수님 마음입니다. 교회만 아니라 모든 공동체의 지도자들 특히 대통령은 이런 사랑을 지녀야 할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 후반부 이사야서 말씀도 착한 목자 하느님의 사랑이 잘 드러납니다. 역시 하느님의 기쁨은 길잃은 양 하나도 없는 일치와 평화의 공동체임을 깨닫습니다
“보라, 주 하느님께서 권능을 떨치며 오신다. 그분께서는 목자처럼 당신의 가축들을 먹이시고, 새끼 양들을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먹이는 어미 양들을 조심스럽게 이끄신다.”(이사40,11)
참으로 기쁨 가득한 하느님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대로 대림시기 우리를 구원하러 오시는 사랑의 주님을 상징합니다. 이런 임마누엘 사랑의 파스카 주님께서 늘 우리와 함께 계시니 우리는 “사랑의 사람”이 될 수 뿐이 없습니다.
착한목자 영성은 비단 공동체 지도자뿐 아니라 믿는 모두에게 해당됩니다. 착한목자 하느님을 닮아갈 때, 우리도 예수님처럼 고유의 참나의 실현이며 이것이 참행복입니다.
그러니 주님을 닮아 위로의 사람, 정의의 사람, 연민의 사랑, 사랑의 사람이 되도록 평생 깨어 분투의 노력을 다하고 이 거룩한 미사중 주님의 도움을 청합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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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이와 같이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마태18,14)
<작은 이들과 작은 것들을 사랑하신 예수님!>
오늘 복음(마태18,12-14)은 '마태오 복음 사가가 전하는 되찾은 양의 비유'입니다. 양 백 마리 중에서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되찾은 것을 두고 기뻐하는 비유를 통해서, '작은 것의 소중함과 우리 안에 있는 작은 이들을 업신여기지 말아야 한다.'는 메시지를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이 메시지가 경제 논리 안에서 더 소유하는 데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이들에게는 큰 십자가로 다가올 것입니다. 그들은 길 잃어버린 양 한 마리보다, 아흔아홉 마리의 양을 더 소중하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고 따라가는 길은 참으로 힘든 '십자가의 길'입니다. 그러니 지금 여기에서 예수님처럼 사는 것이 너무 힘들다고 여겨진다면, 잘 가고 있는 모습이 아닐까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난 하느님 아버지의 뜻은 '지금 여기에서 하느님의 모든 피조물들이 함께 잘 사는', 곧 '공동선이 이루어지는 하느님의 나라 건설'입니다.
"저희가 생명의 소중함을 깨달아 모든 피조물과 창조 질서 안에서 조화롭게 살아가고, 가난한 이들을 우선적으로 배려하며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선을 이룸으로써, 이 땅에 사랑과 생명의 문화를 건설하고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드러내는 일꾼이 되게 하소서."(사회교리주간 기도문 中에서)
이번 주간인 대림 제2주간은 사회 교리 주간입니다. '사회 교리 주간'은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에 더 관심을 두고 살아갈 것을 다짐하는 주간'입니다. 우리 주위에는 '작은 이들과 작은 것들'이 많습니다. 이 다짐이 나의 삶의 자리에서 이루어졌으면 좋겠습니다.
이 다짐과 실천이 "마라나타! 곧 주 예수님 어서 오세요." 라는 외침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대림 시기의 구체적인 준비'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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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m.youtube.com/watch?v=lyw-VTzeC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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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1)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마태 18, 14)
길을 잃어 보아야
길의 소중함을
압니다.
길의 주인(主人)은
주님이십니다.
아흔아홉 마리 양을
산에 남겨 둔 채
길 잃은 양
한 마리를 위해
찾아 나서시고
끝내 찾으시는
아버지의 눈물겨운
사랑입니다.
그래서 사랑이
구원이며
사랑이
놀라운 관계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뜨겁게 체험하는 것이
우리들
인생여정입니다.
광야를 헤매고
풍랑을 만나고
길을 잃고
다시 하느님을
만나는 사랑의
숨 가쁜 여정입니다.
이 사랑의 여정 앞에
사랑받는 우리가
찾아 나서시는
그 대상입니다.
길 잃은 양 한마리를
찾아 기뻐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이 뜨거운 사랑을
만난 길 일었던
한마리 양은
주님 사랑을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사랑하기에 길을 잃고
사랑하기에 되찾는
깊어가는 사랑의
길입니다.
잃어버린 우리를
되찾기위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오십니다.
사랑은
놀랍습니다.
사랑은 한계가
없습니다.
아버지의 뜻은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지 않는
찾아가시는 사랑의
숨바꼭질입니다.
하느님 사랑을
알게하는 것이
기다리시고
찾아가시는
사랑입니다.
사랑의 탄생은
기다림이 반(半)이며
기쁨이 반(半)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기쁨을
숨기지 않으십니다.
이 대림시기가
길 잃은 곳에서
몸소 길이 되시는
하느님을 기쁘게
만나는 사랑의
기적입니다.
사랑이
기적(奇跡)입니다.
하느님 사랑을
믿는 것이
화해이며
용서입니다.
우리가 찾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
하느님께서
끝내 우리를
찾으시는 사랑입니다.
이 놀라운 사랑으로
살아가는 우리입니다.
길을 잃어도
길을 찾게 하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랑의 대림 보내시길
기도드립니다.
+++++++++++++++++++
(2)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마태 18, 14)
길을 잃은
우리를 주님께서
찾아오십니다.
길을 잃은 우리를
되찾으시는
아버지의 뜻입니다.
회개는 길을
잃은 사람들이
길을 되찾는
기쁜 소식입니다.
길을 잃은 곳에서
주님을 다시 만납니다.
길을 떠난
이들만이
길을 잃고 길을
다시 발견합니다.
주님께서는
길을 떠난
이들의 마음을
너무도 잘 아십니다.
길을 잃은
우리의 이름을
애타게 부르십니다.
애타게 찾아
나서시는 주님의
사랑입니다.
아버지
하느님께서는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그 하나도
잃어버리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아버지의 사랑이
우리 마음 속에
뜨겁게 스며드는
회개의 대림되시길
바랍니다.
잃어버린 우리를
되찾으시는
주님을 통해
우리모두가 이렇게
어여쁘고
소중하다는 것을
믿게됩니다.
부르시고 찾으시는
주님께서 우리를
향해 오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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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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