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로하 오에
누구나 한 두 가지씩은 무언가 이루고 싶은 것을 품고 살아가기 마련이다. 그건 소망이라거나 꿈이라거나 바람이라고 하는 것들이지만, 하나로 뭉뚱그려본다면 희망이란 상자에 담아두고 싶은 것이기도 하다.
소망은 새근거리는 아가의 숨소리에도 숨어있고 꿈은 씩씩한 소년의 기상에도 깃들어있으나 바람은 넉넉한 어머니의 하얀 치마폭에 더 많이 감싸여 있지 않나 싶다.
어린 시절 시나브로 어머니의 주변을 맴돌며 뒤적거려보고 싶었던 게 어머니의 치마폭이었다. 어머니의 바람이 나의 바람이기도 하고 나의 바람이 곧 어머니의 바람인 줄로만 알았으며, 그것은 또 어머니의 하얀 치마폭에 소복이 담겨 있다가 저절로 충족되는 것인 줄로만 알았다.
이젠 누구의 도움도 없이 나 홀로 바람을 찾아 나설 수밖에 없지만 가끔은 어머니를 연상하는 포근한 곳을 찾아들고 싶을 때가 있다. 어머니는 태생의 근원이요 돌아가는 귀결점이기도 하다. 그러기에 갑자기 희열에 빠지거나 위급한 상황에 처하면 어머니를 부르고 떠올리게 된다. 어머니는 안식과 평화의 상징이요 낙원으로 드는 길목이기에 안온하고 편안하면 어머니의 품 속 같다고도 한다. ‘양지 밭 과수원에 꿀벌이 잉잉거릴 때 나와 함께 그 새빨간 능금을 또옥 똑 따지 않겠느냐’는 시인 신석정의 ‘그 먼 나라’ 같은 곳을 그런 품속으로 동경하기도 한다.
언제부턴지 소망이라거나 꿈이라고 하는 것들보다 작은 바람을 하나씩 이뤄보리란 생각으로 살아가게 되었다. 그중의 하나가 오래전부터 동경해 오던 하와이 여행인데, 비행거리가 그리 멀지도 않으면서 어머니의 품 속 같이 편안히 머물다 올 수 있는 곳 중의 하나란 생각에 미뤄두었다가 비행기 트랩에 올랐다.
하와이는 북태평양의 동쪽에 130여 개의 섬으로 구성된 군도지만 사람이 살고 있는 곳은 8 개의 섬뿐이다. 여름과 겨울의 기온차가 섭씨 4도밖에 안되고 연안 지역은 하루 평균 기온이 최고 28도에서 최저 20도 사이로, 연중 내내 온화한 기후와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자랑하는 지상 최고의 낙원으로 꼽히기도 한다.
하와이(Hawaii)는 하와이어로 ‘작은 고향’을, 폴리네시아어로는 ‘신이 있는 장소’를 뜻하는 말이라니 원주민들도 낙원으로 생각했던 모양이다. 8 개의 섬 중에서 오아후 섬과 마우이 섬을 둘러보았을 뿐이지만 바다에 연한 곳은 모두 해수욕장이나 요트장이요, 그 뒤로는 호텔이나 리조트들이요, 또 그 뒤로는 옹색함이란 한구석도 없는 잔디밭이나 사탕수수 파인애플 농원이요, 또 그 뒤로는 나이테도 없는 사철 푸른 숲들이 시원한 태평양 바람에 한들거리며 몰려드는 관광객들을 맞고 있었다.
그런 중에 하와이 인구의 80%가 몰려 와이키키 해변에 출몰하는 오아후가 풍요의 섬이었다면 마우이는 세계 최대의 휴화산 할레아칼라(해발 3055미터)의 중턱을 구름이 휘감아 도는 정적과 여유의 섬이었다고나 하겠다.
하지만 이곳엔들 애환이 왜 없겠는가. 최초의 주민은 1300 년 전에서 1500 년 전 사이에 마르퀴세스 제도에서 이주해 온 폴리네시아인이다. 그로부터 천년이 넘도록 이들에겐 낙원이었을 것이다. 1778 년 영국의 탐험가 제임스 쿡 선장이 이 군도를 최초로 발견한데이어 1820 년대에 들어서 기독교 선교사들과 함께 이주민들이 들어서면서부터 원주민과 이주민들 사이에 갈등이 빚어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1790 년 카메하메하대왕에 의해 하와이왕국으로 통일되기까지 숱한 피를 흘렸던지 이아오 밸리(Iao valley)엔 피의 계곡 이야기가 전해지기도 한다.
마침내는 왕조를 이어가기 어려웠던지 마지막 여왕 릴리오칼라니 때 미국에 합병(1898년)되었다니 그가 만들었다는 ‘알로하 오에(aloha oe)’ 노래가 하와이의 낭만을 전해준다기보다 낙원을 잃은 슬픈 어머니의 기원으로 들려왔다.
애환이야 원주민들의 이야기만은 아니다. 총인구 40%를 넘어섰다는 아시아계의 주민들이 이곳에 발붙이기 위해 얼마나 많은 피와 땀을 흘려왔을까. 우리나라의 경우도 1903 년 최초로 일제치하의 어려운 처지에 있던 백 명 여의 무리가 안주할 곳을 찾아 이곳에 이주해 온 뒤 사탕수수와 파인애플의 가시에 피 흘리며 가정조차 이루지 못한 채 역경을 견디기 어언 백 년 여가 넘었다.
이젠 그 2세와 3세들을 주축으로 한 우리 교포의 수가 4만 명을 넘어 외롭지 않다지만 오아후 섬 한복판에 고 이승만 박사가 1세대 교포들의 어려운 헌금을 모아 세웠다는 교회가 외롭고, 뒤뜰에 서있는 우남의 동상은 독립운동하던 때의 흠모의 그림자도 없이 쓸쓸하기만 했다.
니미츠(Nimitz) 거리를 지나 진주만에 이르니 대동아공영권의 헛된 꿈을 꾸며 부나비 횃불에 머리를 처박듯 자멸한 일본 제국주의의 잔해가 고스란했고, 세계 최대의 아웃도어 쇼핑센터라는 ‘알라모아나’에는 시쳇말로 세계적 명품이라거나 캐주얼이라는 브랜드의 가게들은 즐비했건만 상품의 레이블을 쳐들어보는 것마다 ‘made in china'이니 원주민도 이주민도 새로 눈을 부릅뜨는 이들이 입혀주는 유니폼을 입을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작은 바람을 따라 이렇게 몇 군데를 둘러보니 낙원이란 게 일엽편주로 망망대해에 떠있어 뭇사람들이 입질해 대는 무주공당(無主空堂) 같기도 하고, 이곳이 진정 영원한 낙원이 될까 하는 생각도 해보게 된다.
낙원은 안락하게 살 수 있는 즐거운 곳을 말하지만 동양과 서양에서의 개념이 조금씩 다르다. 동양의 무릉도원은 아름다운 자연 속의 평화로움에서, 서양의 파라다이스는 근심걱정 없는 성당이나 공회당의 앞뜰과 에덴동산에서 그 모습을 찾았다. 세상을 초월한 곳으로써의 극락이나 천국을 동서양 모두 낙원의 한 모습으로 생각하기도 하지만 세속의 삶에 한정한다면 사람다운 대접을 받아가면서 빈곤하지 않은 가운데 좋은 환경 속에서 살 수 있는 곳이라면 그곳이 낙원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요즘 삶의 개선을 위해 강조되고 있는 인권과 빈곤과 환경문제는 그래서 낙원으로 가는 열쇠가 될 터요, 그 길은 무임승차권이 없는 한없는 가시밭길이다.
인류는 이 길로 가기 위해 이상국가론(플라톤)이나 유토피아론(Utopia, 토머스 모아)을 펴기도 하고 뉴 아틀란티스(New Atlantis, 프랜시스 베이컨)를 꿈꿔보기도 했지만 낙원이란 종교적 영역 말고는 한없이 다가가는 노력의 칼날 위에 신기루처럼 올라앉아있을 뿐이요, 바라볼 뿐인 자와 누리는 자의 양분을 통합하는 길은 더욱 멀고도 험할 뿐이다.
남들이 하는 대로 번화가 한복판에서 수영복 차림으로 거닐어보기도 했지만 누구도 이상하게 바라보거나 시선이 마주치는 이는 없었다. 우리 상식으론 허용되지 않는 것이겠지만 사회의 공동구간에 나의 밀실이 허용되는 셈이었다.
최인훈의 소설 ‘광장’을 전후문학의 금자탑으로 꼽기도 하는데, 주인공 이명준은 광란의 광장도 집단체면에 걸린 밀실도 버리고 제3국 행을 선택하게 된다. 그는 왜 인도양으로 가다가 바다에 몸을 던졌을까? ‘광장은 대중의 밀실이며 밀실은 개인의 광장이다. 인간을 이 두 가지 공간 중 하나에 가두어버릴 때, 그는 살 수없다. 그럴 때 광장에 폭동의 피가 흐르고 밀실에서 광란의 부르짖음이 새 나온다’(최인훈의 광장에서).
작가의 이런 표현을 미루어놓는다 하더라도 광장은 공공의 영역이요, 규율이란 제약이 있지만 참여의 보람도 있고 삶에 필요한 에너지를 공급받는 곳이기도 하다. 밀실은 사적 영역이기에 자신만의 꽃을 피우는 한없는 자유가 보장된 곳이지만 에너지를 소비하는 곳일 뿐이니 한없이 머무를 수만은 없는 곳이기도 하다.
소설 ‘광장’을 분단문학의 틀에서 바라보긴 하나 인간의 진정한 낙원이 어디인지를 조망해 보는 망루에서 바라보는 재미도 있다. 광장과 밀실이 공존하는 곳이 우리의 진정한 낙원일진대, 이명준이 인도양이 아닌 태평양을 향했더라면 바다에 몸을 던지진 않았을 것이란 엉뚱한 생각도 해보지만 하와이는 태평양 파도에 얹혀 사탕수수밭에서 검은 연기를 내뿜듯 환경적 내홍과 민족 간의 길항으로 뒤뚱거리기도 했다.
소중한 것은 이미 이뤄낸 것이든 바람 속에 있는 것이든 가슴에 품거나 손에 쥐고 살아가기 마련이다. 그중 손은 더듬고 만지고 만들어 가지며, 마침내는 던져버리는 일까지 하게 된다. 그것은 찾음과 창조와 누림을 뜻하며 마침내는 희생이나 포기를 뜻하기도 한다.
소망이든 꿈이든 포근한 품을 찾아보리란 바람은 우선 접어두더라도 이제 지녔던 조그만 바람 하나를 까먹었으니 꼭 쥐었던 손을 조금은 느슨하게 풀어놓아야겠다. ‘알로하’는 만남의 반가움과 헤어짐의 아쉬움이 함께 들어있는 말이라니 릴리오칼라니의 노래를 그런 마음으로나 들어야겠다. (지난 날의 단상 중에서)
옂그제 여권발급을 신청하면서 구 여권을 들여다보노라니 스탬프가 찍한 장장마다 지난 추억들이 어른거렸다. 위 글은 회갑을 맞았을 때의 일이다. 이젠 칠순도 喜壽도 傘壽도 지났으니 벌써 20여 년 전 일이지만 기억이 생생하거니와 미국의 47대 대통령이 탄생했다니 꺼내본다.
* 사진은 하와이의 한인타운 모습이다 |
첫댓글 한번도 그 뜻을 헤아려볼 생각을 한 적이 없었네요.
'작은 고향' '신이 있는 장소' 두 가지 의 미가 다
하와이 섬과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오늘도 가볍기만 한 저의 뇌에
질량이 1그램 추가 되었으니 감사합니다.
중학교 음악시간에 배웠던 알로하 오에~ 노랫말이 생각났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nb-QiGGbpK8
PLAY
노래 잘듣고갑니다.
하와이안 댄싱과 알로하오에를 보고 듣노라면 태평양바람에 한들거리는 야자수가 연상되기도 하죠.
회갑을 맞이하여,
하와이도 다녀 오시고
글로도 그 감회를 남기신 것 같습니다.
원시의 그곳에
원주민들이 사는 그곳에
자연과 더불어 외부로 부터
침략 당함을 걱정하지 않고 산다면,
낙원이 될까요.
문명의 손이 닿고
문화의 발전이 같이 간다면,
낙원이 될까요.
정복자의 꿈은 이루어졌을지라도
정복 당한 자의 슬픔은 하느님이 보상해 줄까요.
이래저래,
강한 쪽으로 흘러가는 것이 역사인 것 같습니다.
역사 속으로 사라진 본래의 것, 원래의 것은
다 흘러가는 것이지만,
잊지는 말아야 할 것 같습니다.
'알로하오에~'를 부르던 그 시절이 그리워집니다.^^
역사는 소용돌이칠 뿐이지요.
그걸 도전이라 한다면
인간은 적응해나갈 뿐이고요.
그걸 일러 토인비는 도전과 응전이라 했지만 그걸 바라보는게 여행객이라 할테고요.
미국에서 산 지 16년이 되었는데
하와이 한번 다녀올 기회가 없었네요. ㅎ
섬을 좋아해서 한국 섬 여행도 많이 다녔는데, 태평양엔 하와이보단 많이 적고 관광지도 부족한 사이판을 오래 전에 다녀온 기억이 납니다.
아버지 세대의 아픔을 그곳에서 목격했는데 그때 느낌이 살아납니다.
사이판은 아픔이지요.
본토 기준하면 하와이 부러워할 건 없겠지요,
하와이엔
1978년 12월에
일주일간,
그리고 1997년 4월인가
IMF 사태 직전
휴가차 다녀 왔습니다.
여행이 자유화된 이후
낭비하며
너무 성급하게
다녀 오지 않았나
생각도 듭니다.
하와이는 욕심없이
살고자하면
낙원일 것 같습니다.
1978년도 출장여행하면서
주저앉고 싶기도 했었지만...!
지금은 USA의
한 주로서
어쩌면 피흘려 통일한
카메하메하대왕 보다는
릴리오칼라니 여왕이
더 나은
낙원을 만들었다고
생각되기도 합니다.
저는 이십여년이 넘었지만 언젠가는
다시 가보고 싶은 곳 입니다.
가을이 있는 우리나라도
아름답기는 하지요.
깊어가는 가을밤
평안하시길 기원합니다.
그러셨군요.
다시 가보기는 이제 너무 멀지요.
석촌님의 글은 늘 교과서 같아서
공부하는 마음으로 읽습니다.
하와이.
'신이 있는 장소'
'작은 고향'
아직 가보지 못 한 곳이지만
가보리라 마음먹고 있는 곳입니다.
알로하 오에.
늘 슬프게 듣곤 했던 노래였답니다.
좋은 글 감사드리면서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