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발견과 성결1에 이어서 2편에 들어가는 관계로 잠시 서론을 언급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을 주시는 궁극적인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형상을 찾으시기 위함입니다.
기도 많이 하라고, 전도 많이 하라고, 봉사 많이 하라고, 건축 많이 하라고, 응답 많이 받아서 간증하라고 성령을 주신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신앙적 행함이요, 주님과 교제하는 한 표현이자 상급을 쌓아가는 과정이지, 성령을 주신 목적이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한편, 우리 모두는 휴거되고 싶어합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휴거해 주시는 영혼들은 어떤 사람들일까요?
여기저기서 각종 계시와 예언, 징조들에서 찾을 것도 없이 성경에서 찾아봅시다.
바로, 성령안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이루어가는 자녀들을 휴거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의 형상을 찾는 자녀들은 어떠한 사람일까요?
로마서 12장 9절 "사랑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
잠언 8장 13절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악을 미워하는 것이라..." 하셨습니다.
악의 주관자는 사단인데요, 하나님의 형상을 이루어가는 자녀들은 악을 미워하는 자들입니다. 악을 미워하는 자가 악을 멀리 할 수 있고 악을 버릴 수 있습니다. 이렇게 악을 버리는 자가 바로 마음의 성결을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마음의 성결을 이루어 갈수록 주님의 의가 이루어지는 것이요, 하나님 나라에도 확장이 되는 것이며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하는 마음도 더더욱 커지는 것입니다.
금같은 믿음을 가지고 있어도 더러운 마음이라면 하나님은 쓰실 수 없습니다.
성경 지식의 옳고 그름에 능통하다해도 더러운 마음이라면 주님은 그가 옳다라고 하시지 않습니다.
적은 믿음이라도 그 마음의 동기가 순전하고 악이 없다면 주님은 응답하시고 그를 들어 쓰시는 것입니다.
그럼 악이 무엇입니까?
악이란, 마음안에 내재된 하나님의 것과 반대되는 속성을 말합니다.
죄란, 그 악이 몸밖으로 표현된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악은 아니지만 죄가 되는 것이 있고, 악이면서도 죄가 되는 것이 있고, 악이지만서도 죄가 되지는 않는 것이 있는데요, 구약시대에서는 악이 되지만 죄가 되지는 않을 일들이 많았습니다.
가령, 누군가를 미워하고 죽이고 싶은 생각을 했다해도 몸으로 표현하여 그를 죽이지 않았다면 죄가 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신약에 와서는 달라집니다.
주님께서는 자녀들에게 한층 더 높은 하나님의 형상을 이루실 것을 요구하십니다.
마음에서 간음을 했다면 행위적으로는 하지 않았다해도 그는 간음을 했다라고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마음 안에 악을 품었다면 비록 행위적으로는 그 악을 표현하지 않았다해도, 하나님께서는 "넌 악하다"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악한 마음을 우리 스스로가 발견을 못합니다. 악한 사람이 어찌 자기 악을 발견하겠습니까. 세상이 어찌 세상을 악하다 하겠는지요. 오로지 거룩하신 성령님께서 깨우쳐 주시고 가르쳐주시고 드러내 주실때 우리는 아~ 내가 악하구나. 내 안에 이런 악한 속성이 있구나 알게 되는 것이요, 회개하고 부르짖으면서 죄와의 싸움을 통해서 마음을 할례해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의 할례, 즉 마음의 성결은 우리의 기도응답하고도 관련이 있습니다. 물론 기도내용중에는 오랜 시간의 공의를 쌓아야하고 인내가 필요한 것들도 있지만, 영계의 기본원칙에서는 하나님 나라와 의를 이루어 드릴때 응답이 빨라지는 것인데요,
주위를 보면, 응답을 받기 위해서는 하나님 나라 세우는 일에는 열심들을 냅니다. 성경을 하루에 10장씩 읽기 결심했다. 헌금은 전보다 더 드리려고 한다. 이제는 성가대나 봉사하나 맡으려 한다. 구역모임이나 교회행사에 한달에 한번은 그래도 참석하려 한다. 기도도 하루에 2시간 작정하려고여. 등등...
그러나, 주님의 의를 이루어 드리는 일에는 상대적으로 소홀하고 이루어가는 분량이 극히 적으며 개념을 영적으로 이어가지 못하시는 일들이 많은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요, 초신자나 새신자라면 마음의 할례 이야기는 저 멀리 딴나라 이야기로 들리기도 하지만서도여, 어느정도 신앙의 연륜이 있고 그만큼 성경을 들어 아는 지식이 있고, 직분과 사명을 감당하는 성도라면요,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드리는 것은 내 안에 하나님의 의를 이루어 드릴수록 하나님께서는, 나로 하여금 하나님 하시는 일에 동참케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악을 미워하고 마음의 성결을 이루어 주님의 의를 이루어 나갈수록 기도응답과 더불어 주님께서는 그를 어떻게 칭찬하시고 들어쓰시는지 마태복음 15장에 나오는 이방족속 여인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이 이야기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이지요.
22절 "...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들렸나이다"
23절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지 아니하시니 ..."
26절 "...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27절 "여자가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하니"
28절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보시면요, 그 여인이 자기 딸이 귀신들렸으니 좀 고쳐달라고 주님께 애원을 합니다. 무리를 헤치면서 주님을 만나려고 얼마나 크게 소리지르며 주님을 불러겠는지요.
이때 주위 사람들의 행동은 성경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제자들의 태도를 보아서도 알 수 있듯이, 분명 주위 사람들에서는 조용히 좀 해. 너 같은 거 고쳐주지도 않어. 예수님이 대답이 없으면 넌 안고쳐주는 거야. 시끄럽게 굴지 마.
분명 이러하게 말하면서 그녀를 비난하거나 업신여기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계속해서 주님을 부릅니다. 그래도 여전히 주님은 묵묵부답이셨습니다.
어느덧 그녀는 무리를 헤치고 주님앞에 나왔는데요 주님이 자신을 개로 비유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녀는 부스러기라도 먹겠나이다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이에 주님께서는 너의 믿음이 크도다 칭찬하시면서 그녀의 딸을 치료해 주셨습니다.
자기발견과 성결2 첫번째 시간에서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바로 자존심입니다.
저는 이 구절들에서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시사하는 바도 자존심도 이야기하고 있다 보아집니다.
그 여인이 자존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중간에 포기했습니다. 힘들어서 포기한게 아니라, 더럽고 치사하고 아니꼬아서 포기를 했을 것입니다.
먼저는, 주위 사람들의 만류에 (1)실족했을 것입니다. 믿었던 예수님은 대답이 없지, 주위에서는 자꾸 잠잠하라고 하지, 왜 난리 법석이냐고 핀잔을 주지. 아마도 낙심과 상실감에 서러워서 그 자리에 주저앉았을 것입니다.
다음으로는 주님께서는 묵묵부답이셨습니다. 그렇다면 소문에 의하면 주님은 선하시고 인자하시고 자비로우시고 치료도 해주신다 들었을텐데요, 왠걸요. 자신의 간절한 부르짖음에는 듣는척 마는척, 들었으면서도 못들은척 하시는 태도에 (2)화가 났을 것입니다. 사람 개무시하네. 소문이 거짓말이네. 저 사람 소문과 달리 영 아니네. 얼마나 잘났다고 사람 무시해...
그 다음으로는 더 가관입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개로 비유하는 것입니다. 보통 사람같으면 여기서는 얼굴이 붉어집니다. 극도로 자존심이 상합니다. 그래서 그 자리를 떠나버리거나 예수님에게 (3)말대꾸를 하면서 말싸움에서 지지 않으려고 했을 것입니다.
다시 봅니다. 자존심은 교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다만! 내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자존감은 반듯이 가져야 하는 마음입니다. 그러나, 내가 나를 높이는 자존심은 교만에서 나오는 것인지라 이러한 자존심을 갖고 있는 사람은 그 자존심이 건드려졌을때 세가지 유형이 나타납니다.
첫째, 실족하는 마음이 드러납니다.
둘째, 분이 납니다. 속이 상합니다.
셋째, 논쟁을 하게 됩니다. 맞받아칩니다.
그런데, 그녀는 이런 교만에서 나오는 자존심이 전혀 없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중에는여, 학식이 있고 품성이 좋은 사람일수록 자존심이 높은 것을 보게 됩니다. 전문가나 교수들 보세요. 얼마나 자존심이 쎈지요. 그런데, 목사들이나 장로들에게서도 이런 자존심이 무척이나 쎈 것을 보게 됩니다.
이것은 성도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존심이라는 악한 마음을 할례하지 않으면
일상에서 악한 기운이 순간순간 드러납니다. 다만! 자신은 그것이 악이라고 생각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혹! 악이라고 느꼈다해도 이내 이성으로 감추어 버리고 덮어버리니 할례를 못하는 것입니다.
위 본문의 이야기는 설교시에도, 포기하지않는 믿음, 끝까지 믿음을 내보이는 마음 주제로 많이들 거론되지만서도여, 실상은 그녀가 그럴 수 있었던 것은 그녀는 자존심이 없었다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녀의 그런 겸비한 마음을 알았기에 그 마음을 들어내시고 칭찬하시면서 후대에 그 마음을 본받기를 원하셨고 이렇게 성경에 기록을 하신 것입니다.
일전에, 어느 자매님께서 문의를 하신적이 있었습니다. 자기 아버지는 불신자인데요, 기도하고 애교도 부리고해서 어렵사리 아버지를 어느 목사님 집회에 모시고 간 것입니다. 그런데, 아버지께서 그 집회에서 은혜를 받은 것입니다.
목사님께서는 은혜를 받은 사람은 단으로 올라오라고 하셨는데요, 그 아버지께서 단 앞으로 나가시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녀는 마음에서 할렐루야를 외쳤답니다. 그런데, 여기서! 그 목사님이 아버지에게 한마디를 하시더라는 것입니다.
목사님 왈: 눈물 한방울 보이지도 않는데 무슨 은혜를 받았다는 건가요. 내려가 주세요.
그래서 아버지는 마음이 상하여 교회하고는 다시 담을 쌓게 되었고, 그 자매님은 그 목사님에 대해서 마음에 원망과 미움의 한이 맺혀버린 것입니다.
덧붙여 본다면요, 그 아버지께서 예수님 앞에 가셨더라면 어떻겠는지요. 예수님께서 이방족속의 그 여인을 대하듯, 그 아버지에게 대하셨더라면 과연 그 아버지는 끝까지 그 자리에서 믿음을 내보일 수 있었을까요? 그렇다고, 그 목사님이 잘했다라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어련하시겠는지요.
또 하나 예를 들겠습니다. 어느 모태신앙 자매님이십니다. 그런데, 이 자매님은 자신의 믿음이 확실하고 대단히 큰 것으로 생각합니다. 여기까지는 좋습니다.
그런데, 자기보다 나이 어린 사람이 무언가 권면이라도 하나 할라치면 엄청난 짜증을 내비칩니다. 어린 것이, 주제에, 감히 모태신앙이자 정통교단에서 말씀을 배운 자기에게 무엇을 감히 한마디 할라 치려는가 듣지를 않습니다.
어느 형제님은 식당에서 종업원에게 손님대우를 제대로 받지 못하면 화를 내기도 합니다. 자존심이라는 악한 속성을 살펴보지못하고 종업원의 태도가 부당하다라는 것으로 자기를 발견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어떤 자매님들은 자신들이 옷을 고급스럽게 입지 않으면 종업원이 자기를 무시한다고 빕스나 아웃백인가요, 그런데 갈때는 무진장 차려입고 가시기도 합니다.
교회안에서도 보시면, 자기가 이룬 업적이 아님에도 그래서 남을 드러내어주고 칭찬해주어야 함에도 그런 것을 쏙 감추고 자기를 드러내고 싶어하고 남이 칭찬받으면 얼굴이 붉어지는 성도들도 꽤 많으시구여.
정리합니다. 자존심이라는 이 악한 마음은 자신으로 하여금 믿음성장에 발목을 잡으며 영적 성장에도 걸림이 되고 기도응답에도 방해가 된다라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자존심을 갖고서리 악하다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그것이 죄라고 생각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주안에서는 악입니다.
우리는 악한 자존심을 감추고 살지 않나 성령님과 함께 살펴보셔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께 드러내어 치리받아야 합니다.
믿음만 강조할 것이 아닙니다. 주님으로부터 응답받을만한 믿음, 칭찬받을만한 믿음을 가지기 위해서는 악쓰고 떼쓰고 내 편에서 작정하고 한다하여서 가져지는 것이 아니라, 자존심을 버리는 마음을 할례해 갈수록 믿음이 커지고 이루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