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4월은 어느때보다 우울하다. 이라크 전쟁 소식이 그랬고 장국영의 죽음이 그랬고 그리고 4월 14일 오후 3시쯤 씨네21에서 접하게된 뜻밖의 비보가 그랬다. 바로 우리나라 최초로 칸느 영화제 단편영화 경쟁부문에 진출했던 '스케이트'를 만든 조은령 누나의 사망 소식이었다.
내가 살아오면서 주변의 사람들의 죽음을 접한 것은 몇 번 되지 않는다. 상문고 비리와 연루되어 자살(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한 중학교 친구가 있었고 2000년에 돌아가신 외할아버지와 1990년대에 돌아가신 친할머니, 친할아버지가 있었다. 외할아버지는 내가 훈련소에 있을 때 돌아가셨기 때문에 임종을 보지 못했다. 지금까지 내가 접한 죽음은 나를 크게 낙담시키지는 않았다. 할아버지, 할머니 모두 나이가 들어서 돌아가신 것이었고 중학교 친구도 소식을 늦게 들어서 충격이 덜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이번엔 정말 다르다. 나에게 은령 누나의 사망 소식은 그 어느때보다도 충격적이었다.
나는 우연히 씨네21에 접속했다가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럴수가... 어떻게 이런 일이... " 나는 순간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나는 그 사실을 인정할 수 없었다. 마치 누나의 죽음이 현실이 아닌 영화 속의 한 장면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그것은 현실이었다. 자택에서 뇌진탕으로 사망했다는 사실이 나를 더 슬프게 했다. 병에 걸려서 죽은 것도 아니고 뇌진탕이라니! 나는 사실이 정말 믿기지 않았던지 인터넷 국어사전에서 '뇌진탕'의 뜻을 찾아보기까지 했다. 누나는 겨우 31세였다! 그리고 누나는 결혼한지 1년도 되지 않은 신혼이었다. 그런 누나에게 어떻게 이런 일이... 발인 시간이 이미 지난 상태였다. 병원에 전화해도 계속 통화중이었고 누나 남편('꽃섬'의 김명준 촬영 감독)도 핸드폰을 받지 않으셨다. 아쉽게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인터넷을 뒤져보니까 누나의 사망 소식이 신문 기사화되어 있었다. 나는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다. 그때 할 수 있었던 것은 그것밖에 없었다.
나는 이런 슬픈 소식을 듣고도 '질투는 나의 힘' 시사회에 갔다. 그리고 재미있게 영화를 보았다. 아니, 꼭 그런 것은 아니었다. 영화에서 나왔던 장례식 장면에서 은령 누나가 떠올랐다. 가끔 누나 생각에 집중이 잘 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영화를 보고온 나는 나 자신을 이해할 수 없다. 어떻게 영화를 보러 갈 수 있단 말인가. 그리고 돌아와서는 다시 누나를 기리는 글을 쓰고...
작년에 영상미디어센터에서 강좌를 듣고 같이 버스를 타고 대화를 나누다가 강남역에서 내려 씨티 문고 근처에서 헤어진 게 누나와의 마지막 순간이었다니... 그때 누나는 결혼식을 며칠 앞둔 상태였다. 나에게 시간이 되면 결혼식에 오라고 하셨다. 그런데 나는 누나의 결혼식에 참석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 이후로 누나가 사망할 때까지 전화 한 통, 메일 한 번 주고 받지 않았다. 나는 지금 그게 너무 후회가 된다. 최근에 누나에게 전화를 걸어볼 생각을 했었는데 그때 걸어볼 걸 그랬다. 왜 누나한테 연락할 생각을 못했던 걸까. 아마도 누나가 이렇게 세상을 떠날 것이라고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내 예상은 빗나갔고 이제 돌이킬 수 없다. 이제 더 이상 누나의 따뜻한 목소리를 들을 수 없다.
나에게 은령 누나는 소중한 존재였지만 사실 누나와 만난 것은 몇 번 되지 않는다. 메일은 꽤 여러번 주고 받았지만 전화 통화도 거의 해 본 적이 없다. 누나와의 만남은 영화 잡지로부터 시작되었다. 나는 몇 년 전, 여느때와 같이 영화 잡지를 보다가 '스케이트'와 관련된 기사를 읽고 '조은령'이라는 이름을 처음 알게 되었다. 내가 누나에게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기사에 실린 누나의 영화에 대한 태도때문이었다. 그 글을 읽으면서 누나의 영혼이 참 맑다는 느낌을 가지게 되었다. 한국에서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중에 이런 사람이 있었나 싶을 정도였다. 그리고 얼마후 나는 동숭 시네마텍에서 누나가 만든 '스케이트'를 보게 되었다. '스케이트'라는 단편영화도 누나의 영혼처럼 맑았다. 한 폭의 아름다운 풍경화였다. 왕가위 감독이 자신은 절대 만들 수 없는 영화라고 호평한 적도 있었던 작품이다.
누나에게 계속 관심을 가지고 있는 가운데 서점에서 우연히 '단편영화를 보러갔다'라는 책을 보게 되었다. 거기에는 누나의 홈페이지 주소(http://my.netian.com/~echo)가 나와 있었고 나는 그 홈페이지를 방문했다. 홈페이지를 보니까 누나는 차기작으로 '생'이라는 작품을 준비중이셨고 후원회원을 모집하고 계셨다. 나는 기꺼이 누나의 후원회원이 되기로 마음먹고 누나에게 돈을 보내드렸다. 나는 한국에 누나와 같은 감독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누나를 조금이나마 도와드리고 싶었다. 얼마 후 누나는 약속대로 완성된 '생'의 비디오 테이프를 보내 주셨다. 거기에는 '스케이트'도 함께 들어 있었다.
그후로 나는 누나와 메일을 주고 받으며 서로 안부를 묻곤했다. 나는 누나와 친하게 지내고 싶었지만 그렇게 하지는 못했다. 누나에게 부담을 드리고 싶지 않아서 조심스러웠다. 그런 가운데 누나를 만날 기회가 찾아왔다. 전주영화제에서였다. 누나는 '생'을 들고 전주에 오셨다. 누나가 묵는 호텔에서 드디어 목소리로만 듣던 누나의 얼굴을 보게 되었다. 누나는 '생'이 독일에서 2등상을 받았다고 말씀하셨다. 나는 누나의 말에 기분이 좋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쉽게도 누나와의 만남의 시간은 짧았고 역시 좀 서먹해서 많은 대화를 나누지는 못했다. 어떻게 하다보니 같이 찍으려 했었던 사진도 못찍었다. 기회를 다음으로 미루었다. 그 이후였는지 그 이전이였는지 잘 모르겠지만 나는 누나와 우연히 길가에서 마주친 적이 있었다. 나는 누나와 같은 사랑의 교회에 다니고 있었고 예배를 마치고 나오는 도중에 누나와 마주친 것이었다. 우리는 가볍게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다. 누나와 다니는 교회도 같았던 나는 마음만 먹으면 누나와 친해질 수 있는 기회가 얼마든지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렇지 못했다. 그때 여러가지 개인적인 문제로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그냥 누나와 아는 정도에 만족해야 했다. 부산영화제때 부산 P.P.P에 선정되어 부산을 찾았던 누나를 잠깐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누나와의 관계의 진전이 있어서 '감독님'에서 '누나'라고 부르기 시작한 지 얼마되지 않은 때였다. 그런데 막판에 일이 생겨서 결국 누나와 만나지 못하고 전화 통화로 만족해야 했다. 누나는 P.P.P에서 상을 받았다. 그 이후로 자주는 아니지만 누나와 메일을 서로 주고 받았다.
작년에 나는 영상미디어센터에서 '디지털 사운드 기초'라는 수업을 듣기 위해 수강 신청을 했다. 수강 신청 명단을 보니까 '조은령'이라는 이름이 눈에 띄었다. 나는 누나일까, 아닐까 궁금했다. 그것은 그렇게 결국 누나와의 마지막 만남(횟수로 3번째)이었지만 우연히 이뤄진 것이었다. 강의실에 들어가니까 낯익은 누나의 얼굴이 보였다. 나는 누나와 커피를 마시면서 대화를 나눴다. 전보다 자연스러운 느낌이었다. 나는 거기서 누나에 대한 새로운 소식을 듣게 되었다. 바로 누나의 결혼식 소식이었다. 상대는 누나가 영화 작업을 하다가 만난 '꽃섬'의 김명준 촬영 감독님이셨다. 누나는 P.P.P로 진행중이던 조총련과 관련된 멜로 영화를 포기하시고 대신 조총련과 관련된 다큐멘터리를 준비하고 계셨는데 그 과정에서 신랑되실 분을 만나고 결혼하게 되신 것이었다. '디지털 사운드 기초' 수업도 그 다큐멘터리 제작과 관련해서 들으러 오신 거였다.
수업이 끝나고 버스를 타면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누나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기회가 딱 한번 있었다. 누나는 몇 일 앞으로 다가온 결혼식 준비로 바쁘셨기 때문에 나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시간이 별로 없었다. 아쉽지만 나는 그 한번으로 만족해야 했다. 그게 마지막이 될 줄은 전혀 알지 못한 채 말이다. 난생 처음 버스 안에서 누나와 같이 앉아서 누나를 알게된 이래로 가장 오랫동안 대화를 나눴다. 우리는 영화 얘기를 하고 있었다. 그때 누나가 했던 말이 기억난다. 누나는 요즘에 신랑되실 분과 맨 인 블랙 2, YMCA 야구단 등 개봉 영화를 많이 보셨다고 하셨고 장예모의 최근작들이 마음에 든다고 하셨다. 장예모의 '집으로 가는 길'은 기독교적으로도 와닿는 영화라고 말씀하셨다. 내가 알고 있었던 누나는 빔 벤더스와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크쥐시토프 키에슬로브스키의 영화들을 좋아하셨다. '단편영화를 보러갔다'에서 빌 어거스트의 '최선의 의도'의 마지막 장면에 대해서 말씀하셨던 것도 기억이 난다. 6월에는 '빔 벤더스' 영화제가 열릴 예정이다. 그때 다시 누나가 생각날 것 같다. 누나가 살아 계셨다면 같이 벤더스의 영화를 볼 수 있었을텐데...
강남역에서 헤어졌던 누나와의 마지막 순간을 다시 떠올려본다. 누나는 결혼식에 오라고 하시면서 화사하게 웃고 계셨다. 나는 그때 누나의 웃는 모습을 결코 잊고 싶지 않다. 누나는 살아 계셨다면 좋은 영화들을 많이 만드셨을 것이다. 아마도 키아로스타미나 타르코프스키의 영화들처럼 작품 속에서 감독의 맑은 영혼이 숨쉬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는 영화들이었을 것 같다. 누나는 장편 영화를 만들어서 관객들과 만나고 싶어하셨다. 그래서 누나의 죽음이 더 슬프고 안타깝다.
나는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다. 누나가 살아 계셨다면 더 좋은 일들을 하셨을텐데 하나님은 누나를 일찌감치 데리고 가 버리셨다. 인간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은 다르다는 성경 구절이 떠오른다. 나는 지금 이해할 수 없지만 누나의 죽음에는 하나님의 크신 뜻이 있었다고 믿을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나에게 있어서 누나의 죽음은 인간의 운명을 좌지우지하는 절대적 존재에 대해 다시 한번 깊이 느끼게 한 계기가 되었다.
누구에게나 자신에게 힘이 되고 기쁨이 되는 소중한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짧은 만남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있어서 조은령 누나는 그런 사람들중의 한 명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내가 능력이 된다면 누나와 관련된 다큐멘터리나 단편영화라도 만들고 싶다. 누나의 죽음을 기리기 위해 조그만 일이라도 하고 싶다. 내가 가지고 있는 테이프로 추모 상영회라도 열고 싶다.
이제 누나는 가고 누나의 영화만 남았다. 누나의 영화를 통해서라도 누나와의 만남을 기대해보리라.
영화 '스케이트'의 한 장면에서
하이얀 눈길을 사각사각 밟으며
화사한 미소와 함께
나에게 다가오시기를...
(은령 누나! 누나와 더 가까와질 수 없었던 게 너무 아쉬워요. 왜 그날 헤어진 뒤 연락 한번 할 수 없었는지... 누나는 모르셨을지 모르지만 저에게 누나는 참 좋은 분이셨어요. 누나가 없는 세상이 너무 슬퍼요. 하지만 현실을 인정하고 살아가야겠지요. 이제 편히 쉬세요. 영원히...)
P.S 다음의 웹주소는 누나가 생전에 인터뷰한 내용이 실려 있어요.
기독교인이면서 인터뷰에 관심이 있으신 분들은 한번 방문해보세요.
첫댓글안녕하세요. 씨네필님^^ 저 기억하실런지? 작년에 장백지 왔을 때 강남구청에서 모임있을 때 마중나갔었던 남잔데~ 저랑 아마도 동갑이셨던 걸로 기억해요. 전에 씨네필님이 올리신 홍상수 감독과의 만남 글도 그렇고 언제나 님의 글을 읽으면 참 생각이 깊고 독특하신 분 같아요.
첫댓글 안녕하세요. 씨네필님^^ 저 기억하실런지? 작년에 장백지 왔을 때 강남구청에서 모임있을 때 마중나갔었던 남잔데~ 저랑 아마도 동갑이셨던 걸로 기억해요. 전에 씨네필님이 올리신 홍상수 감독과의 만남 글도 그렇고 언제나 님의 글을 읽으면 참 생각이 깊고 독특하신 분 같아요.
글을 읽으니 앞길이 기대되는 한 인재가 안타깝게 된듯 하네요. 힘내시구요^^ 앞으로도 자주 들러주세요. 글도 많이 올려주시구요^^ 전 그 누나라는 분의 홈피를 한번 방문해봐야겠네요!
안타깝네요 ...
너무 안타깝습니다...처음 씨네21에서 조은령 감독님의 소식을 들었을땐 그냥 무덤덤했었는데 이렇게 가까운 지인이 안타까운 심정으로 올려주신 글을 읽으니 씨네필님 만큼은 아니지만 안타까운 심정 금할 길이 없네요...
부디 하늘나라에서 행복하시길...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고인은 가셨어도 남긴 작품은 길이 빛 나겠지요. 삼가 고인 명복을 빌어 마지 않습니다.
에휴.. 정말 안타깝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