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길 남산에 오르다
잊으려 해도 잊을 수 없는 게 있다. 만감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외면하려 해도 외면할 수 없는 게 있다. 지난 일이 현재로 되살아나 희비의 감정을 자아내고 채찍질하기 때문이다. 잊을 수 없는 것이나 외면할 수 없는 게 사람일 수도 있겠지만 어떤 현상이거나 사물일 수도 있다. 나에겐 남산이 그런 것 중 하나다.
아침을 열고 일어나 푸른 하늘을 바라보는 이도 있을 테고 저 너머 뽀얀 안갯속을 헤집으며 몽환에 젖어보는 이도 있을 테다. 허나 나는 책상머리에서 고개 들고 남산을 바라보게 된다. 그러면 남산은 예외 없이 친근감으로 다가오기 마련이다. 거기엔 내 성장기의 고통이 조용히 가라앉아있고 조그만 희열들이 둥둥 떠다니기 때문이다.
지난날의 궂은일도 있겠으나 이미 빛바랜 것이거나 세월에 씻길 대로 씻긴 것일 테지만 다 내 것이니 마다 할 것도 아니요 아쉬움이 너울 거리기도 한다. 그건 또 하루를 열어주는 오늘로 반가움이 앞서고 있으니 존재의 소중함으로 덮을 뿐이다. 맑은 하늘이라도 열려 그 윤곽이 또렷해지는 날엔 내일로 퍼져나가는 함성조차 생생히 듣게 된다.
그리스 아테네의 한 복판엔 돌산 아크로폴리스가 있다. 그들은 일찍이 그곳 중앙에 수호신 아테나를 모시는 파르테논 신전을 세워놓고 경배하기 시작했다(BC 5세기경 신축). 산이라고 해봐야 해발 150미터에 불과하고, 신전이라고 해봐야 옆으로 8개, 아래위로 17개의 열주(列柱, 콜로네이드)를 세워 지붕(엔타블레이처)을 떠받치게 한 것이다. 그들은 아침저녁으로 그 아크로폴리스와 신전을 바라보며 신들을, 철학을, 문학을 생각하고 이야기했을 것이다. 여기서 배태된 헬레니즘이 헤브라이즘과 더불어 서양사상의 골간이 되었거니와 그 상징성을 생각해 유네스코에서도 파르테논 신전을 인류의 문화유산 제1호로 지정해 놓고 있으니, 이런 사실을 떠올리노라면 남산에 대한 유감(有感)이 없을 수 없다.
한양의 너른 들판은 그만 못하던가. 너른 들판을 가로지르는 유장한 아리수는 그만 못하던가. 이를 내려다보는 300 미터에 가까운 우뚝한 남산은 또 그만 못하던가. 파르테논 신전은 이미 낡고 노회 하여 수리 중이요, 남산의 저 첨탑은 새로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우뚝하기만 하다. 그 의미를 살려나가기만 하면 남산이 하늘 아래 배꼽이라 불리는 날도 오리라.
남산의 기상을 살려야겠다. 딸깍발이의 그 옛된 기상을 넘어서서, 수염을 아래로만 쓰다듬을 게 아니라 두 눈과 더듬이를 위로 위로 추켜올려야겠다. 남산이여! 창 너머 바라보는 이 있어 행복하거니, 오늘따라 날씨마저 쾌청하여 네 모습 참으로 선연(鮮然)하구나.
어제는 그 남산에 올랐다. 충무로 역에서 셔틀버스 타고 남산 정류장까지 간 다음에 남산 성곽을 둘러보며 지난 선조들의 탄탄한 방어의식을 떠올려봤다. 발길을 돌려 팔각정, 봉수대, 안중근 의사 동상,김구 선생 시비를 둘러본 다음에 낙엽을 밟으며 내려왔다.
우리나라는 아이티(IT) 강국으로 우뚝 선 지 오래다. 그것은 한 마디로 통신 수단의 최첨단화를 뜻하지만 그 시원은 남산의 봉수대가 아니던가. 그 불꽃이 꺼지지 않도록 다독이는 것도 있으니 그건 또 김구 선생의 시비(一日不讀書 口中生荊棘)가 아니던가..
목멱산이여! 남산이여! 479 미터의 첨탑이여! 봉수대여! 지구촌의 배꼽이 될지어라.
2024. 11. 9. 夕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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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저도 남산에 가본지 오래되어 문득 그곳에 꼭
가보아야 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너무 가까이 있어 오히려 잊혀지기도 하는
사람처럼, 그 남산에 말입니다.
사부작사부작 걷기는 제일이지요.
그레서,
우리 애국가 2절과 4절에는,
남산 위에 저 소나무 철갑을 두른 듯
바람 서리 불변함은 우리 기상일세.
이 기상과 이 맘으로 충성을 다하여
괴로우나 즐거우나 나라 사랑하세.
그러고 보니,
저 봉수대는 지금의 우리가
IT 강국의 국민이 될 것임을 예견하고
저 자리를 지키고 있었겠지요.
지구촌의 배꼽이 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정치만 혼란스럽지 않으면 정말 우뚝 설 때가 올겁니다.
가까운 거리에 이렇게 멋진 남산이 있어서 서울은 더욱 아름다운도시입니다.
맞아요, 한양 기준으로 보면 경복궁에 대한 안산으로, 남쪽에 치우쳐있지만 지금은 강남권 개발로 수도의 중심이 되었지요.
요즘 세계의 기운이 한국을 중심으로 퍼져나가는 경우가 참 많은 것 같습니다. 당연히 남산도 세계의 중심이 되겠지요.
유사 이래 가장 융성한 때인데,
말씀처럼 정치가 뒷발치에라도 따라오면 좋겠습니다.
그동안엔 미국의 양식을 믿었는데
이젠 어떻게 될지 모르겠네요.
우리나라는 세계의 양식이 되긴 어려워요.
정치현상을 보면 그런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기술에서는 선두주자가 될 수 있는데
그것도...
가끔은 남산이 놀이터였던 제 기억에 남산타워는 벌써 50여년이 훌쩍 넘은 것 같습니다.^^
어린 시절의 추억이 많은 남산을 요즘엔 가끔씩 친구들과 걷기도 합니다.
그랬군요.
걷기에도 만만한 산이죠.
석촌님 사진솜씨가 수준급입니다. 책으로 내셔도 될듯합니다. 저도 대학시절 남산도서관아래에 있는 독일문화원에 있는 각대학 연극써클에 가입하여 청춘을 즐겁게 보냈습니다. 그멤버들을 지금도 매달 이렇게 저렇게 몇십명씩 만나니 나에게는 큰자신이 되었답니다.
2018년 10월에는 독일문화원에서 3천만원을 들여 50주년행사도 했습니다. 우리써클에서 300명정도가 거쳐 갔는데 그중 7쌍이 결혼했습니다. 남산길하면 참 훤하게 다녔습니다.
그 문화원과 붙어 있는 저의 초등학교,
번데기 사먹는 윤복희도 보고...ㅎ
아련한 시절의 기억이 떠오릅니다.^^
맞아요, 거기 독일문화원이 있죠.
써클 활동을 왕성하게 했나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