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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보 고속도로 시작할 때 공병 윤영호 대령
경부고속도로 건설 뒷이야기① 三無 상태, 치열한 전투
윤영호 / 신영기술개발(주) 회장
삼무(三無) 상태에서 이루어낸 기적적인 공사
1968년 2월 1일 기공하여 1970년 7월 7일 준공한 경부고속도로는
지난 30년 동안 대한민국 경제 발전의 초석이 되었다.
경부고속도로는 수도권과 한국의 대표적 수출․ 입항인 인천과 부산을 직접 연결함과
동시에 동서남북 연결의 척추 역할을 함으로써
1970년대와 1980년대 한국 초고속 경제성장의 원동력이 되었던 것이다.
산업 뿐만 아니라 국민 생활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쳐 전국이 일일 생활권이 됨으로써
여유있게 시간을 활용할 수 있게 되었다.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주도한 박정희 대통령이 고인이 된 지 어언 20년,
고속도로가 건설되기까지 그 이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이제 거의 잊혀져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가고 있다. 그나마 공사 현장에서 국가의 손과 발이 되어 밤을 지새우며 국토를 일구던 역군들도 세월이 흘러 이제는 기억이 가물거리게 되었다.
박 대통령의 뜻을 받들어 현장에서 노선 선정 및 공사 감독을 맡았던 나머지도
이제는 고희의 나이, 언제 세상을 뜰지 모른다고 생각하니 나와 관련되었던 당시의 일과 그 이면사만이라도 밝히는 것이 박대통령과 역사에 대한 도리라고 생각하여
이 글을 쓰게 되었다.
경부고속도로 건설은 자본, 기술, 장비 어느 것 하나 제대로 갖추지 못한 삼무(三無)의
상태에서 이루어낸 기적적인 공사다.
세계에서 가장 빠른 공기(工期)에 가장 저렴한 공사비로 건설된 고속도로라는 점 이외에 색다른 특징을 또하나 지니고 있다.
그것은 바로 약 430억원이라는 엄청난 공사비가 든,
당시로서는 거국적인 공사였음에도 종합적인 국토개발의 일환으로 계획되거나 짜임새 있는 정부 조직이 구상한 것이 아니라, 구상부터 실제 공사까지 거의 모든 과정이 박정희 대통령의 지휘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경부고속도로 건설은 치열한 전투
실제 박 대통령의 고속도로에 대한 열망은 대단하였다.
앞으로 경부고속도로 건설에 대한 극적인 장면을 여럿 소개하겠지만,
노선 선정 및 실제 공사 과정에 참여하였던
필자가 느끼기에 경부고속도로 건설은 그 자체가 하나의 치열한 전투였다.
그리고 박 대통령은 그 전투의 군 지휘관이었다.
그것도 가장 선봉에서 역동적으로 이끈 진두 지휘관이었다.
필자가 군인이라서 이런 느낌을 받았던 것만은 아니었다.
아마 당시 건설 현장에 있었거나 공사에 관계되었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비슷하게 느꼈을 것이다.
아무튼 박 대통령은 당시 한국의 열악한 경제 사정 때문에
어느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던 고속도로 건설에 대한 원대한 꿈을
현실로 구체화 시키기 시작하였다.
박 대통령은 1967년 4월 제6대 대통령 선거 마지막 유세장인
장충단 공원에서 고속도로 건설의 꿈을 표면에 부상시켰다.
“서울에서 부산에 이르는 경부고속도로 계획, 또는 대전에서 목포에 이르는 호남고속도로, 이러한 것은 대략 금년 내로 계획이 완성되리라고 봅니다만 막대한 예산이 듭니다”하고
밝혔던 것이다.
그리고 대통령에 당선되자마자 바로 5뤌 서울~부산 고속도로 건설을 전격 발표하였고,
그해 11월 고속도로 건설유관기관에 고속도로 건설에 대해
상세한 기초 조사를 할 것을 지시하였다.
그때 박 대통령은 “아무리 늦어도 내년 초에는 착공에 들어설 것이다.
공사가 기존 국도를 이용하는 것이든 완전히 새로운 길을 닦는 것이든 다양하고
구체적인 안을 수립, 보고하라”고 지시하엿다.
그리고 한 달 뒤인 12월 15일 정식으로 국가기간 ‘고속도로 건설계획 조사단’을 발족시켜 자신의 고속도로 건설에 대한 열망을 현실화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박 대통령의 계획은 거센 반발에 부딪혔다.
서울~부산 국도들이 그때 겨우 포장을 끝낸 상황에서
느닷없이 튀어나온 고속도로 건설계획이란 실로 상상 외의 일이었던 것이다.
특히 야당과 언론에서 반대가 심했다.
반대의 주된 이유는 바로 국가 재정의 절대 부족이었다.
1960년대 우리나라의 국가 예산은 대략 15조원,
경부고속도로 건설비는 (결과적으로) 430억원이었다.
단순히 숫자만 비교해 보아도 국가 재정과 공사 규모 간의 불균형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야당과 언론은 이러한 경제 상황을 감안할 때 장거리 고속도로 건설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주장하였다.
박대통령도 이 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박 대통령은 처음에는 세계은행에 차관을 요청했다.
이에 세계은행에서는 조사단을 우리나라에 파견해 경부고속도로 건설계획에 관한 전반적인 상황을 조사하였다.
그들이 내린 결론은 “경부고속도로는 정치적, 군사적으로는 중요할지 모르나
경제적으로는 그 중요성을 인정하기 어렵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박 대통령은 가난한 나라일수록 반드시 국토의 대동맥을 이어야
경제 성장의 뜨거운 피가 흐를 수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래서 계획을 그대로 추진해 나갔다.
건설 소요 자금은 대일(對日) 청구권 자금을 포함해 세수(稅收), 국채, 도로세,
석유류 관세를 주축으로 연차적으로 달성하는 방식으로 자체 조달하기로 결정하고,
5개 부서의 장관들에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가장 경제적인 예산 견적안을 작성하라고 지시하였다(여기에 민간 기업인 현대건설도 참여하였다.)
예산 부족이라는 현실적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서였다.
야당과 여론에서는 국가 재정상의 이유 이외에 삼선개헌과 연계해
박 대통령의 정치적 목적이 숨어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과 비판도 제기되었다.
그러나 이후 여러 사람이 밝혔듯 경부고속도로는 오로지 경제적인 측면에서만 구상하고 계획된 것이었다.
즉, 박 대통령은 산업 기반 시설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껴 경부고속도로를 경제적으로 건설하고자 구상하였던 것이다.
박 대통령을 옆에서 지켜본 내 생각에도 당시 고속도로 건설을 둘러싸고는 정치적 목적이 전혀 없었다. 오직 경제의 하부구조를 튼튼히 함으로써 경제 부흥의 밑거름으로 삼고자 하는 신념뿐이었다.
‘청와대 파견단’의 일원이 되다
1967년 11월 어느날 육군 공병감 박병순 장군이 나를 호출하였다.
박 장군은 “오늘 청와대에 가서 대통령께 서울~부산 4차로 고속도로 건설에 소요되는 예산의 견적 내용을 보고드렸더니, 대통령께서 ‘내가 오늘까지 5개 부서의 견적 예산안을 보고받은 결과 각 부처마다 소요 예산의 차이가 많이 나서 검토를 해야겠소.
돌아가거든 공병 대령과 중령 각 1명씩을 나에게 보내주시오’하고 말씀하셨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육군본부로 돌아와 여러 과장들과 상의한 결과 윤 대령이 적임자로 판단되어
선정하였으니 내일 아침 청와대 김학렬 경제수석 비서관을 방문하라고 지시했다.
그래서 일차로 추천된 조달감실 소속의 나와 공병감실 소속의 박찬표 중령은 부대가 아닌 청와대로 출근하게 되었다. 이후 박 대통령은 별도로 건설부 기좌 1명을 파견하게 하여 박종생 기좌가 우리와 합류하였고, 그 후 다시 공병감실의 방동식 소령이 추가되어 우리 반원은 총 4명으로 늘어났다.
세칭 ‘청와대 파견단’이라고 불린 우리는 아무런 명칭도 편제도 없이 같은 달인 11월 24일부터 청와대 신관 2층의 경제 수석 비서실 옆방 307 A호실에서 작업을 시작하였다.
당시 박 대통령은 5개 부서의 견적서를 나에게 건네면서
“이 견적서들을 비교․ 분석․ 검토하여 최소한의 예산으로 조정하라”고 말했다.
각 견적서의 내용을 검토해 보니 관계 부처마다 견적 상의 시각 차가 매우 컸다.
소요 예산이 기관별로 최저 180억원에서 650억원까지 차이가 났다.
지금의 기억으로는
재무부가 330억원, 서울특별시가 180억원, 현대건설이 280억원 등이었다.
건설부 역시 초기 견적과 후기 견적의 비용 차가 컸다.
처음에는 650억원으로 잡았다가 다시 450억원으로 조정하였다.
이와 같은 혼란의 이유는 각 부서가 모델과 기준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근본적인 이유는 고속도로를 건설한 경험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나는 박 대통령의 지시로 이와 같이 많은 차이를 드러내고 있는 견적서들을 잘 조정하여 가장 경제적으로, 즉 가장 싸게 고속도로를 건설하는 방법을 강구했다.
나는 각 기관의 예산 중 항목별 최소 예산을 분석하고 종합하여 대략 360억원이면 건설이 가능할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대통령께 보고했다.
보고서를 접한 박 대통령은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더니 조용한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공사가 어려운 지점에 공사비가 많이 소요되는군. 이렇게 하면 어떨까?
공사 난코스 지점에 육군 공병을 투입하는 거야.
그러면 공사비를 상당히 줄일 수 있잖아?
미국측하고 협의를 해야 하지만 만약 고속도로 완공 이후에
미군에게 고속도로 통행료를 면제해 준다는 조건을 제시한다면 가능할 거야.”
박 대통령은 바로 관계관에게 미군측과 협의해 보라고 지시하였다.
박 대통령의 복안은 그대로 실시되어 덕분에 많은 예산을 절감할 수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의 열정
내 예산 견적서를 보고 받은 후 수차례 검토한 박 대통령은
추후 약 330억원이면 건설 추진이 가능할 거라고 말하면서
1차 건설 구간인 서울~수원의 1/12,500 및 1/50,000 축적 지도를 구해오라고 지시했다.
나는 무조건 “알겠습니다”하고 대답하고 육군본부에 가서 구해왔다.
그랬더니 박 대통령은 그 지도에 육군대학에서 고지에 색칠하는 식으로
다시 작성하여 가져오라고 하였다.
그래서 색칠을 하여 가져갔더니 “공사비를 최소화하려면 될 수 있는 대로
노선상에서 고지는 피해야 돼.
동시에 최단 거리를 잡아야 하지”하면서 1/10,000,000 지도에서 1/50,000 지도에 이르기까지 단계적으로 도상에 서울~수원간 예상도로 선을 넣어보라고 하였다.
잠시 뒤 무척 오래된 1/1,000,000 지도를 꺼내면서 자신이 직접 넣어본 선을 참고하라고 덧붙였다.
지도를 받아보니 서울에서 부산까지의 고속도로 예정선이 그려져 있었는데,
손때가 많이 묻어 있어 얼마나 정성이 들어갔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내가 그 자리에서 테이블 위에다 트래싱을 하려고 하자,
박 대통령은 창문에 대고 그려보라고 하였다. 지시대로 하였더니 확실히 테이블 위에서
그린 것보다 햇빛이 투과하여 훨씬 선명하게 잘 그려졌다.
그 후 어느 월요일 이른 아침 출근하자마자 대통령이 호출하였다.
당장 대통령 집무실로 달려갔더니 현재 몇 명이 작업하고 있느냐고 물었다.
그래서 육군 중령 1명과 건설부 기좌 1명이 있다고 대답하였더니 월동 김장용으로 쓰라며 금일봉을 주었다. 그리고 이른 아침부터 수고한다며 우리 일행을 격려해 주었다.
이어 박 대통령은 벽에 걸려 있는 1/12,500 지도를 가리키면서 지시했다.
“어제 일요일에 내가 직접 도로 노선을 알아보려고 길을 나섰더니
처음에는 주민들이 나를 몰라보다가 시간이 지나자 알아보고 모여드는 바람에 더 이상 둘러보지 못하고 돌아섰어. 그러니 지금부터 자네는 아무도 만나지 말고
몰래 우리가 상의한 서울~수원간 노선을 답사하고
그 결과를 오늘 중으로 나에게 보고하게”
서울~수원간 노선 확정
집무실에서 나온 나는 재빨리 지프를 타고
서울 한남동에서 내려 노선을 답사하기 시작했다.
당시 한남동에는 다리가 없어서 지프를 나룻배에 싣고
강을 건너 말죽거리 방향으로 향하였다. 촌각이 급했다.
지금의 강남 주민들은 상상도 못할 일이지만 불과 30여 년 전만 해도
강남 지역은 허허벌판의 모래사장이었다.
도로도 단지 우마차가 다니는 소로만 있을 뿐이었다.
그런 길에 눈발까지 날려서 더욱 고생을 했다.
나는 그 황량한 길을 따라 여러 장애물을 내 망막과 머리에 새기면서 지도상에도 일일이 표시하였다. 동시에 공사 여건에 관계되는 상황을 꼼꼼히 살피며
착공 뒤의 문제점들을 미리 상상하여 메모했다.
시간이 지나 어느덧 지프는 원천저수지에 도착하였다.
그곳에서 사방을 살피고 도상으로 검토해 보니 서쪽인 수원 시내 방향으로는
공사상 여러 가지 불리한 면이 있는 반면
남쪽 방향인 현재의 용인 신갈리 쪽은 여러모로 여건이 좋았다.
게다가 신갈리 방향은 서쪽으로 수원시와 인접해 있었다.
그래서 신갈리 방향을 대통령께 건의하기로 마음먹고
급히 그곳을 떠나 청와대로 향하였다.
저녁 7시경에 청와대에 도착하니 수위실에서 빨리 들어가라고 손짓을 했다.
대통령 집무실까지 달려가면서
‘대통령이 지금까지 퇴근도 하지 않은 채 보고를 기다리고 있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경부고속도로 건설에 대한 박 대통령의 열망과 투지에 새삼 감복하였다.
그래서 좀 더 일찍 돌아오지 못한 것이 송구스럽기까지 하였다.
나는 곧바로 그 날 답사하면서 순간순간 메모한 것과 종합적인 소견을 보고하였고,
박 대통령은 내가 답사한 지역의 사정을 꼬치꼬치 캐물었다.
지형과 지질, 그리고 골재 사정까지.
어느 정도 보고와 질문이 오간 후 박 대통령은 내게 수고했다고 치하했다.
그리고 “내가 지도상으로 구상한 바와 비슷하군”하며
그 자리에서 이후락 비서실장을 호출하여
다음날 바로 이 안건에 대하여 회의를 갖자고 하였다.
회의 구성 인원은 건설부 장관, 서울시장, 경기도 지사, 행정관리 비서관, 이후락 비서실장, 경제수석 김학렬 비서관 등이었으며 회의 시간은 9시였다.
다음날 아침 회의가 시작되자 박 대통령은 지도 앞으로 걸어나가
직접 서울~수원 고속도로 건설 예정 노선을 설명하면서
속히 토지 매입으로 들어가자고 하였다.
토지 매입을 신속히 하지 않고 시간을 끌게 되면 땅값이 상승하여 예산을 초과하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경기도 지사가 질문하였다.
“땅이 얼마나 소요될지도, 값이 얼마인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합니까?”
박 대통령은 토지 구입 방법에 대해서는 서울시와 경기도 경계선을 설명하면서
우선 지주에게 사용 동의를 받은 다음 토지를 매입하라고 지시하고
토지 평수 계산 방법 등 여러 가지를 설명하였다.
“이렇게 하면 경기도가 수용해야 할 땅이 얼마라는 것이 나오잖아. 경기도는 산이 75%,
전답이 25%이니까 이를 평균하면 되지 않겠어?”
대통령은 설명을 하면서 나에게 자신의 계산이 틀리는 곳이 있으면 즉시 말하라고 했다. 그러나 특별히 잘못 계산한 부분은 없었다고 기억된다.
박 대통령의 설명이 끝난 후 경기도 지사가 구체적인 토지 매입 가격과 매입 시일에 대해 질문을 했다. 그러자 박 대통령은 “내가 그런 질문할 줄 알았어. 이것을 보라”고 하면서,
그 자리에서 당시 2개 은행에서 조사한 지가조사표를 회의 참석자들에게 보여 주었다.
당시 그 지가표에는 토지의 평당 가격이 100원에서 200원으로 되어 있었다.
박 대통령은 다시 참석자들에게 “이 지가대로 땅을 못 사면 땅값이 올라서 공사비가 오르니까 반드시 이 값으로 땅을 사도록 하시오”하고 지시했다.
지가표를 확인한 참석자가 지금은 조사 당시보다 지가가 상승하였다고 말하자
박 대통령은 그러면 평당 300원으로 계산할테니 빨리 용지 매입과 부지 확보를 마무리하고 남은 예산은 진입 도로나 토지 구역정리 사업에 이용하라고 했다.
그때 다시 도지사가 그럼 기간이 문제인데 20일을 달라고 하자
대통령은 “2주일 안에 끝내도록 하시오”하고 기간을 못박았다.
참석자들은 토지 매입의 어려움을 누누이 말했다.
그러자 대통령은 도지사는 해당 군수에게, 군수는 면장에게,
면장은 이장에게 얘기하여 우선 주민들로부터 동의를 받아 놓으라고 지시하였다.
대통령이 이처럼 서둘렀던 이유는 땅값이 오르기 전에 터를 매입하기 위해서였다.
공사비 절감이 고속도로 건설의 가장 큰 요건이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대통령은 그 자리에서 건설부 장관에게 예산이 부족하고 개통이 시급하니
설계할 때 보조기층까지는 완전한 설계를 하고,
표층은 나중에 재보수하는 방안을 추진하라고 하였다.
이와 같은 사정 때문에 비록 1990년 말까지의 도로 보수 비용이 당시 공사비의 몇 배에 이르렀지만, 당시의 예산 문제를 고려한다면 그와 같은 박 대통령의 결정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월간 국토해양저널 2001년 3월호(통권 200호)에 실린 내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