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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시인 프로필 간략 소개
고은
1933. 전북 군산~ 시인.장남으로 9세까지 서당에서 한문을 익혔으며, 불가(佛家)에 들어가 기행을 남겼는데, 10여 년간 가짜 고은이 전국 여러 곳에서 나올 지경이었다. 1962년 환속해 폭음과 방랑을 계속하다가 서울 선학원(禪學院)·불교 총무원 간부, 전등사 주지, 해인사 주지대리 등을 지냈다.
1980년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에 연루되어 투옥, 1982년 8·15 특사로 풀려난 뒤,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공동의장, 민족문학작가회 의장 등을 지내기도 했다.
공초 오상순
공초(空超) 오상순(1894~1963)은 하루에 담배를 열 갑 이상 태운 애연가였다. 문인들도 농담 삼아 그를 ‘꽁초’라고 불렀다고 한다. 시 세계도 담배 연기처럼 허무를 근간으로 했다는 평을 듣는다.
1920년대 한국 신시운동의 선구가 된 ‘폐허’의 발간에 참여했으며 허무주의가 짙게 밴 작품을 발표했다. 1912년 일본으로 건너가 1918년 도시샤대학[同志社大學] 종교학과를 졸업하고 이듬해 귀국했다.
귀국한 뒤로 한동안 전도사였는데, 1921년 종교를 불교로 바꾸고 조선중앙불교학교· 교사로 근무했으며, 8·15해방 때까지 방랑생활을 했다. 담배를 하루에 20갑 넘게 피우던 습관은 한국문단에 널리 알려져 있다. 1945년 서울로 돌아와 역경원 등을 전전하다 조계사에서 지냈다.
구상
초기에는 공산치하의 비인간적인 현실을 극복하고 상승하려는 동경과 희구를 노래하다가 차츰 그리스도교 사상을 읊었다. 1941년 일본대학 종교과를 졸업했다. 1946년 원산문학가동맹에서 펴낸 동인시집 〈응향 凝香〉에 문단에 첫발을 내딛었다.
그러나 여기에 실린 작품들이 강홍운·서창훈 등의 시와 함께 회의적·공상적·퇴폐적이라는 이유로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으로부터 '반동작가'로 몰리자 이듬해 월남했다. '대리석에 정을 치듯 피땀을 흘려가며 온정신을 기울여 시를 써야 한다'는 그는 시창작을 통해 현실과 이상의 괴리를 극복하는 동시에 이것의 융합을 위한 노력을 부단히 경주했다.
김광섭
극예술연구회에 참가하여 서항석·함대훈·모윤숙·노천명 등과 사귀었다. 1941년 2월 창씨개명을 공공연히 반대하는 등 반일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는 이유로 3년 8개월 동안 옥살이했다. 해방 후는 민족주의 문학을 건설하기 위한 여러 단체를 조직하는 데 참여했다.
1945년 중앙문화협회를 창립했고, 1957년 자유문학사를 세워 〈자유문학〉을 창간했으며, 1958년 세계일보사 사장이 되었다. 1959년 예술원 회원이 되었고, 964년 〈자유문학〉이 운영난으로 무기정간되자 그 충격으로 고혈압 증세를 보였다. 이듬해 서울운동장에서 야구경기를 관람하던 중 졸도, 오랫동안 투병생활을 하다가 72세에 별세했다.
김구용
1922. 2. 5 경북 상주~ 2001. 12. 28 서울.
불교사상을 바탕으로 자의식의 세계를 추구한 시를 썼다. 본명은 영탁(永卓). 성균관대학교 국문학과를 마치고 1955년 〈현대문학〉 기자, 숙명여자대학교 강사, 성균관대학교 교수를 지냈다. 일찍이 불교에 귀의하여 해방직전까지 동학사 등에서 유불선(儒佛仙)의 경전과 동서양 고전을 두루 익혔다.
1936년〈회고〉를 시작으로 1949년 〈신천지〉에 시〈산중야〉·〈백탑송〉등을 발표하여 문단에 나왔다. 1940년에는 관념적이고 한자가 많은 난해한 시를 썼는데〈탈출 脫出〉(문예, 1953. 2)을 발표하면서 본격적으로 활동했다.
6·25전쟁으로 황폐해진 현실에서 불교사상을 바탕으로 자의식의 세계를 추구했다. 1957년 〈현대문학〉에 〈소인〉·〈심장없는 인형〉 등을 발표했으며 뒤이어 발표한〈불협화음의 꽃〉(현대문학, 1960. 1)·〈육곡〉(현대문학, 1969. 2) 등은 원고 100장이 넘는 장시이다. 그밖에도 〈현대문학〉·〈자유문학〉에 동양의 불교사상을 바탕으로 하고 초현실주의 기법을 실험한 시를 발표해 현대시의 범위를 넓혔다.
1955년 제1회 현대문학상을 받았다. 시집으로 〈시집 1〉(1969)·〈구곡〉(1978) 등이 있고, 역서로 〈채근담〉(1955)·〈옥루몽〉(1957)·〈열국지〉(1990) 등이 있다.
김규동
天
규천아 나다 형이다
김남조
1927. 9. 25 대구~. 시인·수필가.주로 연가풍(戀歌風)이면서도 신앙적 삶을 고백하는 시를 썼다.
사범대학 재학 때인 1950년 〈연합신문〉에 〈성숙〉·〈잔상 殘像〉을 발표하여 문단에 나왔다. 첫 시집 〈목숨〉(1953)에서는 인간성의 긍정과 생명의 연소(燃燒)를 바탕으로 한 정열을 읊었으며,
제2시집 〈나아드의 향유〉(1955)에서부터 종교적 사랑과 윤리를 읊었다. 그후 시집 〈나무와 바람〉(1958)·〈정념의 기(旗)〉(1960)·〈영혼과 빵〉(1973)·〈김남조시전집〉(1983)·〈너를 위하여〉(1985)·〈깨어나 주소서 주여〉(1988)·〈끝나는 고통 끝이 없는 사랑〉(1990) 등을 펴냈다.
김소월
민요조의 서정시를 창작한 우리나라의 시인(1902~1934). 본명은 정식(廷湜)이다. 김억(金億)의 영향으로 시를 쓰기 시작하여, 1920년 창조(創造)에 <낭인(浪人)의 봄>으로 문단에 나타났다. 1922년 개벽에 대표작 <진달래꽃>을 발표했고, 우리 민족의 한을 노래한 시집에 <진달래꽃> 이 있다.
'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 - 진달래
김수영
1921. 11. 27 서울 종로~ 1968. 6. 16 서울 수유동.
초기에는 모더니스트로서 현대문명과 도시생활을 비판했으나, 4·19혁명을 기점으로 현실비판의식과 저항정신을 바탕으로 참여시를 썼다. 서울 관철동에서 아버지 태욱(泰旭)과 어머니 안형순(安亨順) 사이의 8남매 가운데 장남으로 태어났다. 효제보통학교 6학년 때 뇌막염을 앓아 학교를 그만둔 뒤, 1936년 선린상고에 들어가 1941년 졸업했다.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상대[東京商大] 전문부에 입학, 미즈시나[水品春樹]에게 연극을 배웠다. 1943년 겨울 징집을 피해 귀국하여, 1944년 가족과 함께 만주 지린 성[吉林省]으로 이주했다. 해방 후 돌아와 연희전문학교 영문과 4학년에 편입했으나 곧 그만두었다.
6·25전쟁 당시 미처 피난하지 못해 인민군에 징집되었다가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석방되었다. 미8군 통역, 모교인 선린상고 영어교사와 평화신문사 문화부 차장 등을 맡으며 여러 직장을 돌아다녔다.
1956년부터는 집에서 닭을 기르며 시창작과 번역에만 전념했다. 그의 나이 47세 때인 1968년 6월 15일, 집 앞 거리에서 버스에 치여 그 다음날 숨졌다. 서울 도봉동에 있는 누이 김수명의 집 뒷동산에 잠들어 있다. 1주기를 맞아 문우와 친지들이 마지막 시〈풀〉을 새긴 시비를 세웠다.
김 영랑
귀국 뒤 당대 최고 무용수 최승희와 염문도 뿌렸다. 의식있는 청년이기도 했다. 3·1운동에 참여, 독립선언문을 구두 속에 숨겼다가 옥고도 치렀다.
그를 문단으로 이끈 건 친구 박용철 시인이었다. 영랑의 시에 매료된 박용철은 1930년 사재를 털어 ‘시문학’을 발간, 벗의 시 13편을 담았다. 두 달 뒤에 나온 2호에도 9편을 실었다. 바야흐로 한국 시문단은 ‘김영랑의 시대’였다. 문학 애호가들은 카프(조선사회주의예술가동맹)와 모더니즘에 휩쓸리지 않은 그의 순수문학에 열광했다.
광복을 앞두고선 ‘바다로 가자’ 등 저항시도 잇달아 내놨다. 광복 뒤엔 정치인으로 변신했다.12세에 첫 결혼, 1년 만에 사별, 최승희와의 염문, 22세에 재혼, 시문단 스타 부상, 국회의원 출마, 공보처 출판국장까지 그의 길지 않은 삶 47년은 피고 지기를 반복하는 모란 같았다. 6·25전쟁 중 서울 길거리에서 포탄에 맞아 생을 마감했다.
백승현
세배 값
김 일로
할아버지 앞에
세배 값은
호도알 하나
할머니 앞에
세배 값은
꽂감 한 개
아버지 앞에
세배 값은
알밤 하나
어머니 앞에
세배 값은
대추 한 개.
1982.2.1 아동문에 2월호 게제.
김종삼
1921. 3. 19 황해 은율~ 1984 서울. 6·25전쟁 뒤 모더니즘 시인으로 주목받았다. 6·25전쟁 때 월남하여 피난지 대구에서 시 〈원정 園丁〉을 발표하고 이어 1951년 〈돌각담〉을 발표하여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초기에는 피난민의 뿌리뽑힌 삶과 허무를 노래했는데 비약적 상상력과 뜻밖의 어구를 연결하여 난해한 이미지를 만들고 시어의 음향효과를 높이려 했다.
세계와의 불화 또는 인간 사이의 관계를 잃어버린 데서 나타난 정신적 방황을 노래했다. 이 방황은 세계와 조화를 이루기 위한 기나긴 역정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그를 보헤미안적 시인이라고도 불렀다. 또 그의 시를 '여백의 시', '내용 없는 아름다움을 추구한 시'라고 말하기도 한다.
행의 과감한 생략과 비약으로 불완전한 문장과 불안한 문체를 통해 '여백'이 가지는 미적인 효과를 높이려 했다. 그리하여 전통적으로 익숙한 정서를 지워버리거나 독특한 질서로 바꾸어 존재하지 않는 세상을 그리려 했다. 즉 시의 기법을 통해 비어 있는 세계를 깨닫게 하고 독특한 미를 창조하려 한 것이다. 그뒤에도 이 생각은 이어져 소박한 세계에 대한 믿음으로 발전했다. 시집으로 〈십이음계〉(1969)·〈시인학교〉(1977)·〈누군가 나에게 물었다〉(1982) 등이 있다.
김지하
1970년대 반체제문인들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로, 본명은 영일(英一),
원주중학교와 중동고등학교를 거쳐 1966년 서울대학교 미학과를 졸업했다.
대학 다닐 때 4·19혁명, 6·3사태 등을 겪으면서 학생운동에 깊이 관여했고, 졸업 후에도 박정희 정권의 독재정치에 반대하는 민주화운동의 선두에서 활동했다.
그가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된 1970년대의 문학작품들은 바로 이러한 정치활동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 1964년에는 한일회담을 반대한 학생시위에 적극 가담했다가 체포·투옥되어 4개월 동안 옥살이를 했으며, 1970년 담시(譚詩) 〈오적 五賊〉을 발표하여 반공법 위반으로 체포·투옥되었다(→ 색인 : 오적필화사건).
1974년에는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 사건으로 체포되어 긴급조치 4호 위반혐의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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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후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다가 다음해 2월 형집행정지로 석방되었으나, '인혁당 사건'의 진상을 밝혔다가 석방된 다음달에 다시 체포되었다. 전세계의 주목 속에 오랜 재판과정을 거쳐, 앞선 무기징역에 다시 징역 7년형을 추가로 선고받았다.
6년간의 옥살이 끝에 정권이 바뀌자 1980년 12월 형집행정지로 석방되었다. 그뒤로는 정치적 발언을 삼가면서, 그리스도교사상·미륵사상·화엄사상·선불교·기(氣)철학 등의 여러 사상들을 재해석하여
자신의 독특한 생명사상을 펼치거나, 그에 따른 생명운동을 벌이는 데 힘쓰고 있다.
노천명
노천명(盧天命, 1912년 9월 2일 ~ 1957년 12월 10일)은 일제 강점기와 한국의 기자, 시인, 작가, 소설가, 언론인이다.
사슴을 '목이 길어서 슬픈 짐승'에 비유한 시로 유명하다.
대학 졸업 후 조선중앙일보, 조선일보, 서울신문, 부녀신문 등에서 기자로 활동하면서 시인으로도 활동하였다.
해방 직후에는 모교인 이화여자대학교와 서라벌예술대학에 강사로 출강했고, 1951년부터는 공보실 중앙방송국 방송담당 직원으로도 근무했다.
황해도 장연 출생이다. 본명은 노기선(盧基善)이나, 어릴 때 병으로 사경을 넘긴 뒤 개명하게 되었다.
이시카와 다쿠보쿠
나를 사랑하는 노래
1
동해 바다의 자그만 갯바위 섬 하얀 백사장
나는 눈물에 젖어
게와 벗하였도다.
모래언덕의 모래에 배를 깔고
첫사랑 아픔
수평선 저 멀리 아련히 떠올리는 날
촉촉이 흐른
눈물을 받아 마신 해변의 모래
눈물은 이다지도 무거운 것이런가
그는 일찍부터 하이쿠에 관심을 가졌지만,고향의 봉건 영주 밑에 들어가 시종으로 일했다. 그러나 1666년 주군이 죽자 사무라이(무사)의 지위를 버리고 시에 전념하기 시작했다. 수도인 에도, 지금의 도쿄로 나온 그는 1679년에는 '새로운 형식'으로 된 첫번째 시를 썼는데 그는 이 형식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마른 나뭇가지 위에/까마귀 한 마리가 내려앉았다/가을의 해질녘"불교의 선종 철학에 입각해 사소한 것 뒤에 숨겨진 가능성을 드러내고 삼라만상의 상호의존관계를 보여줌으로써,
세계의 의미를 단순한 시형식에 압축·표현하려고 애썼다.
평생을 등산과 수석 모으기를 취미로 한 자연친화적 시인이며 가족들에게 각별히 다정했던 사람이었지만 그는 단호할 때는 단호할 줄 아는 남자였다.
김지하의 시 ‘오적’이 세상을 뒤흔들고 박정희 정권의 엉덩이를 가시로 찔렀을 때 물불 안가리고 흥분한 정권의 법정에서 박두진은 이런 의사를 밝힌다.
“계급주의 문학 내지는 이적 표현물로 몰아붙인 이 작품은 문학 본래의 사명과 책임에 충실한 결과로 오히려 우리의 민주 비판적 영향의 잠재력을 과시한 좋은 표징이 된다.
” 시인은 독재자의 뺨을 이렇게 때린다. 또 하나를 덧붙이자면 그는 하마터면 현직 대통령과도 교분을 가질 뻔 했다. 육영수 여사가 시를 배우고 싶으시다며 문학 선생으로 초빙했지만 박두진은 단칼에 그를 거절했던 것이다.
1981년 연세대 교수직에서 퇴임하면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해방 후 독재정권 때문에 시는 기본적인 자유를 누리지 못했다.
그러나 시가 자유의 추구를 포기해서는 안된다.” 그리고 고별 강연에서 그는 “말의 기교”로써 시를 쓰는 시인 하나를 매섭게 비판한다. 말당 서정주였다.
사월의 노래
긴 겨울이 지났건만 호호 매운 꽃바람 속에 지시인과 최시인 주시인, 삼시인이 산골집에서 회포를 풀고 불콰한 얼굴로 나오던 길이다. 이미 녹두빈대떡에 막걸리로 거나했으나 오랜만인지라 헛헛이 남아 행길 건넛집으로 갔다. 지붕이 야트막하고 손님이 끊이지 않는 그 집, 동그만 술상에 해바라기만한 회접시를 앉혀놓고 소줏잔을 돌리던 중이었다.
오손도손 이야기 때기에 여념이 없는 주객들 틈에서 왠지 노래가 부르고싶어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낮은 소리로 사월의 노래를 읊조리니 청중은 지시인 최시인 뿐이었다. 노래를 다 불렀는데 맹숭맹숭 아무도 추임새가 없다.
아니 이런, 창도 고수가 있어야 맛인데.....하긴 청하지도 않은 노래를 부를 건 뭐람? 다시 도는 소줏잔에 취기도 따라돌고.....그러구러 잠시 후였다. 카운터 앞에서 주모가 우리를 향해 뭐라고 외친다.
엥? 저 손님이 우리 술값을 계산했다고? 자리를 차고 일어나, 아니 이거 누가 웬 일이냐고 의아한 얼굴을 하고보니 우리 옆자리에서 방금 일어난 젊은이들이다.
난생 처음 그것도 등너머로 만난 사람들끼리 이런 호의를 주고받다니, 나는 얼떨결에 허어 이런,을 연발하면서 숨은 청중이 있었음에 화들짝 핀 목련꽃처럼 놀랄 따름이었다.
그들이 서둘러 달아난 후에 주모에게 들으니 지갑을 열었던 40대 친구는 대우건설 무슨 과장이라고 했다. 별난 사월이다,
아아 뜨거운 지옥 대한민국이다! 2009. 4
박인환
1926. 8. 15 강원 인제~ 1956. 3. 20.
어두운 현실을 서정적으로 읊은 후기 모더니즘의 기수로 알려져 있다.
1939년 서울 덕수초등학교를 마쳤다. 이어 경기중학교에 입학했다가 1941년 자퇴하고 한성학교를 거쳐 1944년 황해도 재령의 명신중학교를 졸업했다. 같은 해 평양의학전문학교에 입학했으나 해방이 되자 학업을 중단했다.
서울로 와서 '마리서사'라는 서점을 경영하면서 여러 시인들과 사귀었고, 서점을 그만두고는 〈자유신문〉·〈경향신문〉 기자로 근무했다.
6·25전쟁이 일어나자 육군 소속 종군작가단에 참여하고 피난지 부산에서 김규동·이봉래 등과 '후반기' 동인으로 활동했다.
1955년 대한해운공사에서 일하면서 미국에 다녀왔으며, 이듬해 심장마비로 30세의 젊은 나이에 죽었다.
모더니즘 시를 지향했던 '후반기' 동인으로 활동하면서 시 〈검은 강〉·〈살아 있는 것이 있다면〉·〈목마와 숙녀〉 등을 발표했는데, 이들 시는 8·15해방직후의 혼란과 6·25전쟁의 황폐함을 겪으면서 느꼈던 도시문명의 불안과 시대의 고뇌를 감성적으로 노래하고 있다.
특히 "한 잔의 술을 마시고/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로 시작되는 〈목마와 숙녀)는 그의 시의 특색을 잘 보여주면서도 참신하고 감각적 면모와 지적 절제를 보이고 있다는 점에서 대표작이라 할 수 있다.
1955년 희곡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번역해서 공연하기도 했다.
박재삼
사천 앞바다의 품팔이꾼 아버지와 생선장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중학교 진학도 못하는 절대궁핍을 경험해야 했다. 어렵게 삼천포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서 수학했고, 1953년 〈문예〉에 시조 〈강가에서〉를 추천받은 후 1955년 〈현대문학〉에 시 〈섭리〉·〈정적)등이 추천되어 등단했다.
그의 시는 당시 서정주와 유치환이 서로 반해 추천을 다툴 만큼 출중했다. 시 작품의 탁월함은 무엇보다도 가락에서 두드러졌다. 우리말을 의미·개념에만 맞추어 쓰는 것이 아니라 운율에 맞추어 리드미컬하게 구사하는, 리듬의 중요성을 태생적으로 알아차린 시인이었다.
전통적 가락에 향토적 서정과 서민생활의 고단함을 실은 시세계를 구축했으며, '한을 가장 아름답게 성취한 시인', '슬픔의 연금술사'라는 평가를 받았다.
박화목
박화목{朴和穆, 1924년 2월 15일 ~ 2005년 7월 9일 (본명:박은종)} 대한민국의 시인이자 아동문학가이다.
황해도 황주에서 출생하였으며, 만주로 건너가 봉천 신학교를 졸업하였다. 1941년 <아이생활>에 동시 <피라미드>와 <겨울밤>이 추천되면서부터 문학 활동을 시작하였다.
기독교 방송국 편성국장·아동 문학회 부회장·크리스찬 문학회 부회장 등을 지냈다. 향년 82세.시집으로 <시인과 산양> <주의 곁에서> 등이 있으며, 동화집으로 <꽃 잎파리가 된 나비> <부엉이와 할아버지> 등이 있다.
백기완
모이면
논의하고 뽑아대고
바람처럼 번개처럼
뜨거운 것이 빛나던 때가 좋았다
하나를 알면
열을 행하고
개인을 이야기 하면
역사를 들이대고
사랑을 튕기면
꽃본듯이 미쳐 달려가던 곳
추렴 거리도 없이
낚지 볶음 안주 많이 집는다고
쥐어박던 그 친구가 좋았다
우리는 두려운 것이 없었다
헐벗고 굶주려도
결코 건전하지 않았다
돈 벌이에 미친자는
속이 비었다 하고
출세에 연연하면
호로 자식이라 하고..... 젊은 날 / 백기완
백석
이런 길동무
동해 바다 작은 섬 갯바위의 백사장
나 눈물에 젖어
게와 놀았다네......
자살하려고 바닷가에 나갔다가 흰 모래사장 위에 작은 게들이 노는 모습을 보고
자살하는 것을 잊어버리고 돌아왔다는 일본인 이시가와 다쿠보쿠,
그는 너무나 궁핍하게 산 나머지 폐결핵에 걸려 변변한 치료조차 받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한다.
어머니 역시 그 해에 폐결핵으로 세상을 등지고 아내 세츠코도 이듬해에 남편 뒤를 따랐더라고.....
그렇게 그 (石川啄木, 1886 - 1912) 가 세상을 떠난 해 조선땅에 백기행이란 아이가 태어났는데,
장성하면서 다쿠보쿠를 존경하고 사랑하게되어 자신의 필명에 돌 石자를 가져와 백석이라 했단다.
앞선 길동무가 묵어간 주막거리에 뒤따라 들어서는 길동무,
말하자면 니체와 쇼펜하워가 그렇고 나와 李箱도 이를테면 이런 길동무다.
아수라 중년에 이르러 아쉽게 손을 놓치고말았지만.....!
범대순
"작지만 진솔하게 살아온 인생을 보여주고 싶습니다."
'아름다운 가난의 시인', '무등산 시인'으로 알려진 원로시인 범대순(85)씨가 광주 동구 계림동 자택에 자신의 시문학관을 연다.24일 오후 취재진이 찾은 범씨의 자택은 공사가 한창이었다.손님을 맞기 위해 낡은 대문을 고치고, 칠이 벗겨진 벽에는 말끔하게 페인트 칠을 하고 있었다.
범대순 시문학관'은 시인이 1961년 광주 사범학교 교사로 부임하면서 둥지를 틀었던 2층집이다.
이사 오면서 심은 은행나무는 50년의 세월이 흘러 아름드리 나무로 자랐고, 시인은 어느새 백발이 됐다.
범 씨는 이층에 있는 작은 방에서 책을 읽고 틈틈이 시를 썼다.이 집에서 탄생한 책만 30여권. 범 씨는 손때와 체취가 가득 묻은 자신만의 비밀스런 공간을 세상을 향해 활짝 열었다.82㎡ 규모의 이층은 서재인 시림(詩林)과 명상실, 음악실로 구성됐다.
변영로
시인·영문학자. 서울 출생. 1910년 사립중앙학교에 입학하였으나 자퇴하고, 15년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학교 영어반에 입학하여 3년 과정을 6개월 만에 마쳤다. 19년 독립선언서를 영문으로 번역하였으며 페허,장미촌 동인으로 참가하였다. 영미문학의 소개 및 국내작품의 영문번역. 그리고 유명한 酩酊四十년이 있다
서정주
1930년 광주학생운동과 관련하여 구속되었다가 기소유예로 석방, 이로 인해 퇴학당했다. 박한영의 도움을 받아 대한불교전문강원에 입학하여 불교와 관련을 맺게 되었다.
동아대학교·조선대학교 등에서 강의했으며, 1960년 이후 동국대학교 교수로 재직했다.
' 나를 키운 건 팔할이 바람이다.
어떤 이는 내 눈에서 죄인을 읽고 가고,
어떤 이는 내 입에서 천치를 읽고 가나,
나는 아무 것도 뉘우치지 않을란다'
- 자화상
윤석중
새로운 형태의 동시와 동요를 써서 한국의 아동문학 발전에 이바지했다. 1930년 양정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33년 〈어린이〉 주간, 1934년 〈소년중앙〉 주간, 1936년 〈소년〉 주간을 역임했다.
1944년 일본 조치대학[上智大學] 신문학과를 마쳤다. 1953년 '새싹회'를 창립해 회장에 취임했다.
1933년에 펴낸 동시집 〈잃어버린 댕기〉에는 기존의 3·4조나 7·5조의 음수율을 벗어난 동시 여러 편이 실려 있는데, 특히 이 동시집을 통해 글자수를 맞추어 지은 것을 동요라 하고 자유롭게 지은 것을 동시라 하여 동시의 성격을 규정했다.
이백
남성적이고 용감한 것을 좋아한 그는 25세 때 촉나라를 떠나 양쯔강[揚子江]을 따라서 장난[江南] ·산둥[山東] ·산시[山西] 등지를 편력하며 한평생을 보냈다.젊어서 도교(道敎)에 심취했던 그는 산중에서 지낸 적도 많았다.
그의 시의 환상성은 대부분 도교적 발상에 의한 것이며, 산중은 그의 시적 세계의 중요한 무대이기도 하였다. 안릉(安陵:湖南省) ·남릉(南陵:安徽省) 동로(東魯:山東省)의 땅에 체류한 적도 있으나, 가정에 정착한 적은 드물었다.
맹호연(孟浩然) ·원단구(元丹邱) ·두보 등 많은 시인과 교류하며, 그의 발자취는 중국 각지에 닿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이다.
이동주
윤선도 이후 해남을 대표할 시인으로, 해방 후 현산면 읍호리 출신의 이동주가 그동안 끊긴 우리문학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그의 시세계는 이 전통적인 음악성에 의존한 고전적인 시 세계를 그려 우리 민족의 서정을 형상화한 서정시의 대가다.또, 민족적 감흥이 그의 시에서는 한껏 베어 독보적인 시세계를 그리고 있음에 높이 평가한다.
심호는 현산면 읍호리 오천석꾼 외손자로 태어났으나 아버지대에 이르러 모두 탕진되어 그의 고향에서 국민학교에 입학했을 뿐 외가인 공주에서 학업을 계속할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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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용 1902년 ~ 1950년, 한국의 서정시인, 아호는 지용(池龍)이다. 대한민국에서는 납북 여부와 사인이 모호하여 한때 이름이 '정X용'으로 표기되고 그의 시가 금기시 되었으나, 1988년 해금되어 국어 교과서에도 그의 시 '향수'가 수록되었다.'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
조지훈
1920 경북 영양 ~ 1968 . 청록파 시인 가운데 한 사람이며 전통적 생활에 깃든 미의식을 노래했다. 대표시에 '승무' 가 있다. 1961년 벨기에에서 열린 국제시인회의에 한국대표로 참가, 1963년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초대 소장이 되면서 시쓰기보다
〈한국문화사대계〉등을 기획하고 추진하는 데 힘썼다.
청마 유치환
1908.경남 충무~ 1967. 부산. 시인·교육자.
시의 기교나 표현에 집착하지 않고 생에 대한 의지를 진지하게 추구했다. 8남매 가운데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극작가 유치진은 그의 형이다. 1939년 첫시집〈청마시초〉를 펴냈고 해방직후 생명에의 열애를 노래한 서정주와 함께 '생명파 시인'으로 불렸다.1967년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 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나니 -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
이 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 '
1903. 9. 6 - 1990. 한국 최초의 어린이 문화단체인 색동회
1923년 조선소년운동협회를 조직하고 그해 5월 1일을 '어린이 날
1924년 동요 〈반달〉
일본 창가 말고는 부를 노래가 마땅히 없었던 그 당시의 상황에서 〈반달〉은 어린이뿐만 아니라 어른들에게도 널리 불렸던 노래였다. 1926년 펴낸 동요집에는 〈반달〉〈설날〉등 10편의 동요가 실려 있고 일제강점기부터 400편 이상의 동요를 남겼다.
내지 첫 장에는 '도라간 누이 동생 덕윤이 영전에!'라고 적혀 있다. 윤극영은 1924년 반달 창작 당시, 맏누이의 부고를 듣고 슬픈 마음에 곡을 썼다고 한다.
윤동주
尹東柱, 1917년 ~ 1945년) 한국의 독립운동가, 시인이다.
중화민국 지린 성에서 출생,
연희전문 재학 중 소년(少年) 지에 시를 발표했다. 일본 도시샤 대학 재학 중, 1943년 항일운동 혐의로 후쿠오카 형무소에 투옥, 100여 편의 시를 남긴 27세의 나이에 고문 후유증으로 요절하였다. 사후에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출간되었다.
'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어머님,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마디씩 불러 봅니다. '
이상
1910. 9. 14 서울~ 1937. 4. 17 도쿄[東京]. 시인·소설가.실험정신이 강한 시를 써오다가
1936년 소설 〈날개〉를 발표하면서 시에서 시도했던 자의식을 소설로 승화시켰다.
불현듯이 겨드랑이가 가렵다. 아하, 그것은 내 인공의 날개가 돋았던 자국, 오늘은 없는 이 날개를 떠올린다. 머리 속에서는 희망과 야심이 말소된 페이지가 딕셔너리 넘어가듯 번뜩였다.
나는 걷던 걸음을 멈추고, 그리고 일어나 한 번 이렇게 외친다.날개야 다시 돋아라. 날자 날자 날자. 한 번만 더 날자꾸나.한 번만 더 날아 보자꾸나" 날개
이은상 |
1903. 10. 22 경남 마산~ 1982. 9. 18. 시조시인·사학자.
1920년대 후반에 일어난 시조부흥운동에 참여한 뒤로 시조의 현대화에 힘썼고, 양장시조를 창안하였다.
〈가고파〉·〈봄처녀〉 등의 작사가로도 널리 알려져 있고. 우리나라의 자연을 예찬한 시조집 '조국강산'등이 있다.
1931~32년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수를 지낸 뒤 〈동아일보〉·〈조선일보〉에서 근무했다.
1942년 조선어학회사건에 연루되어 구금되었다가 이듬해 풀려났으며, 1945년에는 사상범 예비검속으로 광양경찰서에 갇혀 있다가8·15해방이 되어 풀려났다. 같은 해 호남신문사 사장을 지냈고,
1950년 이후 청구대학(지금의 영남대학교)·서울대학교 교수로 재직했다.
1954년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이 되었고, 1959년부터 충무공이순신장군 기념사업회장, 안중근의사 숭모회장 등을 맡아보았으나 친일행적이 오점으로 드러나 우리를 안타깝게 한다.
정소파 1912년 광주 남구 사동에서 태어난 고인은 송정공립보통학교와 일본 와세다대학 문학부를 졸업했다. 고인은 1930년 열여덟에 문학동인지 ‘개벽’에 ‘별건곤(別乾坤)’을 발표하며 등단했다. 1948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조부문에 ‘설매사(雪梅詞)’가 당선됐으며 1957년 대한민국건국기념 전국백일장에서 시조부문 장원을 차지하면서 대통령상을 받았다. 시조집 <산창일기>와 시집 <마을>, 동시집 <정소파 동요동시집> 등을 펴냈다. 평소 고인은 우리 전통시조를 널리 알려야 한다는 사명감이 강했다. 호남시조문학회 회장, 한국시조시인협회 고문, 한국문인협회 전남지부장 등을 역임했다. 매일 새벽에 일어나 시를 쓰고, 국내외에서 발간되는 문학지와 시집을 꼼꼼히 읽을 만큼 시에 대한 애착도 강했다. 가람 이병기와 백석, 조운 등 당대의 내로라하는 시인들과도 교유하며 우정을 나눴다. 시조 창작 외에도 전남도청과 광산군청(현재의 광주 광산구)에서 공무원으로 근무했으며 북성중·전남중 등에서 교직생활도 했다. |
조병화
1938년 경성사범학교를, 1945년 일본 도쿄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하고, 1949년 서울중학교 교사, 1955년 중앙대학교 강사 등을 거쳐, 1960년 경희대학교 초대 출판국장, 문리과대학장, 교육대학원장 등을 역임했다. 그림에 취미가 있어 개인전을 열기도 했다.
천상병 소풍 온 속세를 떠나 하늘고향으로 돌아간다는 귀천(歸天)으로 유명하다. 심한 옥고와 고문을 겪었으며 '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하리라 ' 귀천 |
최승렬
최승렬 1921~2003. 아호는 원정(園丁). 전북 전주에서 태어남. 전주 신흥보통학교를 나와 독학으로 교원 임원고시에 합격하여 1945년부터 초등학교 교사로 재직하였다. 1954년 전주고 국어교사를 시작으로 목포 마리아회고등학교, 인천의 제물포고·대건고 교사와 신명여고 교장을 역임했다.
지은 책으로는 동시집 《무지개(1955)》, 소년시집 《푸른 눈동자에 그린 그림(1975)》,
시집 《원정(1955)》· 《산맥(1981)》· 《순수지대(1996)》, 연구집 《한국어의 어원(1987)》· 《한국어와 일본어의 비교(1992)》 등이 있다.
1879. 8. 29 충남 홍성~ 1944. 6. 29 서울. 시인·승려·독립운동가.
한국 근대시사의 불후의 업적인 〈님의 침묵〉을 펴냈고, 한국 근대 불교계에서 혁신적인 사상과 활동을 펼쳤으며, 3·1독립선언에 민족대표로 참가하는 등 일제강점기의 혁명적인 독립운동에도 앞장섰다. 용운은 법명이며 득도할 때의 계명은 봉완(奉玩), 법호는 만해(萬海 : 또는 卍海).
한하운
1919 함남 함주~ 1975. 2. 28.
1943년 중국의 베이징대학[北京大學] 농학원을 졸업한 뒤 귀국하여 함경남도 도청에서 근무하다가 1945년 나병이 악화되어 그만두었다.
1946년 함흥학생사건에 연루되어 반동분자로 투옥된 바 있고, 1948년 공산치하를 피해 월남하여 한동안 유랑생활을 했다.
1950년에 성혜원, 1952년에 신명보육원을 설립·운영하는 한편, 1953년 대한 한센 연맹위원회 회장으로 있으면서 나병 환자들을 위해 많은 일을 했다. 1960년 무하문화사, 1966년 신안농업기술학교 교장 및 한국사회복귀협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
1949년 이병철(李秉哲)의 소개로 〈신천지〉에 시 〈전라도 길〉 외 12편을 발표하여 등단했다.
나병으로 인한 고통과 슬픔을 노래하여 문단의 주목을 받았고, 1949년 첫 시집 〈한하운시초〉를 펴낸 후 문둥병 시인으로 널리 알려졌다.
이어 제2시집 〈보리피리〉(1955)와 제3시집 〈한하운시전집〉(1956)을 펴냈는데,
여기에 실린 시들은 민요 가락에 온전한 인간이 되기를 바라는 간절한 염원이 담겨 있다.
첫댓글 문학 자료 주신 보리뱅이님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