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린 자 달게 먹고 목마른 자 쉬 마신다
주린 자란 어떤 자인가?
한 마디로 배가 고픈 자, 먹을 것이 그리운 자, 굶어서 배가 쫄쫄 고픈 자를 바로 주린 자라고 한다.
먹을 것이 없어서 육적인 양식이 그리워서 주린 자가 있고, 영혼이 갈(渴)해서 주린 자가 있다.
전자는 세상양식으로 배불리려 하나 도저히 이룰 수가 없어서 주린 자이고,
후자는 신령한 것에 마음이 많이 있으나 육이 멍에가 되어서 역시 주린 자 이다.
주린 자들은 배불리 먹어야 한다. 육적인 양식이든 영의 양식이든 간에 배불리 먹어야 만이 그들은 만족한다.
왜 그런가? 우는 아이가 젖을 달라고 보채는 울음 소리를 듣고 그 엄마는 애기에게 젖을 먹인다.
신령한 양식인 영의 양식도 바로 이와 같다.
어떤 세상의 사람들은 육의 양식만 줘도 울음을 그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아무리 육의 양식을 많이 줘도 그런 것으론 도무지 만족할 줄 모른다.
한마디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들이다. 이들은 하나님을 식물로 삼고 살아야만 할 사람들이다.
아무리 세상것을 배불리 먹고 마시고 취하고 즐겨해도 그것은 끝이 있다.
쉽게 말하면 종칠 때가 있다는 말이다. 유구하거나 장구하지 못한 것이 바로 세상적인 즐거움이다.
이것은 조건이 맞아야만, 형편이 좋아야만 그것도 잠시잠깐 일시적으로 누리다가 곧 그만두어야만 할 것들이다.
육을 입고 있는 사람들 육의 장막집에 거하는 사람들은 바로 이와 같은 형편과 처지에 놓인 사람들이다.
모든 사람들이 이 삶의 기본원리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貧富貴賤이나 男女老幼를 불문하고 동일한 범주에서 동일한 양식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바로 인생인 것이다.
쉽게 말해서 인생은 빼도 박도 못하는 어쩔 수 없는 숙명적인 삶을 살아간다고 보면 틀림이 없다.
그러나 소망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과의 차이 즉, 믿는 자와 불신자의 차이는 천당과 지옥의 차이다.
그것은 큰 구릉이 있어서 그 틈새를 그 무엇으로도 메꾸거나 채우지 못한다. 서로 오고가지 못함은 물론이다.
우리는 ‘거지 나사로’의 이야기에서 바로 이러한 형편과 처지를 알게 된다.
어리석은 부자는 땅위에서 날마다 호의호식하며 친구들과 연락하며 기쁘게 즐겁게 삶을 추구했다.
그는 부자였으므로 친구들도 많았고, 날마다 珍羞盛饌으로 기름진 것을 배에 채웠다.
그의 날들은 그야말로 최고의 날들이었다.
그에 비하여 이 형편없고 초라한 나사로는 거지로서 부자의 대문 밖에서
부자가 버리는 음식의 찌꺼기를 주워먹고 살았다.
부자가 음식찌꺼기를 버리면 개들이 달려와서 거지 나사로와 음식 쟁탈전을 벌이곤 했다.
이 나사로는 또한 상처가 있어서 개들이 달려와서 그 상처난 곳을 핥아야 겨우 시원했다.
그정도로 극한 가난과 질병의 고통으로 나사로는 날마다 고통중에 신음했지만
그 마음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의 도우심을 바라는 신실한 마음이 가득했다.
부자는 날마다 호의호식하고 일락을 추구했지만 하나님을 마음에 두지 않았다.
그 결과 그의 땅위의 날들이 다 지나가고 죽었을 때 음부에 가게되고
나사로는 천국에 가서 아브라함의 품안에서 놀게 된 것이다.
부자가 한가지 잊고 있었던 사실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사람이 죽는 것은 정한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라’는 말씀을 아예 듣지도 보지도 못한 것이다.
그 결과 그는 심판을 받아 음부에서 고통 중에 지금도 신음을 하고 있는 것이다.
지옥이란 어떤 곳인가? 거기는 죽고 싶어도 죽음이 피하는 곳으로 불로 소금 치듯이 하는 곳이란다.
극한 고통과 괴로움이 있는 곳이 바로 지옥인 것이다.
무서운 지옥의 형벌을 받지 않기 위해서는 예수를 믿어야만 한다.
유월절 어린양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의 사죄의 은총을 받아 누려야만 하는 것이다.
그래야 소망이 있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학교에서 아이들을 급식을 시켜본다.
그러면 맛이 있는 것이 나올 때(자기들이 생각할 때)는 잘 먹는다.
그러나 맛이 없는 것이 나올 때(자기들이 생각할 때)는 잘 먹지 않는다. 한마디로 拒食症인 것이다.
그 병의 원인은 배가 부름으로 인해 맛이 없어서 음식을 거부하거나 보이코트 한다는 것이다.
우리 속담에 ‘말을 물가까지 끌고 갈 수는 있지만 말에게 물을 먹일 수는 없다’는 원리와 같은 것이다.
그래서 주님이 참으로 답답한 나머지 외치신 말이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했다. 귀는 다 있다.
그러나 주님의 말을 정말로 경청하고 그 말을 순종하는 사람은 정말로 희귀하다.
왜 그런가? 거식증이 있기 때문이다. 배가 부르기 때문이다.
세상 것으로, 잠시 있다 사라지는 것으로, 지혜와 명철이 모자라는 고로 그것을 거부하고 보이코트 해 버리는 것이다.
우리는 사슴이 시냇물을 찾아 갈급 하듯이 하나님의 말씀에 허겁지겁해야 하며,
하나님의 의를 사모하며 그의 베푸신 은혜를 갈망하며 살아가야만 할 것이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되어 배부르게 마시고 살아갈 수가 있게 된다. 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