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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文學> 02년 5월호 발표 단편소설
저승 노인 학교 첫 수업
이원우
허실(許實). 그가 가끔 다중 앞에서 사자후(?)를 토할 때, 그는 자신의 존재 가치를 한껏 느낀다는 고백이다. 특히 노인 문제로 강사로 초청을 받은 자리 같은 데서….
“제자(弟子) 하나가 향년 백열여섯 살에 기세(棄世)했습니다. 황기화(여) 학생이었지요. 스승보다 두 배 많은 나이를 가진 제자가 있었다? 그게 사실인 걸 전들 어찌할 수 없지요.”
객석에 앉은 수십 혹은 수백 명의 청중들-노인 학교 학생들이나 관계자들-이 웅성웅성 떠든다. 아니 사뭇 들끓는 것 같다는 게 적절한 표현이겠다. 거짓말이라는 야유도 섞인다.
자, 다른 건 뒤로 미루더라도 그 제자가 태어나서 말이다. 과연 그 제자가 일세기(一世紀)에서 16년을 더 숨 쉬고 살았다는 걸 증명하는 문제다. 만만찮을 테지만 상황이 바야흐로 급하니 그를 아는 제삼자가 나설 수밖에 없다.
8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서울 강남 세브란스 병원 비뇨기학과에서 전립샘 암을 수술 받는다. 이미 노인 학생들과 인연을 끊은 지 제법 세월이 흐른 뒤였다. 일흔 중반에 가까운 나이라 모두들 걱정이었다. 그렇지만 그는 견뎌내었다. 아니 되레 희희낙락 우쭐대면서 보름 동안을 병실에서 보내다 퇴원했다. 그만큼 종양이 생긴 전립샘을 들어냈다는 자체가 은혜라는 생각이 들어서였으리라.
일부러 1인실을 택했던 까닭이 웃음을 자아내게 만든다. 듣는 이로 하여금 또 웃음을 터뜨 ‘재야(在野) 소리꾼’이라는 별명도 여기저기서 들어오던 그였다. 특히 부산 국악협회 인사들이 민요 없으면 한 시간도 못 산다고 그를 치켜세웠었다. 그래 마취에서 깨어나자 그가 가족들에게 한 말이 이랬다.
“혼자서 모처럼 민요나 실컷 부르고 싶어!”
때론 민요가 자기의 생살여탈권을 쥐고 있다고 착각하는 그! 거짓말 같지만 그는 병실에서 내내 그것들은 입 밖으로 쏟아내었다. 하니 허밍과 휘파람도 곁들였음은 물론이고말고. 물론 그게 밖으로 새어 나가 남에게 불편을 줄 정도는 아니었다. 그게 주효했음이 틀림없었으리라. 별로 통증을 느끼지 않고 열흘 넘게 견뎌낸 게 말이다.
간호사나 의사조차 그의 연기(?)에 잘도 속아 넘어갔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눈치까지 못 챘을 리 만무하다. 그들은 미소로써 그걸 눈감아 주었다. 그러다 그 결과가 엉뚱하게 진화(進化)했으니 그걸 설명하면 이렇다.
병원 홍보 모델이 필요해서 환자 중에서 물색했는데 그들이 그를 지목한 거다. 씩씩한(?) 투병 환자? 그들이 그렇게 점찍었다고 했다. 코디네이터 간호사와 사전에 두어 번 접촉을 하는 등 약간의 진통이 있을 뒤였음도 밝히자. 마침내 그는 그 중책(?)을 맡게 되었다. 한 장삼이사(張三李四)가 하루아침에 유명 인사 아니 유명 환자가 되는 순간이었다. 대형 가족사진과 금일봉을 수수하고, 병원 홈페이지에 3년간 그의 영상을 올리는 조건이었다.
그로부터 모두의 시선부터 달랐다. 그가 운동하러 병원 복도를 천천히 걸으면 다른 직원들도 약속이나 한 듯 그를 알은체했다. 흰 가운을 걸친 관계자(의사며 간호사는 물론 간호조무사며 임상 병리사 등 말이다)는 물론 청소 미화원까지 그를 보면 자기들끼리 이러기 예사였다.
“저 할아버지, 저래 봬도 굉장한 분이라던데?”
“수술 뒤엔 아플 것 아냐? 한데 할아버진 비명 한 번 안 냈다더라.”
“삼국지 이야기를 했다는 거야. 어깨에 박힌 화살을 빼내는데, 글쎄 관운장은 바둑을 두면서 얼굴 한 번 안 찡그렸다는…. ‘바둑 대신 민요’라는 전설의 주인공이 될지 모르지.”
“할아버지는 민요 가창력 하나만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라는 소문이 있어. 부산 부민병 원 홍보대사도 지냈대. 한 달에 한 번씩 환우들을 위문했다지, 아마.”
“할아버지가 한 말 중에서 배꼽을 잡게 하는 게 있어. 할아버지 고유의 믿거나말거나 큰소리 (?)야. 할아버지 왈 ‘내 노래 소리를 들으면 방금 숨 끊어진 사체도 벌떡 일어서요!’”
“전직 교육자, 노인학교에 오래 관계하면서 온갖 민요를 학생들에게 가르쳤단 말도 있어.”
설마 그게 모두 사실일까만 그 친구나 동료 혹은 이웃도 대놓고 콧방귀는 뀔 수 없을 정도로 민요에는 그가 일가견을 가졌다는 게 맞다. 어깨가 아픈 환자가 그의 민요를 들으면 무의식중 손뼉 치는 경우가 있음을 본 정형외과 의사도 불가사의라며 혀를 내두르기도 했다더라.
며칠을 지나고 나서였다. 그는 아침 식사를 끝내고 병실을 나왔다, 아내가 워낙 피곤해 해서, 좀 쉬라고 이르고는. 복도를 좀 빠르게 걸었다. 간호사들이 유달리 반가워하는 느낌이라 인사마저 호기롭게 받았다. 물론 고맙다는 대답도 잊지 않았고….
그가 중간쯤 갔을 때 병실 문이 열리더니 휠체어에 탄 할아버지가 나왔다. 하얀 머리카락을 짧게 깎은…. 뒤에서 도우미인 듯한 아주머니가 손잡이를 잡고 밀고 있었다. 그는 습관대로 할아버지에게 허리를 약간 굽히고 공손히 인사를 드렸다.
“선생님, 참 인상이 좋으십니다.”
결례로 여겨졌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나 매한가지라 당황해 있는데 할아버지는 손사래를 치듯 했다. 그분이 하는 답례다.
“젊은이야말로 한 인물 하는구려!”
허실도 일흔이 넘은 나이인데, 그를 보고 할아버지는 젊은이라 불렀다. 고개를 갸웃거리기에는 너무 시간이 촉박했다. 할아버지가 어쩐지 따뜻한 분이라는 느낌이 파고들어서였다. 그가 다시 할아버지에게 한마디 건네는데, 이번에도 실언 비슷했으니 연세를 물은 것이다. 이번에는 도우미가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우리 원장님 연세 맞춰 보시겠습니까?
도우미의 당돌한(?) 반문을 들으면서 허실은 ‘원장님’이란 할아버지의 호칭에 적이 호기심이 갔다. 그래도 그는 우선 짐작한 대로 할아버지의 나이가 여든 중반쯤 되는 것 같다며 운을 뗐다. 덧붙여 말하기를
“원장님이라 하셨는데….”
이번에도 도우미가 거든다.
“몇 달 전까지 한의원(韓醫院)을 개업하셨습니다. 서초구 한의사회 회장도 지내셨지요. 그리 고 원장님은 올해 백 세 살이십니다, 만으로요.”
그가 그 말을 듣고 바야흐로 뒤로 나자빠질 뻔하지 않았다면 그게 이상하다. 기나긴 세월 매주 토요일 오후 노인들과 만나서 시간을 보냈던 자신이 아닌가? 남학생 중 최고령은 권대열 할아버지였다. 아흔 일곱 살! 한데 지금 자기 앞에 일곱 살이 더 많은 할아버지가 나타난 거다, 도우미가 한마디 덧붙인다. 며칠 전 스텐트(stent) 시술을 했더라는 것이다. 아마도 그게 우리나라 기네스 기록에 오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허실은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조금 있으려니 그에게 할아버지는 하는 귀띔이다. 나, ‘윤(尹)’이라 하오!
허실은 내친김이라 그분에게 자기의 이름과 나이를 밝혔다. 그리고 허리를 한 번 더 굽히면서 예를 다해 인사를 하고 걸음을 옮겼다. 그분은 도우미가 미는 휠체어를 타고 반대편으로 가고…. 이윽고 둘은 다시 복도에서 마주쳤다. 몇 번이나 그랬다. 허실은 운동이 목적이었다. 대신 그분은 끝의 출입문 너머로 시시각각 변화는 바깥 거리 모습을 내다보기 위해서였고.
이윽고 헤어질 시간이 되었다. 허실은 그분에게 조금은 조심스레 물었다. 얼마나 오래 더 계실 거냐고. 도우미가 내일이 퇴원 날짜라 대신 대답한다. 그가 꼭 드릴 말씀이 있으니, 오후에라도 시간을 좀 내 주셨으면 좋겠다고 간청을 했다. 뜻밖에 그분이 좋다고 했다, 마치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그는 그분에게 명함을 건넸다.
허실이 점심을 먹고 아침처럼 복도로 나가려는데, 그분한테서 전화가 왔다. 서둘러 걸음을 재촉했더니 조금 전 그 자리에서 그분이 기다린다. 해후(邂逅)란 명사를 끌어다 씀은 얼토당토않지만, 약간은 그런 극적인 느낌에서 만나는 것 같아 반가웠다. 도우미 대신 허실이 손잡이를 잡고 휠체어를 밀고 한쪽 출입문까지 갔다. 아래는 반시간쯤 계속된 둘의 대화 요약이다.
“저 사실은 부산에서 오랫동안 무료 노인학교를 토요일 오후마다 운영해 왔거든요.”
“아! 그거 정말 대단한 일 했군요. 몇 년간이었는지?”
“스무 해를 넘겼습니다.”
“저런! 일화도 많겠구려.‘
“그럼요, 제가 거기서 민요 가수로서의 역량(?)도 키웠고, 노인학교 운영에 얽히고설킨 이모 저모를 방송이나 혹은 관련 모임 등에서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무엇보다 제게 큰 인 상을 남긴 제자가 있었습니다. 백열여섯 살 된 여학생, 황기화라는 이름을 가진….”
“그것 참 놀라운 일인데요, 하기야 여성이 남성보다 수명이 길다는 사실은 삼척동자도 알지 만, 나보다 열세 살 연상의 할머니라니 믿어지지가 않아요.”
“그러게 말입니다. 원장님께 뭐 하나 여쭤 봐도 될까요?”
“그럼요. 뭐든지….”
“원장님의 건강 유지, 나아가 장수(長壽) 비결을 소개해 주셨으면 합니다.”
“항상 그런 질문을 받아요. 첫째 소식(小食), 둘째 운동, 셋째 금연 등이고. 또 하나, 내가 항상 실천하는 정신적인 덕목이 하나 있지. 남의 허물이나 결점을 꼬집지 않는다!”
“원장님, 그건 꼭 예수님 말씀 같습니다.”
“과찬의 말씀. 그건 그렇고. 아까 그 할머니, 나름의 습관이 있었을 거요. 소개해 보오.”
허실은 황기화 학생 삶 중에서 기억나는 몇 가지를 얼른 떠올렸다. 첫째와 둘째, 셋째 등은 두 분이 어찌 그렇게 부합되는지 감탄할 정도라고 전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실이 그랬으니까. 단 그분이 채식을 생활화했다는 점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었음을 약간 강조했다. 학생 아니 그분은 새로 아파트를 건축하느라 파헤쳐 놓은 빈터에다 틈만 나면 상추를 심었다. 그러곤 시시때때로 요강을 들고 오줌으로 키워 이웃과 나눠 먹었다. 그 모습이 눈에 선하다.
“황기화 학생은 민요를 좋아했지요. 청출어람(靑出於藍), 선생인 저보다 부를 수 있는 민요가 많았을지 모릅니다. 특히 그분이 학교에서 ‘노랫가락’을 절창하면 동료들이 열광했지요.”
“‘노랫가락’이 어떤 민요인데요?”
“조선시대 무녀(巫女)들이 부르던 노래입니다. 3 4 3 4/ 3 4 3 4…. 한 곡 불러 볼까요?”
그분이 그걸 마다할 리 없다. 그는 기뻐서 ‘무량수각’을 목청에 싣는다.무량수각(無量壽閣) 집을 짓고 만수무강 현판 달아/ 삼신산 불로초를 여기저기 심어 놓고/ 북당의 학발양친(鶴髮兩親)을 모셔다가 연년익수(年年益壽)
“노래 솜씨가 대단하시오. ‘노랫가락’이 우리 고유의 민요라는 게 신기해요. 한 곡 더….”
불감청이언정고소원, 그의 화답. 이 몸이 죽어 학이나 되어 나래 위에다 내 사랑 싣고/천만 리 훨훨 날아서 이별 없는 곳 가고 싶어/그곳도 이별이 있다면 또 천만 리를 날아가리
그분은 숫제 감탄사를 연발하고 있었다. 자긴 북한에서 50대에 월남하여 독학으로 한의사 면허를 얻어 개업한 지 반세기지만, ‘노랫가락’은 별로 못 들어봤다면서…. 허실은 자기가 노인대학을 열었을 때 비녀를 꽂은 여학생이 반의반은 되었다고 했다. 그들 중 남편을 여읜 경우도 상당수였다고 덧붙였고. 그러니 노랫가락 ‘이 몸이 죽어 학이나 되어’야말로 ‘이별’이 얼마나 가슴을 아프게 꿰찌르는지 그들의 눈물에서 읽었다고 부연 설명했다.
그러는데 도우미 아주머니가 병실 문을 열고 다가온 것이다. 아들이 왔단다. 수속을 다 밟았으니 곧 귀가해야 한다는 거다. 허실이 인사말을 하려는데 그분이 약간은 미심쩍다는 표정을 짓는다. 그리고 백열여섯 살 여학생 이야기가 사실인지 확인할 수 있느냐고 묻는 거다.
허실은 적이 당황했다. 하지만 자기가 만난 최고령 남자분 앞에서 했던 말이 거짓으로 들통 난다면? 그로 말미암아 우세의 주인공이 될지 모른다고 생각하니 아찔하기도 했다. 그래도 그는 침착성을 되찾아서 스마트폰을 호주머니에서 끄집어내었다, 재빨리 검색한다. ‘116세 제자의 죽음’.한데 거짓말 같이 나타난 것이다. 초등학교 제자가 밀양에서 발행하는 지역 신문 대담 프로다. 그분은 그걸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허실은 이왕이면 싶어 ‘116세 유권자’라는 제목을 다시 두드려봤다. 있다! 부산의 두 개 신문 기사가 뜬다. 몇 년 전 지방 선거에서 황기화(116세) 할머니가 전국 최고령으로 귀중한 투표권을 행사했다는….
그는 그분과 약간은 극적인 대화를 나누고 헤어졌으니 이렇다.
“원장님, 행여 ‘팔만구암자’를 아십니까?”
“아니 그건 금강산 암자(庵子) 수를 말하는 게 아닌지….”
“죄송합니다. 그게 문제라는 겁니다. 금강산에 암자가 팔만 아홉 개라니 얼토당토않지요. 팔 람구암자(八藍九庵子) 즉 큰절이 여덟 개, 암자가 아홉 개라는 뜻인데, 우리나라 으뜸인 여자 민요 가수가 40년 전이나 지금이나 팔만구암자(八萬九庵子)로 부르는 겁니다.”
“그래요? 그럴싸한 이야기로군요. 오늘 젊은이한테서 좋은 걸 배웠습니다. 파이팅!”
“원장님, 다시 한 번 뵐 기회가 있으면, ‘배뱅이굿’에 얽힌 사연을 이야기 드리고 싶습니다.”
그날을 기다리자는 답을 듣고 이윽고 그도 퇴원을 한다. 한 달에 한 번씩 혈액 검사를 하여 단백분해효소(PSA) 수치를 확인하라는 주치의의 지시를 받고 그는 짐을 싸서 병실을 나섰다. 긴 시일은 아니었지만, 그는 전립샘을 떼낸 대신 건강한 70대 초반의 ‘남자’로 돌아와 있었다.
경로당에 나가서도 줄곧 큰소리를 쳤음은 물어보나마나. 사범학교 동기동창회에선 더 목소리를 높였다. 거긴 옛날 남녀 공학이었음을 감안해 보자. 그 모임에선 그가 아내와의 잠자리의 질까지 들먹였다. 어디서든 그는 장수(將帥)라도 된 듯 으스대기도 했음은 물어보나마나.
하니 말이다. 그는 그로부터 이웃들과의 친교 활동에서 ‘장수(長壽)’를 가장 큰 화두로 삼을밖에. 백열여섯 살 여학생과 백세 살 한의원 원장의 삶에서 ‘건강하게 오래 산다’는 자체가 그만큼 축복받을 만한 일임을 거듭 확인한 결실이라 하자. 두 분의 이승과 저승을 초월한 조우(?)야말로 자신의 암 수술 아니었으면 불가한 기적임을 전제하면서….
그는 두 분에게서 두 개의 명제를 얻은 셈이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요약하면 각기 ‘노래’와 ‘남 허물 입에 올리지 않기’다. 두말할 나위 없는 생활화다. 밤낮으로 의식이 있는 한 실천하리라 각오한 거다. 다만 후자(後者)가 그리 만만할 리 만무하니 그는 가끔 절망에 빠진다.
그럴수록 민요는 그에게 이런저런 것 떠나 부를수록 위안이 된다. 지금 그가 완창할 수 있는 민요는 예순 곡을 이미 넘겼다. 거슬러 올라가면 그 옛날 민요집까지 만들어 보급해 가며 노인학교에서 가르쳤던 자신이 아닌가? 제자만도 줄잡아 수천 명이다. 왜 이런 허황된 계산이나 오는가 하면 이러하다. 노인들은 그한테 단 한 시간만 민요를 배워도 그들 스승으로 여긴다. 말하자면 사제지간이 되는 거다. 다른 노인 학교에마저 수도 없이 다녔으니, 실제 그의 제자는 연(延) 만 명을 넘을지 모른다. 아래와 같은 기막힌 일도 있었다.
80년대 중반이었으리라. 자신이 근무하는 초등학교에 교실 한 칸을 빌려 정식으로 노인 학교를 연 지 서너 해가 지난 뒤였다. 버스로 편도에 반시간 걸리는 데로 전보 발령을 받았다. 학구 내에 양로원이 하나 있었는데, 거기에서 적잖은 할머니가 자신의 노인 학교 제자였다.
4월 말, 어느 날 학교장이 허실을 불러 어버이날 경로잔치를 하려 하니 오후에 민요로 노인들을 즐겁게 해 줄 수 있겠느냐고 묻는 게 아닌가. 그걸 그가 마다할 리가 없었다. 아니 쾌재를 불렀다고 하자. 교실로 돌아오면서 그는 혼잣말을 했다. 야호 좋다! 오랫동안 정든 양로원 거주 학생들도 모두 초청한다지 않는가. 참, 그날은 오전 수업으로 일과를 끝낸다고 했지.
하루 전, 컨디션이 시원찮은 것 같아 이웃에 있는 작은 병원에서 진료를 받았다. 조퇴를 하고서 말이다. 원장인 여의사가 청진기를 여기저기 대보고 인후(咽喉) 안도 들여다보았다. 그리고는 목감기라면서 페니실린을 한 대 맞으란다. 물론 약도 먹어야 되겠다고 했다. 원장은 약간은 조심스럽게, 반응 검사를 해 보는 게 어떻겠느냐고 묻는다. 귀찮아서 그럴 것까지 있겠느냐고 반문하려다, 밑져봐야 본전이라는 생각에 고개를 끄덕였다. 대신 준비하는 동안에 내일 경로잔치 때문에 그러니 잘 처치해 달라는 부탁도 잊지 않았다. 원장은 검사 결과는 이상이 없다고 했고, 간호사가 주사를 놓아 주었다. 사흘 치의 약도 지어 주기에 바로 귀가했다.
이튿날, 드디어 어버이날이다. 그런데 목감기는 차도가 별로 없는 게 아닌가? 적이 당황했지만, 허실은 가벼운 옷차림으로 학교로 출근할 수밖에. 대타가 있으면 메우면 되었으련만 그도 아니었다. 오후 한 시 운동장에 모여 앉은 노인들을 보니 속이 타들어갔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그는 진짜 민요 열대여섯 곡을 소화시켜 나간다. 역시 우리 가락! 노인들은 난리가 났다. 약속이나 한 듯 거의 대부분이 일어나 춤을 추기 시작한 거다. 그는 이윽고 장구까지 메고 세마치며 굿거리장단 반주까지 곁들였다. 바야흐로 일인이역으로 자신이 신바람을 내다보니 목통증이 조금은 줄어드는 느낌이다. 조례대 위에까지 올라와 춤을 추는 할머니 몇몇이 자신에겐 학(鶴)으로 보이는 건 웬 까닭이었는지…. 경로잔치가 잘 끝났음은 물어보나마나.
그는 조퇴를 하고 다시 병원으로 가야만 했다. 좀 남은 목통증을 가라앉히려면 아무래도 주사를 한 대 더 맞는 게 좋을 듯해서였다. 원장은 무덤덤한 표정에다 건성으로 허실을 맞았다. 딱 한마디, 좀 어떠냐고 물은 것이다. 그도 무슨 대갚음(?)이라도 하듯이 대답했다, 글쎄요….
둘 사이에 냉랭함이 감돌았다. 어느 사이에 허실이 커튼 뒤 조그마한 공간의 침대에 엎드려 바지를 내리는 데까지도 순간이었다. 간호사가 손바닥으로 그의 엉덩이를 딱 소리가 나는가 싶도록 때리더니 주사 바늘을 찔러 넣었다. 아, 그게 나락으로 그를 떨어뜨릴 줄이야! 이른바 말로만 들어오던 주사쇼크에 빠진 것이다.
그는 순간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소리 없는 굉음(轟音)을 듣는다. 어떤 문자로 표현할 수 없는…. 도끼로 머리를 빠개는 듯한 느낌을 받는가 싶었는데, 그는 그만 의식을 잃는다. 대신 그는 맨몸으로 사위가 어두컴컴한 허공에 떴다. 하늘의 초승달이며 별은 보이되 아래로는 끝없는 갈대가 바람에 나부낀다. 팔을 날개 삼아 쭉 펴니 공중을 가볍게 날 수 있다. 뭔가를 생각하려 했지만 떠오르는 게 없다. 그러다가 이윽고 대궐 같은 집 담벼락에 부딪힐 뻔한 순간 땅바닥으로 내려섰다. 몇 걸음 걸어 솟을 대문을 지나 마당으로 들어갔다. 무사(武士) 차림의 사내가 몇몇 우르르 달려오더니 무릎을 꿇으란다. 그들이 시키는 대로 할밖에. 고개를 들라는 말을 듣고 대청마루를 우러러봤다. 염라대왕이다. 대왕의 말이다.
“고생께나 했겠구나. 네가 전생의 노인학교에서 죽자사자 민요를 불렀던 자(者)렷다?”
“그러하옵니다. 대왕마마.”
“넌 큰소리쳤지만 내가 보기엔 미흡한 점이 많았느니라.”
“무슨 뜻이온지요?”
“노인학교에선 너희 나라 민요와 더불어 지냈는데, 야외 소풍 땐 넌 타락까지 서슴지 않더 라. 언젠가는 어느 천주교 성지(聖地)에서 ‘오동추야’며 ‘앵두나무처녀’, 심지어 ‘죄 많은 내 청춘’ 등을 학생들과 불렀느니라. 태국 방콕 시내버스 안에서도 그랬었다, 기억하느냐?”
“잘못 했사옵니다, 대왕마마님.”
“너희 나라 민요가 제일이니라. 그걸 잊었다면 네가 죄를 지은 결과였음이야.”
“대왕마마, 소인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염라대왕은 잔기침을 한 번 했다. 이윽고 안됐다는 표정을 짓더니, 허실을 이대로 데려오기엔 남은 수많은 노인 학생들이 너무 불쌍하다며 혀를 끌끌 찼다. 그리고 내리는 결론이다.
“내 널 돌려보내마. 단 다시 부를 때까지 ‘죽도록’ 민요 등 가락을 노인들에게 보급하도록.”
“알겠사옵니다, 대왕마마님. 감사드리옵나이다.”
“특히 넌 생애 끝 무렵까지 이것 하나만은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완창할 수 있도록 하라. ‘배뱅이굿’! 그게 네 가슴을 종내 꿰찌를지 모른다만, 살려면 약속이 지금 네겐 급선무니라.”
꿈인가 생시인가 싶어 자신의 다리를 꼬집다가 눈을 떠보니, 코에 산소 용접기에서 이어진 호스가 꽂혀 있는 게 아닌가! 숨이 가쁘고 거칠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그는 맥박수를 측정해 보았다, 120회를 넘겼다. 왜 응급실에 데려가지 않느냐고 항의하려 해도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의식도 가물가물하고…. 눈치를 챈 원장이 그제야 미안해하면서 조금만 더 기다리라는 거다. 다시 한 시간여 지나고 나서다. 원장이 어디서 구했는지 최고급 승용차를 대기시킨다. 그길로 학교 후배가 원장인 종합병원에 실려 가서 처치를 받았다. 일이 묘하게 꼬여 친정 질녀가 맹장염 수술을 받았는데, 걔 수발 땜에 아내는 사건의 자초지종을 모르고 있었다.
참, 그 시대에 주사 쇼크는 무엇이며 곧 응급실로 이송하지 않은 것은 웬 까닭일까? 완전하게 의문이 풀린 것은 아니지만, 그 원장은 한지(限地) 의사라더라. 원장은 옛날 허실이 젊은 시설을 보냈었던 삼랑진의 철도 병원에 근무했다고 했다. 허실의 형님과도 아는 사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더 이상 문제를 확대시킬 수 없었다.
그런데 후유증이 심상치 않았다. 빈맥(頻脈) 증상이 사라지지 않는 거다. 거의 죽을 것 같았던 그 순간의 느낌이 수시로 엄습해 왔다. 게다가 과호흡이 와서 출근 중 육교 아래서 실신한 적이 여러 번이었다. 회복이 불가능하다는 절망감에 빠지기 예사였고. ‘명재경각(命在頃刻)’이 따로 없었다. 워낙 황망중이라 그는 그게 공황장애라는 것도 한참 뒤에야 알게 될밖에. 그래도 토요일 오후엔 노인학교에 나갔다. 타 자원 봉사자가 도와줘도, 민요 수업은 그의 몫이었고말고. 노래는 아편처럼 그걸 입에 올리는 순간 그의 모든 증상을 없애 주는 게 아닌가!
그의 노인 학교에 학구(學區)란 개념이 있을 리 없었다. 서너 시간 거리에서 오가는 학생이 한둘 아니었다. 용두산 공원에서 일상을 보내는, 국악 대가들도 두서넛 어김없이 출석했다. 그중에서 특히 인물이 좋고 빼어난 목소리를 지닌 할아버지가 있었다. 80대 초반인데 워낙 유명해서 외국인들이 신혼여행을 오면 꼭 사진 모델이 되어 주어야 한다는 소문을 달고 다녔다. 주로 단가 즉 판소리를 하기 전에 발성 연습 삼아 하는 노래를 불렀다. 한데 그분이 무대(교단이다) 위에 올라서면 약속이나 한 듯이 여학생들이 대부분 얼굴을 붉히는 거다. 허실은 자신만 들을 수 있게 소리를 냈다. 남자는 죽을 때까지 남자고 여자는 죽을 때까지 여자다!
그렇게 몇 년이 흐른 뒤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학교세(勢)가 불어났다. 노인 학교의 온갖 기록을 갈아 치우는 걸 그는 오히려 속절없이(?) 바라보아야만 했다고나 할까? ‘시나브로’ 따위의 부사(副詞)가 그의 노인 학교 진화에 끼어들 틈이 없었다. 온갖 재능을 가진 학생 120명이 스무 평 교실을 메우고 복도까지 채우고도 남았다. 그 진풍경을 모두가 낯설지 않아했다.
이렇게 우기면 남들은 허실을 마치 머리가 돈 사람으로 여길지 모른다. 그에게 ‘죽어도 못 잊을 제자’ 몇몇을 들라 했다 치자. 그는 대답한다.
“백열세 살을 넘긴 할머니 제자가 있어요. 자기 성(姓)을 쓸 줄 모르면서 민요란 민요는 정확 하게 부르는 동성(同姓)의 제자도…. 무엇보다 굿을 할 줄 아는 무당(巫堂)이 넷이지요. 그중 에서도 북한에서 내려온 학생은 ‘배뱅이굿’을 완창(完唱)할 수 있었어요. 보물입니다.”
그렇다. 남도 ‘판소리’에 비견되는 서도 재담(才談)소리가 그거다. 그 기능보유자(?) 전죽선 할머니가 허실을 찾아온 거다. 그가 주사 쇼크에 빠져 그 후유증으로 고생하고 있을 때였다.
“내 고향이 황해도 해주(海州)시였어요. 가끔 가설극장이 세워졌어요. 김종조라는 서도 명창 이 거기에 출연했지요. ‘배뱅이굿’을 부르는데 정신이 아뜩해질 정도로 반해버렸지요. 그래 물 길러 천천히 샘으로 걸어가면서 익히고, 집에 와서 보리쌀 삶으면서도 익히고…. 그분은 그렇게 방방곡곡 순회공연을 했는데, 몇 달이 걸려 다시 나타나곤 했지요. 그러기를 10년, 어느새 가락은 익혔으나 가사가 자꾸만 헷갈려서 고생을 했습니다. 아직 미완성이지요. 공연 이랄 수도 없는 공연에 스스로 빠져 재산 탕진했고, 결혼했으나 남편과 사별했지요.”
잠시 말문을 닫았다가 이야기를 계속하는 할머니의 얼굴엔 범벅이 된 눈물이 줄줄이 흘러내렸다. 당신은 열한 평 아파트에서 살고 있다. 아들 내외는 재래시장에서 돼지 국밥집을 한다. 거기 붙어 있는 쪽방에서 침식을 해결한다는 것도 할머니는 에둘러 밝혔다. 그 사이에 난 유치원에 다니는 손자 하나는 할머니가 데리고 있었다. 다만 토요일 밤에 손자는 부모한테 가서 잠자고 이튿날은 세 식구가 따로 시간을 보냈다. 너무나 다행히 그 며느리가 워낙 잘해 주는 덕분에 세파를 이겨나갔다. 덕분에 ‘배뱅이굿’도 항상 가까이 할 수 있었다.
한데 말이다. 할머니가 너무나 큰 불행을 겪은 당한 거다. 몹시 추운 1월 중순, 어느 토요일 밤, 여느 때처럼 할머니는 아파트에서 혼자 보냈다. 나머지 셋은 식당 쪽방에서 잤고. 며느리가 아침에 몹시 머리가 아픈 가운데 일어나 보니 남편과 아들이 숨을 쉬지 않는 거다. 가스에 중독된 걸 직감한 며느리의 신고로, 병원에 실려 갔다. 하나 살아난 것은 자기뿐이었다.
그건 너무나 큰 엄청난 사건이었다. 고부(姑婦)가 실성 직전에까지 갈 정도였고, 한 가정이 풍비박산이 되는 순간이었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허실이 앞장서서 사태를 수습하고 장례까지 주도해 치렀다. 할머니가 당한 사고는 많은 사람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그 와중에 며느리가 눈물겹게 효도를 해도 당신의 건강이 회복되지 않는 게 문제였다. 한 달이 그렇게 지나고 나서 며느리는 다시 장사를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전세 문제도 남아 있었더란다.
그런데 일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4월 어느 일요일 며느리가 시내에 나가 볼 일을 보고 좀 늦게 귀가를 했다. 그런데 아파트 현관에서부터 분위기가 심상찮더라는 것. 아니나 다르랴. 시어머니가 일상을 보내는 큰방 문을 열고 보니, 아 당신이 북쪽을 향해 반듯하게 엎드린 자세로 꼼짝을 하지 않고 있다. 놀라서 시어머니를 흔들어 봤는데 당신이 그만 모로 쓰러진 것이다. 그런데 그 앞에 메모지에 뭔가를 적은 것과 항상 지니고 있던 대학 노트가 놓여 있다.
메모지를 든 며느리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두 장이었다. 한 장은 며느리에게 고생을 시켜 미안하다는 마음을 적었다. 그리고 아직 젊으니 이런저런 생각을 하지 말고 개가하라는 당부였다. 노인학교에 가끔 나가 청소라도 도와주라는 말로 끝을 맺었다. 다른 하나는 허실에게 보내는 거였다. ‘배뱅이굿’을 좀 더 파고들지 못해서 미안하다는 것을 서두에 적었다, 저승에 가서도 기원할 테니 선생님이 어떻게든 매듭을 지어달라는 간절한 부탁 뒤에, 대학 노트에 적은 게 ‘배뱅이굿’ 가사란 말도 잊지 않았다. 창졸간에 다시 할머니의 장례-노인학교장(老人學校葬), 개교 이후 처음-를 모시게 된 허실도 거의 반죽음 상태일밖에.
배뱅이굿 가사 노트를 전해 받은 허실은 거기 얼굴을 파묻고 흐느꼈다. 몇 달을 그렇게 슬픔과 충격에서 헤어날 수 없었다. 공황장애도 재발하였으니 사는 게 사는 게 아니었다. 노트 구석구석은 할머니의 눈물 흔적으로 젖어 있었다. 처음에 쓴 가사는 그야말로 맞춤법 따윈 엉망이고 글씨 또한 비뚤비뚤했다. 고쳐 적어보자. (창) 서산낙조 떨어지는 해는 내일 아침이면 다시 황천길이 얼마나 먼지 한번 가서는 못 오누나 에헤 에헤 에어미 염불이로다/ (대사) 옛날 서울 장안에 이정승 김정승 최정승이 재산은 많았으나 슬하에 일점혈육이 없어(이하 생략)
그러다 중간쯤에 가서는 약간 알아 볼만한 글씨로 적었는데…(대사) 이때에 불쌍히 죽은 배뱅이 열두 매끼 졸라 가지고 서른세 명 역군들이 상두대체 둘러메고 북망산으로 올라갈 제/ (상여소리)너너 너너 너거리 넘차 너너어 배뱅이 오마니 거동 보소(이하 생략)
마지막을 해석할 재간이 허실에게는 없었다. 한 줄로 적어 본다. (대사) 평양 감영 다 팔아 먹은 재산 이번 굿에서 반봉창이 되었구나 에 에헤 에허어미 타불이로다(이하 생략)
마침 그 무렵에 이은관의 배뱅이굿 씨디가 나왔으니 허실은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이었다. 정확한 가사도 입수하여 씨디 플레이어를 통해 그 모든 걸 익혀가기 시작했다. 10년 세월을 그렇게 보냈지만 그 실력은 전죽선 할머니에 못 미쳤다. 그래도 그는 노인학교 수업 두 시간 동안 그 일부라도 불러야 직성이 풀렸다. 이윽고 교직에서 정년퇴임함으로써 21년간의 노인학교와도 이별한다. 그 뒤 다른 노인 학교에서 수업도 했지만 어찌 옛날만 했을까?
다시 십년 여를 흘려보냈다. 그러다 수술을 받고 윤(尹) 씨 성을 가진 백세 살 한의원 원장을 만난 거다. 그리고 노래 제목만이라도 둘의 화두에 올렸으니 어찌 예사로운 일이랴. 참, 몇 ㄲ은 부르기도 했었지. 이젠 유튜브를 통해 민요란 민요는 다 익히고 있고, ‘배뱅이굿’도 거의 완창하기에 이르렀다. 만세다! 그러나 죽는 꿈을 부쩍 많이 꾸는 요즈음이다. 호사다마(好事多魔) 따위와는 차원이 다른 정신세계에서 그는 연명한다. 물론 어깨 외엔 아픈 데도 별로 없고.
그래도 가끔은 염라대왕과의 첫 만남의 장면이 떠올라 고개를 갸웃거린다. 그분이 말했었지. 가슴이 꿰찔릴지 모른다고. 생각해보자. ‘배뱅이’는 부모를 앞두고 먼저 저승에 갔으니 만고에 불효여식 아닌가. 허실도 참척을 겪었다. 두 경우가 다른 건 허실이 큰 죄인이란 점에 있다.
그는 생각한다. 창졸간에 내가 이승을 떠난다? 별로 두렵지 않다. 먼저 임들-제자 및 혈육 등-이 약속대로 거기 노인학교를 세워서 자길 기다리리라 믿기 때문이다. 첫 수업을 할 때 누구를 초청할 건지 신경 씀은 당연지사. 이승에서 직간접으로 연연을 맺은 모든 사람들이다. 노래도 골라야 한다. 물론 우리 가락이다, 일흔 곡에 가까운. 그는 이 모든 걸 전죽선 할머니(학생)의 ‘배뱅이굿 노트’ 여백에 적어나가는 중이다. 윤 원장, 그분의 생사도 궁금할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