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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너무 반갑습니다.
항상 얼굴 예쁘신 분들 보시고 사시는 분들이시고, 몸매 좋으신 분들 보시고 사시는 분들이시고, 성경에 나온 어떤 역사보다 더 드라마틱한 것을 만드시고 제작하시고 또 옆에서 돕는 손길들로 계시는 분들이시기 때문에,
제가 얼굴로 한번 튀어보기는 그른 것 같고, 몸매도 그렇고, 하나님이 그 역사의 경영하심에 그저 일점 작은 먼지같은 제 삶의 이야기인데 도대체 여기 계신 분들께 어떻게 전할까? 두려움이 앞서고, 또 항상 두렵다 하면 하나님께서는 “두려워말라 내가 준비해 두었다”고 항상 말씀하시기 때문에 기대도 그만큼 큽니다.
kbs와 저와의 인연을 3가지로 추려볼게요.
초등학교 4학년 때 케비에스에서 카메라를 들고 어떤 선생님이 오셨어요.
다다음주에 ‘모이자 노래하자’ 대도초등학교 편이 방영된대요. 우리학교를 찍어가신대요.
그당시는 MR녹음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모이자 노래하자’ 이것을 반주를 해야 하는데, ‘대도초등학교’ 그 반주 할 수 있는 사람은 그당시 ‘박지영’ 저밖에 없었습니다. 악보없이 그대로 맞춰서,높게도 낮게도 칠 수 있는, 친구들 소리에 맞춰 높게도 낮게도 칠 수 잇는 사람은요.
오르간으로 반주를 했어요. 운동장으로 풍금을 끌어내어 놓고,
“다음주에는 케비에스로 너희들 다와야 된다, 그날 선생님 말씀 잘듣고 오늘 연습한대로 그래로 녹화 해야 돼. 하기 싫은 사람 손들어 봐” “저요,”하고 손들었어요.
담임선생님 옆에 서계시다가 저를 부르셨어요.
“박지영 이리와봐, ‘모이자 노래하자’ 왜 못간다는 거야?”
“선생님 저 전학온지 얼마 안됐는데, 오늘은 오르간 반주가 필요해서 제가 쓰였지만 친구들 녹화하는 날 저는 노트필기 좀 배껴야 겠어요. 모이자 노래하자를 못갈 것 같아요.“
‘모이자 노래하자’를 안가는 바람에, 철없이 못가는 바람에 케비에스와의 첫 번째 인연을 제가 뿌리쳐 버렸습니다.
몇 년전부터 다시 케비에스와의 인연이 시작되었습니다.
기독신우회에서 제가 15년전부터 봉사하고 있는 ‘한시미션’이라는 단체에서 매년 8월 둘째주면, 교회없는 지역으로 내려가서 봉사도 하고 말씀도 전하고,
그 일주일 동안 만났던 꼬맹이들 겨울에 3박4일 초청을 하는데, 케비에스로 초청을 해서 많은 예수믿으시는 어여쁘신 탈렌트 가수분들 예수 열심히 믿으면서도 멋지게 일하시고 이렇게 멋진 방송국에서 일하신단다 보여주기 위해 견학을 데리고 오면,우리 신우회 분들이 항상 따뜻하게 맞아주시고, 손잡고 스튜디오안에 들어가게 해주시고,데스크에서 앉아보게 하시고, 굉장히 바쁜 스케줄가운데 아이들이 마이크 만져보고,,하는 것을 탓하지 않으시고 소중한 기회들을 주셔서 제가 친구들하고 몇 년전부터 드나들었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 인연이 오늘인 것 같아요.
여러분들 너무 귀한 분들이고,
직장에서 시간을 떼어내어 예배드린다는 것이 어떻다는 것, 그 전의 스케쥴과 그후의 스케줄을 생각할 때 여기 온전히 몰입하기가 얼마나 힘드심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바쁜 중에도 기도하면서 일하시고, 그렇게 애쓰시면서 오늘 모이신것에 감사드리면서 짧은 이야기 전해보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 좀 생뚱맞을 수 있겠어요.
‘이드로’라는 사람이 나와요.
이드로라는 분은 사위를 하나 맞았는데, 이상한 사위를 맞으신 분이세요.
사위의 직업은 ‘목동’, 사십년 근속한 목동
근데 목동을 일찍 시작 안했어요. 마흔살에 시작했어요.
마흔살에 처음 목동을 시작하는데, 눈빛이 이상해.
전과자에요.
폭행치사 및, 사체유기 혐의 있고, 야반도주해서 미디안 광야에서...
눈빛은 이상한데 자기는 목동이래요.
사십년 지켜보니까 그대로 목동이에요.
아무 일도 안하고 목동일만하고 양들의 꽁무니만 좇아다녀요.
사십년이 지났는데 어제의 사위가 아니에요. 어제의 모세가 아니에요.
자기 불받았대요. 가시덤불에서 봤다하고, 신발만 벗어 들고 벌벌 떨고 있어요.
공소시효가 지나서 애굽으로 돌아간다해도 옥방을 살진 않더라고 아무래도 죄짓고 나온건데 무섭잖아요.
막대기만 하나 짚고 간단 말입니다.
그 힘없는 뒷모습을 장인이 지켜봐요. 못잡고..
10개월이 지났어요. 다시 눈이 더 시뻘개져서 왔어요.
“뭐했냐? 10개월동안..”물으니까, 아주 이상한 말을 합니다.
“개구리가 나오고, 우박이 나오고, 장자가 죽고, 우리는 전광석화 같이 하룻밤만에 뭐를 바르고 바르고해서 다 수를 싸들고 나왔다하고, 홍해가 갈라졌다고 하고, 반석에서 물이 나왔다 그러고, 하늘에서 만나가 쏟아진다”고 합니다.
그런데 장인 이드로가 고백합니다.
“이제야 내가 똑똑히 알았도다. 모든 신중에서 가장 뛰어나신 이가 하나님이시니”
그래서 네가 그렇게 40년동안 어설픈 목동을 하고, 가슴에 불을 품고 있다가 그것을 하나님께서 불을 피워주셔서 그 오래전부터 계획하셨던 아브라함의 하나님이고, 이삭의 하나님이고, 야곱의 하나님이셨던 그 하나님께서 바로 그 언약을 이루어주시기 위해서 너를 그렇게 고생시키셨고 그 모든 일을 10개월안에 전광석화 같이 해주셔서 이렇게 다시 내 앞에 나타나있구나!
“이제야 내가 알았도다.”하고 고백을 합니다.
아마 성경에 여러 사람들이 간증을 할 텐데, 간증의 의미는 여기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그로가 “야, 우리 사위 진짜 괜찮아!” 이런 말하지 않습니다.
“이제야 내가 알기를, 우리 하나님이 한 분이시라는 것을 알았다”이런 고백을 합니다.
제가 하는 간증이 바로 그런 간증이되기를 원합니다.
들으신 후에 ‘피아노 잘 친데’ 그런 모습이 아니고,
‘이제야 내가 똑똑히 알았네, 그 하나님이 내 하나님이시기도 하시고, 내 부모의 하나님이시기도 하시고, 그 하나님이 아직 안 믿는 내 남편의, 아직 안 믿는 내 동료의 하나님이시기도 하다는 점, 그점 고백하신다면 저는 제 간증의 의의를 충분히 살리고, 그때 ‘모이자 노래하자’를 녹화하지 못한 죄송함을 씻을 수도 있지 않은가?...너무나 감사한 자리인 것 같습니다.
책 읽으신 분들도 계시고, 오늘 특별히 제가 온다고 해서 신우회 아니신 분들고 오신다고 하셨는데..
실은 제책은 ‘트로이의 목마’에요.
제 책 263페이진데..하나님은 세 번 예수님은 한번 나오세요.
보통 ‘불러불러’하시는 분들은 제책보고 은혜가 없다고 하세요.
왜 하나님 말 그것밖에 안 썼냐?
저는 책에는 하나님 135번정도 들어가는데, 나머지 하나님 얘기는 다 뺐습니다.
왜? 트로이 목마가 되려면 밖을 잘 장식을 해야 되잖아요?
‘아 이거 성공담이야, 암이기고 서울대 음대, 서울대 법대 아~싸~’하고 딱 사들었는데,
들고 보니까,
‘아 성공담이 아니네? 지금 이대로도 감사해야 된다는 거네? 하루를 더 살던 삼십년을 더 살든, 무엇이 되느냐? 피아니스트가 되느냐 변호사가 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이후에 무엇인가가 되었다면, 혹여 무엇이 되어 있지 않았다 하더라도 지금 이순간 하나님앞에 살고 있는 내 인생의 일분일초가 의미있다는 그런 얘기네?’ 라는 것을 알아버리게 되는,
그런 내용으로 쓴 책입니다.
그래서 일명 ‘트로이 목마’ 형식상 제목은 ‘피아노치는 변호사,NEXT’입니다.
‘NEXT’라는 이름을 붙인 것을,
‘피아노치는 변호사’라는 책이 나오고, 이번 책이 ‘넥스트’ 두 번째 후속편이신 거에요? 하고 물으시는데..“아닙니다”
‘피아노치는 변호사, 넥스트’가 원제이고 이런책은 다시 쓰지 않을 것 같습니다.
‘피아노치는 변호사’, 피아노 안쳐도 그냥 번호사,
제 변호사 뺏지의 번호가,‘7171번’이에요, 제 뒤로 번호사가 몇 명 더 나왔다는 걸 생각하면 아직 변호사가 만명이 되지 않습니다.
대한민국의 변호사가 되었다는 것 자체로도 너무나 큰 특권이요, 감사의 제목입니다.
그런데 대부분 거기서 끝, 박수를 짝짝짝 ‘신데렐라는 그 후로 오랫동안 행복하게 잘 살았대요’라고 끝을 맺고 맙니다.
그런데 정말 궁극한 것은 신데렐라가 그 이후에도 여전히 자기의 복지와 인권이 아주 억압받았던 잿투성이 때에 있었던 그 모습의 사람들이 여전히 있을 텐데,,여전히 관심을 갖고 있느냐?
그가 왕자님의 사랑만 계속 받고 살고 있느냐? 저는 그게 굉장히 궁금합니다.
백성공주가 멋있는 백마탄 왕자님과 키스 한번 해서 그 후로 오랫동안 행복하게 잘 사는 동안에 여전히 백설공주가 가장 어려운 시점에 함께 했던 광부들의 인권과 복지에 대해서 계속 힘쓰고 있느냐?
그 광부들이 진폐증 시달리는 것에 대해 한번이라도 다시 생각해 봤느냐?
자기가 독사과 먹고 누워있는 동안 그 어려움을 지켜줬는데 백마타고 왕자님 허리 꼭 껴안고 궁전으로 쏙 들어가고 말지 않았느냐? 저는 그것이 가장 궁금합니다.
그리고 저한테도 혹시 ‘피아노치는 변호사, 끝’하고 말아버릴까봐, 손털어버릴까봐.
저한테 경고하고, 경계하고, 권면합니다.
그래서 제 책은 ‘피아노 치는 변호사’ 그걸로 끝나면 아무 소용이 없다.
하나님께서 나한테 함께 하셨던 그 열심이 허사가 된다.
그 이후에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그 특권을 어떻게 사명으로 토해내느냐? 그것이 ‘고난의 의미’인 것이다.
‘고난의 의미’를 말하는 성경의 많은 예가 있습니다.
저는 오늘 이순간까지도 많은 생각을 하고, 아까 나오셔서 기타 반주하시고, 피아노 반주 하시면서, 찬양부르실 때에 그 마음이 억제가 되지 않는데요.
‘고난의 의미’는 고난을 허용하신 분, 고난이 오는 걸 막지 않고 지켜보신 분, 그분 하나님의 수준이 저위에 있는데..
고난을 받는 사람의 수준은 이렇게 일단계, 이단계, 삼단계가 있는 것 같습니다.
젤 하수가 ‘제수 옴 붙었어, 빨리 잊어버려야 돼 ’하는 단계가 있고,
‘여태껏 그 고난 중에 함께 하셨어, 그러니깐 이제 고난 끝, 눈물 뚝 행복시작, 이제부터 행복하게 하면 돼’하는 그 다음 중급이 있고,
그래도 조금 하나 더 높은 급이라면,
“적어도 그 ‘고난의 의미’는 나의 수준에 따라 결정된다.”
하나님 수준은 워낙 높으닉까 그 수준에는 가지도 못하고,
내가 그 고난을 받고, 그 레슨을 받은 사람이 그 레슨을 받고나서 업그래이드 됐나? 안됐나? 를 내가 점검해야 한다.
그래서 나와 동질의 고난을 현재 당하고 있는 사람한테, 내가 과거 주님으로부터 받았던 그 위로를 현재 그분들에게 다시 전해줄 수 있냐?
그래서 과거 내가 받았던 그 고난의 순간,그 어둠의 터널을 지나는 순간은,
‘재수 옴 붙은 시간’이 아니고, 빨리 잊어버리고 털어버리고 묻어버려야 할 사건이 아니고
정말로 하나님께서 특별히 허락하신 특권이요, 보석상자가 아닌가?
그 보석상자를 나만 갖고 있는게 아니라, 열어서 보여주고 그 보석상자 안에 있는 밝은 빛으로 말미암아 현재 터널 한가운데에 출구도 입구도 보이지 않는 그 한가운데 있는 분들에게 보석상자를 열어서
“거기 터널에 앉아서 울고 있지만 마, 손을 더듬어 뻗쳐봐, 보석상자가 있을거야, 같이 열어보자구, 나도 열어봤더니 너무 좋았어, 백주 대낮에 고속도로를 달려 왔으면 그 보석상자를 못 들었을 지도 모르는데 내가 그 어둠의 터널을 천천히 가다 보니까 짚였어
짚인 것 조차 은혜야 그안 에서 울고만 있었으면 못 찾았을 텐데..”
“내가 받은 위로로 다른 이를 위로하게 하시는 주시로다”
바로 고난의 순간이 나에게 위로할 수 있는 자격을 주는 ‘위로 자격증부여 기간’이었다는 사실을 후에 고백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
그래서 그 이후로 더 열심히, ‘피아노치는 변호사, 회계사, 의사’로 끝나지 않고 NEXT의
‘넥스트’를 기대하시는 하나님께 그 기대에 부응하게 사는 것,
이것이 정말 고난을 고난답게 사는 것이고, 고난을 허용하신 분, 고난이 오는 것을 막지 않으시고, 어떻게 그것을 통과하나 지켜보신 분에 대한 아주 작은 예의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5살부터 20살까지 항암치료를 받다가, ‘어 이렇게 피아노 연습을 안하면 내가 사는게 아니지’하고 내가 항암치료를 받다가,
피아노 위에 올라 앉아서 20분동안 초등학교 때 치던 모차르트를 치다가 코피를 왈칵 쏟고,
더 이상 피아노를 칠 수 없게 됐다고 느끼게 된 20살 어느 봄날까지 15년동안 단 하루도 안 빼놓고 피아노를 치면서 살았습니다.
15년동안 손가락끝에 굳은 살이 다 배겨서 개구리 왕눈이 같은 손이었는데, 항암치료받은 한달동안 그 피아노를 안 친 한달동안 굳은살이 다 없어지고 말랑말랑한 손으로 돌아와 버렸습니다.
그 때는, 20살까지는 이 세상이 ‘피아노’와 ‘피아노 아닌 것’으로 나누어졌습니다.
그 외에 어떤 분류도 저에게는 의미가 없었습니다.
하루도 안 빼놓고 피아노 연습을 했다는 것은 거짓말이고요.
저의 아버지가 2차 석유파동으로 80년도에 부도를 맞으시면서,
그 중고피아노, 팔아봤자 20-30만원밖에 안되는 걸 팔아서 열흘동안 자금을 융통하는 동안, 그 열흘을 뺀 나머지 15년간을 피아노 연습을 했습니다.
예원학교에 들어가는 건 사치이자 불효였지요.
덜컥 시험을 쳤고 저는 항상 예원을 ‘붙었다’로 표현한적이 없고 ‘붙여주셨다’고 표현을 하는데, 붙여주셔가지고 예원학교를 다녔습니다.
다른 친구들 각계각층의 아주 고위급 자제들 제벌자제들 다니는 학교였지만, 저는 하나님앞에 겸손과 성실성 하나로 내 미래를 담보받으면 된다.
6년간 공부, 피아노 한번 니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해보자 하고 매진해서 레슨을 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 향방없는 열심, 왜 피아노를 칠려고 하는지 모르던 그 열심,
좋아서 잘하려는 건지, 잘해서 좋아하게 된건지 모르는 그 피아노를 15년동안 쳐왔던 그 순간들이 지금 생각하면 너무나 필요한 단련의 과정이었지만, ‘하나님을 빼놓은 채’
하나님을 빼놓았다고 제가 주일성수를 안했다거나 그런 차원은 전혀 아니었을 겁니다.
교회 열심히 다니고, 주일학교 예배 반주 항상 하고, 지각 못하고, 중등부, 고등부 학생회도 임원 다하면서 하는 열심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내 삶의 목표는 ‘피아니스트가 되는 것’ ‘피아노 잘 치는 것’ ‘그걸 위해서 공부 잘하는 것’ 그걸 위해서 하나님의 영광위해서 그렇게 했노라고 말할 정도의,
하나님이 양념으로 쓰이는 상태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리고 이 순간도 제가 혹시 그 본말을 전도해서 ‘하나님의 기쁨과 이웃의 기쁨을 위해서 산다’라고 하면서 그 말을 하는 걸 이유로, 내 변호사 일이라든지,내 봉사하는 일을 본말을 전도시켜서 하나님을 양념삼고 있지 않는지? 나아가 이웃까지 양념삼고 있지는 않은지?
제가 지금까지도 저를 경계하고 있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아! 피아노 너무 잘쳤어요.
그래서 책보신 분들 ‘슈만의 토카타’ 쳐보하고 하시는데, 슈만 토카타 열심히 쳐서 피아노과 2등하고 너무나 기쁘고 좋은 시간들 적어도 내가 하나님 앞에 뭔가 기대하고 이루어냈다는 그런 소소한 기쁨들 많이 가졌던 예원,예고 시절이었습니다.
당연히 ‘서울대 음대 피아노과’ 지원했었는데, 똑 떨어졌어요.
‘떨어질 수 있구나! 평생 치기로 한 피아노니까 1년정도 대학생으로 치지 않고 재수생으로 친다해도 그리 나쁜일은 아닐거야, 정기대학 10명중에 2명붙고 8명 떨어지는데 내가 그 8명에 들었으면 지극히 정상이야’ 라고 생각을 했어요. 그렇게 저를 위로해줄만 했어요.
1989년에 19살에 5월달, 여전히 재수생으로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원래 피아노를 열심히 치면 어깨도 아프고 손가락도 아프고..항상 정형학교를 다니면서 물리치료를 받아왔어요.
근데 통상의 그것보다 아픈 통증이 다가와서, 그것도 너무 기분나쁜 통증이고 심상치가 않아서 다시 병원을 찾고 ‘응급A’라는 점수를 받았어요.
큰병원으로 옮겨서 그 병원에 있는 모든 첨단기계에 제 몸을 한번 통과시켜보았습니다.
삼주후에 내린 결론은 ‘임파선 암’이었습니다.
19살이었고, 너무 보고 싶은 것 많고, 하고 싶은 것 많고, 피아노 치고 싶은 곡 많고, 먹고 싶은 것 많고, 머리 이렇게도 하고 싶고 저렇게도 하고 싶은 19살이었는데,
머리 이렇게도 하고 싶고 저렇게도 할 수 없게 머리카락이 빠지고, 피아노 칠수 없게 손가락 힘이 빠지고,
피아노고 뭐고, 일상생활이고 다 못하고 그냥 젖은 국수처럼 늘어 붙어서 천장의 벽지 무뉘만 세고 있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그 부분에 대해서 저에게 많이 물으셔요.
“그 때 기분이 어땠느냐? 살 것 같았냐? 죽을 것 같았느냐?”
그런 생각을 하는 생각의 속도보다는, 육체의 고통의 속도가 빨랐습니다.
저는 바보같이 XX하지 못하면 어떻하지 하는 생각을 하긴 했는데,
그 생각을 하고 밥을 찾기도 전에 10시간씩 토해야 되는, 장기가 다 빨려져 나갈 정도로 토해야 하는, 토하면 여기서 2미터 정도 제 몸이 튕겨져 나가는
그래서 어머니가 제 허리를 꼭 붙잡고, 토한게 휴지통에 다 쌓이면 갖다 버리고 다시 새 비닐을 바꿔주셔야 하는 그런 반복이 수개월이 계속 되었어요.
당연히 자연스럽게 피아노에서는, 건반에서는 떠나야 했지요.
천년만년 살지 않더라고요.
그리고 아침에 일어나서 “오늘 하루 살기를 어제부터는 덜 아픈 오늘 하루가 되게 해주세요”하는 소박한 꿈,
‘피아니스트’같은 것은 상상도 못하는 그런 시간들이었습니다.
‘아 우리 삶이 한시적 삶이구나,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이 다시오심을 믿고 ,우리 인생이 유한하고 하나님 앞에 MM에 불구하다는 것을
내 피부에 닿게 살고 있지는 않았구나, 이제사 내몸 아프니까 그걸 알게 되는구나
많은 분들이 암을 60세, 70세에 앓으시고, 노한과 겹쳐 앓으세요.
“너무 빨리 앓은게 억울하지 않냐고” 많이 물으시는데, 기왕 깨달을 거면 빨리 깨달은 것이 저에게는 행운이었던 것 같아요.
60세 70세에 만약 걸려서 그 때부터,
‘하나님의 기쁨’과 ‘이웃의 기쁨’을 위해 살려 했다면 마음이 너무 급했을 것 같아요.
‘나한테 너무 시간이 안 남았다’는 생각이 들었을 것 같고
여전히 그마음 같지만, 한시적인 삶이라는 것은 알지만,
적어도 주님께서 주신 젊음 앞에 마치 천년만년 살 듯이 꿈꾸고, 오늘 하루 살 듯이 행동하면서 살게된, 아주 소중한 레슨을 받은 기간이었다고 생각을 합니다.
어느정도 치료를 마치고, 책에도 나오지만 치료를 마친 건 아니었고요.
너무너무 아파서 그냥 병원을 도망쳐 나왔습니다.
음식으로 조절을 했고, 기도와 믿음으로 그냥 버텼습니다.
정말 무지하기 짝이없는 선택이라고 비난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무지하다는 말을 듣기 싫어서 그냥 있기에는 몸이 너무 많이 괴로웠습니다.
그래서 자연식으로, 식이요법으로 몸을 추스리는 기간들이 있었고,
어느새 시간이 흘러서 제가 재수도 안하고 형식적으로 삼수생이 되어 버렸어요.
대학은 가야 했어요.
왜냐면 무엇을 하는지는 중요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대학이라는 넓은 세상에 가서
‘내가 하나님앞에 무엇을 어떻게 할건지’ 한번 저를 내던져 보아야 하기 때문에,
그래서 서울대 음대안에 ‘작곡이론과’라고, 제가 그 때 갖고 있었던 실력과 그당시 소품의
피아노곡과 학력고사와 내신성적을 합쳐서 갈 수 있는 10명만 뽑는 과였습니다.
91년에 ‘서울대 음대’에 합격해서 4년을 다녔는데요.
저는 서울대 음대를 ‘간이역 대합실’이라고 표현을 했습니다.
서울대는 종착역이 될 수 없지요.
서울대 아니라 그 무엇도 종착역이 되는 건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적어도 제가 어디갈지는 몰라서 잠깐 간이역에서 내려서 쉬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열심히 고민을 했지요.
이 한번밖에 살지 않는 삶을, 이쪽방에서 저쪽방으로 삶에서 죽음으로 얼마든지 경계를 넘나들 수 있는데, 나는 우연히 이쪽 ‘삶의 방’에 남아있다.
‘이유가 뭘까? 하나님앞에 꼭 돌려드려야 되는데..’
가슴이 막 두방망이질 치는데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어요.
감사함과 두려움 때문에 같이 두방망이질을 치는데도.
고민하면서 아무일도 안하는 ‘우’까지 범할 수는 없었어요.
그건 이중으로 바보가 되는 것 같았어요.
고민만하고 고민한다고 아무것도 안하고,
그래서 무엇인가는 해야 했어서
91년부터 우리 꼬맹이들과 함께 하는 사역 ‘한시 미션’에서
지금까지 15년동안 ‘선교봉사활동’을 91년부터 시작했어요.
우리 친구들, 꼬맹이들, kbs에 올 때 kbs분들이 저희를 못 알아 보십니다.
왜냐면 호루라기 불어서 45명을 “이리와, 저리로와”하지 않거든요.
1대1로 애기들 한명에 저같은 청년 한명, 성인 1명,직장인 한명
그래서 삼촌이 조카 직장 구경 시켜 주듯이 슬슬슬슬 들어옵니다.
그래야 그 아이들이 서울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안되고, 그들이 서울을 구경할 수 있거든요.
그런 섬김의 노하우를 하나씩 하나씩 배워가면서..
그리고 기회가 되면 저들에게 그 마음에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저들이 지금 살고 있는 시골은 아무것도 교육의 혜택을 못받는 곳인데,
복음의 혜택에서까지 소외될 수는 없기 때문에,
그런 혜택을 조금이라고 줄려고 애쓰는 그런일을 하면서..
‘이게 진짜구나!’ 피아니스트가 진짜가 아니고, 변호사가 진짜가 아니고..
이일을 하다가 오늘 암걸려 죽든, 감사하게 30년을 더 살든,
‘이일을 하다 죽으면 후회가 없겠구나!’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그렇게 생각을 하고 나니까, 인생의 목표가 분명해지니까 하늘 색깔이 달라지더라고요.
내가 이제껏 달려 왔던 기차는 ‘하나님의 기쁨과 이웃의 기쁨을 위한 종착역을 가기 위한 기차였고, 지금 그 기차가 잠깐 고장이 나서 다른 기차로 갈아타면 된다.
근데 아직 기차를 못찾았어요. 너무 헤매고 있었는데
음대 졸업하던 해에. ‘한시미션’ 지금 같이 사역하고
제가 지금 섬기고 있는 ‘하이 기쁨교회’의 담임 목사님이신 조병호 목사님께서
“니가 얼굴은 아니다, 몸매도 아니다, 그런데 머리는 좀 되는 것 같다.
이웃의 기쁨과 하늘의 기쁨을 위해서 정말 예리하고 힘있는 도구 하나 가져보지 않을래?”
“그거 뭐예요. 저 정말 갖고 싶어요. 제가 건강만 된다면..”
“‘법’이란거 있는데 한번 해볼래?”
생뚱맞기 짝이없는 일이었지요. 180도로 바꿔야 하는 일이었는데,
바보같이, 순진하게,
조금만 더 똑똑해서 주판알을 튕겼으면 법을 안해야 맞아요. 건강이든, 그 무엇이 되었던,
제 인생 반경 100킬로 미터안에 법과 관계된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거든요.
‘정보의 부재’ 같이 협력해주시는 분들의 부재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냥 1995년 ‘서울대 음대’졸업하던 그 해에 신림동 자락의 여자 고시원에 짐을 싸가지고 들어갔어요.
법학서적을 몇 개 샀어요.
이건 법학서적이 아니에요. ‘상용문자’내지 외계인들이 써놓은 ‘괴문서’죠,
전혀 읽을 수 없는, 해독할 수 없는..
이걸 어떻게 내가 읽어서, 이해해서, 암기해서, 다시 내것으로 바꿔서 답안지에 써서
사법시험 채점 위원들에게 내가 알고 있다는 걸 증명할 수 있을까?
‘미션 임파셔블’ 이었죠.
5년동안 맨땅에 헤딩했어요.
맨땅에 헤딩을 하고, 2000년에 사법시험 최종합격, 당시 서울대 법대 4학년 재학중,
‘서울대 법대 대학원 특차합격’ 미리 받아논 상태, 그상태가 2000년 말에 되어 있더라고요.
제 책 201페이지에 보면 거기 ‘그 정신병자 방 같은 방이었다’고 나옵니다.
고시원 방인데, 환기할 수 있는 틈만 남겨두고, 방바닥은 자야 되니까 빼고
나머지 다섯면 전체에 천장까지 포함해서 암기사항으로 전부 도배가 되어 있던,
시험 끝나고 와서 그거 떼어내는데,,2시간이 걸렸어요.
버리는 쓰레기 처리 비용이 2만원이 들 정도로,
그렇게 암기사항을 모두 붙여놓고, 눈을 감는 그순간까지, 자는 그 순간까지 외울려고
그렇게 하지 않고는 쫒아 갈 수가 없었어요.
몸 힘들면 자야 했고, 아프면 아파야 했고...
그런 시간들을 보내고 소중한 합격의 결실을 맺었어요.
대부분은 성공스토리가 여기서 끝나야 됩니다. 그래서 ‘박수 끝’
그런데 제 생각에는 바로 이 지점까지는 “저 기차 올라 탔어요” 라고 말하는 그 순간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럼 물어야 되지요. “그 기차 어디가는데? 광주가는데? 부산가는데?”
“하나님의 기쁨과 이웃의 기쁨을 위해 열심히 달려 보려고요”
“그 기차 좋은 기차야, 그 기차 아무나 타는 거 아니야, 그 기차 잘 탔으면 그 기차 타게 해주신 분께 합당하게 살아야 돼”
그 말씀이 저를 오늘도 두방망이질 치게 하는 말씀입니다.
‘음악’ 20년 했어요. ‘법’, 올해로 한지 딱 10년 됐어요.
35살을 그렇게 20년과 10년을 나누어 살았습니다.
음악은, 사회 저 앞에 있어요.
사람들은 아무도 아는 척 안하는데... ‘호주제’가 나쁘다고, 또 어떤 법이 안좋다고 길거리에서 퍼포먼스를 하죠. 얼굴에 시커멓게 칠하고,
사람들의 가슴을 자극을 해요. ‘어 이런 제도가 있었어, 이런 제도에 이런 허점이 있었어?’
시대정신을 예술매체가 반영해서 사람들을 자극합니다.
사람들이 “어, 저거 잘못된 거였대, 이거 이렇게 바꿔야 좋데”
사람들의 의견을 모읍니다. 합의를 도출합니다.
‘아이 그러면 이제사 법을 바꿔야 되겠구나!’ 사회적으로 법이 그것을 정의를 해줍니다.
음악은 사회앞에서 사회를 이끌어가준다면, 인간의 행동양태가 어느정도 축적되고, 규율된 이후에
정말로 법제도를 고쳐야 될 필요성, 만들어야 될 필요성, 없애야할 필요성이 생겼을 때에
많은 검토과정을 거쳐서, 합의 도출과정을 거쳐서, 검증을 거친 이후에 법제도를 바꿉니다.
앞의 예술의 모습은 보기 싫으면 안보고 지나가면 그만이지만, 법은 한번 적용되면 모든 사람에게 그대로 적용되잖아요.
그렇게 사회적으로 법이 따라가게 돼 있습니다.
어쩜 사회가 ‘예술’과 ‘법’이라는 스펙트럼 안에 그 창조성과 안정성, 실험성과 공정성, 그 사전성과 사업성안에 사회가 다 들어있는 것 같아요.
제가 그 모든 것을 알려고 처음부터 피아노치고 중간에 아팠다가 법한거예요. 그게 아니지요. 몰랐어요.
그냥, 그냥 제 앞에 닥친 것, 내수준의 얄팍한 믿음으로 하나님과 낑낑대면서 사랑탑을 쌓아가다 보니까 그 스펙트럼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하게 되었어요.
너무나 감사한 일이고, 저에게 주어진 특권이 아닐 수가 없어요.
특권을 먹은 사람은 꼭 사명으로 뱉어내야 합니다.
특권을 먹고 사명으로 뱉어내지 않으면 특권을 먹은 사람은 소화불량이 되고,
특권을 먹지 못하고 특권을 먹고 있는 사람을 바라보는 사람은 배가 고파요.
그 불균형 때문에 사회에 많은 어려움이 있는 것 같아요.
제가 오늘 이 자리에 서있다는 것 만으로
국내에 있는 35만명의 암환자들이 큰 위로를 받을 것입니다.
그일도 제 책을 낸 소중한 이유중에 하나예요.
“암걸렸다 나아서 저 걸어다녀요” 그러면 걸어다닐 수 있는 희망이 있어요.
“저 운전면허 땄어요” 운전면허 딸 희망이 있어요.
“대학교도 갈 수 있어요” 대학교갈 희망도 있어요.
사법시험도 붙었고, 변호사도 할 수 있어라는 희망에까지 끌어올릴 수 있다면,
지금 오늘도 ’나에게 주님이 주신 구역은 침대 사각형 뿐이로구나!’하고 누워계신 그 분들에게 말로 다할 수 없는 새 소망의 희망이 될 것 같아요.
나아가 현재 제가 ‘피아노치는 변호사’가 되었다는 이 사실 하나만으로 머물러 있어서.
‘응 그래 됐어 끝, 여기까지 해주셔야 하나님이 감사한거야’라고 고백하는 데서 벗어나서
과연 그렇게 하신 이유가 ‘내 이후의 삶을 어떻게 운행하시는 하나님의 더 깊은 뜻이 있다’는 것을 제 스스로 견책하면서, 권면하면서
그 희망을 다른 분들께 법으로든 음악으로든 더 나눠드리는 것,
그 모습이 제 ‘넥스트’안에 있기를 하나님 앞에 간절히 소망을 해요.
그리고 현재 같은 어려움 중에 계신 많은 분들께서,
“박지영 변호사도 별거 아니었네, 아팠다가 다 나아서 저렇게 살잖아, 나도 힘내보자”
힘드실 줄 알아요. 너무나 힘드실 줄 알고...
아파서 누워 있을 때 병원에 와서 그 안맞는 기타음으로 찬송가 불려주세요. 복도에 오셔서 청년분들이,
제가 귀가 굉장히 예민하잖아요. 음악 20년 했으니까, 음, 반음 떨어지면 못참습니다.
그런데 누워있을 때는 그 안맞는 기타음으로 찬송불러주시는데, 너무 좋아서
링겔병을 꽂을 데가 없으면, 링겔병을 들 힘이 없어서 병이 내려가요.
그러면 피가 링겔병으로 들어와요.
그런데도 링겔병 피가 역류하도록까지 그 찬송을 들으려고 끌고 나가서 듣곤 했습니다.
여러분 계시는 곳, 너무나 아름답습니다.
지금 현대 사회를 살면서 방송의 힘은 특권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하나님을 잘 방송하는 분, 어떻게 예수님을 잘 광고하시는 분이 되실까?
케비에스 기독신우회에서 함께 고민하고 실천하시게 되기 바랍니다.
실천이 없으면 다른 사람들은 알 수가 없어요.
내가 받은 사랑 표현하지 않으면 알 수가 없어요.
예수님을 가장 잘 피알 하시는 분, 예수님이라는 그 가장 역적의 극적인 드라마를 가장 잘
연출해서 표현해 주시는 분들,
그 코드를 어떤 곳에서건 다 집어넣어서 ‘트로이 목마’를 만드셔서 사람들에게 보여주시는 분들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그 자리에 아마 저도 함께 할 수 있을 겁니다.
‘이웃의 기쁨’과 하나님의 기쁨을 위하는 그 자리에는 우리 다 산봉오리에서 만나게 될 거에요.
우리 ‘피아노 치는 변호사’가 되는 것 ,‘연출가’가 되는 것, 작가가 되는 것은 ‘베이스 캠프’를 친 것에 불과해요.
베이스 캠프쳤는데 케비에스 9시뉴스 헤드라인에 뜹니까? 안 뜹니다.
근데 우리는 베이스캠프 친것에 박수치는 시대에 살아요.
베이스캠프를 친 것은 진짜 기초만 다진 것이고, 산봉우리에 올라가서 만났으면 합니다.
산봉오리는 하나님의 기쁨과 이웃의 기쁨이 실천되는 곳,
소외되고 어두운 곳, 나의 감정과 나의 시간과 나의 노력과 나의 작은 그 무엇을
조금이라도 희생해서 그분들과 나누어서 형평케 되고,
그곳에 저희로 ‘너희의 그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
그 간증을 듣고
“이제야 똑똑히 알았네, 하나님이 만 천하에 한분뿐인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고백하는 일이 있게 되도록,
그런일이 저와 여러분 사이에 되도록 계속 재밌게 신나게 많이 만들어졌으면 좋겠습니다.
하루를 더 살든, 30년을 더 살든요,
감사합니다. 이야기 들어 주셔서요.
첫댓글 ------------‘이게 진짜구나!’ 피아니스트가 진짜가 아니고, 변호사가 진짜가 아니고.. “하나님의 기쁨과 이웃의 기쁨을 위해 열심히 달려 보려고요” ...............................“그 기차 좋은 기차야, 그 기차 아무나 타는 거 아니야, 그 기차 잘 탔으면 그 기차 타게 해주신 분께 합당하게 살아야 돼” 그 말씀이 저를 오늘도 두방망이질 치게 하는 말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