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칼이 어디인가 알혼은 또 어디던가
소설가 김종록의 한민족 원류 탐험기- ① 바이칼에 서다
1만3천년前, 한민족의 발자국을 찾아서…
336개의 강이 사방으로부터 흘러들어 만든 위대한 호수 바이칼.
알혼은 이 바이칼에 떠 있는 섬으로 샤머니즘의 고향이자 몽골리안의 시원지이다. 우리네 本鄕인 것이다. 학자들에 따르면 한민족은 약 1만3,000년전 후빙하기인 충적세에 따뜻한 기후를 찾아 바이칼 호수를 떠나 한반도에 들어와 정착한 것으로 보고 있다. 소설
‘풍수’의 작가 김종록이 심령의 울림을 따라 겨레의 얼을 찾아
떠났다. 몽골 초원과 시베리아 대초원을 건너고 이르쿠츠크를 지나 바이칼에 이르는 수차례의 歷程. 그 시원문화 답사의 감회와 여행 경험을 묶어 3회에 걸쳐 소개한다.<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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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칼 알혼 섬에 가자!”
웅혼한 고구려 사나이임을 자칭하는
문명탐험가이자 대학에서 역사를 강의하는 윤명철 박사의 전화를 받고
나는 한동안 감전된 사람처럼 숨을
죽였다. 바이칼이 어디인가. 알혼(Olkhon)은 또 어디던가. 샤머니즘의
고향이자 몽골리안의 시원지이기도
한 그 꿈의 섬에 간다는 말인가.
“어떻게…그곳을….”
나는 차마 믿기지 않아 말을 더듬었다. 그러나 이미 속으로는 ‘물론
간다!’고 외치고 있었다. 윤박사와 함께 만주에 있는 고구려 백암성과 오녀산성 일대를 답사하고 온 지 채 두 달이 안된 즈음이었다. 말이
나온 김에 인사동에서 만나 자초지종을 듣기로 했다. 흥분은 컸지만
요지는 간단했다. 1만년 겨레의 얼을 찾아 제1차 한민족시원문화답사단을 이끌고 학술기행을 떠날 참이라는 것이었다. 주최측은 봉우사상연구소라고 했다. 봉우(鳳宇)는 선도 수련 붐을 일으킨 바 있는 국학자
권태훈 선생의 자호였다.
며칠 뒤 봉우사상연구소의 정재승 소장과 윤박사를 고구려연대 사무실에서 다시 만났다. 모두 잔뜩 기대하고 있었다. 나는 여행 일정을 꼬치꼬치 따지고 들었다. 이미 두차례나 바이칼을 찾았지만 아쉽게도
두차례 모두 알혼 섬은 밟지 못한 터수였다. 그래서 알혼은 발로 디딜
수 없는, 꿈에서도 사무치는 섬이 돼 있었다.
“반드시 알혼 섬에 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저는 이번 여행에서
빠지렵니다.”
두사람은 분명히 간다고 거듭 말했지만 아직 북방에 관계된 일에서
확실한 것은 없다. 많이 달라졌다고는 하지만 북방의 서비스산업은
지금도 영 기대에 못미친다. 분명한 것은 가봐야 알 수 있었고, 가서도
밟아봐야 아는 일이었다. 그래서 일말의 불안을 종래 떨칠 수 없었다.
다시 북방으로 향한다. 벌써 몇번째인가. 여행은 으레 마음을 달뜨게
하지만 나의 북방여행은 하도 엄숙해 은현(隱玄)한 계시를 받으러 가는 구도의 길과 같다. 그래서 언제부터인가 북녘으로의 여행은 ‘순례’로 말바꿈된 터다. 이쯤 되고 보면 여행이 아니라 고행이며 수련이다.
무엇이 나의 북방여행을 이토록 무겁게 만드는가. 바로 역사 때문이다. 말발굽 소리 흩날리며 대평원을 내달렸을 우리네 조상들의 본향(本鄕)이 그곳 북방이란다. 비파형 청동검과 사슴뿔 혹은 자작나무형
금관과 빗살무늬토기 그리고 샤먼 등으로 대강 간추려지는 북방문화가 우리의 뿌리란다.
아직 고고학적 발굴작업이나 인류학적 연구가 미미하여 숱한 비밀을
묻고 있는 그곳 검은 땅이 우리 민족의 중요한 기원지란다.
여전히 풀어야 할 수수께끼가 너무도 많은 터라 단정은 금물이지만
이제껏 밝혀진 사료나 유물만으로도 우리는 충분히 문화적 동질감을
만끽할 수 있다. 더욱이 만주벌판은 부여와 고구려의 역사현장이었으니 어찌 가슴속 피를 뜨겁게 만들지 않겠는가. 그래서 일찍이 단재 신채호는 ‘고구려의 수도 지안(集安)을 한번 가보는 것이 역사서를 1만번 읽는 것보다 낫다’고 했다.
무거운 짐을 지는 자는 현명한 나그네가 못된다. 더욱이 마음의 짐을
지니고 떠나는 나그네는 여행이 뭔지도 모르는 얼치기다. 학술탐사나
취재여행은 그 성격상 얼마간의 부담을 떨칠 수 없다지만 처음 몇차례의 여행은 지나치게 긴장했고 그만큼 무거웠다. 결국 시간이 지나면서 여행도 인생의 한 부분인데 즐거우면서도 유익한 쪽이 낫겠다고
생각을 고쳤다. 그랬더니 오히려 더 많은 것들이 보였다. 어차피 우리
모두는 여행지에서는 이방인이고 그래서 처음부터 한계를 지닌다. 더구나 언어장벽까지 가로막고 있으니 욕심낸들 쉽게 붙잡힐 리 없다.
만주와 몽골, 시베리아는 나라는 제각각이어도 우리에게는 하나로 여겨진다. 만주 벌판을 찾다 보면 몽골 초원이 보이고 그 초원의 연장선에 시베리아가 자리하기 때문이다. 나의 10여년 북녘 여행은 한·중수교 직전부터 만주벌판을 시작으로 몽골과 시베리아까지 발빠르게
쏘다녔다. 나중에는 알타이 산과 서역 티베트 고원까지 영역이 넓어졌다. 그러다 마침내 내 몸을 구성하는 피와 뼈, 영혼의 모태에 대한
목마름을 달래기 위한 주술적 행위로 자리잡아 버렸다.
고즈넉하게 북녘 하늘을 우러러본다. 그곳에는 기러기나 청둥오리 등
우리와 너무 친숙한 겨울철새가 뭔가 구구절절한 소식을 전하려고 편대를 지어 나는가 하면, 밤하늘에는 성스러운 북두칠성이 빛난다. 뿐인가. 백두산 천지와 만주 벌판이 있고 우리들 지친 몸과 영혼을 깨끗이 씻어줄 성스러운 정화수이자 인류의 씻김굿터인 바이칼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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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의 바이칼.호수가 얼어붙으면 그 위로 도로와 철로가 놓인다. |
가는 곳이 곧 길
바이칼로 가는 길은 보통 세 코스가 있다. 블라디보스토크까지 비행기로 가서 거기서 다시 비행기나 열차로 이르쿠츠크로 가는 길이 있고, 몽골의 수도 울란바토르까지 비행기로 가서 거기서 역시 비행기나 열차로 갈아 타는 길이다. 마지막으로 노보시비르스크까지 비행기로 가서 비행기나 열차로 이르쿠츠크로 가는 방법이다.
한때 동대문이나 남대문을 들락거리는 보따리장수들 때문에 생긴 전세기가 직접 서울에서 이르쿠츠크까지 데려다 주었던 적이 있었다.
한번은 운 좋게 그 편을 이용한 적이 있는데 비행기가 뜨네 못뜨네 요란을 떨기 일쑤였고 탑승했다가도 늦은 저녁까지 이륙하지 못해 평창동 호텔에서 하룻밤 묵고 다음날 떠나는 해프닝도 있었다. 돌아올 때도 현지에서 너댓시간씩 기다리게 만들어 러시아의 아에로플로트 항공은 오랫동안 내 기억에 아름답지 못한 문신을 새겨놓았다.
그런데 이번에는 우리 국적의 한 항공사가 문제였다. 이번 코스는 이미 한번 밟은 적이 있는 울란바토르를 경유해 가는 노선이었다. 2001년 6월14일 새벽 5시30분에 인천공항에 집결한 우리는 점심 무렵까지 항공사 직원들과 집요한 승강이를 벌여야 했다. 처음에는 2시간 연발을, 나중에는 현지 기상악화를 이유로 다음날 오전 7시30분에 뜬다는 통보였다. 당시 그 항공사는 파업중이어서 결항이 잦았는데 그들은 일반인이 확인하기 힘든 현지 공항의 일기 악화를 핑계로 승객들을 질리게 만들었다.
다음날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결국 몽골 대사관 영사와 통화해 현지 기상자료를 건네받기로 했다며 험악한 분위기를 연출한 끝에야 겨우 이륙할 수 있었다. 현지 자료를 받아보니 전날 결항한 노선은 이 항공사뿐이었다. 몽골에서 바람 없는 날은 단 하루도 없다. 그것을 구실삼는 데야 무슨 말을 더 하겠는가.
항공사의 횡포로 인해 일행은 출발부터 지쳐 있었다. 하지만 네시간의 비행 끝에 문득 맞닥뜨린 몽골의 초원은 언제 보아도 나그네의 주럽을 싹 가시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연초록 초원은 바다였고 비행기는 그 위를 떠가는 배였다. 드넓은 초원에 구름 그림자가 얼룩진다. 눈이 새뜻해지고 의식이 환기된다. 이곳은 초원의 나라, 바람의 고향인
것이다. 귓가를 때리는 말발굽 소리도 전혀 환청이 아니다.
언젠가 울란바토르에서 고비 사막으로 날아간 적이 있었다. 쌍발 여객기가 사막에 랜딩하는데 활주로가 따로 없었다. 착륙하는 순간 눈을 질끈 감았을 만큼 심하게 흔들렸지만 눈을 떠보니 세상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신선한 충격이었다. 공항에 대기하고 있던 지프도
길이 아닌 곳으로 얼추 방향만 잡고 마구 달렸다. 섬광처럼 스치는 착상이 있었다.
‘청년아, 네가 가면 그곳이 곧 길이다!’
오지여행이 선사한 아포리즘이었고, 드넓은 사막 혹은 초원에서나 가능한 명제지만 이후내 뜨거운 피는 언제 어디서든 그 말을 떠올릴 때마다 맥박을 다듬질했다. 산다는 것이 저마다의 길 찾기이니 길이 어디 공간에만 있던가.북방에서 승마는 놓칠 수 없는 즐거움이다. 전혀
어렵지 않다. 몽골의 유명한 휴양지 테렐지나 만주벌판, 바이칼 호수
주변에서도 신나게 말을 달릴 수 있다.
하지만 때로는 허벅지가 헐거나 떨어지기도 하고 뒷발질에 채일 위험도 있으니 주의를 요한다. 실제로 윤박사는 말에 채여 정강이가 부러지는 사고를 당하기도 했다. 탐험가로 유명한 그는 말을 타고 고구려
유적지를 답사한 베테랑이지만 말에서 내려 무심코 곁에 서 있다 채이는 바람에 여행 내내 고생을 하고 돌아와서도 한동안 깁스를 해야
했지만 앞으로도 결코 말 달리는 것을 포기하지 않겠단다. 그만큼 말타기는 신나는 일이다.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초보자라도 곧잘 말을 달린다. 선뜻 나서지 못하고 부러운 듯 쳐다보기만 하는 유럽인들이나 일본인들과는 확실히
그 기질이 다르다. 우리가 진취적인 기마민족의 후예임을 실감하는
순간이다. 나는 한국인의 맥박 속에는 말발굽 소리가 들어 있다고 믿었는데 그것이 사실임이 입증된 셈이다. 집단무의식의 발현이니 어찌
놀라운 발견이 아니겠는가. 국내에서도 승마공원이 여럿 생겨 얼마든지 말을 탈 수 있다지만 역시 대초원을 달려야 제 맛이다.
“추, 추!”
박차를 가하면서 내지르는 몽골말이다. 일찍이 이처럼 속도감 넘치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다. ‘추, 추!’ 소리에는 바람을 가르는 비장함과
오금에 힘이 뻗치는 긴장감이 스며 있다. 이 단음절 속에 강인한 기마민족의 얼이 온축돼 있는 것이다. 세계를 정복한 공포의 기마병단을
떠올려 보라. 아직도 유럽인들은 그 시절을 악몽으로 여기고, 찬란했던 과거에 비할 수 없이 초라해진 오늘의 몽골인에게는 내심 긍지로
자리해 있다. 몸은 비록 남루해도 자부심을 새기고 사는 그들이 은근히 부러웠다. 대부분의 몽골인들은 자존심이 강하다. 그리고 그것은
세계를 제패했던 역사의 유산에 기인한다. 우리는 잘 살고 있다지만
아직도 역사적, 정신적 열패감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지 않는가.
사실 바이칼로 가는 길 가운데 가장 좋은 길은 우리 땅에서 열차를 타고 북한을 경유하여 백두산 천지에 올라보고 만주의 고구려 유적을
둘러본 뒤 시베리아 횡단철도로 바꿔 타는 코스일 것이다. 이른바 ‘철의 실크로드’를 누벼보는 것인데, 이 길은 일찍이 우리네 선각자들이 달렸던 길이고 무엇보다 경비가 적게 든다는 장점이 있다. 더구나 열차를 ‘철마’로 부르기도 하지 않던가. 말을 타고 다녀야 대륙은 제대로 눈에 들어온다. 그러나 아직 이 길은 기약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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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성낭당과 너무 똑같은
몽공의 오브. |
북방종족의 성소, 하늘연못
그러니 현재로서는 몽골 코스가 최상인 듯싶다. 테렐지나 고비 사막,
혹은 몽골인들의 정기가 나온다는 흡수골(000) 호수를 거쳐 바이칼로
가는 것이다. 특히 흡수골은 몽골인들이 나라에 큰 일이 있을 때 제사지내는 성스러운 호수다. 바이칼 바로 남서쪽에 자리하는데 그 또한
달라이 에치, 곧 어머니의 바다라고 불릴 만큼 거대한 호수다. 수정처럼 맑은 이 호수를 몽골인들은 바이칼에 전혀 손색없다고 자랑한다.
나라마다 성스러운 호수 하나쯤은 가지고 있는 것이 북방종족들의 특징이다. 티베트인들에게는 마팜융초가 있고 만주족에게는 징보후(鏡泊湖)가 있으며 우리에게는 백두산 천지가 있다. 하늘을 모시고 살며
제사하는 풍습이 있는 북방종족들에게 높은 지대의 호수는 천신이 강림하는 성소다.
2001년 6월16일 오전 8시45분, 막 이륙한 울란바토르발 이르쿠츠크행 소형 미아트 여객기 안에서 5년 전의 바이칼 여행을 회상했다.
1996년 8월7일 오후 9시. 나는 그때 막 미끄러지기 시작하는 시베리아 횡단열차에 자리잡고 있었다. 일행이라고는 전직교수 이동한 형과
나, 이렇게 달랑 둘이었는데 둘 다 초행이었고 확보된 정보도 거의 없었다. 예정대로라면 다음날 오후 10시 울란우데에, 그 다음날 오전 9시에는 이르쿠츠크 역에 닿을 것이었다. 몽골쪽 여행사와 러시아쪽
여행사의 업무 연결은 매끄럽지 못해 예약 확인조차 안되는 상태에서
떠나 몹시 불안했다. 일면식도 없는 한인 체류자들의 연락처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 그나마 한가닥 위안이었다.
차창 밖에는 비가 내렸다. 또 무모한 여행이 시작되고 있었다. 무엇 때문에 이런 고생을 사서 할까. 일제때 여러 해 동안 만주와 시베리아를
유랑했던 아버지는 불량한 떼놈, 호떼놈, 붉은 이리떼들이라는 원색적인 용어를 동원해 가며 나의 거듭된 오랑캐(?) 땅 여행을 경계했다.
옛 시절의 일이라며 적이 안심시켜 드리고 떠나왔지만 강도나 비행기
추락 따위의 두려움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열차강도가 있다는 풍문도 들었겠다, 일몰 속에서 미지의 시베리아로 북행하는 침대차에 누운 심사는 고달펐다. 눅눅한 실내 공기도 우울함을 더했다.
4인용 ‘쿠페’ 침대칸에는 몽골인 보따리장수 부부가 합석했다. 그들은 침대칸이 미어터지도록 짐을 바리바리 싸서 쟁였다. 뭔가 걸리는 것이 있었던지 불안해 하는 눈치들이었다. 러시아 뚱보 여차장의
고압적이고도 세세한 검표가 끝나자 그들은 비로소 자기네와 닮은꼴의 외국인인 우리 쪽에 관심을 보였다. 한국인이라는 말에 곧 친숙한
표정으로 접근해온 여자는 그물코에 붙이는 납덩이보다 별반 나을 게
없어 보이는 조잡한 진주 목걸이를 한 타래 꺼내 보이면서 사라고 권했다.
자연산이라고 하는데 동그란 구슬은 하나도 없었다. 남자도 질세라
투박한 가죽잠바를 꺼내 들고 진짜 소가죽이라고 초를 쳤다. 모두 사실일 것이었다. 다만 취향이 아니었기에 기분 나쁘지 않게 사양하고
책을 꺼내 들었다. 그러나 고비사막에서 묻어온 피로의 여파로 잠이
몰려왔다. 곧 알타이 유물인 ‘얼음공주’처럼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고깃배가 들어오면 포구에 파시가 서듯, 시베리아의 역에서는 열차가
들어올 때마다 시장이 선다. 열차가 20∼30분씩 정차하므로 시간은
충분하고 팔 것도 살 것도 많다. 산딸기와 찐 감자, 피로조크(고로케),
맥주와 보드카…. 울란우데 등 바이칼에서 가까운 역에서는 오믈 훈제도 쉽게 구할 수 있다. 오믈은 바이칼의 트레이드마크처럼 돼버린
청어 비슷한 생선인데 비린내도 나지 않고 맛도 좋아 보드카와 곁들이면 그만이다. 내리기 귀찮으면 창문을 통해 물건을 살 수 있고 그마저 귀찮으면 열차에서 상시 공급되는 뜨거운 물로 컵라면을 끓여 먹어도 된다. 식당칸을 찾아 러시아 음식을 체험할 수도 있다. 검은 빵과
생수, 샤실릭이라는 꼬치구이, 샬란카라는 돈가스 비슷한 요리와 닭고기 요리도 있는데 값은 생각보다 비쌌다.
잠자는 땅, 혹한의 거친 대지를 깨우며 달리는 시베리아 횡단 열차여행은 누구나 한번쯤 해보고 싶은 체험일 것이다. 객차는 2인용 ‘룩스’, 4인용 ‘쿠페’, 6인용 ‘프라취’ 이렇게 세가지가 있는데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모스크바까지 9,288Km를 6박7일에 주파한다고 한다. 그 사이 60개의 역을 지난다.
시베리아 대평원을 달리며 맞는 일출과 일몰은 사이버 세계에 와 있는 것 같은 환각을 불러일으킨다. 시베리아는 으레 동토(凍土) 혹은 검은 땅의 이미지로 다가오지만 사실은 빛의 대지이고 숲의 바다다. 겨울이라고 해서 살벌하기만 한 것도 아니다. 눈 덮인 설원에 비치는 햇살은 오로라를 방불케 한다.
비록 겨울이라 해도 숲이 있는 대지는 따뜻해 보인다. 본래 우리는 숲의 인간이었고 우주목(宇宙木)이 즐비한 시베리아 타이가(아한대 침엽수림이 주종을 이루는 삼림지대)는 제신들이 축복을 내리는 성지였다. 언덕이건 호수건 숲이건 바라보이는 그 무엇을 들추어도 요술처럼 북국의 신화가 풀어헤쳐질 것만 같다. 특히 샤먼들이 우주목으로
즐겨 쓰는 자작나무 숲은 신화 그 자체다. 섬세하고 우아한 가지와 파란 이파리를 달고 하늘 높이 뻗어 올라가는 자태는 손을 뻗어 쓰다듬어 주고 싶을 만큼 순수하다. 게다가 은빛이 감도는 그 순백의 껍질에
이르러서는 찬탄이 절로 나온다.
자작나무는 빛의 나무다. 만지면 백색 가루가 묻어나는 둥치에 햇살이 비치면 나무는 날개를 퍼덕이며 둥둥 떠오른다. 시베리아 샤먼의
엑스타시는 이 나무의 상승작용에 편승한 현상이다.
시베리아 횡단 철도는 꿈길이며 시적인 길이지만 다른 얼굴도 가지고
있다. 단순히 저렴한 공간이동을 위해 열차에 탔다면 그 순간 열차는
철창으로 변해 버리고 만다. 수많은 유형수들을 시베리아 강제노역장으로 이송하는 데 쓰인 교통수단이 바로 이 철도라는 것, 그래서 지옥행처럼 지겹고 고통스러울 수도 있는 것이다.
시베리아 횡단철도의 역사는 1891년 3월17일, 당시 황제였던 알렉산드르 3세가 칙령을 공포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당시 러시아는 농민이
급속히 늘어 1인당 경작지가 줄어만 갔고, 이에 따른 농민들의 불만을
해결할 탈출구가 필요했다. 당시의 활발했던 공업화 추세도 농촌의
유휴노동력을 흡수하기에는 역부족이어서 인구분산 효과도 얻고 공업화에 따른 철과 석탄 그리고 목재 등의 풍부한 자원도 공급받을 수
있는 시베리아 개발은 좋은 탈출구 역할을 했다. 뿐만 아니라 러시아의 동아시아 정책의 생명선이 시베리아 철도였다.
모스크바에서 우랄산맥까지는 이미 1880년대에 건설되었고 우여곡절 끝에 1916년 전 구간이 완공되었다. 첫 기차가 이르쿠츠크를 지나간 것은 1898년의 일로, 이때 이르쿠츠크의 온 시민이 꽃을 들고 나가
기차를 맞았다고 한다. 이르쿠츠크는 모스크바와 블라디보스토크의
거의 중간지점으로 이르쿠츠크에서 모스크바 쪽으로 한시간 반 거리에는 ‘팔로비나’라는 간이역이 있다. 말 그대로 정확히 시베리아
철도의 중간지점에 해당하는 곳에 세운 역이다.
시베리아 횡단열차가 아무리 낭만의 상징이라 해도 준비는 철저히 해야 한다. 세면도구나 부식거리, 캠핑용 스테인리스 컵 등을 준비하면
약간의 불편함 속에서도 여유롭게 차창 밖 풍경을 완상할 수 있다. 그러나 역마다 반복되는 오랜 정차와 그때마다 잠기는 화장실 등을 겪다 보면 새뜻하게 다가온 자작나무나 적송 등으로 이루어진 타이가
풍광 바라기도 어느덧 지루해지기 시작한다. 울란우데 근처에서는 바이칼을 보려는 의욕으로 다시 눈이 크게 떠졌지만, 오랜 열차여행은
확실히 사람을 지치게 만든다. 그래서 여유가 있다면 유서 깊은 역에서 내려 주변을 며칠씩 둘러보고 가는 것도 좋다.
김종록
소설가
1963년 전북 전주 출생.
1987년 ‘파수병 시절’로 제17회 삼성문예상 수상하며 등단.
1988년 장편 ‘칼라빈카’로 제1회 불교문학상 수상.
‘동동’ ‘왕자의 눈물’ ‘풍수1.2.3’ ‘제왕의
길’ 등 다수의 장편이 있다.
한민족 정체성 찾기와 천·지·인 삼재사상 탐구를 위한 여행을 계속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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