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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3주일설교 고린도전서14:1-25
본문: 고린도전서14:1-25
제목: 교회는 세우는 은사
오늘은 고린도전서14:1-25의 말씀을 가지고
“교회를 세우는 은사”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은 무엇입니까?
“교회를 세우는 은사”
우리는 고린도전서 13장을 통해서
사랑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나누었습니다.
사랑의 중요성을 알았다면 바울은
우리에게 이 사랑을 최종 목표로 삼으라고 합니다.
최종 목표를 삼으라는 말은
이 사랑을 추구하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우리가 교회 안에서나 삶에서
사랑이라는 결과를 얻어 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라는 말입니다.
앞에서 바울은 믿음과 소망보다
사랑이 더 중요하다고 말했습니다.
물론 사랑은 영적 은사들을
활용하고 발휘함으로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은사라 할지라도 사랑하는데 쓰이지 않는다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은사들을 사모하고 사용해야 하지만
그것은 오직 사랑하는 수단으로 삼아야 합니다.
영적 은사는 분명 우리에게 중요한 것입니다.
영적 은사는 좋은 것이지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그것을 대하는 신자의 태도 문제입니다.
성령의 은사들은 사랑을 열매 맺는 데
꼭 필요한 수단들입니다.
그래서 구체적으로 예를 들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원리만으로 해결되는 경우는 드뭅니다.
영적인 일들에 열정을 품어 사모해야 하는데
무엇보다 예언하는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영적인 은사는 다 소중하고, 따라서 방언도 소중합니다.
하지만 현재 문제가 되는
방언과 예언을 의도적으로 비교하고 대조합니다.
그리고 방언의 상대적 무가치함과
예언의 상대적 가치 있음를 극명하게 드러냅니다.(2-5절)
1.방언보다 예언을(2-5절)
신자들의 모임 곧 교회에서는
예언이 방언보다 더 유익합니다.
그 이유는 명확합니다.
예언이 방언보다 더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방언은 사람이 아닌 하나님께 말하는 것입니다.
방언은 아무도 그 말을 알아들을 수 없습니다.
방언 자체는 사람 사이의 소통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방언은 영으로 비밀을 말하는 행위입니다.
여기서 영은 고상한 소통의 수단이 아닙니다.
오히려 영은 선명한 이해와 소통의
주체이자 수단인 정신과 대립 됩니다.
그러니까 방언은 사람이 아닌 하나님을 향해 말하고,
정신이 아닌 영으로 말합니다.
그렇다고 방언이 다른 언어보다
더 심오하는 말은 아닙니다.
그냥 알아듣거나 이해할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이 방언의 치명적 한계입니다.
바울과 같은 설교자들은 누구나 알 수 있는 말로
신자들에게 하나님의 비밀을 말합니다.
방언은 하나님께 사람이 말하는 비밀입니다.
그 비밀은 하나님께로서 온 것이 아닙니다.
심오한 하나님의 비밀이 아니라
그냥 말하는 사람 자신의 말 못할 속내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방언으로 기도하는 사람들은
무슨 말을 했는지 모르지만
자신의 속내를 털어놓았기에 시원함을 느낀다고 합니다.
하지만 방언하는 사람은 자신도 모르는 말을 하고 있고
듣는 사람도 모르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아무도 모르는 말을
심오하거나 특별하게 생각해야 할 이유는 딱히 없습니다.
그렇기에 내가 내 영으로 하나님께 전하는 말과 기도가
하나님이 그분의 성령으로 나에게 주시는 계시보다
더 심오할 이유는 없습니다.
방언을 말하는 자체는 성령의 선물입니다.
모든 은사가 초월적 존재이신
하나님의 주권으로 주시는 선물입니다.
그렇다면 이해할 수 없는
방언이 하나님의 뜻을 선명하게 전달하는
계시보다 더 귀한 대접을 받아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계시는 알려지기 위해서 주신 것입니다.
그렇기에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으로는 주어지지 않습니다.
방언을 심오한 언어라는 생각은
그 배후에 매우 세속적인 인식이 자리합니다.
다른 사람보다 더 멋있는 사람처럼 보이고 싶다는
세상적인 욕망이 그런 생각을 하게 합니다.
모든 함께한 자리에서 다른 사람이
내 말을 못 알아듣는다는 말은
남 다른다는 데서 오는 멋짐이 아니라 결정적 약점입니다.
이런 방언의 약점은 더욱 뼈아픕니다.
그것은 은사의 목적 자체는 배반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더 날카롭게 드러내기 위해
바울은 예언을 비교 대상으로 제시합니다.
이해할 수 없는 언어로 말하는 방언과 달리,
예언은 하나님이 아닌 “사람에게 말하는‘하는 은사입니다.
예언은 내 생각이나 나에게서 시작하는 말이 아니라
성령을 통해 주시는 ”예언“입니다.
그러니까 성령이 주시는 메시지를 누구나 알 수 있는 말로
다른 사람에게 전하며 소통합니다.
그래서 그 말의 내용이나 결과는
이해할 수 없는 비밀이 아니라,
누구나 알 수 있는 말입니다.
그렇기에 예언을 통해서
덕을 세우고, 권면과 위로가 가능해집니다.
성령이 주시는 말씀이 전달되면 그 말씀을 듣는 자는
유익함이 있고 위로가 되고 세움을 입게 됩니다.
바로 이것이 은사의 목적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영적 은사를 열망하라고 하면서
다른 무엇보다 예언을 추구하라고 호소합니다.
이 은사들은 기능 측면에서 차이는 극명합니다.
방언을 말하는 사람은 자신을 세웁니다.
그러나 예언을 말하는 사람은 교회를 세웁니다.
그렇다면 판정은 끝났습니다.
적어도 교회 공동체 모임에서는 그렇습니다.
이 대조만으로도 바울이 하고 싶은 말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방언보다는
그보다 더 예언하기를 바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방언보다는 선명한 말로 알아듣게 하는 예언이
더 큰 가치가 있다고 말합니다.
한 성령이 주시는 은사를 비교하면서
어느 하나를 더 크다 말하는 바울의 태도는 대단합니다.
하지만 판단의 근거는 선명합니다.
이해할 수 있는 말로 다른 신자들을 유익하게 하는 은사와
그렇지 못한 은사의 차이입니다.
물론 방언도 소통이 된다면
예언만큼이나 유익한 은사가 될 수 있습니다.
방언에 통역 되어 교회가 세워지는 경우라면
그것은 예언만큼 유익한 은사가 됩니다.
그러나 통역의 과정이 없이
그냥 행해지는 방언은 예언보다 가치가 덜합니다.
이처럼 은사의 크기 곧 중요도를 평가하는 기준은
교회 내 다른 신자의 유익입니다.
이처럼 깔끔한 기준도 많지 않습니다.
특별히 사랑의 공동체라면 더욱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는 교회에서의 일을
항상 다른 사람을 고려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과 나만의 예배만 있습니다.
그래서 옆에 있는 성도들에게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나 혼자만 드리는 예배는 통역되지 않는 방언과 같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구체적인 유익을 끼치지 못하는
은사의 무가치함에 대한
바울의 집요한 지적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2.알아 들을 수 있는 말의 중요성
방언이든 예언이든 말하는 은사들의 유익은
철두철미 그 말의 소통과 이해 가능성에 달려 있습니다.
말한다는 것은 소통의 수단으로 작동됩니다.
그렇기에 말하는 은사라면 적어도 소통이 필요한 자리에서 소통이 안 된다면 그것은 무의미합니다.
이 말은 당연합니다.
그런데 계속해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말한다는 것은 소통이라는 것이
기본이기에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말합니다.
자신이 고린도 교회에 가서 복음을 전한다면서
알아들을 수 없는 말만 중얼거렸다면 그것이 계시든
예언이든 미친 사람 취급을 당했을 것이라고 합니다.
아무리 좋고 유익한 말이었을 지라도
그들이 듣지 못하는 언어로 했다면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방언은 무용지물입니다.
방언은 소통의 관점에서 쓸모없는 언어입니다.
그렇기에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가서 청중들이 알아 들을 수 있는 계시나 지식이나 예언 또는 교훈을 전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청중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일상적인 언어로 전해서 구원의 길을 외쳤고
그들을 구원의 길로 들어서게 했습니다.
그렇게 복음을 들은 고린도 교인들이
방언에 집착하는 것은 우스꽝스러운 일이었습니다.
바울은 악기에 비유하여 이러한 사실을
더 설명하려고 합니다.
피리나 하프는 당시의 가장 대표적인
관악기와 현악기였습니다.
사람들의 생명의 말과 달리 이들이 내는 소리는
생명의 없는 무생물의 소리였습니다.
바울은 신호용 나팔의 이야기를 통해
이 차이의 중요성을 보여줍니다.
나팔이 명확하지 않은 소리를 낸다면
누가 그 소리를 알아듣고 전쟁을 준비하겠습니까?
신호용 나팔에 요구되는 선명함은
신호와 신호 사이의 날카로운 차이가 있어야 합니다.
진격하라는 신호와 퇴각하라는 신호는 서로 다릅니다.
이런 소리를 바울이 하는 것은
방언으로 소리를 내지만 그 말하는 바를
누가 알아들을 수 있겠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우리가 말하는 것의 중요성은
남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소리를 내지만 무슨 말인지 모를 웅얼거림이라면
아무도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아기를 키우는 엄마들은 아기들의 웅얼거림을
잘도 이해하고 해석을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엄마의 생각일 뿐이고 우리는 모릅니다.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분명 방언도 하나의 언어이지만
언어의 생명은 의미를 전달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런 면에서 방언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방언은 교회에서
소통의 의미로는 아무런 도움이 안됩니다.
지난 7월 미국인 인도네시아 선교사님이
우리에게 귀한 말씀을 전해주셨습니다.
서광종 선교사님이 통역을 해 주지 않았다면
우리는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방언이 소중한 성령의 은사이기는 하지만
무조건 소중할 이유는 없습니다.
은사는 나름의 용도와 끼칠 수 있는
유익이 있어야 합니다.
건강한 사람에게는 치유의 은사는 쓸모가 없습니다.
방언도 나름 유익이 있지만
소통에 관해서는 아무런 유익이 없습니다.
13장에서 말했듯이 은사의 가치는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성령의 은사에 대한 열정은 인정하지만
그것이 교회를 세우는 방향에서 중요한 것입니다.
공동체를 세우는 것은 성도를 돕는 것
이것을 위해서 우리는 성령의 은사가
풍성하여 지기를 구해야 정상입니다.
3.소통의 중요성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방언의 폐해는 소리는 있지만
다른 사람과 소통이 되지 않는 것이고
다른 사람을 세울 수 있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 입니다.
그렇다고 방언이 나쁘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방언을 말하는 사람이
그 말하는 바를 통역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 구하라고 권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통역은 방언을 말하는 사람 자신입니다.
방언을 말하게 된 사람은
자신이 방언으로 말하는 비밀을 이해하고
그 내용을 일상 언어로 통역할 수 있는
은사도 함께 가질 수 있도록 기도하라고 합니다.
하지만 이는 유일한 가능성은 아닙니다.
다른 사람이 그 방언을 통역할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자신이 한 방언을 이해하면
그것을 통역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통역을 위해 기도하라는 말은
방언을 이해할 수 있도록 기도하라는 말입니다.
이해되지 않아서 당사자도 통역할 수 없는
방언의 무의미함을 재차 강조합니다.
방언은 하나의 독자적인 활동이 아닙니다.
기도나 찬송 또는 감사 등의
표현의 수단으로 제시된다는 소리입니다.
우리가 모여서 기도할 때
방언으로 기도하는 분이 있습니다.
방언으로 기도한다는 것은
내 영이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 때 내 생각이나 이성은 전혀 개입하지 않습니다.
방언하는 때는 내 생각이나 이성은
아무것도 안하는 상태가 됩니다.
기도하는 사람 자신이 생각조차 끼어들 수 없는 마당에
다른 사람의 생각이 내 영의 언어를 이해하고
거기서 모종 유익을 얻을 가능성은 없습니다.
방언을 하는 것은 좋은 것이고
방언은사가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 감사한 일입니다.
그러나 방언이 특별한 것이 아니며
수많은 성령의 은사 중에 하나입니다.
하지만 방언은 공동체에서 한계가 있는 은사입니다.
신자들이 함께 모여 있는 것은 소통하기 위한 것입니다.
한 자리에 모여서 핸드폰만 보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에 대해서 우리는 싫어하고 꾸중합니다.
그렇기에 한 자리에 모여서 방언에 몰두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주님과 소통이 중요하지만
신자들 사이의 소통을 분리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은 교회라는 모임 가운데 머무시고,
이 모임의 유익을 위해
신자들에게 다양한 은사를 배분하십니다.
그래서 바울도 성도들에게 알아들을 수 없는
일만 마디 말 보다
선명한 생각을 담아
다섯 마디의 말을 하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방언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지만
다른 사람이 듣고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기에
방언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4.방언과 예언의 두 극단적인 상황(20-25절)
우리는 이 땅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악에 대해서는 멀리하고
성숙한 지혜를 갖추고 살아야 합니다.
그렇기에 이해력이 수반되지 않는 방언을
대단한 은사로 내세우는 어떤 신자들의 태도는
어리석은 태도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계속해서 말씀드리는 것이지만 은사는
교회와 다른 사람에게 유익한 것이 중요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복 받으며 살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율법을 버리고 우상을 숭배하여
살게 됨으로 멸망 당하여 앗수르로 끌려가서
결국 하나님을 떠나면 멸망 당한다는
역사적 교훈을 얻게 된 것입니다.
만일 교회 안에서 방언만을 말한다면
불신자들이 교회에 왔을 때 어떤 반응이겠습니까?
미쳤다고 하지 않겠습니까?
저의 어린 시절에 어머니를 따라서 부흥집회에 가면
통성기도 시간에 방언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미쳤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니 믿지 않는 자들이 보았다면
당연히 미쳤다 소리를 듣게 됩니다.
하나님이 정말 소중하게 여기는
소통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고 자신만을 내세우기 위해
방언만을 강조한 자들이 들은 말은
미쳤다는 말이 되었습니다.
정말 하나님의 뜻이 중요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실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것을 무시하고 자신을 내세우고
교회를 세우는 은사가 아닌
자신만을 나타내는 은사를 강조한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기는커녕
제정신 아닌 사람들이라는 비난만 듣게 됩니다.
결론적으로 방언과 예언을 비교하면서
바울이 우리에게 하려는 말은
소통이 없는 방언은
교회 안에서 무의미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선명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예언의 역할은 제한이 없습니다.
여기서 강조하는 것은 신자들과의 이해와 소통 및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과 교회 전체의 유익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각자 은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은사를 가지고 사람들에게 나가야 합니다.
교회를 세우고 다른 성도를 세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각자 하나님 앞에서 신앙생활을 해야 하지만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행동이
다른 사람을 세우고 교회를 세우는 일이 되어야 합니다.
혼자 기도하고 혼자 성경 묵상하고
혼자 봉사하는 것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나를 내세우고
다른 사람을 무시하는 행동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새벽기도를 한 번도 안 빠진 것을 자랑하고
그렇지 않은 자들을 무시해서
상처를 입히는 것은 그것은 바른 일이 아닙니다.
십일조 잘하고 봉사 잘하는 것으로
다른 사람을 실족하게 한다면
그 또한 아름다운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사는 결국 소통을 위한 것이고
다른 사람을 세우는 것이고
교회를 하나 되게 만드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 어떤 놀라운 것일지라도
그 어떤 대단한 것일지라도
무용지물이라는 사실을 우리를 알고
행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이 말을 간단하게 말하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사는
사랑하기 위해서 주신 것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이 주신 은사로 우리는 공동체와 이웃과 사랑하며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 원하시는 삶임을 기억하고
살아가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