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죽기가 어려워라
스님께서 상원사를
중창하시던 때에 이런 일이 있었다.
스님께서
신도 몇 분과 산길을 가시던 중에
웬 나무꾼 한 사람과 마주치셨는데
그 나무꾼은 무슨 영문인지
스님께 마구 욕설을 퍼부어 댔다.
그럼에도 스님께서 무심히 지나치시자
그 나무꾼은 더욱
기승을 부리며 폭언을 서슴지 않았다.
그는 육두문자까지 섞어 가던 끝에
"네가 정말로 그렇게 도력이 높은
인간이라면
내가 당장 목숨이라도 내놓겠다."
하고 떠들어 댔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그 나무꾼이
마을로 들어서면서 그대로 쓰러져
끝내 일어나지를 못한 것이다.
스님께서 그 일에 대해 말씀하셨다.
"그 사건은 오히려 나를 크게 배우게 했다.
나는 사실 무심코 있었던 것 뿐이었다.
그러나 그냥 무심해서만 되는 것은 아니었다.
진실한 마음은진실한 공덕으로
회향시켜 주는 게 옳겠지만
스스로 악행을 짓는다고
그것까지 금방 과보를 받도록
방치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 뒤로 부터는
여간 조심스럽지가 않았던 것이다.
참으로 업의 법칙은 너무나 분명하다.
그러므로 중생의 원을 무조건
다 들어주는
것만이 부처가 아닐 것이다.
악업도 가려야 하듯
선업도 즉각적으로
보상 되어지는 것이 아니며,
또 그래야만 좋은 것도 아니다.
문제는
선과나 악과가 아니고
마음의 본분을 밝히는 일이다."
스님께서는 그 당시 누구를 보든지
''너도 이생(利生),
나도 이생이니 전부가 다 이생이다."
---라는 말씀을 자주 하셨다.
그로부터 대중들은
스님을
'이생님'으로 부르게 되었다.
이 이름은 나중에 스님께서
'대행'이라는 법명을 쓰시게 될 때까지
스님의 법명 아닌 법명이 되어 버렸다.
스님께서 회고하셨다.
"나는 스스로
내가 나한테 주고 내가 받았지만
함부로 쓰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누구를 해롭게 한다든가,
한 치라도 어긋남이 있어서는 안 되고
오로지 모든 이에게 이익이 되고
남을 보하면서 돌아가리라고 다짐했다.
실은 나와 남이 둘이 아니니
나를 보하고 남을 보하며
그렇게 돌아감으로써
그대로 이익중생이 될 일이었다."
스님께서 상원사에 계실 때의 일이다.
어느 날 그 절에 시주를 많이 한 한 신도가
그곳에 와서 3일 전에
죽은 자식의 제사를 지내게 되었는데
때마침
상원사 신축 기공식이 있어
큰스님들이 다 모여 있었다.
그 신도는 통곡을 하고 울면서도
'스님들이 다 계시니
우연이라 해도 이런 복이 어디 있느냐.'
하며 감사해했다.
그날 스님께서는
바깥 일에 아랑곳하지 않고
홀로 기거하시는 방에 계셨는데
그 신도가 스님을 부르며
"잠깐이라도 좋으니 나오셔서
앉았다 들어가셨으면 좋겠습니다."
하고 나와 보시기를 간청했다.
스님께서
"알았다." 고 말씀하시고
잠시 생각에 잠겼는데
그 신도의 자식은 자기네 집에서 맴돌다가
이미 자기 집 돼지 소굴에 들어가 있음을 아셨다.
곧 이어 스님께서는
"여기서 천도를
시킨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벌써 돼지가 돼지를 잉태해 버렸으니……."
하고 나직하게 말씀하시고
앉은 채로 천도를 시작했다.
그러자
스님의 온몸에서 땀이 흘러내렸다.
다음 날 그 신도 집에선
새끼를 밴 암퇘지가 죽었다고 야단이었다.
스님께서 그 소식을 듣고
"천도가 잘됐구나."
하실 뿐 더는 말씀하지 않으셨다.
스님께서 나중에 이 일을 두고 말씀하셨다.
"죽어서 식은 있으나 분간을 못하니
소 우리로 들어가 소가 되기도 하고
사람으로 들어가 사람이 되기도 하고 천차만별이다.
오관을 가린 송장이
무엇을 가지고 분별하겠는가.
선천적인 식만 남아
암흑 속을 이리저리 떠도는 것이니
한 발짝 제대로 떼어 놓기도 어렵다."
[출처] (대행스님) 수혜(修慧)편 4. 자유인의 길(46 ~ 60)|작성자 여여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