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와 열매 7장 15 -20절
거짓 선지자들 즉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인' 사람들을 분별하기가 어렵다는 점이었습니다.
주는 말씀하시기를 거짓 선지자는 그 열매를 보아 알 수 있다고 하셨는데(16절) 이 점을 자세히 설명하셨습니다.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느니라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16-20)고 하셨습니다.
본문에 기록된 대로 주님은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로 시작해서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는 말씀으로 끝을 맺으셨습니다.
주는 즉겉으로는 보기에 전연 잘못된 것이 없어 보이는, 서로 닮은 두 종류의 나무가 반드시 같은 종류의 열매를 맺을 수는 없는 사실입니다.
한 종류의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고 다른 나무는 보잘것없는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이른바 '나쁜 열매'라는 말은 뜻은 품질이 좋지 못한 열매, 보잘것없는 열매라는 뜻입니다.
[썩은 나무는 열매을 맺지 못합니다]
결국 겉모양은 한 종류의 열매는 쓸 수 있지만 다른 하나는 쓸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삶의 형태을 교훈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이번에는 실생활, 행실, 태도의 문제를 배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께서 여기서 권면하신 다음의 중요한 원칙을 강조해야 하겠습니다.
그것은 기독교인이 되는 것은 인격의 중심에 관계되는 것입니다. 신앙이나 생활의 어느 면으로 보든 표면적인 외면만의 문제는 아닌 것입니다.
환언하면 기독교인처럼 보이면서도 실제로는 그렇지 않는 위험성입니다.
새로운 존재가 '되지 않고' 내적인 생명을 받지 못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좇아 우리의 본성이 새롭게 하심을 받지 못하고 그저 기독교인이 되어 보려는 위험성을 여기서 지적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주님이 강조하신 것은 사람 자체에 대한 것입니다.
즉 그가 외견상으로는 바른 생활을 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에 의하면 그는 줄곧 거짓 선지자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는 기독교인의 생활을 하는 것처럼 가장할지 모르나
실제로는 기독교인이 아닐 슈도 있습니다.
기독교인이 되는 것은 그 사람의 생명과 본성의 변화를 의미함을 이미 시작할 때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것이 중생의 교리입니다. 인간의 본성이 변화되지 않는 한 그의 봉사는 아무런 가치도 없는 것입니다.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 하였나이까 하리니'라고 하신 말씀입니다(22절).
거기서 우리는 그의 생애 중 많은 일을 해 오고 있으나 자기 자신은 변화되지 않는 사람을 보고 있습니다. 그는 바른 것을 말하고 또한 그대로 행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무런 가치도 없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2장 33-37절 '나무도 좋고 열매도 좋다 하든지 나무도 좋지 않고 열매도 좋지 않다 하든지 하라 그 열매로 나무를 아느니라'(마 12:33).
여기서도 나무의 품질과 성격을 강조하셨습니다.
주님은 다른 곳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막 7:20-21).
문제는 단순히 표면상으로 하는 것이거나 잔이나 접시의 겉을 씻는 문제가 아닙니다. 밖에서 들어오는 것이 아니고 안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사람 자신인 것입니다.
주님은 이 장면에서, 마음 속에 있는 것은 반드시 외부로 나타나지 않을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하시려 하십니다.
마음속에 있는 것은 그 신앙에서나 가르침에서 나타나기 마련인 것입니다. 이것은 실생활에서도 나타납니다.
기독교인으로 생각되던 사람이 실제 생활면에 있어서도 그러합니다. 이것을 이리는 몇 가지 원칙의 형태로 서술할 수 있습니다.
첫째 원칙은, 신앙과 실생활과의 사이에는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즉 본성은 결국 외부로 나타나기 마련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의 깊은 곳에 있는 것은 항상 드러나고 나타나기 마련입니다. 신념과 생활에서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 두가지는 불가분의 관계를 갖고 있습니다.
사람은 결국 생각하는 그대로 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생각하는 그대로 행합니다.
환언하면 우리의 사람됨이 무엇인지, 무엇을 믿고 있는지를 외부로 나타내지 않을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아무리 조심한다고 해도 결국은 그렇게 필연적으로 나오게 마련입니다.
본성은 반드시 자신을 드러내고 맙니다.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딸 수는 없는 것입니다. '좋은 나무마다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절대적인 선고로써 단언하셨습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베드로후서 2장에도
분명히, 그림자처럼 선명하게 밝힌 바 있습니다.
거기서 사도 베드로는 교회에 와서 그리스도인으로 받아들여졌기는 하지만 얼마 못되어 나가버린 사람들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그들이 한 일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습니다. '개가 구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씼었다가 더러운 구덩이로 도로 누웠다'(벧후 2:22). 베드로의 비유를 인용하자면 돼지라도 깨끗이 씻기어 질 수 있고 표면상으로 깨끗해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본성은 변하지 않습니다.
본성의 변화가 없는 한낱 표면상의 청결도 있는 것입니다.
겉만 씻은 사람도 외관상으로는 기독교인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여기서 그가 과연 진짜 기독인인가 그렇지 않은가를 결정하는 것은 내부적인 본성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내적인 본성은 반드시 표면에 나타나게 마련입니다.
참된 증거는 눈에 띄일 때까지는 시간이 걸릴 것입니다.
하나님은 맨 처음부터 알고 계시지만 우리는 이런 것을 분별하는데 너무 더딥니다.
다음 성구의 분명한 뜻도 이것을 나타냅니다.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딸 수 있느냐'
이 두 가지는 절대로 분리시킬 수 없습니다.
내적인 본성은 반드시 외부로 나타나게 마련입니다.
사람의 깊은 신념은 조만간 반드시 생활을 통해 나타나게 됩니다. 항상 조심해서 열매를 찾아보도록 우리들 자신을 가르치고 훈련해야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좋은 열매의 본성과 성격에 대해서 자세히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협착하고 좁은 문밖에 서서 여러분은 그런 것을 절대로 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 길로 오시오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것들을 식별할 수 있는 방법을 배워야 합니다.
진짜 기독교 신앙의 최대의 적은 이 인간사회에서 호전적으로 기독교를 박해하고 혹은 극악무도하게도 기독교의 교훈을 무시하는 사람들이 아나라 거짓 모습을 보여주려는 기독교인들이라는 사실이 더욱 분명히 되어가는 것 같습니다.
이런 사람들이야말로 여기서 주님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내리시는 죄의 선고를 머지 않아 받을 사람들입니다.
참된 영생을 끊임없이 방해하고 최대의 적이 되어온 거은 가짜 모조품의 기독교였습니다. 그리고 지금 이 시대의 가장 큰 문제점은 교회의 세속적 상태임이 분명합니다.
기독교의 관점에서 볼 때 이점에 대한 시금석은 오직 하나가 있습니다. 이것은 그야말로 주님이 여기서 나쁜 열매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구약 성경은 이 점을 매우 강하게 다음과 같이 표현했습니다.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사 64:6)라고 말입니다.
세상적인 안목으로 본다면 의로운 것이었지만 하나님이 보신다면 더러운 누더기였습니다.
하나님께 궁극적으로 어떤 가치가 있는 것은 기독교인의 성격에서 나오는 것이요, 새로운 본성에서 샘솟아 나오는 것 뿐인 것입니다.
적극적인 시험방법은 이것입니다. 진정한 기독교인은 팔복을 예시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가시에서 포도를,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딸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좋은 나무는 반드시 좋은 열매를 맺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반드시 맺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자기 속에 하나님의 성품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이 좋은 열매, 팔복에 서술되어 있는 좋은 열매를 맺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는 심령이 가난하며, 죄 때문에 애통하고 온유하며 의에 주리고 목마르며, 화평을 낳는자요 마음이 깨끗한 사람입니다.
이상 몇가지의 시금석을 말씀드렸습니다.
이런 시금석은 '뛰어난 이교도'를 항상 제거하는 시금석입니다.
동시에 거짓 선지자와 일시적인 신자를 제거합니다.
우리들 속에 이생과 세상에 대하여 자랑을 품고 있다면
우리는 진리를 충분히 알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우리가 새로운 본성을 갖고 있는가 확인해야 하겠고 각자 자기를 검토해야 합니다.
안에 있는 것은 밖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에서 복음을 전할 때 자신과 자기 주장에 넘쳐 사람들 앞에 나타난 것이 아니라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인 것입니다(고전 2:3). 우리는 우리 자신을 얼마나 은연중에 들어내는 것입니까. 무심한 행동으로 우리의 사람됨을 우리는 얼마나 잘 선언하고 있습니까!
끝으로 잊어서 안 될 것은 우리들이 이와 같은 일들을 어떻게 생각하든,
우리가 아무리 그릇된 판단을 하며, 또 아무리 거짓 선지자들에게 속임을 당하든 하나님만이 유일하신 심판주이시며 하나님은 절대로 속임을 당하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리라'
하나님이 우리들을 불쌍히 여기시며 하나님이 우리들로 하여금 이같은 중요한 원칙에 대해서 눈을 뜨게 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그리고 우리들의 영혼에 위험하고,
이 사악하고 궁핍한 세상에서 복된 우리의 대의를 위태롭게 하고 있는 모든 사람에 대해서 이 식별력을 구사할 수 있게 해주시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받았고 그 참여자가 되고 좋은 나무임을 확실히 할 수 있도록 우리 모두 주의를 집중합시다. 나무가 좋을진대 필연적으로 열매 역시 아름답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