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히고히 올라갈읗 고히고히 우러엘라
위로 길이길이 올라갑니다. 하늘에 머리를 두고 아름답게 사는 사람은 위로 올라가는데, 아무런 소리 없이 고이고이 올라갑니다.
‘우러엘라’는 하느님을 우러러보면서 나아간다는 뜻과 울면서 나아간다는 뜻이 겹쳐 있습니다. 사람이 하느님께서 계시는 위로 가지 않고 가로로 가면 담밖에 없습니다.
위로 올라갈 때는 울면서 올라갑니다. 우렁차게 또는 구슬프게 운다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데 그치지 않고, 부르고 부르면서 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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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주 다석 사상 공부 글이다.
'위로 올라갈 때는 울면서 올라간다'는 말이 가슴에 꽃혔다. 그건 내가 해봐서 안다. 명상. 사색,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도 있지만 울부짖음으로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은 그럴 여지가 없다. 지금 팔레스틴의 주민들처럼.
그러나 "하나님이 어디 있나?"고 묻는 현실을 모르고서는 위로 올라갈 수 없다.
인생은 울음으로 시작해서 울음으로 끝나는 것이다. 사람을 성숙시키는 것은 웃음이 아니고 울음이다.
나는 인생대학 부모박복과 출신으로 허무주의에 빠져 있다 실존주의에서 구원을 받았다.
부조리한 상황에 던져진 인간에게 주어진 무제한의 자유!
그러나 쟁취한 자유가 아니라, 주어지고 강요된 자유!
그러므로 산다는 것은 매 순간의 선택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의미에서 자유롭지 않을 자유만 빼고는 자유로운 존재.
결론적으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자유 속에서 하덕이던 시절이 길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삶의 주인이 되어야만 하는 인간은 이 세계에 대한 책임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우리가 처한 실존의 무대는 저 하늘나라가 아닌 우리가 발을 딛고 서 있는 이 세상이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신에게 갈 때는 울면서 올라가는 것이다.
선출직으로 뽑힌 정치인들에게는 항상 민원이 들어 오는데 그 중에는 악성민원인들이 있다. 악성민원인이라고 해서 나쁜 인상을 갖기 쉽지만 내용은 좋은 것이다. 젊은 시절 국회의원 비서 경험에서 배운 것은 복잡한 정치현장에서 잠시도 한 눈 팔 수 없을 정도로 바쁜 국회의원에게 정당하기는 하지만 해결 할 수 없는 일들을 해달라고 조르는 것이 바로 악성민원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하나님에게는 드리는 기도의 대부분은 악성민원 같은 것이다. 인간은 악성민원인처럼 해결되지 않는 문제를 가지고 울면서 기도하면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