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제 10회 김용근 민족교육상 수상자 결정 및 시상식 안내
김용근 선생 기념사업회(회장 윤한봉)는 제 10회 김용근 민족교육상 수상자로 "한빛고등학교 교사회(대표교사 배수홍 515-4955)"를 선정하였습니다. 상금은 300만원이며 시상식은 다음과 같습니다.
김용근 민족교육상은 1985년 타계하신 김용근 선생의 제자들과 유족들이 1995년에 선생께서 실천하신 민족교육의 뜻을 기리기 위해 제정한 상으로 매년 민족교육에 헌신한 국내외의 개인이나 단체에 시상하고 있습니다.
고 김용근 선생은 전주고등학교, 광주고등학교, 광주제일고등학교, 전남고등학교 등에서 후학을 양성했으며 은퇴 후로는 고향 강진군 작천면에서 농사일을 하시며 농촌계몽운동을 하셨습니다.
또한 선생께서는 일제시대에 두 번 투옥되고 518 민중항쟁으로 또 한번 투옥되는 등 조국의 광복과 민주화에도 크게 기여하셨기에 정부로부터 독립유공자와 5.18 민주화 유공자로 인정받으셨습니다.
【다음】
일시 : 2004년 5월 22일(토) 오후 3시
장소 : 5.18 국립묘지 역사의 문
【역대수상자】
1회 윤영규,
2회 홍성 풀무학교,
3회 양동지,
4회 김연순,
5회 극단 토박이,
6회 LA 민족학교,
7회 김현준,
8회 베를린 세종학교,
9회 실상사 작은학교
【붙임】: 시상이유, 김용근 선생 연보
문의 윤한봉(기념사업회 회장, 062-527-4501), 김양래(총무, 016-613-2004)
(시상이유)
- 한빛고등학교 교사회는 1998년 전국 최초로 인문계 특성화 고등학교로 개교한 한빛고에서 개교 초기부터 학교 업무 전반을 전 교사가 참여하는 교무회의에서 민주적인 토론을 거쳐 결정해 오는 등 기존 학교와는 완전히 다른 운영체계를 갖추고 있음.(교육계에서 교무회의의 의결기구화 논의가 제기되기 이전부터 이미 교무회의를 학사 결정의 최고 기구로 운영하여 왔음. 법률적 구속력은 없지만 학교장도 교무회의의 논의를 거치지 않거나 교무회의의 결정사항을 번복하는 일은 없었음.)
- 이 과정에서 한빛고등학교 교사회는 입시 위주의 교육에서 탈피하여 학생의 존엄성과 소질을 존중하는 참교육의 실천을 위해 교육과정을 교사들의 토론을 통해 결정하고 이를 구체적으로 실행하는 등 모범적인 교사상 확립에 앞장서 왔음.
- 한빛고등학교 교사들은 개교 이래 타 학교 교사보다 낮은 임금(개교 초기 일반교사의 60% 수준)을 감수하면서 학생들에 대한 교육적 열정을 가지고 교육에 임해 왔고, 지난 해 폐교 위기 이후부터는 급여마저도 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학교를 지키기 위하여 스스로 희생을 감수하고 있음
- 한빛고등학교 교사회의 가장 큰 성과는 학생들과의 관계에서 드러나는데,
한빛고를 졸업한 학생들 모두는 학생들을 위해 다양한 교육과정을 만들어
헌신적으로 교육해 온 교사들을 진정한 스승으로 존경하고 있으며
이를 매우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다는 사실에서 드러나고 있음
- 한빛고등학교 교사회는
"곽방오, 김선희, 김용남, 김정원, 박성준, 배수홍, 서호필, 손은주, 안광제,
윤영소, 이강석, 이정아, 이종철, 정관준, 정송남, 정혜영, 최동희, 최종재" 등 총 18명으로 구성되어 있음
石隱 金容根 선생 연보
* 1917년 10월 28일 전라남도 강진군 작천면 현산리 죽현에서 부친 광산 김씨 문정공파 16대손 俊洙님과 모친 윤씨 小心님 사이에서 1남 5녀 중 장남으로 태어나다.
* 선생의 유년시절 가족이 목포로 이사를 하여 영흥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목포양동교회 박현세 목사님의 추천을 얻어 1932년 평양 숭실학교에 종교 유학하다.
* 숭실학교 기독청년회 종교부장으로 활약하던 중 신사참배 거부와 관련되어 일경의 요시찰 인물로 분류되다.
* 숭실학교 졸업 후 1937년 전남 영광군 염산면 야월리 소재 개량학당에서 야학을 지도하던 중 일제에 의해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목포지방법원에서 6월의 실형을 선고받다.
* 출옥후 1939년 2월 2일 강진군 도암면 학장교회에서 조주일 여사와 결혼, 목포시 대성동에서 신혼생활을 시작하면서 목포 유달국민학교에서 첫 교직에 몸담다.
* 1940년 연희전문학교 사학과에 입학, 같은 해 장남 창중을 얻다.
* 1941년 장남 창중의 돌 직후 지안유지법 위반혐의로 전주지방법원에서 2년형을 선고받다.
* 1945년 1월 전주교도소에서 출옥하여 강진군 작천면 본가에서 요양하던 중 일제에 의해 징용영장을 발부받고 만주에서 독립운동에 동참하기 위해 도피하던 중 만주 신경에서 8.15해방을 맞다.
* 1945년 10월 강진 본가에 귀향, 농촌계몽운동에 투신한다.
* 1946년 연대 사학과에 입학 후, 재학 중 관현악단의 클라리넷·호른주자와 농구선수로 활약하다.
* 1950년 연대 졸업 후 경복고 교사취업과 대학원진학이 이루어졌으나 한국전이 터져 귀향하다.
* 1951년 초 경찰에 쫓기던 군·면 인민위원들을 자택에서 보호했다는 혐의로 강진경찰서에 연행돼, 장흥에서 약식재판을 받은 후 석방되다.
* 1951년 육군 제20사단에 입대하다.(당시 사단장은 연희 전문학교 동기동창으로 국방부장관을 역임한 박병권 씨)
* 1954년∼1964년 전주고등학교 교사로 국사과목을 강의하면서 농구부 육성. 시인 신석정 님과 같은 집에 살면서 두터운 교분과 사상적 교류를 갖다.
* 1965∼1972년 3월 광주고, 광주일고에 재직, 세계사를 강의하는 한편 농구부를 육성하다. 이때 시인 문병란 님과 두터운 교분을 갖고 광주일고 학생독서회 "향토반"의 지도교사를 맡다.
* 1972년 교단을 잠시 떠나 서울에서 사업(분필공장)에 힘썼으나 대홍수로 인하여 실패하다.
* 1973∼1976년 전남고에 봉직, 유신체제하 긴급조치 상황에서 학생시위에 책임지고 사임하다.
* 1977년 회갑을 맞아 제자들의 주선으로 광주YMCA 백제실에서 기념 강의하다.
* 1978년 귀향하여 농사를 짓는 한편 향토문화연구, 작천 노인대학 창설, 지역교회 및 민방위 강연 활동 등을 계속하다.
* 1980년 6월 광주민중항쟁 관련으로 옥고를 치르다. 당시 선생은 지명수배중인 제자 윤한봉, 정용화 등을 자택에 보호하여 범인 은닉죄를 적용, 징역 8월에 집행유예 1년6개월을 선고받다.
* 1983년 10월 3일 한국기독교 장로회 작천교회 장로로 임직하다.
* 1985년 5월 22일 새벽 5시 30분 숙환으로 소천하다. 향년 69세.
* 1987년 9월 18일 독립유공자로 추서되다.
* 2002년 5.18민주화운동 유공자로 추서되다.
첫댓글 장하다 넙땍이.. ^^~
한턱쏴...
오호~~~박선생 굿~~~ 꼰대로서 멋진 삶을 살았다는 이야기인데...흐음...더 잘 살아보소!!! 홧팅~~~*^^*
역쉬역쉬~ 오빠 멋져요!!!!! 당신의 후배라는 것이 자랑스럽습니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