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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해를 받는 자가 복이 있나니
마태복음 5:10~12,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가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이 될 것임이라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오늘 본문 말씀은 예수님께서 복이 있다고 말씀하신 천국 시민의 특성 중 마지막 복된 모습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주님은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것이 복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옳고 진실하고 선한 일을 위하여 수고하기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미움을 받는 자는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또 주님의 이름을 인하여 사람들로부터 욕을 먹고 온갖 고통을 겪고 거짓말까지 동원하여 온갖 악한 말을 뒤집어 쓰이는 일을 당할 때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옳고 바른 길을 걷고 바른 신앙의 자리에 굳게 선 이유 때문에 세상 사람들로부터 미움을 당할 때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이 세상 살아가면서 모든 사람들에게 항상 칭찬만 받고 인정을 받고 살 수는 없습니다. 아무리 우리가 선하고 의롭고 진실하게 행한다 할지라도 우리를 대적하는 반대자들을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는 까닭없이 우리를 싫어하고 까탈스럽게 약점을 찾아내고 끌어내리려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잘하여도 우리의 대적이 생기고 원수가 생기고 우리를 향한 비난과 험담이 다가올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든 사람들에게서 칭찬과 인정을 받으려는 욕심은 버려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누가복음 6:26 말씀에서 이르기를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그들의 조상들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모든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으려 하면 이는 교만한 것이요 욕심일 뿐입니다. 우리는 완벽하지도 아니하며 우리가 모든 사람에게 칭찬을 받을 성숙한 인격도 갖고 있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상에 사는 동안 우리는 살다가 원수도 만나고 대적도 만나고 우리를 미워하는 사람을 만나게 되어 있으니, 이런 일을 겪을 때에 놀라거나 낙심하거나 당황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사람들로부터 비난과 멸시를 당하고 고난을 당하는 경우를 크게 세 가지로 나누면 다음과 같은 경우입니다.
첫 번째는 우리가 죄를 범했거나 실수를 했기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고난과 멸시와 조롱을 당하게 되는 경우입니다. 내가 잘못했습니다. 내가 실수했습니다. 내가 법을 어겼고 내가 양심을 어겨서 남에게 해를 끼쳤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비난과 조롱을 한다 묵묵히 감내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범한 죄로 인하여 내가 자초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타인들의 비난과 멸시를 당하면서 부끄러움을 잘 감내하며 자기의 죄를 깊게 반성하며 앞으로 동일한 죄와 허물을 범하지 않겠다는 각오를 다지는 기회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잘못했을 때에 우리에게 비난과 멸시를 가하는 사람에게 반감이나 미움이나 보복의 감정을 결코 가져서는 안될 것입니다.
두 번째는 우리가 애매한 고난을 당하는 경우입니다. 나의 잘못과 실수가 아니고 나의 본래 뜻도 아닌데, 상황이 이상하게 되어서 사고가 발생하고 이로 인하여 나에게 손해나 비난이 가해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차를 몰고 도로에 나섰는데, 다른 사람이 실수해서 내 차를 들이받고 내 차도 다른 차를 추돌하게 되는 상황과 같은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싸움에 휘말려서 말리다 보니까 나도 한 패로 몰려서 맞게 되고 경찰에 함께 끌려가서 고생을 하게되는 경우와 같습니다. 애매한 고난도 우리 인생에는 종종 발생하게 됩니다. 그럴 경우에 우리의 의도와 상관없이 비난과 멸시가 쏟아지게 되기도 합니다.
그럴 경우에 어떻게 해야 할까요? 사도 베드로는 그의 편지 베드로전서 2:19 말씀에서 이르기를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부당하게 까닭없이 고난을 겪을 때에, 비난과 멸시가 닥쳐올 때에, 우리는 비난과 멸시 속에서 묵묵히 참으셨던 우리 구주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잘 참으라고 사도는 권면하고 있습니다.
우리 인생에서 이런 경우도 종종 생깁니다. 살다 보면, 본의 아니게 사기를 당하고 나도 다른 사람에게 손해를 끼치는 경우도 생기고 혹은 본의 아니게 오해를 당하여 당하지 않아도 될 모욕을 당할 경우도 있는데, 그럴 경우에 상대방을 미워하고 대적하고 앙갚음하려 하지 말고 묵묵히 참고 인내하라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내가 의롭게 살고자 함으로써, 믿음으로 살고자 하는 신앙 때문에 다가오는 세상의 멸시와 비난과 박해의 경우입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오늘 본문 말씀에서 다루고 있는 고난입니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가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이 될 것임이라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이 말씀은 팔복 중의 가장 높은 단계의 축복으로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영광과 나라를 위하여 살아감으로 인하여 세상으로부터 온갖 모욕과 학대를 받는 자들이 장차 받을 영광에 대하여 노래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믿음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살기 위하여 몸부림치다가 세상 사람들로부터, 그리고 왜곡된 신앙인들로부터 학대와 모욕과 죽음을 당한 경우가 참 많이 나옵니다.
예를 들면 첫 번째 순교자인 아벨이 그러합니다. 그는 아버지 아담과 어머니 하와 밑에서 신앙 교육을 받다가 장성하여 분가하면서 형 가인과 함께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벨은 믿음과 감사함으로 기름진 양의 첫 새끼를 드렸습니다. 형 가인은 농사 짓는 사람이었는데 자기의 수확한 작물 중에서 일부를 제단에 올렸습니다. 하나님은 아벨의 제사는 기쁘게 받았으나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아니하셨습니다. 가인은 분노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의 제사와 동생 아벨의 자세를 함께 받지 않았다면 그래도 좀 괜찮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벨의 제사는 받으시고 자기의 제사는 거절한 것을 인하여 속에서 엄청난 분노가 치밀어 올랐고 결국 동생 아벨을 들로 불러낸 후에 쳐 죽이는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그리하여 아벨은 의롭게 살았기 때문에 신앙 때문에 박해를 받은 첫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아벨 이후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백성들은 세상으로부터, 악한 자들로부터 박해를 받곤 했습니다. 예를 들면, 북 이스라엘 왕국의 아합 왕과 그 아내 이세벨은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는 주의 종들을 박해했습니다. 그들은 신앙 때문에 체포와 죽임을 당하는 고난을 피하여 동굴에 숨어서 몰래 갖다 주는 음식을 먹으며 연명하였습니다. 그들은 신앙 때문에 그처럼 고통을 겪었습니다.
나봇이라는 이스르엘 포도원 주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아합 왕은 나봇의 포도원을 탐내어 그것을 사서 자기의 나물 밭으로 쓰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나봇은 왕이 포도원을 팔라는 제안을 거절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포도원은 여호수아 때부터 그 가문에 하나님께서 기업으로 주신 땅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땅을 팔아넘긴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그 집안에 주신 기업을 지키라는 하신 사명을 저버리는 불신앙과 배신 행동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봇은 왕의 제안을 거절하였습니다. 그는 그 악한 왕과 그 아내 이세벨에 의하여 불법 재판에 회부되어 아들들과 함께 돌에 맞아 죽었고 그 땅도 빼앗겼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악행자의 죄값을 물어서 결국 얼마 있다가 아합 왕은 전쟁터에서 화살 맞아 죽고 그 피를 개들이 핥게 하였으며, 그 아내 이세벨도 개들이 그 몸통을 먹어치워서 그녀가 이세벨이라는 것을 알지 못할 정도로 처참하게 죽게 하셨습니다. 나봇은 신앙을 지키다가 순교당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실한 종들 곧 엘리야, 엘리사, 하나니, 미가야, 이사야, 예레미야와 같은 선지자들은 하나님께로부터 그 시대의 죄악상을 지적하며 불신앙적인 왕들에게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였다가 혹독한 대가를 지불했습니다. 그들은 목숨을 위하여 토굴과 시냇가와 광야와 이방 지역을 떠돌아 다녔으며 감옥에 갇혔으며 순교의 피를 쏟는 일을 겪었습니다. 또한 신약 시대에 들어와서도 하나님의 종들 곧 베드로와 요한과 사도 바울과 같은 사도들과 수많은 주의 백성들이 신앙 때문에 감옥에 갇히고 채찍질당했습니다. 그들은 돌을 맞고 죽기도 하고 칼로 목베임을 당하기도 하였습니다. 네로 황제 때에 그리스도인들은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경기장에 짐승의 가죽옷을 입혀진 채 곰에게 던져지기도 하였으며, 몸에 역청이 발라져서 나무에 묶여서 불을 붙여 밤중의 연회의 횃불이 되어 태워지기도 하였습니다.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황제 숭배를 거절하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주님이라는 고백을 지키는 일 때문에, 체포되어 화살 맞아 죽임당하고, 때로 가죽이 벗겨진 채 초를 부어서 고통스럽게 하는 일들을 당하기도 하는 일을 겪었습니다.
그리고 중세 시대에 들어와서는 타락한 천주교 교황에 의하여 진실한 기독교인들이 동일한 박해를 당했습니다. 저 체코 지방 보헤미아 지역의 존 후스라는 선각자가 성경적 진리를 증거하자 그를 붙잡아서 심문하고 사형을 선고했습니다. 그러나 로마 교회의 부패와 비진리를 지적하며 바른 진리를 곳수한 그는 화형대의 불 가운데 큰 소리로 찬양하면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존 후스 순교 이후 백년 후에 독일의 마르틴 루터가 나타나 당시 돈을 내면 사죄권을 얻어 연옥에서 천국으로 올라간다는 로마 교황청의 면죄부 판매 정책의 부패성을 고발하면서 개혁을 외쳤습니다. 그 때에 로마 교황청은 그에게도 파문을 하여 죽이려 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목숨을 내걸었던 진실한 주의 종을 도와서 독일, 프랑스, 영국, 네달란드 등 수많은 귀족들과 상공인들과 농부들을 일으켜 진리 편에 서게 함으로써 로마 교회의 부패성을 폭로하고 종교 개혁의 열매들을 많이 맺게 하셨습니다.
이렇듯 하나님의 참 교회는 늘 박해와 시련을 당하여 왔으니, 우리나라에서도 그러한 빛과 어둠, 의와 불의의 싸움, 선과 악의 싸움이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일제 군국주의 군대가 우리나라를 점령하여 압제할 때에 교회를 굴복시키려고 일제 말 때에 신사 참배를 강요했습니다. 그래서 학교나 관공서 뿐 아니라 교회를 지도하는 주의 종들까지도 신사 참배에 참여하도록 끈질긴 강요를 했습니다. 이를 반대하는 주의 종들은 감옥에 끌고 가서 온갖 고문을 하였습니다. 주기철, 최권능, 손양원, 한상동, 이기선 목사님들이 끝까지 저항하였습니다. 그들이 감옥에서 겪은 일은 밥을 제대로 주지 않아서 눈이 실명되는 위기를 겪었으며, 고추가루 물을 거꾸로 매달린 채 코에 부었으며, 발가락 손가락을 대나무 깎은 뾰족한 것으로 찔러 후벼 팠습니다. 그 가운데 주기철 목사님 같은 경우 끝내 감옥에서 처참하게 돌아가셔서 시신만이 교회로 돌아왔었습니다. 안이숙 여사 같은 경우에도 중학교 교사였던 처녀 시절에 일본 국회의사당에 가서 한국 교회를 압박하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예고하는 전단지를 뿌린 일로 체포되어 재판받고 감옥에서 오랫동안 고생했습니다. 그녀가 사형 집행일 하루이틀 전에 해방이 되어 감옥에서 나왔을 때에 그 처녀의 아름다운 모습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머리는 다 빠지고 이빨도 다 빠진 모습이었습니다. 감옥에서 그렇게 열악한 상황에서 보내다가 나온 것입니다.
오직 신앙의 지조를 지키기 위하여 생명을 내놓고 불의와 비진리와 맞서 타협하지 아니하였던 주님의 사람들은 이처럼 계속 있어왔던 것입니다.
오늘날도 이런 일을 계속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날 거의 체감하지 못하지만 여전히 주님의 이름 때문에, 신앙 때문에 박해받는 이들이 세상에 많이 있습니다.
선교단체 오픈도어즈의 통계에 의하면 2025년 작년 한 해에 전 세계 70억 명 중에 약 3억 8800만 명이 심각한 박해 아래 있다고 말합니다. 기독교인 7명 중에 한 명이 이런 상태에 있다고 말합니다. 박해 수준이 높음에 해당하는 나라가 78개 국가에 이르고 있으며, 신앙 때문에 살해 당한 사람이 작년 한 해 4849명이라고 말합니다. 폭력과 압박을 받아 집을 떠나거나 도망자 신세에 처한 신고 건수가 20만 1427건이나 된다고 보고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적으로 보면 이것보다 더 많은 피해가 있을 것으로 말합니다. 예를 들면 작년에 저 아프리카 서쪽 나라 나이지리아의 인권단체들이 보고한 바에 의하면, 거의 7천 명의 기독교인들이 무슬림 극단주의 단체인 보코하람의 공격으로 살해되었다고 보고하고 있습니다. 수천, 수백 명의 기독교인들이 납치되어 끌려가서 온갖 고통을 겪기도 합니다. 이런 일들을 보다 못하여 얼마 전에 미국 대통령 트럼프가 직접 나이지리아의 기독교 박해 상황을 언급하며 그런 일을 막아야 한다고 말한 바도 있습니다.
지금도 북한, 소말리아, 예멘, 수단, 에리트리아,시리아, 나이지리아,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인도 등에서 강력한 박해가 일어나고 있으며, 지금 저 중국에서도 기독교인들을 강력하게 박해하면서 특히 젊은이들이 기독교 신앙을 갖지 못하도록 조직적으로 막고 있다는 말이 전해오고 있습니다. 특별히 우리 동족이 살고 있는 저 휴전선 너머 북한에서 20만 내지 40만 명의 기독교인들이 철저한 감시와 억압 속에서도 믿음을 지켜오고 있음이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현실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은 현재 기독교 신앙을 누리는 데 거의 장애가 없는 상황이지만, 수많은 동일한 기독교 신앙을 가진 믿음의 형제 자매들이 가혹한 신앙의 박해를 받고 있는 상황에 처해 있다는 것을 깊이 명심하는 것이 필요하다 할 것입니다. 그들이 겪는 신앙의 고통에 대하여 아무런 관심도 없고 동정심도 없고 공감하지 않는다면, 이는 참으로 비정한 일이요 진실한 신앙인이라 볼 수 없다 할 것입니다.
우리는 박해받는 기독교인들을 기억하면서 그들을 위하여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저 북한의 형제들을 위하여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매년 한번씩 기독교인들을 수용한 관리소에 북한 당국자들이 나와서 본보기로 처형을 한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믿음을 지키기 위하여 그 위협과 고통을 견디면서 믿음을 지키며 속히 해방의 날을 기다리며 기도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그들을 기억하며 기도해주어야 하겠습니다. 또한 수천 명씩 죽임을 당하고 있는 아프리카 서쪽 나이지리아의 형제 자매들이 더 이상 이슬람 무장 세력에 의하여 무참하게 공격당하는 일이 벌어지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할 때마다 기억하며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오늘날도 박해 아래 믿음을 지키기 위하여 몸부림치는 세계 각처의 형제 자매를 기억하며 기도해주는 것이 오늘 본문 말씀에 나오는 바 의를 위하여 박해받는 자가 복이 있다는 말씀에 참여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이 여덟 번째의 복을 받을 경우로는 신앙 때문에 가족들과의 갈등을 겪으면서 그들을 주님께로 인도하고자 인내할 때에 이 복이 있을 것입니다. 또한 친구들로부터 소외되고 직장에서 신앙 때문에 따돌림을 받을 때에 이 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믿지않는 이들로부터 차가운 냉대를 당하고 모욕적인 말을 들을 때에 이 복을 우리가 받게 될 것입니다. 또한 세속화 되는 세상의 흐름 속에서 우리가 복음에 합당한 행실로 살아갈 때에 세상 사람들로부터 따가운 눈총을 받게 됩니다. 주일 성수를 하거나 그들의 술 문화에 동참하거나 그들의 뇌물 관행이나 부정 부패에 동참하지 아니할 때에 세상 사람들은 청렴하고 진실하고 경건한 기독교인들을 싫어하며 박해합니다. 자기들과 한 패가 되지 아니함 때문에 우리 기독교인들은 박해를 받게 됩니다. 이러할 때에 우리 기독교인들은 오늘날 세속화 사회 속에서도 주님께서 말씀하신 바 의를 위하여 박해 받는 자, 주님의 이름으로 박해받는 자로서 복 있다 하는 말씀을 듣게 될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이러한 박해를 받을 때에 기뻐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2절에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말씀하셨는데, ‘즐거워하라’라는 말은 헬라어로 ‘아갈리아오’라는 단어로서 ‘기뻐 날뛰다’라는 뜻으로서 넘치는 기쁨. 주체할 수 없는 기쁨을 의미합니다. 실제로 믿음의 선배들은 박해받을 때 낙심하거나 슬퍼하거나 의기소침하지 않고 도리어 기뻐했습니다.
예루살렘 공회에 끌려갔다가 예수님 이름으로 말하지 말라는 명령을 거부하고 매를 맞고 나오는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은 기뻐하며 즐거워했습니다. 사도행전 5:41 말씀에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과 실라도 전도하던 중에 점치는 귀신 들린 소녀를 치료해주었다가 억울하게 체포되어 매를 많이 맞고 빌립보 감옥에 착고에 채인 채 갇혔을 때에 한밤중에 일어나 기도하고 찬송하였습니다. 그처럼 믿음의 수많은 선배들이 화형 당할 때에도 불꽃 속에서 찬양하며 하나님께 그 영혼을 맡겼습니다.
이처럼 박해를 당하여 사람들에게 모욕과 멸시를 당하고 감옥에 갇히고 심지어 죽임을 당할지라도 기뻐서 날뛸 만큼 즐거워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렇듯 주님의 백성된 우리가 신앙과 복음과 주님을 섬기는 수고 때문에 박해와 모욕을 당할 때에 기뻐하고 즐거워할 이유가 분명히 있습니다.
먼저, 그 이유는 박해를 당하는 것이 은총이요 축복이기 때문입니다. 박해를 당할 때에 여러 가지 축복이 임합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의 은혜를 절대적으로 의존하게 됩니다. 그리고 놀라운 은혜를 얻게 되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다니엘의 세 친구가 우상 숭배 거절하고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명령에 의하여 불 가마 속에 던져졌을 때에 그 불꽃 가운데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 그들과 함께 거닐며 그 불꽃 가운데서 그들을 보호해주시고 살려내주신 바가 있습니다. 저도 우연치 않게 몇 년 전에 누군가 보내준 영상을 통하여 아프리카 기독교인 형제 둘이 화형을 당하는 순교 장면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형제들은 그 뜨거운 나무 불에 던져졌는데도 비명도 지르지 않으면서 고통을 이겨내는 것을 보았습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어떤 은혜와 보호가 있음이 분명했습니다. 옛날 성결교회 이성봉 목사님이 한국 전쟁 때에 전남 목포 지역에서 북한군에게 붙잡혀서 목사라는 이유로 엄청나게 몽둥이로 맞았는데, 그 몽둥이 찜질이 아프지가 않더라는 것입니다. 이상하게 견딜 힘을 하나님께서 주시더랍니다. 박해를 당할 때에 하나님의 은혜가 그들에게 특별히 주어지는 은혜가 있습니다. 박해가 아니라면 그렇게 주님께서 가까이 와주시고 건져주시는 견딜 힘을 주시는 특별 은혜를 누릴 수 없었을 것입니다.
또한 박해를 당할 때에 죄로부터 보호를 받습니다. 세속화의 위험으로부터 보호를 받습니다. 믿음 때문에 세상으로부터 온갖 모욕과 멸시를 받으면서 세상을 사랑할 마음이 일체 사라지기 때문에 도리어 더 거룩해지는 은혜를 입는 것입니다.
또한 박해를 받으면서 더 진리를 사랑하며 믿음의 지조를 지키며 순결한 마음으로 주님께서 더욱 충성스럽게 자기를 단장하는 은혜를 입게 됩니다. 그래서 박해를 받는 것은 변장한 하나님의 축복이요 은총입니다. 박해를 받았더라면 적당한 신앙 생활하면서 세상에 타협하면서 살고 죄를 범하며 살았을 것이고 믿음의 정절을 잘 가꿔가지 못했을텐데 박해 때문에 더욱 순결하고 성숙한 신앙으로 성장하는 복을 입게 된 것입니다. 참으로 박해가 복이기에 박해를 당할 때에 기뻐하며 즐거워해야 마땅한 것입니다.
또한 기뻐하고 즐거워할 이유는 주님께서 약속하신 바 말씀대로 천국에 들어갑니다.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라는 말씀대로입니다. 그뿐 아니라 하늘에서 상이 클 것이라고 주님께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 앞에서 받을 상 중에서 이 복이 가장 아름답다 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이름으로 미움을 당하고 박해를 당하고 목숨을 잃어버리는 일을 당할 때에, 슬퍼하거나 낙심할 것이 아니라 도리어 기뻐하고 춤을 출 만큼 즐거워해야 하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즐거워할 이유는 믿음의 선진들과 교제하는 영광을 누리기 때문입니다. 12절 끝에 주님께서 이르시기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비록 부족하지만 주님의 이름으로 욕도 듣고 멸시도 당하고 왕따도 당하고 신체적인 공격도 당하고 전도하다가 위협도 당하며 박해받는 형제들을 위하여 눈물로 기도하고 적으나마 그들과 그 가족들을 돕기위하여 손을 펼 때에, 우리는 어느틈엔가 그들과 일체감을 갖게 됩니다. 저 북한 형제들과 나이지리아 흑인 형제들과 저 이란의 믿음의 형제들과 한 형제 자매로서 박해의 고통을 나눔으로써 형제의 교제를 나누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장차 우리는 저 천국에서 믿음의 위대한 선배들과 함께 하는 은총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이처럼 큰 복이 있으므로, 우리는 신앙 때문에, 주님을 위하여 봉사하고 헌신하며 믿음을 지키기 위하여 가족과 친척과 친구와 직장 동료들에게 비웃음과 박해를 당할 때에 기뻐합시다. 전도할 때에 냉대를 당하고 비웃음을 당할 때에 기뻐합시다. 오늘날 78개 국가에서 높은 지수의 박해가 이루어지고 있는데 그런 국가에서 신앙 생활하는 신자들이 불쌍한 것이 아니라 복이 있다는 점을 기억합시다. 저 북한의 형제들이 육신적으로는 불쌍하지만 영적으로 주님이 보실 때에는 참으로 복이 있음을 기억합시다. 장차 천국에 가면 그들이 참으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주님 곁에 가까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이 땅에서 살아가면서, 사람들과 어울려 살면서 비방과 멸시도 받는 어려움도 겪게 되는데, 그 이유가 우리 죄와 잘못 때문이라면 기꺼이 그 수치를 감당하면서 자기를 반성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유 없이 우리를 반대하고 모욕을 주는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 경우에도 우리는 너무 분노하지 맙시다. 우리가 모든 사람이 우리를 좋아해야 할 정도로 우리가 선하고 완벽한 사람도 아님을 기억하면서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고 차분하게 자기를 지킵시다. 애매하게 고난을 당할지라도 우리 주님께서 묵묵히 참아내신 것을 기억하면서 우리도 기꺼이 모욕과 멸시를 참아 냅시다. 그러나 주님의 이름으로, 주님을 믿는 신앙 때문에 우리가 모욕과 멸시를 당할 경우에는 우리는 참으로 기뻐하고 크게 즐거워합시다. 왜냐하면 이것은 우리의 신앙이 진실하며 견고한 것을 보여줄 기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 신앙을 통하여 우리의 믿음의 진정성을 확인하고 영광을 받으실 기회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박해를 받는 경우에 진정한 신자는 그 박해 때문에 더 많은 축복과 은혜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이 더욱 굳건해지고 더욱 순전해지고 더욱 세상을 이길 은혜를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박해를 인하여 기뻐하며 감사합시다. 지금 우리는 그러한 기회가 별로 없습니다. 그럴지라도 우리가 집안에서 굳건한 믿음으로 살아내면 그런 박해를 받을 수 있습니다. 세속화된 직장에서 진정성 있는 신앙으로 살아가면 그러한 박해의 축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 세속화된 사회에서 우리가 견고한 믿음으로 살아가면 반드시 그 박해가 올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3:12 말씀대로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
고 하였으니, 반드시 박해의 은총이 우리에게도 주어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 모두 이 여덟 번째 축복의 은총을 소중히 여기고 믿음으로 승리함으로써 하나님께 영광 돌립시다. 그리하여 장차 주님 앞에 가서 크고 아름다운 상을 받으며 엘리야 엘리사 선지자들을 가까이에서 뵙는 영광을 누리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