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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처럼 전자 저울로 달아내는 대형소매점에선
"덤"으로 준다는 게 여간해선 보기 어려운 광경이다.
더운날 비좁은 건물아래 그늘에 노점을 펼처두곤
쉴새없이 다듬는 할머니들이 동네마다 있곤 하는데,
그분들은 제값 만큼 주셨지만 더달라고 떼쓰면
투덜거리시면서도 한 웅큼 더 쥐어주신다.
그래서인지 상추라도 좀 살라치면 어머니는 집근처의
서원유통 매장말고 내다놓고 파는 분들에게 가서 쭈글쭈글한
까만봉지(그분들은 봉지도 재활용인지라 온통 구겨진채 모여있거
나 색깔도 다양하다. 투명파랑이나 주황도 있다)에 가득담아오라
고 하신다.
어디 그뿐인가 포스트 콘프레이크를 사니깐 플라스틱 물총준다고
간사들 사이에서 거기 집중적으로 눈독 들인 것도 덤의 진풍경이다.
이처럼 대가에 걸맞는 기본사양외에 후한 인심이나 상술 덕에 주어지는
덤이라는 것은 상거래를 꽤나 재미나게 한다.
그런데 덤으로 받는 다고 해서 모두 좋은 것이 아닌 것도 간혹
나타난다.
성령의 학교인 영남 제 7기 UDTS 자봉 간사로 와서 내가 덤으로
얻는 것 중에 무좀이 바로 그런 류이다. 심한 건 아니지만
멀쩡해뵈는 발 밑바닥은 듬성듬성 껍질이 벗겨지고 빈티가 난다.
와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이만한 시설 갖는 게
쉬운게 아니고 보면, 내가 어지간히 안씻는 거 뽀록난다.
해서 발바닥을 보여야하는 모임에서는 여간 눈치뵈는게 아닐때
가 종종있어서 발을 굽혀서 가능한한 양반다리라도 발바닥이 잘
드러나지 않게 하곤 한다.
덤으로 얻는 은혜도 나누고픈데, 요한복음을 다시 잘게 새롭게
묵상할 수 있는 것도 제법 큰 특권가운데 으뜸이다. 작년처럼말이다.
며칠 뒤면 나도 묵상인도란 걸 이틀아침 만큼 하게 되는데
8월 15일을 향하면서 요한복음 13장을 막 지나왔다.
요한복음 13장은
예수께서 잡히고 달리셔야할 유월절 직전상황이다.
이 장이 쓰여지던 날도 예수께서는 몇가지 분명히 아셨다고 하는데,
1절과 3절에선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기손에 맡기신 것과
떠나고 가야할 장소와 때가 이른 줄을 아셨다고 하신다.
아버지께로부터 와서 아버지로 돌아가셔야할 것. 요한을 통해
그렇게 완곡하게 그려두고 계신것이다. 죽을 날이 멀잖은 식사...
그 식사엔 갓 구운 떡과 물이 있다. DTS에선 점심을 수제비로 했다면,
원조 예수제자훈련학교에선 이따금씩 저녁도 떡으로 마무리 되곤한다.
그건 이번 주 식단을 맡은 요한의 잘못만도 아니다.
먼저는 이적앞에 쉽게 열광하지만 대접 정신을 몰라서,
마이크도 없는 연일 집회에서
"나를 저버리고 내 말을 받지 아니하는 자를 심판할 이가 있으니!.."
라고 예수께서 목이 터져라 외쳐도 물한사발, 찬 행주하나 준비않으니
재정후원이라고 턱턱해내는 것도 아니었다.
그치만 더 큰 문제는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이 팀에게
풍성하게 하나님께서 부으셔도 돈궤맡은 제자하나는 자주 주머니에
구멍을 내서 곤란을 야기했다.
으레 우리 각자의 돈주머니가 그런 것처럼.
이런 상황에서 어렵사리 떡과 물이 나왔을 때,
평소에도 쿡장 요한이 예수의 총애받는게
못마땅하던 어부베드로가 떡이 왜 이모양이냐, 살림을 잘했으면
갓잡은 생선 몇마리는 먹을 수 있지 않느냐면 툴툴 거린다.
시장이 반찬인지라 곤한 식탁에 큰 요동은 없지만 말이다.
예수께선
어설픈 식탁에서 떡을 입으로 가져가시다가 문득 찢은 떡을
응시하신다. 광야에서 달린 놋뱀처럼 나 찢겨 달려야 한다.
다른 때와 달리 아버지께 돌아가야할 때가 이르렀음을 감지한
예수의 입에서 씹히는 떡이 그리 부드럽지만은 않다.
하지만 예수의 시선은 언제나 처럼 자신의 찢은 떡보다는
아옹거리며 관계의 싸움이 한창인 제자들에게 곧장 옮겨진다.
감사로 시작한 식사가 이어지는 동안도
요즘 특히 둘만의 특별한 관계로 전체 공동체의 벽을 쌓는
마가와 누가를 주시하기도 하시고,
저녁 등불이 잘들지 않는 구석자리에 앉아 모래씹듯이 먹고있는
가룟유다에 물끄러미 시선을 던지곤 하신다.
가룟유다...
그러다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난 예수를
누구도 눈여겨 보진 않았다.
평소처럼 편안히 웃으시는 데다가 별 소리없이 자리에서 일어서신 터라
시끌벅적한 제자들의 입은 여전히 우물거리고 있는 것이다.
이적은 누구나 환호하며 주시하지만, 예수의 작은 발걸음이 늘
발견되는 건 아니다.
예수는 겉옷을 벗어두시곤 허리에 수건을 가져다가 두르시고
한쪽 가의 세리 마태앞에 쪼그려 앉으셨다.
습관처럼 능숙하게 일어난 일이라 마태는 순간 당황에 빠지긴 했다.
그러나 갖춰입고 있는 자신앞에 겉옷도 없이 쪼그려앉은 사람에게
발을 내맡기는 것이 그리 두려운 것은 아니다.
예컨대 이따금 목욕탕서 돈받고 때밀어 주시는 분들이
옷입고 등밀어주러오시면
쑥스럽겠지만 말이다.
게다가 말씀그대로 쪼그려앉아 벗은 예수님은
마른땅에서 자란 줄기처럼 고운 모양이나
풍채도 없지 않은가 말이다.
종종 사람들은 저만 못한 사람들이라고 여길 때
어깨에 힘이 들어가곤 한다.
아주 짧은 시간이지만 예수는 씻겨줄 제자의 발을 들여다보신다.
거친 들과 산을 오르내리며 신들메 사이로 살이 터진 이도 있고,
나무등걸처럼 굳은살이 겹쳤거나
이런 기후에도 놀랍게 무좀과 습진에 노출된 제자들이
여간 안쓰러운 것이 아니다.
나와 이웃은 누군가의 발을 씻겨주고,
또 때로는 누군가가 나를 씻어주길 바란다.
죄가 묻어 흉하게 얼룩진 발이나
상처와 연약함에서 기인해 갈라진 발,
그리고 전염되고 감염된 무좀발까지 말이다.
그치만 누군가 제 겉옷을 입고 서서 네 발이 더럽고 터졌다하면
어디 숨고만 싶다.
그런 우리에게 예수께선 벗고 쪼그려 앉으시는 것이다.
이 말씀은 내게 한 지침이 되었는데,
마침 우리 플락학생들의 발을 씻어 줘야할 시점에
머뭇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재정이 말도 못하게 어려운 우리
플락학생들은 강의 기간이 지나가고 재정 얘기가 많이 나오고부터
얼굴이 어두워 졌다. 말도 잘 안하고 말이다.
그래서 플락모임에 들어가면서 다시한번 예수의 벗으신 몸처럼,
이부분에 대한 벌거벗음이 내쪽에서 먼저 일어나야겠단 마음을 주셨다.
나의 춥던 날들. 그리고 정말로 두려운 것들...하나씩 말이다.
그리고서야 남의 밭 날품을 팔고,
시장 노점을 펼쳐두고 여름볕사이에서 흥정하는 홀어머니와
노부모를 향한 각학생들의 상한 마음과 낙심을 깊이 읽을 수 있었다.
그리고 대야에 물을 담아오신 예수님은 두르신 수건으로
발을 씻기신 것을
유념할 수 있었다.
나는 내속에 있는 물. 침이나 타액, 땀으로
종종 사람들의 발을 씻으려 들었지만
이내 그들을 더 큰 어려움속으로 밀어넣는 것을 보았다.
거라사 광인을 줄로 더 묶었듯이 말이다.
생수같이 맑은 성령의 물을 대야에 떠와서
아프지 않게 닦아 주는 것이 필요하다고 성령께서 속삭이셨다.
그래서 시키고 이끄시는대로 아이들의 마음 어루만지고
주시는 마음과 말로 세워 나가고
여유있는 기다림으로 들어주고 나자
제법 환해지는 걸 목도할 수 있었다.
안그래도 재정에 기죽어 자라온 애들.
마음이 어려운 것 대신, 그 초라한 낙심대신
재정의 역사를 이루시는 하나님을 보겠다는 고백을
할 때에 이르러 하나님께서 씨익 웃으시는 것도 만끽하게 된다.
이곳 성령의 학교는 이렇게 묵상으로 플락모임이 연명된다.
무좀이 좀 가렵긴 하지만 말이다.
참고로 우리 애들은 25살이다. 히히
재정의 문들은 활짝 열릴지어다. 당신의 두려움에도 말이다.
카페 게시글
ㅁ갈렙이야기
무좀
똥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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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8.15 2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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