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AI와 설교의 외주화 >
넷플릭스에서 방영된 영화 중 최고의 작품을 꼽으라면 나는 <러브, 데스, 로봇>을 말하고 싶다. 여러 가지 테마를 가진 단편 애니메이션 영화들인데 작품 하나하나에 문학적 깊이가 정말 뛰어나다. 미술과 영상이 문학적 기법과 어우러지며 마술적인 즐거움과 신비감을 주는 예술 영화들이다. OTT 이전 시대였다면 나는 기어이 이 작품을 소장하고 말았을 것이다. 정말 뛰어난 예술작품이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 인류가 종말을 고한 지구에 인공지능 로봇들이 남아 인간의 미개함에 대해 조롱하는 장면이 자주 등장한다. 그 설정이 너무 리얼하고 현실적이어서 섬득하게 다가온다. 인간이 개발한 인공지능이 특이점을 지나 인간의 지능보다 앞서게 됨으로써 인간을 지배하게 되는 터미네이터의 세계가 반드시 오고야 말 것이라는 것은 상상이 아니라 현실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반증하는 사례가 요즘 유행하고 있는 chat gpt다. chat gpt가 등장한 지 4개월 만에 1억 명의 가입자가 발생했다. 새로 등장한 이 신기한 물건에 호기심을 갖고 사람들이 노리개 삼아 여러 가지를 시도하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가 미처 적응하기도 전에 놀랄 만한 속도로 진화하고 있다. chat gpt가 할 수 있는 일들은 단순히 질문에 대한 언어적 답변이 아니라 그림 그리기, 이미지 편집하기, 컴퓨터 프로그래밍, 코딩, 논문 작성 같은 것들이다. 이 인공지능이 이 상태로 진화를 거듭하게 되면 머지않아 인간의 지능과 기술을 뛰어넘는 특이점이 오게 될 것이다.
많은 부분에서 인간은 인공지능에 일자리를 빼앗기게 될 것이다. 고소득 전문직으로 분류되던 변호사, 변리사, 회계사, 세무사, 심지어 의사들까지 그 자리를 잃게 될 것이다. 기능적 지식을 기반으로 하는 직업들이 사라지는 직업군에 속할 것이다. 하지만 가치판단을 내려야 하는 직업과 인간과의 정서적 교감을 필요로 하는 직업들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인간이 지구의 주인공으로 남아있는 한에서는 말이다.
교회에서는 설교자의 자리가 사라질지도 모른다. chat gpt가 처음 등장했을 때 영리한 척하는 몇몇 목사들은 chat gpt를 이용하여 설교문을 작성하거나 복음이 들어가지 않는 곳에 chat gpt를 이용하여 복음을 전할 수 있다는 순진한 발상을 하는 것을 보았다. 또 일부 신학교는 시대를 앞서가는 양 chat gpt를 목회에 활용하는 방법에 대해 특강을 한다. 그것이 가지고 있는 문제를 통찰하기도 전에 그것에 올라타서 이익을 선점하겠다는 얄팍한 생각이 앞서는 것이다. chat gpt가 천사가 될 것인지 악마가 될 것인지 먼저 분별하지도 않고 덜컥 올라타고 보자는 것이다.
이젠 무능한 설교자들은 AI에게 설교를 외주화할 것이다. AI가 만들어주는 설교는 과연 어떤 설교인가. 성경과 그것의 주석들을 편집하여 그럴듯하게 논리를 짜 맞추는 말하기가 설교라면 그것은 하나의 훌륭한 설교가 될 수 있다. 이 훌륭한 설교는 더 이상 인간의 창의적인 말하기를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AI가 제공하는 설교들이 훨씬 논리적이고 합리적일테니 인간은 인간의 설교를 거부할 것이다. AI는 헌금을 강요하고, 지옥의 공포를 주입하고, 맹목적 충성을 강요하는 등의 더러운 설교를 하지 않을 것이다. 입력된 데이터에 의해 성경 본문을 기초로 하여 충실하게 주석할 것이다. AI가 제공하는 설교 앞에 인간의 주석은 필요성을 상실할 수밖에 없다.
말로 사람을 가르치는, 교사로서의 설교자 역할은 AI가 훨씬 잘할 것이다. AI 앞에 인간의 설교는 공자 앞에 문자 쓰는 격이 될 것이다. 하지만 인간에겐 설교가 아니라 설교의 내용을 살아가는, 따뜻한 체온을 가진 동류 인간으로서의 설교가 있어야 한다. 인공지능이 가지지 못한 인간에 대한 따뜻한 시선과 세계와 인간을 통찰하며 무엇이 옳은가에 대해 정확하게 가치판단을 할 수 있는, 예언자적 지성으로 올바른 삶의 방향을 제시할 수 있는 설교자로서의 종교인은 더욱 요구될 것이다.
시대를 분별하지 못하면 시대를 이끄는 게 아니라 시대에 끌려가다 압살당하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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