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를 저지르는 자는 악마에게 속한 사람입니다. 악마는 처음부터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악마가 한 일을 없애 버리시려고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나타나셨던
것입니다." (3,8)
요한은 요한1서 3장 1-3절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입어 하느님의 자녀가 된 성도의
신분과 이러한 성도는 미래의 영광을 희망하며, 현재 주님을 본받는 순결한 삶을 살아야
함을 역설하였다.
이어서 요한은 요한1서 3장 4절부터 12절까지 하느님의 자녀는 불법을 행치 않고
그리스도 안에 머무르는 삶을 살아야 함을 강력하게 강조함으로써, 앞 단락의 내용을
한 걸음 더 진전시킨다.
여기서 요한의 논리는 그분 안에 죄가 없기 때문에 그리스도안에 머무르는 자는
논리적으로 죄를 범치 않는다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죄를 멸하기
위해 오셨기 때문에 그분 안에 머무르는 자는 죄에 대하여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악마는 끊임없이 성도들을 유혹하여 죄를 짓도록 부추긴다. 그리고 이 유혹에 빠지는
자는 악마에게 속하게 된다. 그러나 하느님의 씨를 소유한 자는 이러한 유혹에서
승리하여 지속적으로 하느님 안에 머무를 수 있게 된다(1요한3,9). 죄에 대하여
승리하는 자는 바로 하느님께 속한 사람인 것이다.
한편 요한은 요한1서 3장 4절에서 죄를 지으면서도 그것에 대해 크게 개의치
않았던 이단들을 염두에 두고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자행하는 것이라고
단정적으로 선언한다.
여기서 '불법'으로 번역된 '아노미안'(anomian)의 원형 '아노미아'
(anomia)는 '율법'에 해당하는 명사 '노모스'(nomos)에 부정 불변사 '아'(a)를
접두시켜, 문자적으로 '율법이 없는 상태'를 의미하는데, 성경에서는 주로 하느님께서
주신 계명에 대한 불순종이란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러한 원어적 의미로 볼 때, '불법을 자행하다'라는 말은, 곧 하느님의 율법을 파괴하는
자라는 말이다. 진리와 교리를 왜곡하여 분명히 하느님을 거스르는 범죄를 행하면서도
자신의 행위들을 합리화시키며, 자신의 잘못된 사상과 주장을 가지고 성도들을 속였던
당시 영지주의 이단들을 향하여 요한은 이러한 그들의 행위야말로 하느님께서 인간의
삶의 기준으로 주신 율법을 파괴하는 불법임을 분명하게 선언하고 있다.
요한은 요한1서 3장 4절에서 "죄를 저지르는 자는 모두 불법을 자행하는 자입니다.
죄는 곧 불법입니다." 라는 사실을 명시적으로 밝히며, 죄와 불법은 별개의 것이 아닌
하나라는 사실을 분명히 밝혀주고 있다.
요한은 불변하는 진리를 나타낼 때 사용하는 현재형 시제를 구사하여 '죄= 불법'은
결코 변경시킬 수 없는 진리임을 증거하고 있다. 요한이 이 사실을 강조하는 것은
당시 교회안에 신은 영적 세계에만 관심을 가지며 악한 물질로 구성된 육체의 죄에는
관여치 않는 것으로 보고, 죄와 불법의 관계를 부정하는 영지주의 이단들이 득세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자신들의 죄가 하느님의 율법을 깨는 불법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오류에 빠져 있었다.
죄로 번역된 '하마르티아'(hamartia)는 '과녁에서 빗나가는 것'이란 문자적 의미를
가지며, 실제로는 하느님께서 전하신 법으로부터 벗어나는 모든 행위와 상태를 말하고,
'불법'으로 번역된 '아노미아'(anomia)는 '법이 없는 상태' 즉 하느님의 법을
깨뜨리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요한1서 3장 4절은 하느님께로부터 달아나 인간 본성대로 살아가는 것이
곧 하느님의 법을 위반하는 삶임을 규정하는 의미를 지닌다. 요한은 이러한 죄의 개념과
특성을 요한1서 3장 5절이하에서는 그리스도와 악마를 대조하여 잘 설명하고 있다.
요한은 5-7절에서 그리스도안에 머무는 자는 죄에 탐닉하지 않게 된다는 사실에 대해
밝힌다. 그리고 8-10절에서는 악마에게 속한 자와 하느님께 속한 자를 상호 대조시켜,
전자는 죄를 범하지만 후자는 죄는 범하지 않는다고 밝힘으로써 하느님의
자녀된 성도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죄를 저지르는 자는 악마에게 속한 사람입니다' (8)
본절은 '의로움을 실천하는 이'에 대하여 묘사한 7절 하반절과 대조를 이루고 있다.
의로움을 실천하는 이는 그리스도께서 의로우신 것처럼 의로운 반면, 죄를 짓는 자는
악마에게 속하여 죄를 짓는 다는 사실을 비교하여, 성도는 의로움을 실천해야 한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부각시키는 것이다.
사실 죄를 저지르는 자는 악마에게 속해 있다는 사실을 증거하는 것이다. '속한'에
해당하는 '에크 ~에스틴'(ek ~estin)은 현재시제로, 앞으로 속하게 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현재 '속해 있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에크'(ek)는 기원,출생을 뜻하는 전치사로서, 범죄하는 자들이 악마에게
속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 모든 죄의 기원이 악마임을 함축적으로 보여준다.
악마는 바로 죄의 아비로서 태초부터 범죄한 자이다.
성도의 의로운 행위는 자신의 소속과 기원이 하느님께 있음을 보여주고, 불의한 행위로
범죄하는 자는 자신의 소속과 기원이 악마(ho diabolos; 호 디아볼로스;the devil)
에게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악마는 처음부터 죄를 지었기 때문이다'
이유 접속사 '호티'(hoti)로 시작하는 본문은 죄를 짓는 자가 왜 악마에게
속하였는지 그 이유를 설명하는 문장이다. 요한은 그 이유를 악마가 '처음부터'
범죄하였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처음'으로 번역된 '아르케스'(arches)의 원형 '아르케'(arche)는
어떤 일의 시점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천지의 시작을 가리키는 '태초'와 어떤 일련의
과정의 처음 시점을 가리키는 '시작', '처음'이라는 뜻으로 사용된다.
본절에서는 다른 어떤 수식어도 없이 '아르케스'(arches)를 단독으로 사용하여,
모든 것의 시작 시점인 '태초'를 가리키고 있음을 보여준다.
즉 인간이 창조되기 전에 벌써 영계에 교만하여 타락한 악마가 있었고, 이들에 의해서
범죄는 먼저 선행되었으며, 이들에 의해서 인간의 타락이 이루어진 것이다. 따라서
악마는 모든 인간 범죄의 근원이 되고, 현재 죄를 범하는 모든 자들의 아비가 되어
(요한8,44) 세상의 어두움을 주관하고 있다(에페2,2 ;6,12).
'그래서 악마가 한 일을 없애 버리시려고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나타나셨던 것입니다'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본절에서
'일을'로 번역된 '에르가'(erga)의 원형 '에르곤'(ergon)은 '행위', '행실', '역사'라는
뜻이다. 여기서는 복수형으로 사용되어 악마가 여러 측면에서 하느님을 대적하는
범죄를 일삼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러한 악마의 일들을 하나로 요약하면, 사람들로 하여금 하느님의 뜻에
대항하여 범죄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그런 악을 없애 버리시려고 이 땅에 오신 것이다. '없애
버리시려고'로 번역된 '뤼세'(lyse)의 원형 '뤼오'(lyo)는 보통 '풀다', '놓아주다' 의
의미로 사용되지만, '파괴하다', '헐어 버리다', '폐하다' 라는 뜻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그런데 여기서는 가정법 부정 과거 능동태로 사용되었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시어 악마의 일을 파괴하시되, 매우 적극적으로 완전하게 파괴하심을 보여준다.
'하느님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아무도 죄를 저지르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씨가
그 사람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3,9ㄱ)
여기서 '~에게서'에 해당하는 전치사 '에크'(ek)는 기원의 의미를 나타낸다.
또한 '태어난'에 해당하는'게겐네메노스'(gegennemenos)의 원형 '겐나오'
(gennao)는 출생을 의미하는 동사이며,본문에서는 완료분사로 쓰였다.
따라서 본문은 하느님을 기원으로 하여 출생한 자를 지칭하며, 인간의 육체적 출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거듭난(새로난) 것을 말한다.
요한 복음 3장 3-8절, 야고보서 1장 18절, 그리고 베드로 전서 1장 23절 등에도 죄인의
거듭남(새로남)에 대한 진술들이 나오는데, 이 모두에게 공통적으로 말하는 진리는
죄인의 영적 거듭남(새로남)이 자신의 의지, 소망, 힘 혹은 교육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위로부터 주시는 은총으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이다.
즉 하느님의 주도적 권세와 능동적 역사하심으로 죄인의 거듭남(새로남)이 이루어진다는
것이 계시 진리의 일관된 주장이다.
그렇게 해서 새롭게 출생한 자는 과거 타락한 본성의 자아가 추구해 온 것들에 등을
돌리고 하느님을 따라 그의 말씀과 성령의 인도하심을 쫓아 살아가게 된다.
'하느님의 씨'
'씨'로 번역된 '스페르마'(sperma)는 '씨앗'을 의미한다. 요한에 의하면, 하느님의
씨가 하느님께로부터 난 성도들 안에 있어 그들로 하여금 죄를 짓지 않게 한다고
설명한다. 많은 학자들은 그 씨를 '말씀'과 '성령'이라고 주장한다.
먼저 '말씀'이라는 주장의 근거는 베드로 전서 1장 23절과 야고보서 1장 18절의
진술에 있다. 베드로는 성도의 거듭남(새로남)에 대해서 말하면서 '썩어 없어지지
않는 씨앗' 곧 살아계시며 영원히 머물러 계시는 하느님의 말씀으로 났다고 말하며,
야고보는 진리의 말씀으로 낳았다고 말한다. 이처럼 하느님의 말씀을 마음으로
받아들일 때만이 거듭남(새로남)의 체험을 할 수 있다.
요한은 바로 생명력을 배태하고 있는 '씨'란 이미지를 거듭난 새 생명의 이미지와
연결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거듭난(새로난) 자는 결국 죄에 대하여 승리한다는
점에서 하느님의 말씀은 죄에 대한 승리와도 연결된다.
하느님의 말씀이 성도 안에 머무를 때,죄를 이기고 승리하게 되는 것이다
(1요한1,10; 2,5.14). 그리스도 안에 머무는 삶은 한마디로 거듭난(새로난) 자
안에 머물고 있는 하느님의 말씀과 동행하는 삶이다.
둘째, '성령'이라는 주장의 근거는 요한 복음 3장 5-8절에 있다. 예수께서는 니코데모와의
대화에서 거듭남(새로남)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성도가 성령으로 거듭난다는 사실을
밝히셨다.
바오로 역시 하느님의 자녀들은 하느님의 영의 인도를 받는다고 말하였다(로마8,14).
성령께서 내주하시는 성도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살아가게 됨으로써, 삶에서 육의
욕망을 이루지 않고, 성령의 열매들을 맺게 된다(갈라5,16-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