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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423. 묵상글 ( 부활 제3주일. - 동행.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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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423. 부활 제3주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동행
오늘 엠마우스 얘기를 묵상하자니
주님께서 드셨던 백 마리 양 비유가 저절로 떠올랐습니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가 바로 비유의 잃은 양이라고 연결이 되었던 것이지요.
엠마오 두 제자는 왜 엠마오로 갔겠습니까?
주님의 제자단 곧 주님의 공동체서 이탈하여 간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런 제자를 ‘제멋대로 이탈한 놈들 갈 테면 가라’고 하지 않으시고
그들을 찾아가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주님의 진한 사랑이 느껴집니다.
그런데 이들이 왜 주님의 공동체에서 이탈했겠습니까?
주님의 공동체에 주님께서 돌아가시고 안 계시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어제 저는 제자들이 주님과 함께 떠나지 않은 것이 문제이고,
제자들의 배에 주님께서 안 계시기에 풍파를 만난 것이라 말씀드렸는데
오늘은 주님의 공동체에 주님께서 돌아가시고 안 계신 것이 문제입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의 공동체를 돌아보게 합니다.
우리와 같이 살던 자매가 공동체를 떠난다면
그것도 한둘이 아니라 여럿이 떠난다면 그것은
우리 주님 공동체에도 주님께서 돌아가시고 안 계시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런데 우리는 강하게 반문합니다.
언제나 어디나 계시는 우리 주님께서 우리 공동체에,
그것도 주님의 이름으로 모인 우리 공동체에 안 계신다니 말이 됩니까?
그렇습니다. 그럴 리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분명 부활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 공동체에는 죽어 계신 것입니다.
매일 미사를 드려도 그분을 우리 공동체에 모셔 들이지 않기에,
매일 기도를 드려도 그분 말씀을 우리가 공동으로 듣지 않기에 죽어 계십니다.
그리고 매일 예물을 바쳐도 형제와 화해하지 않고 예물을 바치기에,
매일 성체를 모실 때 주님은 모셔도 형제는 받아들이지 않기에,
매일 주님의 몸인 빵을 먹어도 그 빵을 형제와 나누어 먹지 않기에
결과적으로 우리는 주님과 함께 형제를 내친 것입니다.
물론 공동체의 잘못도 있지만 개인의 잘못도 있습니다.
우리 공동체 안에 엄연히 살아계시는데도 주님을 보지 못한 잘못입니다.
욕심과 절망에 눈이 멀어 우리 형제 안에 살아계신 주님을 보지 못합니다.
아무튼, 이런 이유로 공동체에서 이탈한 제자들에게 주님께서 다가가시어
동행하시며 그들의 말을 경청도 하시고, 공감도 해주시며 가르쳐주십니다.
그랬더니 떠난 형제들의 마음이 비로소 움직입니다. 감동한 것입니다.
우리가 공동체를 떠나려는 형제자매에게 할 일도 바로 이것입니다.
다가감-동행-경청-공감, 이것을 먼저 해준 뒤에
그들에게 성경 말씀을 풀이해 주며 설득해야 합니다.
다가감-동행-경청-공감-설득, 이것이 다 중요하지만
그런데 다가감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다가가야 그다음 것들도 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다가가려는 마음 곧 사랑과 경우에 따라 용기도 있어야 다가가기 때문입니다.
떠나려는 것을 눈치채지도 못하거나 보고 안타까운 마음은커녕 무관심하거나
심지어 떠나려는 그가 잘못되었다고 비난하거나 떠날 테면 떠나라는
그런 마음이면 결코, 다가가지 않겠지요.
또 사랑의 마음이 있어도 다가감을 그가 거부할까 봐 못 다가갈 수도 있지요.
그래서 이 사랑에는 용기도 있어야 다가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사랑으로 다가갔으니 그다음은 무식하게 바로 설득하여
성급히 돌려세우려 들지 말고 천천히 그의 길을 같이 걸어주며
그의 말을 듣는 것부터 하고 동감해주는 것에 진심이어야 하고 설득은 나중입니다.
하이라이트는 그러나 빵을 같이 나눔입니다.
주님께서도 제자들과 빵을 같이 나누셨습니다.
멋진 식당이나 술집에 데려가서 음식이나 술을 같이 마실 수도 있고,
손수 음식을 장만하여 같이 먹고 마시면 더 감동적이어서
그의 마음을 다시 뜨겁게 타오르게 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아무튼, 우리의 말씀의 전례와 빵을 나누는 성찬례가 이런 것이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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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423. 부활 제3주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오늘 복음은 엠미로오 가는 예수님과 두 제자와 예수님과 나눈 부활 사건을 전해줍니다.
두 제자는 그리스도께서 살아 계시지 않는다고 생각하니 슬펐습니다. 그들은 엠마오로 가던 길에 그분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가까이 오시어 함께 걸으셨지만 그들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태어나실 때 빛나던 별이 그분께서 돌아가시자 빛을 감추었듯이,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에게 예수님의 본모습이 감추어져 있었던 것입니다.
초대교회의 전승에 따르면 클레오파스는 요셉의 아우 클로파스로서, 예수님의 삼촌으로 전해집니다.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다른 한 제자는 클레오파스의 아들 시메온으로 뒤에 예루살렘의 제2대 주교가 되어 서기 70년 이후 예루살렘 교회를 이끌었다고 합니다. 전승에 따르면, 시메온은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당신 제자들의 마음이 죽어 있는 것을 보시고 그들에게 나타나셨지만, 그들의 눈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들의 눈에 분명히 보였지만 그분이 누구신지 알아보지 못한 것입니다. 루카 복음사가가 알려 주듯이, 그들의 눈이 가리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분을 보는 눈이 가리어 있던 것이 아니라 그분을 알아보는 눈이 가리어 있었던 것입니다.
두 제자는 주님께서 말씀을 건네시는데도 마음안에 믿음이 없었습니다. 그분께서 되살아나셨다는 것을 믿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분께서 다시 살아나시리라고 기대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믿음을 잃었고 희망도 잃었습니다. 그들은 죽은 채로, 살아 계신 그리스도와 함께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죽은 채로, 생명 자체와 함께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생명께서 그들과 함께 걷고 계셨지만 그들의 마음 안에서는 아직 생명이 회복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분께서 다른 어떤 곳이 아닌 빵을 떼는 행위 안에서 제자들이 주님을 알아보게 됩니다. 이 행위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신앙인들에게 믿음의 눈을 가지도록 촉구합니다. 참된 믿음을 지닌 신앙이라면 아무 이유없이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는 것이 아니고 아무 생각없이 교회에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두려움과 희망속에서 하느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가난한 이들과 빵을 떼어 나누는 행위에 있을 것입니다. 주님의 부재는 정말 아무것도 없는 그런 부재가 아니고 믿음의 눈이 없을 때 오는 부재입니다.
엠마오로 가는 길은 우리의 지상의 순례길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이 순례길에 하느님 없이 이 여정의 길을 걷는 것은 공허하고 하무합니다. 참된 하느님의 생명력이 우리 마음에 자리잡지 않기에 자신의 삶에 참되고 소중한 의미를 발견하지 못하게 됩니다.
참으로 부활하신 주님을 알아 뵙고 우리 마음속에 기쁨과 사랑의 불이 타오를 수 있도록 주님께 믿음의 눈이 열리는 은총을 청하도록 합시다.
✝️ 일요일 성체의 날✝️
<세계 도처에 일어난 성체의 기적(마리아 헤젤러)>
지극히 거룩하신 성체 앞에서 멈춘 네 마리의 말
독일 -1453년
이 소식은 주위의 모든 지역으로 급속하게 퍼져갔다. 랑엔비제 본당의 신부는 십자가와 기를 들고 엄숙한 행렬 속에서 숲으로 들어가서는 성체를 싸고 있는 아마포를 땅으로부터 집어 들고서 종소리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성당으로 모셔갔다. 이것은 1453년의 부활절과 오순절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 때부터 랑엔비제에서 있었던 그 기적의 성체께 경배하러 오는 행렬은 20세기까지 끊이지 않고 있다. 그 때 이후로 크레타의 대주교이면서 교황 비오 2세의 시종관이었던 폴란드와 슐레지엔 지방의 사도 눈티우스(Nuntius)는 수많은 순례자들에게 대사를 베풀어 주었다. 이것은 1460년 2월 4일의 기록을 보면 알 수 있다.
이 속죄의 의식은 부활절이 끝난 후 네 번째 일요일에 거행하기로 확정되었다. 16세기까지는 이 곳을 방문하는 순례자들의 수가 엄청나게 많아서 특히 8일간의 대축제 동안에는 약 오만 여명이나 되는 신자들이 모여 들었다. 성체 안에 계신 하느님께서 하느님의 인내심으로 감내하셨던 모든 신성모독과 성유물 약탈에 대해 하느님께 죄사함을 빌었다. 매년 부활절이 끝난 후 네 번째 일요일에서 다섯 번째 일요일 동안에는 성체에 대한 자신의 믿음을 사랑으로서 고백하기 위해 방방곡곡에서 행렬이 랑엔비제로 몰려들었다.
이러한 의식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거행될 필요가 있는지 없는지에 대해서 우리는 슬프게도 생각하기 조차 꺼려한다. 하지만 2차 대전이 끝난 후에는 아주 많은 것들이 바뀌었다.(1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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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페소 평화 관상 기도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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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423. 부활 제3주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루카 24,31)
오늘은 부활 3 주일입니다.
오늘 <제1독서>는 오순절 날에 베드로가 유대인들에게 한 설교의 일부입니다. 이 설교에서 베드로는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죽음의 고통에서 풀어 다시 살리셨고”(사도 2,24), 예수님은 “저에게 생명의 길을 가르쳐주신 분”(사도 2,27)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이 고백을 받아서 <화답송>의 시편에서는 “주님 당신께서는 저에게 생명의 길을 가르치시나이다.”(시 16,11 참조)라고 노래합니다.
<제2독서>는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약 30년이 지나서 베드로가 소아시아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낸 서간입니다. 베드로 역시 마찬가지로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서 일으키키시고 영광을 주시어, 우리의 믿음과 희망이 하느님을 향하게 해주셨음”(1베드 1,28)을 말합니다.
<복음>은 예수님 부활의 모습을 드러내주시는데, 참으로 감동적입니다. 곧 당신의 제자들이 믿음을 지켜내도록 하기 위해, 얼마나 섬세하게 사랑하시는지를 보여주십니다.
아마, 우리 모두는 실망과 절망에 빠져 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가던 길을 중단해버릴 만큼, 희망이 꺾인 적도 있을 것입니다. 왔던 길을 되돌아가버릴 만큼, 믿었던 바가 의혹과 불신으로 바뀌어버린 적도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엠마오로 가고 있는 두 제자들이 바로 그러했을 것입니다. 그들은예수님의 죽음으로 희망을 잃고, 슬픔과 절망에 빠져 이전의 자신들의 삶으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가까이 가시어 그들과 함께 걸으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눈이 가리어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루카 24,16). 혹 우리도 우리와 동행하시며 동행하시는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고 있지는 않느지 들여다 보아야 할 일입니다.
절망과 슬픔에 빠져,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그들에게 예수님께서 먼저 말씀을 건네십니다. “걸어가면서 무슨 말을 서로 주고받느냐?”(루카 24,17) “무슨 일이냐?”(루카 24,19)
그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일의 표면만 보고서 절망에 빠져, 진정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사실, 슬픔과 절망에 빠진 바로 그 순간은 위기의 순간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기회의 순간이기도 했습니다. 바로 그때가 자신들의 걸었던 희망과 믿음을 내려놓아야 할 때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희망과 믿음이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희망과 믿음이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때가 바로 우리의 눈이 가려져 있음을 깨달아야 할 때요, 우리의 눈이 열려야 할 때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아, 어리석은 자들아! 예언자들이 말한 것을 믿는 데에 마음이 어찌 이리 굼뜨냐?”(요한 20,25)
그렇습니다. 자신이 알고 있다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고, 자신이 알고 있던 것을 믿었던 일에서 벗어나서, 새로운 앎과 새로운 믿음을 받아들여야 할 일입니다. 그것은 ‘그분이 죽었다’는 그 앎과 그래서 그분께 걸었던 믿음이 무너져버린 일에서 벗어나, 다시 알아듣고 새로이 믿어야 할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사실을 ‘말씀’을 통해 깨우쳐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다름 아닌 “성경 전체에 걸쳐 당신에 관한 기록들을 설명해 주시며”(루카 24,27), 슬픔에 젖은 그들의 어루만지시어 “마음이 타오르게”(루카 24,32) 하십니다. 그리고 그들은 마음이 타올랐으나 그분이 누구신지 알아보지는 못한 채 응답합니다. “저희와 함께 묵으십시오.”(루카 24,29).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식탁에 앉으셔서, 빵을 들어 떼어 나누어주시며”(루카 24,30) 사랑으로 응답하십니다. 그 깊은 사랑이 그들의 어둠을 비추시니,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루카 24,31). 마치 ‘말씀의 전례’로 마음이 타오르고, ‘성찬의 전례’로 말씀이신 분을 보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결국, 그들은 예수님께서 “빵을 떼실 때에”(루카 24,35) 그분을 알아보게 됩니다. ‘떼어내다’는 단어는 ‘분리하다’, ‘파괴하다’, ‘으스러뜨리다’라는 의미의 동사라고 합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부수심으로 당신의 진면목을 드러내십니다. 그러니 신비, 곧 부활의 신비를 보는 눈은 이 ‘떼어냄’, ‘부수어짐’, ‘으스러뜨림’에서 드러난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우리의 부활도 마찬가지로, 우리의 생명을 부술 때 우리 안에 숨겨져 있는 하느님의 생명을 보게 될 것입니다. 곧 나의 믿음이 부서지고 당신의 믿음이 들어설 때입니다. 나의 희망이 부서지고 당신의 희망이 들어서고, 나의 사랑이 부서지고 당신의 사랑이 들어설 때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부서지고 으스러뜨려질 질 때, 우리는 그분 안에 숨겨져 있는 우리의 생명을 보게 될 것입니다.
이를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습니다. ~우리의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숨겨져 있는 까닭입니다.”(콜로 3,1-3)
그런데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지만”(루카 24,31). “그러나 그분께서는 그들에게서 사라지셨습니다.”(루카 14,31). 그러나 보이지 않는 모습으로 여전히 살아계신 그분께서는 제자들이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을 여전히 동행하시며 그들이 당신을 증언하도록 동행하십니다.
이토록,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믿음을 붙드시고 지켜주시기 위해, 참으로 감동적으로 우리를 동행하십니다. 오늘도 보이지 않는 모습으로 여전히 우리의 슬픔과 절망과 고통 속에서도 우리를 동행하십니다. 하메나 놓칠까 우리의 손을 꼭 붙들고서 말입니다. 우리 주님의 깊고 깊은 사랑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스스로 그분의 손을 빠져나가지는 말아야 할 일입니다.
오늘, 우리가 걷는 이 길에서 당신 ‘말씀’으로 마음이 타오르고, 마음의 눈이 열렸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주님의 사랑과 부활생명을 보는 눈이 열려, 어려움 속에서도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향기”를 뿜어 나르는 “그리스도의 향기”(2코린 2,15)가 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사실은 우리는 이미 그렇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그리스도의 개선행진에 늘 데리고 다니시기”(2코린 2,14) 때문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예수님께서 가까이 가시어 그들과 함께 걸으셨다.”(루카 24,16)
주님!
저는 고통을 없애주기를 바라지만,
당신은 고통을 함께 지라 하십니다.
저는 평화롭기를 바라지만,
당신은 평화를 위해 일하라고 하십니다.
저는 세상의 부패를 비난하지만,
당신은 세상의 부패를 막는 소금이 되라 하십니다.
저는 세상의 어둠을 탓하지만,
당신은 세상의 빛이 되어 밝히라 하십니다.
주님께서 제 가까이 오시어 곁에서 함께 걸으시기 때문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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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423. 부활 제3주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예수님을 동행인으로 모셔야 한다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있고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계십니다. 사랑은 하느님과 하나가 되게 합니다. 영성체를 통해 하느님과 하나 되고, 이웃사랑을 실천하는 가운데 하느님을 만나 뵙는 은총에 눈뜨기를 바랍니다. 사랑받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이 있다면,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에 사랑 더 하십시오. 사랑이신 주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오늘은 기도와 말씀과 성찬에 대해 중심을 두면 좋겠습니다.
먼저 복음의 흐름을 보면,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과 많은 사람은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을 미워하는 모든 사람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하시리라고”(루카1,68)희망하였습니다. 예수님을 메시아, 임금님이라고 환호하였고, 예수님께서 당장에 예루살렘에서 하느님의 다스림을 시작하실 것이라고 기대하였습니다(루카19,11).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무기력하게 죽고 말았습니다. 메시아가 십자가 위에서 비참하게 고난을 받으시며 삶을 마감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충격입니다. 제자들과 많은 사람이, 영광을 좇았으니 메시아의 죽음은 큰 절망을 가져왔습니다.
이에 제자들은 더 이상 예루살렘에 머무를 이유가 없습니다. 게다가 예수님의 시신이 사라졌다는 소문은 절망에 절망을 더했습니다. 낙심과 불안에 슬픔만 커졌습니다. 그래서 빨리 그곳을 떠나야 했습니다. 그 와중에 예수님께서는 무너진 가슴에 다시 희망의 싹을 틔워주기 위하여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과 동행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눈이 가려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설마 예수님이 동행하실 리가 있겠나 하는 마음이죠. 마음의 눈을 연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래도 상관하지 않으시고 함께 걸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우리 인생 여정에서도 무거운 시련과 고통, 낙담 안에 동행하십니다. 그분이 늘 함께하시지만 내 눈이 가려 못 보고 못 느낄 뿐입니다. 문제에만 매여 있으면 다른 것이, 보이지 않는 법입니다. 돌아보면 은총인데 당장은 은총으로 느끼지 못하고 힘에 겨워합니다. 부모님의 자녀에 대한 사랑을 생각해 보면, 자식이 원하면 무엇이든 다 해주고 싶지만 때로는 마음 아파하면서도 해주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자녀도 때가 되면 그것이 사랑임을 알게 됩니다. 은총의 순간을 은총으로 느끼는 것은 뒷날 느끼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렵습니다. 정신을 차려 깨어있으면 희망을 잃었을 때야말로 기도할 때이고 주님을 만날 수 있는 때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성경에서의 기적은, 문제가 있는 곳에서 믿음을 바탕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눈이 뜨이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으로 실망과 허탈감으로 고향 엠마오로 가던 제자는 날이 저물어 동행하던 사람과 서로 헤어져야 할 때가 왔을 때 “저희와 함께 묵으십시오.”하고 나그네를 붙들었습니다. 너는 너의 길을 가고, 나는 나의 길을 가면 그만인데 굳이 ‘함께 묵자’고 붙잡았습니다. 이 붙잡는 모습은 우리의 기도, 간청을 돌아보게 합니다. 아마도 예수님이 풀이해 주는 성경 말씀에 감동하여 더 듣고 싶은 마음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또한 나그네를 외면하지 않는 모습이 나그네를 대접하다가 천사를 만난 아브라함의 모습을 떠오르게 합니다(창세기 18,1-15). “은총은 대가를 요구하지도 않지만, 아무에게나 마구 주어지는 것도 아닙니다”(이현주).
예수님께서 집에 들어가 함께 식탁에 앉아 찬미를 드리고 빵을 떼어 나누어 주실 때 제자들은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모습은 부활 이전의 모습과 같으면서도 달라서 믿음의 눈이 열린 사람만이 알아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일상 안에서 예수님이 오시든지 가시든지 그냥 놓아두지 말고 못가시게 간절히 붙잡아야 합니다. 주님은 뿌리치고 가실 분이 아니십니다. 임마누엘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삶의 여정에 이런 간절한 기도가 필요합니다. 당장 들어주시지 않더라도 말입니다. 지나고 보면, 오히려 그것이 은총일 때가 있습니다.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사라진 후“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 속에서 우리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24,32) 하고 서로 말합니다. 그리고 그들을 낙심시켰던 예루살렘으로 곧장 돌아가서 부활의 기쁜 소식을 전합니다. 얼마나 기뻤으면 날이 저물었는데도 불구하고 40리 길을 곧장 걸어갔겠습니까? 우리가 오늘 미사참례를 하고 영성체를 통해 주님을 모시는 기쁨이 그리도 클까요? 그 기쁨을 전할 용기가 있나요? 우리는 저마다의 필요한 요구와 희망을 안고 미사참례를 합니다. 그럼에도 잠념이나 분심이 들어서 미사를 봉헌한 것 같지 않은 때도 있습니다.그래도 괜찮습니다. 그 자체를 봉헌하시면 됩니다. ‘저의 이 부족함을 받아주십시오. 온 마음으로 봉헌할 수 있도록 저의 마음을 바로잡아주십시오.’ 하면 됩니다. 그러면 어느날 그분의 손길을 꼭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예수님을 동행인으로 맞아들여 그분과 함께 성경 말씀을 읽고 묵상하면 우리 마음에 뜨거운 감동이 일어나고 성찬 안에 현존하시는 그분의 모습을 영적인 눈으로 볼 수 있게 될 것입니다(정태현신부).“하느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상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드러냅니다”(히브4,12). 그리고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은 행복합니다.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그분의 가르침을 밤낮으로 되새기는 사람들은 하는 일마다 잘됩니다(시편1,3). 그러니 마음을 다하여 말씀 안에 머물러야 하겠습니다.
가슴을 뜨겁게 한 말씀과 마음의 눈을 열게 한 ‘빵을 떼어 주시는’성찬은 서로를 보완합니다. 그 최상의 조합은 미사입니다. 미사 안에서 우리는 부활하신 주님의 현존을 체험합니다. 사실 “성찬례는 우리의 행위가 아니라 하느님의 행위입니다.” 미사참례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는 은총의 자리입니다. ‘성체이신 예수님은 때때로 지치고 짓눌린 우리 영혼에게 다시 힘을 불어넣어 주는 양식입니다. 미사에 참례하는 목적은, 칭찬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힘, 은총을 가득히 받기 위해서입니다. 하느님은 언제나 우리를 만나러 오시어 우리를 먹여 살리시고 굳건히 붙들어 주십니다’(프란치스코 교황). 미사는 종합영양제입니다. 미사는 가장 완벽한 기도입니다.
그러므로 자주 미사참례를 하고 영성체 함으로써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기쁨으로 충만하여 세상에 나아가 부활의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성체이신 예수님의 현존은 내어주는 삶이며 우리가 함께 나누어 모시는 삶입니다. 우리는 그 빵을 받아 모시며, 우리의 삶을 내어주는 선물로 바꾸겠다고 다짐합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생명을 내어주셨듯이, 우리도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그렇게 해야 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나그네를 소홀히 하지 않는 사랑의 실천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게 됩니다. 제자들이 나그네를 집안에 모셔드려 대접하고 믿음의 눈이 뜨였듯이 우리가 성경 말씀을 가슴으로 받아들이면,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됩니다. 사실 “이웃을 사랑할 때 우리의 눈이 맑아져서 하느님을 뵐 수 있는 능력을 받게 됩니다”(성 아우구스티누스). 그리고 사랑의 구체적 실천인 자선은 “하느님의 자비를 우리 위에 내리게 하는 힘이고 우리 구원의 확실한 표입니다”(성 요한 비안네). 우리가 만나는 한 사람, 한 사람을 통하여 예수님을 만나게 되고 섬기게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한 가지 질문으로 정리하겠습니다.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 누가 말했을까요? ‘하루살이’가 말했답니다. 하루살이에게는 내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주님께서 약속해 주신 영원한 내일이 있어 행복합니다. 부활한 새 생명의 내일이 있어 기쁩니다. 부디 내일을 희망하는 만큼 오늘을 미사 안에서 감사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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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423. 부활 제3주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3년 전입니다. 코로나로 모든 성당의 문이 닫혔을 때입니다. 저는 가톨릭방송을 통해서 부활 제2주와 3주의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그때의 강론을 읽어보니 지금도 가슴이 먹먹해집니다. 잠시 그때의 강론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코로나 바이러스는 우리의 일상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언제든지 찾아가서 기도할 수 있었던 성당의 문은 닫혔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성체를 모시던 미사가 중지되었습니다. 성가를 부르고, 강론을 듣던 신자들이 그립습니다. 미사가 시작되었지만 늦게라도 성당 문을 열고 들어오던 신자들이 그립습니다. 항상 먼저 성당에 오셔서 묵주기도를 하시던 어르신들의 모습도 생각납니다. 주일 그토록 혼잡했던 성당 마당의 주차장은 텅 비어있습니다. 차량 안내를 맡아서 수고하셨던 형제님들도 그립습니다. 농구장에서 뛰어놀던 학생들도 그립습니다. 주일 미사 후에 음식을 준비하던 자매님들도 그립습니다. 사제서품을 받고 신자들과 함께 미사를 봉헌하고 싶었던 새 사제들은 더욱 신자들이 그리울 겁니다.
신자들의 마음도 비슷할 겁니다. 고백성사를 볼 수 있었던 시간이 그리울 겁니다. 강론을 듣고, 성체를 영하던 순간이 그리울 겁니다. 미사 후에 제의를 입고 신자들과 담소를 나누던 사제가 그리울 겁니다. 한 달에 한번 봉성체를 하였던 거동이 불편하신 어르신들은 성체를 모시고 오던 사제가 그리울 겁니다. 본당 단체 모임 중에 함께 하였던 사제들이 그리울 겁니다. 함께 웃고, 함께 고민하며 문제를 해결하였던 시간들이 그리울 겁니다. 사제들이 준비하였던 피정, 특강이 그리울 겁니다. 평화의 인사를 나누던 시간이 그리울 겁니다. ‘미사가 끝났으니 가서 복음을 전합시다.’라고 강복과 파견을 하였던 시간이 그리울 겁니다. 다시 만나 평화의 인사를 나누고 환하게 웃는 시간이 오면 좋겠습니다.” 3년의 시간이 흐르면서 우리는 백신을 맞았습니다. 치료약도 생겼습니다. 아직은 마스크를 쓰고 있지만 우리는 함께 모여 미사를 봉헌하고 있습니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성경 말씀처럼 코로나 팬데믹은 지나갔습니다. 3년의 시간이 흐른 후에 저는 다시 가톨릭방송 미사를 이렇게 봉헌하고 있습니다.
2000년 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습니다.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복음을 선포하던 예수님이 있었습니다. 호숫가에서 고기를 잡던 어부들을 부르시어 ‘사람 낚는 어부’가 될 것이라고 하셨던 예수님이 있었습니다. 그 예수님은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서 먹고 마시고 하느님나라를 선포하였습니다. 예수님은 회당에서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을 읽었습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이루어졌다고 선포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참된 행복’을 말씀하셨고, 수많은 표징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위로와 기쁨을 주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5,000명을 배불리 먹이셨고, 남은 광주리가 12광주리가 되었습니다.
팬데믹으로 모든 신앙 활동이 멈추었던 것처럼 하느님나라를 선포하였던 예수님에게도 시련과 고통이 찾아왔습니다. 유다의 배반으로 예수님은 겟세마니 동산에서 늦은 밤에 체포되었습니다. 가야파와 헤로데에게 심문을 받았습니다. 종려나무를 들고 예수님을 환영했던 군중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쳤습니다. 로마의 총독 빌라도는 예수님에게 사형선고를 내렸습니다. 예수님을 위해서라면 지옥까지라도 가겠다던 베드로는 예수님을 3번이나 모른다고 하였습니다. 제자들은 모두 뿔뿔이 도망갔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가던 예수님은 3번이나 무참하게 넘어지셨습니다. 머리에는 가시관을 썼고, 채찍으로 맞았습니다. 예수님의 모습에서 하느님의 아들을 볼 수 없었습니다. 수많은 표징과 기적을 보여주었던 권위와 권능을 볼 수 없었습니다. 손과 발에 못이 박히고, 옆구리는 창에 찔린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하느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라고 절규하며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이 선포했던 하느님나라는 실패한 것으로 보였습니다.
절망과 고통으로 모든 것이 끝난 것 같았던 갈릴래아와 예루살렘에 이상한 소문이 돌았습니다. 비참하게 죽었던 예수님이 다시 살아났다는 소문입니다. 막달라 여자 마리아는 무덤가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마리아는 이 기쁨을 제자들에게 전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다락방에 숨어 있던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너희에게 평화를 준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때 자리에 없던 토마사도에게도 나타나셔서 “토마야 네 손으로 나의 손과 옆구리를 만져보아라.”라고 하셨습니다. 토마는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토마야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참으로 복되다.”라고 하셨습니다. 십자가의 죽음으로 끝난 것 같았던 하느님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다시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엠마로오 가던 제자들은 길에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께서 성경 말씀을 들었을 때 가슴이 뜨거워졌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집으로 모셨고, 예수님께서 빵을 떼나 나누어 주셨을 때 주님께서 부활하셨음을 보았습니다.
엠마오는 장소가 아닙니다. 엠마오는 우리의 마음이 바뀌는 것입니다. 두려움과 공포에서 열정과 희망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두려움에 숨어있던 다락방을 열고 세상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이 시작됨을 아는 것입니다. 빈 무덤은 텅 빈 것이 아니라 부활의 표징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십자가의 길에서 비록 넘어지셨지만 다시 일어나셨고, 십자가에 달려 죽음에 임박해서도 하느님께 저들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셨으며, 죽으셨지만 죽음의 어둠을 이기고 부활하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부활시기를 지내면서 그 부활의 기쁨과 부활의 영광을 우리 마음 안에 벅찬 감동으로 받아들이고, 우리 이웃에게 드러내고 증거해야겠습니다.
“하느님께서 미리 정하신 계획과 예지에 따라 여러분에게 넘겨지신 그분을, 여러분은 무법자들의 손을 빌려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죽음의 고통에서 풀어 다시 살리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죽음에 사로잡혀 계실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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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423. 부활 제3주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폭력은 신체적 폭력도 있지만 정신적 폭력도 있습니다. 이 둘 중에서 어떤 폭력이 더 무서울까요? 사실 뇌에서는 똑같은 크기로 받아들인다고 합니다. 신체적 폭력을 당할 때 고통을 느끼는 뇌 부위가 활성화되는데, 인간관계에서 거절당하고 따돌림을 당할 때도 똑같은 부위가 활성화됩니다. 이렇게 신체적 고통이나 정신적 고통은 똑같습니다. 둘 다 생존의 위협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래서 타이레놀 등의 진통제를 먹으면 이별의 고통이나 왕따로 인한 괴로움도 훨씬 완화된다는 것이 입증되었습니다.
어떤 폭력도 정당화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정신적 폭력도 신체적 폭력과 마찬가지로 생존을 위협받고 있다는 신호를 보내는 이유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정신적 폭력으로 인간관계가 깨질 것을 아는 것입니다. 함께 어울려 살아야만 하는 우리에게 이는 큰 위협이 된다는 것을 뇌는 본능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함께하는 삶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게 큰 아픔을 주었다고 다시는 안 보겠다고 다짐해보지만, 마음은 너무나 불편하지 않습니까?
주님에 대해서도 그렇습니다. 자기 뜻대로 되지 않으면, 주님께서 아픔과 상처를 주신 것처럼 책임을 몰면서 주님을 믿지 않으며 멀리하겠다는 분을 종종 만납니다. 과연 몸과 마음 모두 편안할 수 있을까요? 그럴수록 주님과 함께해야 편안한 마음을 가지고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이후 침통한 심정이었습니다. 이런 마음을 가지고 고향 엠마오로 가던 중에 예수님을 만납니다. 그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예수님을 향해 “예루살렘에 머물렀으면서 이 며칠 동안 그곳에서 일어난 일을 혼자만 모른다는 말입니까?”(루카 24,18)라고 말하면서, “나자렛 사람 예수님에 관한 일입니다.”라고 합니다.
사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나자렛 사람 예수’라는 표현을 쓰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적대자들만이 예수님을 경멸하기 위해 쓰던 호칭이었지요. 그만큼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은 예수님께 실망했고, 예수님께 대한 믿음도 사라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제 예수님을 믿지 않겠다며 고향 엠마오로 향했던 것이 아니었을까요? 그리고 이렇게 믿음이 없으니 예수님을 알아볼 수 없는 것은 당연했습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도 처음에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지요. 그러나 곧바로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도 60스타디온을 함께 걸었습니다. 스타디온은 그리스식 길이 단위로 계산하면 약 11.5km 정도입니다. 걸어서 두 시간 정도의 거리지요. 두 시간 동안이나 함께하면서도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알아보게 되는 시간을 믿음이 굳어지는 시간이라고 합니다. 즉, 믿음이 있어야 주님을 알아보고 함께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 안에 많은 고통과 시련을 주는 육체적 정신적 폭력이 난무합니다. 그런데 주님과 함께라면 즉,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갖춘다면 그 폭력의 상황에서도 평화를 얻을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죽음을 이기신 가장 힘센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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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란 서로 마주 보는 것이 아니라 둘이서 똑같은 방향을 내다보는 것이라고 인생은 우리에게 가르쳐 주었다(생텍쥐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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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423. 부활 제3주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주님과 함께 개안開眼의 여정, 우정友情의 여정
-무지에 대한 답은 예수님뿐이다-
어제는 신록으로 빛나는 아름다운 날이었고 오전, 오후 명일동 성단 독서단 18명을 대상으로 “렉시오 디비나” 주제로 피정을 지도한 날이었습니다. 피정온 사랑스런 형제자매들 하나하나가 흡사 하느님의 선물처럼 느껴졌습니다. 사실 개안의 은총으로 눈만 열리면 온통 하느님의 선물로 가득한 세상임을 깨달을 것입니다. 강의 시작전 드린 말씀입니다.
“삶은 선택입니다. 선택의 은총입니다. 오늘 여러분은 참 탁월한 선택을 하셨으니 이 또한 주님의 은총입니다.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참 아름다운 날에 참 아름다운 수도원에 참 아름다운 분, 부활하신 파스카 예수님을 만나러 오신 여러분들은 참 아름다운 분들입니다. 오늘 하루 아름답고 행복하게 사시기 바랍니다.”
그렇습니다. 아름답고 행복하게 사는 것은 우리 삶의 의무이자 책임이자 권리입니다. 참으로 눈이 열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닮아가면서 참내가 되어갈 때 아름답고 행복한 삶이겠습니다. 한 두 번의 만남이 아니라 날마다 하루하루 살아있는 그날까지 새롭게 눈이 열려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감사합니다. 신부님의 아름다운 강의와 강론과 배려 덕분에 넘 행복하고 감사한 은총의 시간이었습니다. 특히 미사에서 정점을 찍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단원님들이 다 너무 행복해 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은총 안에 건강하시고 행복한 수도생활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떠나면서 보내준 단원 대표 자매의 글도 저를 행복하게 했습니다. 어제 피정 지도했던 주제, 렉시오 디비나, 참 풍부한 내용이었습니다. 성경 렉시오 디비나의 궁극 목표는 내 삶의 성경책 렉시오디비나에 있습니다. 내 고유의 삶의 여정을 통해 눈이 열려 하느님의 섭리를 깨달아 갈 때 참으로 풍요로운 삶입니다. 개안의 여정은 깨달음의 여정이기도 합니다.
오늘 엠마오 도상의 두 제자들은 그대로 우리 믿는 이들의 여정을 상징합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신후 의기소침해 있던 이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남으로 아연 활기를 찾는 분위기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과의 만남에 성경 말씀의 렉시오 디비나와 빵 나눔의 성체성사가 얼마나 결정적인지 깨닫습니다.
엠마오 도상이 제자들은 눈이 가려져 함께 하셨던 부활하신 주님을 발견하지 못하다가 빵을 떼어 주실 때 눈이 열려 주님을 알아 보는 장면과 이어지는 이들의 고백이 우리에게는 참 고마운 가르침이 됩니다.
-‘그들과 함께 식탁에 앉으셨을 때, 예수님께서는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그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사라지셨다.’-
그대로 미사중 성찬전례에 대한 묘사입니다. 주님의 몸인 성체를 모실 때 순간 눈이 열려 주님을 알아 본 참으로 강렬한 깨달음의 순간입니다. 사라진 주님은 어디로 가신 것이 아니라 바로 제자들과 하나됨으로 사라진 것입니다. 우리 안에 숨어 계신 늘 우리와 함께 하시는 주님이심을 깨닫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약속을 기억할 것입니다.
“보라, 세상 끝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성경 렉시오 디비나 한결같은 수행이 얼마나 주님과의 만남에 결정적인지 깨닫습니다. 엠마오 도상 제자들의 고백입니다.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 속에서 우리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
새삼 주님의 은총속에 이뤄지는 성경 렉시오 디비나의 생활화가 믿는 이들의 삶에 얼마나 결정적인지 깨닫게 됩니다. 바로 살아 계신 주님을 만남으로 우리 마음이 사랑으로 타오르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오늘 엠마오 도상 제자들의 이야기는 그대로 미사전례 은총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전반부가 말씀전례라면 후반부는 성찬전례입니다.
매일의 개안의 은총, 개안의 여정에 미사가 얼마나 결정적 도움이 되는지 깨닫습니다. 어제 피정지도시 강조했던 내용이 생각납니다.
“매일미사책대로 날마다 렉시오 디비나를 생활화하면 좋겠습니다. ‘입당송부터 영성체후 기도’까지 주의 깊게 렉시오 디비나 하고 매일 미사에 참석하면 좋을 것입니다. 미사에 이보다 더 좋은 준비도 없고 혹시 미사 못하더라도 매일의 영적 양식으로 삼아 매일 미사책대로 렉시오 디비나하면 좋을 것입니다.”
참으로 개안의 은총으로 우리가 주님을 만나는데 결정적 도움이 되는 말씀과 전례입니다. 무엇보다 말씀의 렉시오 디비나를 통한 살아계신 주님과의 만남이 개안의 여정에 결정적 도움이 됩니다. 바로 그 좋은 모범이, 렉시오 디비나의 대가가 베드로 사도입니다.
시편의 다윗의 체험을 통해 그대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는 베드로입니다. 바로 그 시편은 화답송에 그대로 나옵니다. 아마도 베드로는 시편의 주님의 고백을 자기 고백으로 삼았을 것이며 자주 되새겼을 다음 내용입니다. 그대로 내 고백으로 삼아도 너무 좋은 내용입니다.
“나 언제나 주님을 내 앞에 모시어, 그분께서 내 오른쪽에 계시니 나는 흔들리지 않는다. 그러기에 내 마음은 기뻐하고 내 혀는 즐거워하였다. 내 육신마저 희망 속에 살리라. 당신은 저에게 생명의 길을 가르쳐 주신 분, 당신 면전에서 저를 기쁨으로 가득 채울 것입니다.”
다윗의 고백은 바로 예수님의 고백이 되었고, 베드로의 고백이 되었고 우리의 고백이 되고 있습니다. 바로 이런 성경 렉시오 디비나의 생활화가 우리 순례여정의 삶에 영원한 도반이신 주님과의 우정을 날로 깊게 할 것입니다. 참으로 우리 믿는 이들의 삶은 개안의 여정과 더불어 영원한 도반이신 주님과 날로 깊어지는 우정의 여정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저는 주저없이 예수님을 제 절친이라 고백하곤 합니다. 주님의 집인 수도원에서 주님의 전사로, 주님의 학인으로, 주님의 형제로 35년 동안 정주하면서 날마다 미사에 강론을 통해 우정을 다져온 주님이니 아마 세상에 이런 친구도 없을 것입니다. 하루하루 빠짐없이 매일 쓰는 강론은 사랑하는 주님께 올리는 연서(戀書)이기도 합니다. 죽는 그날까지 하루하루 주님과 함께 계속될 우정의 여정, 개안의 여정입니다.
예수님의 수제자였던 베드로는 부활하신 주님과 늘 함께 했던 렉시오 디비나의 대가임을 깨닫습니다. 사도행전의 오순절 설교에 이어 제2독서 베드로 전서에서 그의 생생한 주님 체험의 고백은 그대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나그네 살이 하는 동안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지내십시오. 여러분은 헛된 생활 방식에서 해방되었는데, 은이나 금처럼 없어질 것으로 물건으로 그리된 것이 아니라, 흠없고 티없는 어린양이신 그리스도의 고귀한 피로 그리된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시고 영광을 주시어, 여러분의 믿음과 희망이 하느님을 향하게 해 주셨습니다.”
주님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요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하느님께 갈 수 없다’고 확언하셨습니다. 이런 예수님이야 말로 우리의 평생 순례 여정중 하느님을 가리키는 방향의 이정표 자체임을 깨닫습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주님과 개안의 여정, 우정의 여정에 결정적 도움을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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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423. 부활 제3주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의 심정은 어땠을까요? 분명 가볍고 희망찬 발걸음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주님을 이스라엘의 해방자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주님께서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서 이스라엘을 강대한 나라로 만들고 동시에 모든 이들에게 삶의 윤택함을 주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실망이라는 무거운 마음으로 다시 그들의 삶으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희망이 사라진 처진 어깨로 말입니다. 그때 그 어깨 너머로 주님께서 물으십니다.
걸으면서 무슨 말을 주고받느냐?
이러한 질문으로 제자들이 그간의 이야기를 하도록 하십니다. 그리고 급기야 자신들이 어떤 식으로 주님을 믿고 있었는지도 말하게 하십니다. 이러한 모습은 우리가 하는 기도의 모습과 같습니다. 우리는 주님 앞에서 기도합니다. 그리고 그 기도는 대부분 우리들의 삶의 모습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들의 일상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도 주님과 같은 대화를 했습니다. 일상적인 일을 이야기한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이 어리석은 자들아!
이 말씀으로 제자들을 깨닫게 하십니다. 기도의 문을 열어주십니다. 기도 안에서 우리는 우리 모습을 바라보고 그 안에서 참회와 겸손을 배웁니다. 제자들에게도 주님은 이런 은총을 베푸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빵을 떼시며 주님 자신을 체험하게 하십니다. 즉 주님을 만나게 하시고 느끼게 하십니다. 제자들의 마음을 타오르게 하십니다.
기도 안에서 마음이 타오르신 적 있나요? 그 타오름으로 눈물 흘리신 적 있나요? 그렇다면 우리도 오늘 제자들이 얻었던 엠마오의 은총을 입은 것입니다. 다시 우리의 마음이 주님의 향기로, 체험으로 타오르기를 희망합니다.
계단 이용 시 남편을 잡아주세요.
어제 필요한 물건이 있어서
다땡소에 들렀습니다.
한참 네모나고 빨간 쇼핑 바구니를 들고
이리저리 움직이는데
스피커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계단 이용 시 남편을 잡아주세요.
하하하…. 물론 잘못 들은 것입니다.
‘계단 이용 시 난간을 잡아주세요.’입니다.
남편도 없는 제가 왜 남편이라고 들었을까요?
이유는 모릅니다.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났습니다.
혼자는 살 수 없는 삶이니까
서로서로 잡고 살아야 하는 거니까
그렇게 서로 위험할 때 잡아주는 것이
주님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이 아닐까!
계단 이용 시 서로 잡아주세요. 위험하지 않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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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423. 부활 제3주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그리스도의 몸과 피>
십자가의 길을
떠나시기 바로 앞선 밤
그분께서는
사랑하는 벗들에게
당신의 살과 피를 나누셨지
정성껏 받아
먹고 마심으로써
당신처럼 되어 나누어지라고
오늘만이 아니라
당신을 길이 기억하며
늘 그렇게 나누어지라고
십자가의 길을
그분 홀로 걸어가시던 날
그분의 살과 피를
기꺼이 먹고 마셨던
벗들은 그분을 버리고 떠났지
참담한 마음이야
없을 수 있을까마는
그저 제 살 길 찾아서
그분을 집어삼킨
패배와 두려움 가득한
그곳에 그분 홀로 남겨두고
부활하심으로써
십자가를 완성하신 다음 날
그분께서는
제 살 길 찾던 벗들에게
당신의 살과 피를 다시 나누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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