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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 김형일 '
형일의 마지막 제를 지낸 후 우리는 하나 둘 각자의 길로 헤어졌다.
백화암에 들어서던 때 새벽비가 그치고 날이 개어서 숲을 덮은 낙엽들이 빛의 조각들로 바람에 굴렀다.
깊은 가을이었다.
샤워를 하고 오후 늦게 잠이 들었다.
지난 밤을 꼬박 새운 탓에 몹시 피곤했다.
꿈을 꾸었다.
동네에 살고 있는 친한 형님이 저녁을 먹으러 오라고 전갈이 왔다.
편안한 복장을 하고 집을 나서 그 형의 집에 들어섰다.
마루에서는 형님이 거실에 앉아 옥수수 껍질을 까고 있었는데, 뭔가 마뜩찮은 표정이었다.
자세히 보니 부엌에서 음식을 하던 형수님의 지청구를 듣고 있던 것이다.
시간 내에 시킨 일을 해야 하는데 게으름을 피우던 형님은 형수님에게 지청구를 듣기 일쑤였던 것이다.
나를 보자 마치 응원군을 만났다는 듯이 반색을 하는 형은 얼마 전 대학에서 정년퇴임을 하고
어릴 적 고향이던 우이동자락에 돌어와 정착을 하셨고, 나 역시 형과 살고 싶어 동네에 마땅한
집을 물색하여 자리를 잡았던 것이다.
형님은 대학교수이자 화가였고 산악인이었는데 세가지 직함 중에 이제는 교수라는 직업과 직함이 없어지고 나머지 두 가지만 남게 되었다.
두 분의 행복하고 조용한 삶을 보면서 나는 또 다른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함께 산행을 하고 함께 차를 마시고 또 가끔 식사를 하면서 그들과 나는 함께 늙어가는 중이었다.
잠에서 깨어 주위를 살펴보니 내 방 침대였고, 난 다시 현실로 돌아오는 중이었다.
동네에서 함께 늙어가며 살고 있던 형은 이상조 형님이었던 것이다.
며칠 전 형일의 사고소식을 처음 알려준 것도 상조 형이었고, 상조 형에게 소식을 가장 먼저 알린 것은 김점숙이었다.
그 날 난 면접실에서 다른 면접관 한 명과 여사원 팀장 후보 면접을 보는 중이었다.
그 여사원에게서 정말 오랜만에 공감해보는 현장의 생생한 소리와, 강한 전사의 기질을 엿볼 수 있었는데, 그것은 함께 일하는 동료이자 동지이고 어려운 상황에서 꽃피운 인동초 같은, 활화산 같은 내용이었다.
전사(戰士)는 꼭 전장(戰場)이 아니더라도 찾기 어려운 대상은 아니라고 난 생각했다.
등반을 하는 클라이머나, 운동을 하는 운동 선수나 지금 같은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도 전사의 모습은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 후 하루 업무를 정리하고 퇴근을 했다.
평소보다 도로의 차량정체가 극심했다.
알고 보니 제과업체에서 만들었다는 11월 11일 빼빼로 데이.
그것도 2011년이 들어가서 천 년에 한 번 온다는, 마케팅수단으로 활용하기에 아주 좋은 요소를 가진 그 날이었다.
암장에서 운동을 하던 중에 전화가 걸려왔다.
그 전화는 익스트림라이더 등산학교 초대교장을 지낸 상조 형의 전화였고, 전화내용은 K2원정대 김형일의 사고 내용을 알리는 다급한 것이었다.
- 형일이가 촐라체 북벽에서 크게 추락했대. 여기 저기 말할 단계는 아닌데, 사망한 게 거의 확실한 가봐,
네가 내일 오전에 전주 내려오는 일정은 일단 취소하자. 내가 내일 서울로 올라 갈께…
순간 머리가 멍해졌고 현실감각이 떨어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선운산 등반을 가는 채미선이 늦은 시간 암장에 들어섰고, 잠시 뒤에 미선의 배낭을 꾸려 짊어지고 남편 형우가 들어왔다.
형우를 붙잡고 암장 근처 횟집에서 소주를 마셨다.
소주를 마시면서 형일이 이야기만 줄 곧 한 듯 했다. 아침에 머리가 아팠다.
다음 날 상조 형께 전화를 걸었고, 등산학교 전현직 강사 몇 명과 도봉산 등산학교에서 만나기로 했다.
상조 형의 목소리가 많이 메마르고 갈라져 있었다.
흡사 목소리에서 가뭄에 갈라진 논바닥을 연상시켰는데 목소리에 힘조차 없음이 느껴졌다.
"형, 목소리가 많이 안 좋으세요. 감기 걸리셨어요?"
감기 걸린 목소리에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에는 다른 무언가가 있었고 짐작이 가는 것이 있었지만 짐짓 그렇게 물을 수 밖에 없었다.
- 어, 감기도 걸렸고, 어제 소식 듣고 밤에 술 마시면서 좀 울었어, 지금은 많이 안정되었어.
며칠 전에 술 마시면서 형진이 생각나서 많이 울었는데, 며칠 만에 형일이의 소식이 이렇게 황당하게 들려올 줄 누가 알았겠니…
나이 먹으면 눈물이 많아진다는 것은 자연스런 생리현상과 같은 모양이었다.
형일의 사고와 그에 따른 후속 조치들, 이를 테면 형일의 부모님, 유족, K2코리아와의 의사소통, 현지와의 연락, 장례식 일정 등을 위한 작은 모임이 있었다.
이상조, 강인철, 안동준, 김점숙, 김세준, 김형욱 등등
중간에 김점숙은 형일의 집으로 가서 부모님을 만나 뵙고 다시 합류했다.
나중에 참석한 조우령이 전하는 현지 상황이 좀 긴박했다.
대원으로 참가했고 사고를 목격하고 형일의 주검을 수습한 일영이가 전한 통화내용은 이랬다.
- 지명이는 그나마 상태가 괜찮은데, 형일의 상태가 많이 안 좋대요. 그 상태로 운구해와서 부모님께는 도저히 보여드릴 수 없는 상황이라 어떻게 해서든 현지에서 화장을 하고 들어오는 것이 최선일 것 같아요.
그 말을 듣고서야 비로서 그의 죽음이 처연한 현실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어찌하랴, 어찌하랴…
내 마음속에 몇 방울의 눈물이 고여왔다.
김형일,
익스트림라이더 등산학교를 처음 만들었고 '그레이트 트랑고'에서 ‘코리아 환타지’라는 신루트를 개척하고 그 짧은 시간 동안 갱기좌벽과 적벽, 장군봉, 개토왕 등에서 눈부신 등반을 펼쳐냈던 초대 강사 중 한 명이었던 김형진의 친형.
얼마 전 마운틴紙 이영준기자가 히말라야 스팬틱에서 신루트를 통해 등정하고 온 그를 취재하며 쓴 글에서 그는
‘자신을 클라이머 김형일이 아닌, 영원한 김형진의 형 김형일이다’ 라고 했었다.
그 문장에 그의 마음을 볼 수 있었다.
지금 여기서 고인이 된 김형일이 살아 생전의 공과를 적을 수는 없다.
난 형일을 깊이 알지 못한다.
다만 내 기억 속에 남아있는 그의 기억들 중 몇 가지를 끄집어 낼 수 있을 뿐이다.
2001년 가을 익스트림라이더 9기 교육을 마치고 수료식을 하던 의정부 부대찌개 골목 안 샤모니 암장 옆 보영식당 2층.
가장 스스럼없이 다가온 것이 당시 강사였던 김형일이었다.
- 이제 강사와 교육생이라는 관계는 없어졌어요. 앞으로는 형이에요. 바로 지금부터 형이라고 부를께요.
한 잔 받으세요. 형
수료식이 끝나고 가장 먼저 조우령이 떨어지고, 그리고 2차 3차로 이어지는 술자리가 깊어갈 수록 김형일과 김세준이 암장에서 차례로 전사하고 결국 옆에 남은 사람들이 다 없어지고 날이 밝아오는 새벽에 택시를 타고 집으로 가는 나를 김점숙이 마지막으로 배웅했었다.
그 뒤 샤모니 암장에서 잠을 자는 날들이 점차 많아졌고, 잠자는 시간이 많아질수록 그들과의 우정은 점점 더 깊이와 두께를 더해갔다.
그 날 회사에서 면접을 보던 여사원이, 자신이 근무하는 회사에 무한한 자부심을 가지고 생활하듯이 당시 익스트림라이더 등산학교와 졸업생들은 그만한 자부심이 있었다.
적어도 각 산악회에서 등반대장이나 리더격 혹은 오랜 산행경력을 가진 클라이머들이 교육을 받기 위해 입학하였고, 거벽등반 기술을 배우고 돌아가 산악회에 전파시키는 역할을 하는, 정해진 규칙이나 기준은 없었지만 그야말로 암묵적인 분위기와 기준은 있었던 시기였다.
60~70년대 한국산악회원들이 에델바이스 문양의 뱃지를 달고 자부심을 가졌던 것처럼…
전용학과 남인우가 강사로 위촉되고 활동할 즈음, 처음으로 클라이머에 대한 서툰 글을 쓰기 시작했다.
맨 처음 쓴 글이 솔개를 인용한 클라이머 전용학에 대한 글이었고 그 뒤 몇 몇 클라이머에 대한 글들이 있었다.
처음 빅월 페스티발을 준비하며 종로에서 잦은 모임을 가지던 시절, 어느 날 형일이 내게 술을 건네며 이야기했다.
- 형, 클라이머에 대해 쓴 글들 있잖아요. 저에 대해서도 글 하나 써 주세요…
난 그의 청탁에 대답할 수 없었고 그에게 웃음밖에 되돌려 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것은 수긍의 대답이 아니었다.
당시에는 그랬고, 마음 속으로는 언젠가 쓸 날이 있겠지 라는 기약 없는 약속만이 남았을 뿐이었다.
내가 왜 그 때 그에게 대답을 못했는지, 왜 그에 대한 글을 그 후에도 쓸 수 없던 것은 많은 것들을 포용할 수 없었던 내 옹졸한 성격 탓이리라.
그리고 그 약속은 형일이 하늘로 떠난 지금까지 지켜지지 않고 있었다.
다음 날 상조 형이 전주로 내려가면서 형일에 대한 글을 하나 써서 홈페이지에 올리는 게 어떻겠느냐는 말씀을 하셨다.
제안인지 부탁인지 당부인지 아니면 청탁인지 전혀 생각지도 않은 것이었고, 최근 그러한 글들을 쓴지도 오래되었거니와
마땅히 그에 대해 적을 소재들, 그야말로 ‘이야기꺼리’들이 빈곤하고 난감할 뿐이어서 역시 선뜻 대답을 못해 드렸다.
그에 대해 가진 것 별로 없는 빈곤한 상태로, 긍정할 수 없는 가난한 가치들을 가지고 어찌 고인에 대해 적절한 글을 쓰랴 싶었다.
강원도에 있는 연수원을 오가는 차 안에서 운전을 하며 그러한 생각들을 떠올려보았다.
친하게 지냈던 2000년 초반 몇 년을 제외하면 그와 나는 적절한 사회적 거리(Arm Length)보다 거리가 좀 더 있는 그런 관계를 유지한 채 지냈던 것이다.
그에 대한 안 좋았던 이야기들, 그리고 술에 취해 그가 저질렀던 몇 가지 좋지 않았던 일들.
- 형, 저 형일이에요. 형 저 많이 미워하시죠? 저도 알고 있어요. 그래서 사람들 앞에 나서기도 힘들고, 연락 드리기도 힘들었어요.
나중에 소주 한 잔 사주세요.
여름 어느 날 정선 수정헌으로 가는 길.
수정헌 쥔장 혜경씨로부터 전화.
- 형, 여기 형일이가 와있어요. 빨리 오시면 함께 술 한 잔 할 수 있겠네요.
잠시 뒤 형일의 전화
- 형, 형 오신다는 이야기는 누나에게 들었는데, 제가 지금 서울로 올라가야 해서 아마 형 도착할 때 쯤이면 제가 없을 거에요…
나중에 서울에서 술 한 잔 사주세요.
얼마 전 겨울, 산행을 함께 하던 상조 형이 이런 말씀을 했었다.
- 형일이 잘됐지? K2클라이밍팀 들어간 거 말야, 좋은 클라이머이고 괜찮은 후배라고 내가 추천을 했거든. 그 녀석 잘 할 거야…
상조 형의 말처럼 형일은 2009년 9월 안나푸르나 히운출리에서 실종사한 준영, 그리고 팔봉과 함께 카라코람 히말라야의 스팬틱(7,027M) 북서벽에 신루트를 개척하며 등정을 하고 돌아왔다.
우리나라에서는 흔하지 않은 7,000미터급 거벽 알파인 스타일 등반에 신루트 개척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은 좋은 등반이었다.
스팬틱에서의 성과로 그들은 아시아 황금피켈상 최종 후보에 올랐고, 한국산악회에서 제정, 수상하는 황금피켈상을 받았다.
준영과 팔봉은 익스트림라이더 등산학교에서 형일 등에게 거벽등반기술을 배운 형일을 비롯한 강사진들이 무척 아끼던 후배이자 동생들이었다.
형진이가 탈레이사가르에서, 준영이가 안나푸르나에서 떠나고 형일마저 촐라체에서 차례로 하늘로 그렇게 올라갔다.
산은, 등반은 전쟁과 똑 같은 것이어서, 그런 것이어서 부모와 자식, 형제간의 죽음의 순리마저 뒤바꿔 놓는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뒤바뀐 죽음의 순서는 자연사와는 거리가 멀었다.
장례식장에는 이틀간 수많은 지인들과 산악인들이 조문을 왔고 그리고 돌아갔다.
그 들은 형일의 살아 생전의 삶에서 보다 하늘로 가는 마지막 길을 더 윤택하게 만들어 주고 있었다.
장례식장에서 앉아 술을 마시고 있던 중에 누가 나를 불렀다.
나를 보자는 여인이 있다고, 남인우가 내 손목을 잡고 그 녀가 있는 자리로 갔다.
눈시울이 촉촉한 그 녀는 어색해했고, 나 역시 떠올려지지 않는 기억을 되살리려 애썼다.
그 녀는 ER 등산학교 6기를 졸업한 써미트 산악회의 조순희였고 희미한 옛 기억 속에 그 녀와 종로에서 술을 마셨던 일들이 되살아났다.
시종일관 눈을 적시는 그 녀는 얼마 전 안나푸르나에서 실종사한 박영석 원정대의 신동민과 연결 되어 있었다.
네팔 트레킹에서 친한 친구를 잃었고 그 때 힘이 되어준 신동민과 결혼하여 9살 아이를 둔 엄마가 되어 있었다.
잠시 동안의 인연은 다시금 또 다른 인연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 동민씨 수색작업을 도와주던 형일씨를 만났어요. 그 때 네팔에서 형일씨가 등반이 끝나면 다시 서울에서 꼭 보자고 했는데 …
- 제가 한참 등반할 때는 인수봉의 빌라길을 선등을 섰었어요. 그런데 친구가 네팔에서 죽고, 지금은 동네 놀이터 미끄럼틀에 올라가도 무서워서 못 내려와요.
말을 하는 그 녀는 눈은 젖어 있었다.
그 녀의 눈의 물기가 나의 시선에 느껴졌는데, 시각이 아니라 손으로 더듬는 촉각처럼 내 몸에 와 닿았다.
어느 순간 옆에 온 우령이도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죽음은 그렇게 많은 것들을 함께 이어주고 덮어주고 있었다.
그것이 자연사가 아닌 죽음인 경우 더 그런 것일까.
작년 이 맘 때 세상을 떠난 나의 친 형은 생전에 사람들 마음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기는 모진 말과 그릇된 행동으로 주변사람들을
무척이나 힘들게 했었다.
살아서는 얼굴을 대면하지 않기를 바랬고, 그와 연관된 어떤 일도 벌어지지 않기를 원했었다.
아무 죄도 없는 형의 자식들마저 인연을 끊은 채 지냈다. 그가 졸지에 세상을 떠났다는 부음을 접하고서야 어쩔 수 없는 것은 결국 어쩔 수 없는 것이구나 라는 생각과 함께 그의 몸과 그와 관련된 감정들마저 다 하늘로 날려 보냈다.
나의 생각과 다짐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들인가를 다시 생각했고, 결국 인생이란 이런 것인가 라는 자조적인 생각들로 내 머리가 가득 찼었다.
그가 이 세상을 떠나던 날은 억수같이 퍼붓던 비가 아침까지 이어졌고, 그의 육신이 화장장 화덕 위에 얹혀져 형언할 수 없이 뜨거운 불구덩이 속으로 들어간 뒤에야 비가 그쳤다.
이 곳에서 8년 전 아버지를 보냈고, 1년 전 형을 보냈다. 성남 영생원은 두 사람의 영혼이 안치되어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 곳 성남 영생원에서 다시 형일을 보내고 있었다.
날이 갠 영생원의 가을은 깊어서 비스듬한 햇살에 날이 서 있었고 벼랑 끝으로 내몰려가는 위태로운 시간들이 햇살에 바스라지고 있었다.
형일의 어머니를 뵙자 며칠 전 요양병원에서 만나보고 온 내 어머니의 늙은 얼굴이 겹쳐지고 있었다.
내 어머니는 늙어서 지나간 삶의 그림자처럼 얇고 가벼웠고, 형일의 어머니는 점차 내 어머니처럼 얇고 가벼워지고 있었다.
아들이 출옥했다는 말을 듣고 순천에서 배를 얻어 타고 서울로 올라오던 병석의 어머니는 배에서 숨을 거두었고, 전해 들은 어머니의 시신은 가랑잎처럼 가벼웠다고 이순신은 후에 술회했다.
오래 살면 가벼워지는 모양이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영생원으로 오기 전, 새벽에 형일의 어머니는 형일의 영정 앞에서 깊은 슬픔을 토해냈고, 그런 어머니를 앞과 옆에서 그 녀를 위로한 건 이상조, 김점숙, 심정화였다.
12년 전 형진의 장례를 치를 때도 많은 눈물을 흘렸던 어머니는 그 후 딸을 또 보내고 형일마저
보내는 지금, 그 작은 몸에서 어떻게 그런 크고 깊은 슬픔을 토해낼 수 있는 것인지…
그 들을 바라보던 내 눈에서도 기어코 참았던 눈물이 쏟아지고 말았다.
눈물은 걷잡을 수 없이 눈에서 넘쳤고 오랜 시간 동안 이어졌다.
그제서야 난 비로서 형일의 죽음을 인식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옆 자리에 돌아온 상조형도 오래토록 눈물을 흘렸다.
술이 먼 것들을 가깝게 당겨주고, 술이 비처럼 몸 속으로 스며든다는 그의 시간처럼, 나도 형일을 그렇게 느끼고 있었다.
형일의 유골과 위패는 동생 형진의 위패가 모셔진 불곡산 백화암에 함께 모셔졌다.
백화암은 형진과 그의 영원한 자일 파트너였던 승철도 함께 모셔져 있는 곳이고 그 들이 히말라야 거벽의 꿈을 키우던 ‘골수암’이 있는 곳이기도 했다.
이제 그 벽은 부처님들의 조각들로 바뀌어 채워졌다.
제를 마치고 손재식, 김점숙, 심정화, 조우령, 장기헌, 김팔봉 등과 골수암을 올랐다.
그 곳에는 그 들의 부조가 새겨져 바위 끝에 붙어있었고 그것은 갱기좌벽에 있는 동판과 같은 글귀로 채워진 것이었다.
바위 곳곳을 돌아보며 그 들이 남긴 흔적과 기억을 되짚었다.
형진이 등반하다가 머리를 바위 틈에 넣고 양손을 털던 그 동작을 하던 구간을 설명했고,
바윗길 이름을 그렇게 지었던 배경을 이야기 했다.
우리는 백화암에서 내려와 점심을 먹고 헤어졌고, 그렇게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형일이 자신의 사진과 글 등을 정리했었던 인터넷의 공간 블로그가 있다.
생전에 그는 내 블로그를 자주 방문하기도 했었다.
그의 블로그 이름은 ‘내 영혼이 따뜻했던 기억들’이고, 블로그 주소 끝 영문은 Thalaysagar 이다.
탈레이사가르 …
동생 형진이 죽고 형일은 여러 차례 원정대를 꾸려 탈레이사가르의 정수리에 오르고자 애썼다.
형일은 형진을 자랑스러워했고, 안타까워 했으며 앞서 말한 대로 자신은 영원한 ‘형진이의 형’ 김형일이고 싶어 했다.
동생 형진이 오르다가 하늘로 올라간 마지막 산 탈레이사가르,
그리고 그 산을 자신의 블로그 이름으로 삼았던 김형일.
그의 영혼이 가장 따뜻했던 기억들은 어떤 것들이고 또 언제였을까,
형일은 스팬틱원정을 떠나기 전 동생 형진의 모습이 담긴 1998 탈레이사가르 원정대 사진을
자신의 블로그에 올리고 이렇게 썼다.
- 1998년 9월 탈레이사가를 원정대 사진이다. 그들이 세상을 떠나 하늘나라로 간지도 벌써
십 년이 지났고 시간이 흐른 만큼 우리도 많은 것들이 변했다.
지금도 가끔 꿈속에서 나는 만난다.
꿈속에서도 꿈이 아니길 늘 바라지만 깨어보면 슬퍼진다.
잘 살고 있겠지….
내가 하늘나라로 가면 만날 수 있을까?
정말 이승이었으면 좋겠다. 그렇다면 꼭 만날 수 있을텐데…그립다.
그리고 보고 싶다. 환한 웃음이…
그리고 2004년 이재용 한정희 김봉주와 함께 했던 탈레이사가르 원정을 마치고 쓴 글에서
- 정말 최선을 다해 등반했습니다. 비록 우린 정점에 설 수 없었지만…
베이스 캠프로 복귀한 날, 저는 울었습니다.
정말 오늘 하루만 울겠다고 마음먹고 한없이 울었습니다.
승철이, 형진이 사진을 가슴 속 품에 안고 정점에 올라 아름다운 경관을 보여주고,
정상의 하얀 눈 속에 고이 묻고 입맞춤 하고 싶은 마음이 서러워 그렇게 울었습니다.
원정을 나가기 전 그리고 다녀온 후에 쓴 글에서 부모님에 대한 죄스러운 감정을 나타냈다.
- 또 이렇게 병이 도져 나가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어머니 그리고 아버지께 또 거짓말을 했습니다.
그래도 두 분은 속아주시는 걸 저도 압니다.
그래서 너무 죄송합니다.
오십삼일 만에 집에 돌아오니 어머니께서는 제가 떠난 날부터 돌아오는 날까지
거실에 촛불을 한시도 끄지 않고 계셨습니다.
촐라체에서 형일은 무척 힘이 들었다고 한다.
베이스 캠프의 일영과 무선 통신을 할 때, 그는 지쳐있었고 힘겨워했고 더 이상 등반을 이어나갈 체력적이고 물리적인 힘이 없었다.
올라온 길로 내려갈 수 도 없었다. 다른 길을 도모해야했다.
휴식을 취하고 다른 길을 모색하여 다시 내려오는 것이 가장 현명했으리라.
그 순간 그 들이 날았다. 지명이 나르고 그 후에 형일이 날았다.
그 간격이 얼마만큼인지, 그 찰나가 어땠는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위태로운 시간이었고 얇고 바스락거리는 시간의 흐름이었다는 것을 짐작할 뿐이다.
12년의 시차를 두고 형제가 히말라야의 거벽에서 나란히 1,000미터를 날아올라 하늘로 올라간 이야기는 지구 어디에도 유례가 없는 사건이자 기구한 운명의 이야기일 것이다.
천 년에 한 번 뿐이라는 2011년 빼빼로데이의 이야기보다 더 접하기 힘든 두 형제의 이야기.
형일은 이번 촐라체에서 뿐만 아니라 스팬틱을 가기 전에도 다른 원정 등반에서도 늘상 위태로운 시간들을 보냈었다.
재식 형이 썼던 책 ‘하늘 오르는 길’ 제목처럼 형일은 이미 형진이가 하늘로 올랐던 길을 알고
있었던 건 아닐까.
그리하여 남겨진 우리는 조지훈의 시처럼 ‘이미 알고 정하신 하나님을 위하여’ 한 잔 술을 마셔야 하는 것일까.
다음 주에는 고산 상조형님 댁에 내려가 지난 주에 못 마신 술을 마시며 그 이야기를 해봐야겠다.
라디오에서 귀에 익은 가요가 나온다.
그 후로 오랫동안 - 신승훈
첫댓글 잘 봤네.
글 잘 보았습니다..
형일이형 생전에 '산'지에 인터뷰한 기사를 읽은적이 있습니다.
오래전이지만 천등산에서 원정등반훈련중에 만난 형의 환한 얼굴이 떠오릅니다.
더불어 천등산에 남겨진 형의 등반흔적들까지... ㅜㅜ
잘 읽었습니다.
천등산에 형일이가 '키작은 나무'라는 루트를 만들어 놓았다고 알고있는데
지금도 있는지 모르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