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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경환의 명시감상 제1권에서
변검쇼 2
정채원
지체장애 1급 정운재 할아버지
양 손이 없는 그가
강원도 산골에서 밑둥만 겨우 남은 팔꿈치로
죽은 나무뿌리를 주워오기도 하고 캐오기도 한다
겨드랑이에 톱을 끼고
아내와 함께 톱질을 하고 조각을 한다, 죽은 뿌리가
여의주 입에 문 용도 되고
개도 되고
동자승도 되고
부처도 되고
뿌리째 말라죽었나 싶던 내 가지에도
연두 새순이 돋는다, 그대 손길에
겨울잠 깬 개구리도 발치에서 튀어오르고
물오른 우듬지엔 은줄팔랑나비 한 마리 날아와 앉는다
뇌종양으로 세상을 떠난
9살 소년의 각막이
20살 여대생의 눈웃음 속에서 반짝
초승달로 빛나는 새 봄
----정채원, [변검쇼 2]({애지}, 2007년 여름호) 전문
아들로서의 가면도 있고, 아버지로서의 가면도 있다. 가장으로서의 가면도 있고, 손자로서의 가면도 있다. 어머니로서의 가면도 있고, 딸로서의 가면도 있다. 교사로서의 가면도 있고, 동창회장으로서의 가면도 있다. 판사와 검사로서의 가면도 있고, 범죄인과 마피아 두목으로서의 가면도 있다. 목사와 위선자로서의 가면도 있고, 국회위원과 대통령으로서의 가면도 있다. 친구와 애인으로서의 가면도 있고, 건달과 창녀로서의 가면도 있다. 우리 인간들은 누구나 다같이 수많은 가면들을 쓰고 살아간다. 또, 그리고 우리 인간들은 누구가 다같이 일인다역의 주인공들이며, 그 일인다역의 역할을 통해서, 자기 자신만의 연극무대를 이끌어 나가고 있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만일 그렇다면 가면이란 무엇이란 말인가? 이때의 가면이란 가면무도회에서 쓰는 탈을 뜻하지 않고, 우리 인간들이 일상생활의 현실에서 거짓으로 꾸민 표정이나 행동을 말한다. 따라서 그 거짓 표정이나 행동은 자기 자신의 진실을 드러내지 않고 타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속이는 구실을 하게 된다. 아버지는 아들의 선량한 표정에 속아 넘어가고, 아들은 아버지의 인자한 표정에 속아 넘어간다. 아내는 남편의 도덕군자다운 표정에 속아 넘어가고, 남편은 아내의 현모양처다운 표정에 속아 넘어간다. 때로는 판사와 검사보다도 범죄인과 마피아 두목이 더 선량한 가면을 쓰고 있을 때도 있고, 또, 때로는 범죄인과 마피아 두목이 판사와 검사의 준엄한 채찍 앞에서 쩔쩔 맬 때도 있다. 이 세상의 삶은 완벽한 허위와 완벽한 범죄 속의 삶에 지나지 않으며, 우리 인간들은 누구나 다같이 가면무도회의 주인공들로서 그 지옥과도 같은 삶을 연출해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만일, 그렇다면 진짜 얼굴의 세계는 무엇이란 말인가? 진짜 얼굴의 세계는 거짓이 없는 세계이며 꾸밈이 없는 세계이지만, 그러나 그 이데아의 세계는 어느 누구도 가본 적이 없고 설명해줄 수도 없는 세계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나의 가면에 지나지 않고 너는 너의 가면에 지나지 않는다. 실존이 본질에 우선하고, 따라서 우리 인간들의 ‘인간 존재론’----우리 인간들이 그토록 자기 자신들의 정체성을 찾아 헤맨 인간존재론----이 판단중지된 존재론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생각해본다면, 나의 이 말은 더욱 더 타당성을 띠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러나, 이 가면무도회의 세계가 그야말로 완벽한 허위와 완벽한 범죄의 세계로만 구성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아버지도 아들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아들도 아버지를 진정으로 사랑한다. 아내도 그의 남편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남편도 그의 아내를 진정으로 사랑한다. 판사와 검사는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공정한 판단을 내리고, 범죄인과 마피아 두목은 그들의 잘못을 진심으로 뉘우친다. 교사도 그 제자들을 위해서 밤낮으로 공부를 하고, 제자들도 그 선생님의 가르침을 따라서 보다 더 나은 미래의 인간형으로 자라난다. 목사도 가난한 자, 힘 없는 자, 불행한 자를 위해서 진정으로 기도를 하고, 사회적인 천민들도 그 구원의 말씀을 진심으로 감사하게 생각한다. 따라서, 진짜 얼굴과 가짜 얼굴, 혹은 선과 악이 상호 겹쳐져 있는 가운데, 이 세상의 가면무도회는 더욱 더 즐겁고 기쁘게 그 대단원의 막을 내려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열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향하여 네게 주리라 맹세하신 땅으로 너를 들어가게 하시고 네가 건축하지 아니한 크고 아름다운 성읍을 얻게 하시며 네가 채우지 아니한 아름다운 물건이 가득한 집을 얻게 하시며 네가 파지 아니한 우물을 얻게 하시며 네가 심지 아니한 포도원과 감람나무를 얻게 하사 너로 배불리 먹게 하실 때에
----[신명기](6장 9절~11절) 에서
임마뉴엘 칸트는 “선은 욕망의 대상이고 악은 혐오의 대상”이라고 그의 {실천이성비판}에서 역설한 바가 있다. 하지만, 이 무슨 도덕군자로서의 음산한 기상나팔 소리이며 우리 인간들의 삶의 장송곡이란 말인가? 선과 악이란 동일한 것의 양면에 불과하며, 이 선과 악이 분리된다면 우리 인간들의 삶이 없게 된다. 모두들 선만을 욕망하면 그 욕망 때문에 최고의 선을 차지하려는 다툼(악)이 생겨나게 되고, 그리고, 그 악 때문에 선의 얼굴은 형체도 없이 망가지게 된다. 만일, 악이 혐오의 대상이라면 모두들 살생이나 타인의 희생을 강요하는 일들을 하지 않게 되고, 이 세상은 바보나 멍청이나 팔푼이들의 천국이 될 것이다. 때때로 우리 인간들은 선보다는 악을 더 원해야 하고, 가장 찬란하고 아름다운 악의 모습으로 영원한 제국의 신전을 건축하지 않으면 안 된다. “네가 건축하지 아니한 크고 아름다운 성읍을 얻게 하시며 네가 채우지 아니한 아름다운 물건이 가득한 집을 얻게 하시며”가 바로 그것이고, “네가 파지 아니한 우물을 얻게 하시며 네가 심지 아니한 포도원과 감람나무를 얻게 하사 너로 배불리 먹게 하실 때에”가 바로 그것이다. 유태인의 하나님은 끊임없이 침략과 약탈을 사주하는 하나님이며, 유태인은 자기 자신들의 침략과 약탈을 하나님의 은총으로 위장을 하게 된다. 유태인의탈은 선택받은 자의 탈(침략자의 탈)이고, 비유태인의 탈은 버림받은 자(약탈당한 자)의 탈이다. 유태인의 탈은 여유로운 자의 탈(행복한 자의 탈)이고, 비유태인의 탈은 슬퍼하는 자의 탈(분노하는 자의 탈)이다. 어쨌든 유태인들은 그 ‘악의 탈’을 ‘선의 탈’로 변모시키고, 사상과 이론의 차원에서, 이 세상에서 가장 찬란하고 아름다운 인식의 제전----유태교와 기독교를 창시한 것----을 펼펴 보인 바가 있다.
나도 가면을 쓰고 있고 너도 가면을 쓰고 있다. 나도 진실을 말하지만 너도 진실을 말한다. 나도 거짓말을 하지만 너도 거짓말을 한다. 너와 나는 다정한 친구일 때도 있고, 너와 나는 너무나도 끔찍하고 잔인한 원수형제일 때도 있다. 나의 얼굴은 양파껍질과도 같고 너의 얼굴도 양파껍질과도 같다. 가면을 벗기고 또 벗겨도 진짜 얼굴은 드러나지 않고, 그 가면들이 진짜 얼굴과도 같은 표정을 짓고 있다. 가면이 웃으면 진짜 얼굴이 울고, 가면이 울면 진짜 얼굴이 웃는다. 가면이 화를 내면 진짜 얼굴이 농담을 하고, 가면이 농담을 하면 진짜 얼굴이 화를 낸다. 가면이 연애를 하면 진짜 얼굴은 사내 아이를 얻고, 가면이 사내 아이를 얻으면 진짜 얼굴은 돌잔치를 한다. 진짜 얼굴이 사기를 치면 가면이 채찍들 들고, 진짜 얼굴이 채찍을 들면 가면도 채찍을 든다. 이 가면과 진짜 얼굴의 싸움에 의해서, 인류의 문명과 문화가 발전하고, 그리고 그 가면무도회에 의해서 영원한 제국의 밤이 무르익어 가게 된다. 인생은 가면무도회와도 같으며, 우리 인간들은 누구가 다같이 그 가면무도회의 주인공들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다.
정채원 시인은 서울에서 출생했으며, 1973년 이화여대 영문학과를 졸업했다. 1996년 {문학사상}으로 등단했으며, 시집으로는 {나의 키로 건너는 강}을 출간한 바가 있다. ‘변검變臉쇼’는 중국 사천성 성도의 전통쇼이며, 한 사람의 배우가 순식간에 수많은 가면들을 바꿔쓰는 묘기를 말한다. 정채원 시인의 ‘변검쇼’ 연작은 중국 사천성 성도의 전통쇼를 보고 와서 쓴 것이며, [변검쇼 1](2007년 {애지} 여름호)에서는 ‘석민이’에서 ‘명호’로, ‘명호’에서 ‘영섭이’로 그 가면을 바꾸어 쓰는 과정을 매우 극적으로 묘사해낸 바가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모두가 다같이 “회칼로 반대파의 목을 따고도” “말기암 어머니의 전화 목소리에 귀가 젖는 사람”들이며, 또한, 그들은 모두가 다같이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벙어리에게는/ 맘 놓고 속내”를 다 털어 놓으면서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향해서는 결코 용서’할 수 없다고 울부짖고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가면을 바꿔쓰면 사람이 전혀 딴판이 되고, 사람이 전혀 딴판이 되면 그 가면이 그의 진짜 얼굴처럼 보이게 된다. ‘석민이’에서 ‘명호’로, ‘명호’에서 ‘영섭이’로 이어지는 [변검쇼 1]이 선과 악이 겹쳐져 있는 가면무도회라면 “지체장애 1급 정운재 할아버지”가 연출해내고 있는 [변검쇼 2]는 ‘악’이 제거된 ‘선’의 세계에서, 수많은 기적들을 가능케 하고 있는 가면무도회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왜 정운재 할아버지는 지체장애자가 되었던 것이며, 또한, 왜 그는 양 손이 없는 몸으로 나무뿌리의 목공예품을 만들고 있는 것일까? 아마도 정운재 할아버지는 한국전쟁이나 월남전쟁의 참전용사일는지도 모르며, 또한 그 할아버지는 그 죄업을 씻기 위해서 그 불구의 몸으로 목공예품의 조각가가 되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따라서 정운재 할아버지가 교통사고와 그밖의 산업재해로 지체장애자가 되었다고 하더라도, 그러나 이 [변검쇼 2]에서는 참전용사의 그것으로 간주하지 않는다면 이 시의 극적 구조는 살아나지 않게 될 것이다. 정운재 할아번지는 ‘악’의 가면을 쓰고 대량살상의 전쟁무대에 뛰어 들었던 참전용사이며, 이제는 양 손이 없는 불구의 몸으로도 그 죄업을 씻기 위하여 죽은 나무뿌리들로 수많은 기적들을 연출해내게 된다. 기적이란 불가능한 것을 가능케 하는 것이며, 그것은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어떤 것을 말한다. 진정한 속죄의 마음은 그 주체자를 더없이 고귀하고 거룩하게 만들어 주고, 그리고 그의 가면을 더없이 착하고 선량한 가면으로 변모시켜 준다. “지체장애 1급 정운재 할아버지/ 양 손이 없는 그가/ 강원도 산골에서 밑둥만 겨우 남은 팔꿈치로/ 죽은 나무뿌리를 주워오기도 하고 캐오기도 한다”가 바로 그 기적이 아니라면 무엇이고, 또한, “겨드랑이에 톱을 끼고/ 아내와 함께 톱질을 하고 조각을 한다, 죽은 뿌리가/ 여의주 입에 문 용도 되고/ 개도 되고/ 동자승도 되고/ 부처도 되고”라는 시구가 바로 그것이 아니라면 무엇이란 말인가! 어느 누가 양 손이 없는 정운재 할아버지가 죽은 나무뿌리를 캐고, 그 죽은 나무뿌리들로 용도 만들고, 개도 만들고, 동자승과 부처도 만들 수 있으리라고 상상조차 할 수나 있었단 말인가! 그것은 백척간두의 위기 앞에서도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해내겠다는 일념 하나로, “구름이 길을 인도하고, 홍해 바다가 갈라지고, 바위는 샘물을 내뿜고, 하늘에서는 만나가 쏟아지는” 기적을 연출해냈던 모세의 업적과도 비견될 만한 것이라고 해도 틀림이 없는 것이다.
용은 상상의 동물이며, 등에 81개의 뻣뻣한 비늘이 있고, 몸은 큰 뱀과도 비슷하다고 한다. 용의 얼굴은 사나웁게 생겼으며, 뿔과 귀와 수염과 네 개의 발이 있고, 하늘을 자유 자재롭게 날아 다니며, 비와 구름을 몰고 다닌다고 한다. 용은 예로부터 상서로운----복되고 길한 일이 일어날 징조----동물이며, 천자와 군왕을 지시하고 있는 동물이라고 할 수가 있다. 여의주는 용의 턱 아래 있다는 구슬이며 이 구슬을 가지고 있으면, 모든 변화와 기적들을 주재할 수가 있게 된다. 개는 개과의 짐승이며, 외부의 적과 도둑의 침입을 막아주는 짐승이다. 동자승은 어릴 때부터 출가를 한 스님---중생을 구원해내겠다는 스님----을 말하며, 부처는 모든 중생들을 고통으로부터 구원해냈던 인신人神을 말한다. 진정으로 속죄를 하면 모든 기적이 가능해지며, 그 기적의 세계는 모든 것이 가능한 지상낙원(극락세계)의 세계가 된다. 양 손이 없는 불구의 몸이 전지전능한 人神이 되면 용이 여의주를 입에 물고 나타나게 된다. 용이 여의주를 입에 물고 나타나면 개가 나타나고, 그 개가 나타나면 동자승과 부처가 나타나게 된다. 정운재 할아버지에서 여의주를 입에 문 용으로, 여의주를 입에 문 용에서 개로, 그 개에서 동자승으로, 그 동자승에서 부처로, 그리고, 또다시 정운재 할아버지로 그 선량한 가면들의 변검쇼가 벌어지고 있는 것이 제1연의 외양이라면, 제2연은 그 변검쇼의 마술에의하여, “뿌리째 말라죽었나 싶던 내 가지에도/ 연두 새순이” 돋게 되는 것이다. “뿌리째 말라죽었나 싶던 내 가지에도/ 연두 새순이 돋는다”라는 시구는 첫 번째로는 모든 감각이 마비된 초로의 여성이 그 마비된 감각을 회복시켰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고, 또한 두 번째로는 그 연두빛 새순을 통하여, 정운재 할아버지의 지상낙원을 더욱 더 아름답고 풍요롭게 장식하게 되었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그대 손길에”, 즉, 정운재 할아버지의 손길에, ‘뿌리째 말라죽었나 싶던 내 가지에도/ 연두 새순이" 돋고, “겨울잠 깬 개구리도 발치에서 튀어오르고/ 물오른 우듬지엔 은줄팔랑나비 한 마리 날아와 앉게” 된다. 기적은 기적을 부르고, 또다른 기적은 또다른 기적을 부른다. 이제는 정운재 할아버지의 변검쇼에 의하여, “뇌종양으로 세상을 떠난/ 9살 소년의 각막이/ 20살 여대생의 눈웃음 속에서 반짝/ 초승달로 빛나는 새 봄”이 탄생하게 되는 것이다.
나는 그 동안 정채원 시인의 시들을 수도 없이 많이 읽어 왔지만, 이 [변검쇼]의 연작시들처럼 아름답고 뛰어난 시들을 읽어 보지는 못했던 것같다. 온몸으로, 온몸으로, 언어의 가시밭길 속에 뛰어들고, 그리고, 그 고문받는 순교자의 황홀함으로 이 아름답고 뛰어난 명시들을 쓰게 된 것이다. 시는 시인의 생명이며, 언어는 그의 붉디 붉은 피이다. 그 붉디 붉은 피는 더없이 고귀하고 거룩한 피이며, 그 진정성의 힘으로 한 편의 시는 영원불멸의 삶을 살아가게 된다. [변검쇼 2]의 “지체장애 1급 정운재 할아버지”는 실제의 인물이 아니며, 그 ‘변검쇼’를 주재하는 정채원 시인의 창작품에 지나지 않는다. 시인은 보고 느낀대로 쓰지만, 그러나 어느 누구도 보고 느낀대로만은 쓰지 않는다. 실제는, 사실은, 하나의 모델(가상)이며, 그 모델(가상) 이상의 의미를 띨 수가 없다. 시인은 모든 가치의 명명자이며, 전제군주이며, 제일급의 창조주이다. 양 손이 없는 불구의 할아버지의 손끝에서, 여의주를 입에 문 용과 개가 탄생하는 것도 그 가면무도회를 주재하는 시인의 의도에 의한 것이며, 또한, 그 할아버지의 손끝에서, 동자승과 부처가 탄생하는 것도 그 가면무도회를 주재하고 있는 시인의 의도에 의한 것이다. [변검쇼 2]의 제2연과 제3연은 그 기적이 정운재 할아버지에 의해서 연출되고 있는 것 같지만,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외면적인 양상일 뿐, 그 머리에서 발끝까지 정채원 시인의 의도와 상상력에 의해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연출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제2연, 즉,
뿌리째 말라죽었나 싶던 내 가지에도
연두 새순이 돋는다, 그대 손길에
겨울잠 깬 개구리도 발치에서 튀어오르고
물오른 우듬지엔 은줄팔랑나비 한 마리 날아와 앉는다
라는 시구가 그것이 아니라면 무엇이고, 또한 제3연,즉,
뇌종양으로 세상을 떠난
9살 소년의 각막이
20살 여대생의 눈웃음 속에서 반짝
초승달로 빛나는 새 봄
이라는 시구가 그것이 아니라면 무엇이란 말인가! 다시 말해서, “뿌리째 말라죽었나 싶던 내 가지에도/ 연두 새순이 돋는다, 그대 손길에/ 겨울잠 깬 개구리도 발치에서 튀어오르고/ 물오른 우듬지엔 은줄팔랑나비 한 마리 날아와 앉는다”라는 시구와 “뇌종양으로 세상을 떠난/ 9살 소년의 각막이/ 20살 여대생의 눈웃음 속에서 반짝/ 초승달로 빛나는 새 봄”의 시구는 상상력의 혁명에 의한 제일급의 명구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뿌리째 말라죽었나 싶었던 내 가지에서 연두빛 새순이 돋고, 겨울잠에서 깨어난 개구리들이 발치에서 튀어 오르고, 물오른 우듬지에는 은줄팔랑나비 한 마리 날아와 앉는 기적, 뇌종양으로 세상을 떠난 9살 소년의 각막이 20살 여대생의 눈웃음 속에서 반짝이는 초승달로 빛나는 새 봄의 기적----, 바로 이 기적이 ‘상상력의 혁명’의 힘인 것이다. 시인의 힘은 상상력의 힘이고, 상상력의 힘은 새로운 지상낙원의 창조로 나타나게 된다. 여의주를 입에 문 용이 나타나면 개가 나타나고, 개가 나타나면 동자승이 나타난다. 동자승이 나타나면 부처가 나타나고, 부처가 나타나면 고목나무에서 새순이 돋게 된다. 그리고, 또한, 고목나무에서 새순이 돋게 되면 물오른 우듬지에는 은줄팔랑나비 한 마리가 날아와 앉게 되고, 물오른 우듬지에 은줄팔랑나비 한 마리가 날아와 앉게 되면 뇌종양으로 세상을 떠난 소년이 20살의 여대생으로 환생을 하게 된다. 제1급 장애인에서 부처로, 만물이 얼어붙은 겨울에서 따뜻난한 봄날로, 이미 죽어버린 것 같은 고목나무에서 물오른 우듬지의 나무로, 9살 소년의 죽음으로부터 20대의 여대생으로 환생은 우주적인 크기의 기적이며, 이 모든 것이 정채원 시인의 상상력의 혁명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정채원 시인의 [변검쇼 2]는 그의 최고의 걸작품이며, 한국현대시의 진수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가면 위에 가면이 있고, 가면 옆에 가면이 있다. 가면 위에 진짜 얼굴이 있고, 진짜 얼굴 뒤에 진짜 가면이 있다. 가면이 진짜 얼굴이고, 진짜 얼굴이 가면이다. 수많은 가면이 사라지고 수많은 가면들이 새롭게 등장한다.
너무나도 잔인하고 끔찍한 가면무도회여!
너무나도 아름답고 즐거운 가면무도회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