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케페의 글은
2021년 6월19일 포스팅항였습니다.
성경을 깊이 묵상하면
진실의 갈증을 더욱 깊이 느낍니다.
성서지대를 탐험하면 하나님의 창조와 구속을 발견하지만
하나님의 진실을 찾기란 쉽지 않습니다.
창세기의 독자는
창세기 저자의 시선을 따라 "여호와 하나님"을 발견합니다.
그러나 창세기의 배경과 인물에 대한 역사적 진실을
고고학적 고증으로 증명하기란 거의 불가항력입니다.
창세기의 "태초" 개념을 고증할 수 없으며
말씀으로 창조하신 하나님의 역사, 바로 그 현장을 누가 볼 수 있을 것인가?
창세기 1:1절의 태초는 그 이후....
이사야 선지자에게 계시되었습니다.
☞ 이 일을 누가 행하였느냐 누가 이루었느냐 누가 태초부터 만대를 명정하였느냐
나 여호와라 태초에도 나요 나중 있을 자에게도 내가 곧 그니라(사41:4)
창세기를 비롯한 성경의 말씀은 하나님을 계시하며 또한 그 행하신 일을 계시의 말씀으로 기록하였고
천지를 창조하신 태초의 그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합니다.
율법과 선지자의 증거를 받은 메시야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계시하였으며 그 아버지의 뜻을 성령으로 온전히 순종하여 영원한 구세주가 되었습니다.
실체적 믿음의 진실은 곧 말씀의 계시를 믿는 그 계시 신앙이요,
하나님의 계시는 하나님의 행사를 알리고 전하고 깨닫게 하는 유일한 말씀입니다.
그 놀라운 말씀 계시의 역사가
성경 저자의 영감적 기록으로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성서의 문학이 되었습니다.
창조의 참된 진실은 창세기 저자의 진실에 대한 호불호의 믿음으로만
창세기의 신비를 이해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실에 대한 본질적인 고찰이 없으면
창세기에 대한 이해는 "꽝"일 수 밖에 없습니다.
창세기에 대한 믿음이 무너지면
아브라함의 언약을 통한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창세기는 창세기 저자의 전지작 작가 시점으로 탄생한
계시적 영감으로 말미암은 성서문학의 기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창세기의 저자를 하나님과 동일시해야 되는 믿음의 눈높이는"미신"이 아니면" 종교적 신념"의 이데올로기요,
그 실체적 진실의 믿음을 갖기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창세기에 대한 불가항력적 믿음의 이해는
성서지대의 영감적 계시를 공유하고 소통하는 조명입니다.
그러므로 덮어 놓고 믿는 믿음이란 미신이요, 신념이며
실체적 진실을 이해하는 믿음의 본질과 동이 서에서 먼 것처럼 멀기만 합니다.
성경의 역사에 대한 고고학적 고증의 실체적 진실의 이해라고 하더라도
그 믿음은 대상에 대한 신본적 믿음이 아니라 지식으로 얻은 상식적인 이해입니다.
지식으로 얻는 상식적 이해의 믿음은
진실의 소통과 공유할지라도 구원얻는 믿음이 아닙니다.
말씀을 이루는 믿음의 본질적 이해는
미신과 신념과 상식적 이해를 뛰어넘는 하나님의 지식이요,
그 지혜이며 그것을 의지하고 순종하고 따르는 믿음입니다.
창세기는 창세기 저자의 전지적 작가 시점의 서술과 그 서술의 내용에서
하나님의 구원 역사의 동선과 그 뜻을 믿음으로 순종하는 인물의 소통과 공유의 광장입니다.
창세기의 독자는 창세기 저자가 보여주는
모세에게 계시된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노아와 아브라함 등에게 적용된 영감적 성찰을 주목해야 할 것입니다.
창세기 저자의 실체적 진실의 발견은 고고학적 고증보다
모세에게 계시된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창세기 저자의 아브라함에 대한 믿음의 이해입니다.
이것이 창세기 저자의 믿음이요,
역자적 고증으로 증명할 수 없는 실체적 진실입니다.
참으로 창세기 저자의 믿음은 하나님의 창조에 대한 말씀의 이해뿐만 아니라
에녹과 노아와 아브라함을 비롯한 믿음의 족장에 대한 여호와 하나님의 적용이라는
정확한 믿음의 이해를 하였습니다.
창세기를 비롯한 모세 오경에 대한 진실의 이해는
창세기와 출애굽기를 연결하는 애굽의 이스라엘입니다.
애굽의 이스라엘에 대한 모세의 이해는
모세의 어머니 요게벳이 레위의 딸이기 때문에 역사적 고증이 필요없는 실체적 이해로 충분합니다.
그러나 가나안 땅에 대한 모세의 이해는
가나안 땅에 대한 계시적 영감의 이해가 아니라 정탐꾼의 보고를 통한 믿음의 이해입니다.
사실에 입각한 열명의 보고는 불신으로 매도되고
가나안 땅에 대한 여호수아와 갈렙의 신앙적인 믿음의 보고는 출애굽 신앙의 진실이 되었습니다.
탐정의 사실적 보고는 단순한 불신의 매도가 아니라
그것으로 인해 38년 동안 광야를 맴돌았으며 그것에 편승된 모든 사람이 죽기까지 멸망의 심판을 받았습니다.
열명의 정탐꾼, 그들이 보고 듣고 목격한 사실에 대한 진실의 이해는
하나님의 충만한 지식, 그 구원 능력의 역사에 대한 불신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사실과 진실의 분리된 이해는
믿음의 본질이라는 실체가 되었습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사실적인 지식의 이해라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믿음의 말씀이 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성서에 대한 이해는 역사적 고증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충만한 지식으로 말미암은 믿음의 이해입니다.
성서에 대한 실체적 진실의 열망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갈증으로 그의 의를 힘입는 것입니다.
도올의 성서에 대한 이해는 그의 저서와 강의를 통해서 볼 때
성서에 대한 시실적 이해의 불신이라는 궤변의 대명사가 되었습니다.
도올은 성서 뿐만 아니라 공자와 맹자와 노자에 대한 궤변과
우리 나라 역사에 대한 좌파적 역사 이해의 궤변자가 되었습니다.
도올과 쌍벽을 이루는 우파적 역사의 궤변자는
자연사 박물관의 김정민 박사일 것입니다.
김정민 박사의 해박한 우파적 역사의 이해는
도올의 좌파적 역사의 이해와 쌍벽을 이룰 정도로 보수 궤변의 대가로 그 오염된 흔적을 남겼습니다.
그러나 김정민 박사의 궤변은 실체적 진실의 검증을 받으면서
우파 유튜브의 민낯을 드러내는 리트머스가 되었습니다.
결국 처절한 거짓과 진실의 공방전, 그 이전투구는 이판사판으로 지리멸렬되었으며
진실과 정의와 자유의 큰 상처를 남기고 지평선 저 멀리 떨어지는 별똥별이 되었습니다.
사실에 대한 역사적 관점의 다른 시각은
나름의 실체적 사관이 낳은 불편한 진실일 것입니다.
우리 나라의 역사에 대한 사관은
좌파적 시각의 민중사관을 비롯하여 반도사관과 뉴라이트 사관 등 다양합니다.
성서지대를 바라보는 사관도
선지자적 시각의 신명기 사관과 제사장적 시각의 역대기 사관이 서로 충돌합니다.
가나안 땅에 대한 열명의 정탐꾼 보고는 사실에 충실한 보고였지만
그 실체적 진실의 보고는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대한 불신이 되었습니다.
잘못된 사관에 편승된 불행은
오늘날 한반도의 혼동과 공허의 실상이 되었습니다.
눈으로 보고 듣는 그 이상의 실체적 진실의 이해는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말씀으로 기록한 성서 저자의 눈높이입니다.
날조되고 왜곡된 진실의 역사를 바로 세우기란
성공한 촛불 혁명 정부를 무너 뜨리는 진실의 힘이 될 것입니다.
지금은 남의 땅,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작금의 실체적 진실의 힘은
좌파적 역사 이해의 실체가 되었습니다.
지금 대한민국은 "진실의 역사"를 만들어 가는
혼돈과 공허의 무주공산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진실의 역사, 그 주도권 싸움은 촛불과 태극기의 용쟁호투요,
진실과 정의와 애국의 이전투구가 되었습니다.
지난 날 군사 독재 정권은 "정의사회구현"이라는 양의 탈을 썼고
작금의 좌파 독재 정권은 "적폐청산"이라는 양의 탈을 쓰고 있습니다.
소위 말하는 촛불좌파혁명정부의 적폐청산에 대한 이해는
자유 대한 민국의 보수적 가치에 대한 부정이요, 건국과 부국강변과 자유 통일에 대한 날조요, 왜곡입니다.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탄핵은 국정농단이라는 허위로
자유 민주주의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파괴하는 적성세력의 전략전술입니다.
진실과 정의와 법치와 애국의 파괴는
메이저 언론과 방송, 그리고 검찰과 국회와 특검과 헌재와 법원과 좌파 정권의 무소불위가 되었습니다.
여기에 더불어 편승된 세력은 촛불 정신으로 하나되어
보수를 불태우고 궤멸시키는 무지막지한 싱크탱크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진실에 대한 촛불과 태극기 세력의 이해는
천양지차의 역사적 실체가 되었습니다.
문득 박근혜 대통령의 진실은 무엇인가?고민하며
그 실체적 진실의 추적은 암흑한 시대의 조명이 될 것입니다.
박근혜 대통령은 대통령의 정보력으로
청와대에서 자유 대한민국을 포진하고 있는 적성세력의 살기를 느꼈을 것입니다.
그러한 적성세력에 대한 박근혜 대통령의 선전포고는 적성세력과 전면전이 되었으며
통진당 해산, 민노총 압박, 전교조 해체작업, 개성공단 폐쇠, 국정 교과서 등의 통치로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2016년 국군의 날 연설은
북한의 레짐체인지와 자유 통일의 열망과 그 신념을 담은 정예강군을 강조하였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은 비정상의 정상을 국정 기조로 삼았으나
화합을 위해 호남인사를 많이 발탁하였고 친이계를 포용하면서
결정적인 순간에 배신의 정치에 함몰되었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의 자유 통일로 가는 길목에서
적성 세력의 반란으로 되치기를 당하여 탄핵의 길을 걷고 영어의 몸이 되었습니다.
적성세력의 발톱은
먹이를 낚아채는 독수리와 맹수의 야성, 그 자체였습니다.
자유 대한민국을 강타한 적성 세력의 쓰나미는
아름다운 금수강산을 붉게 물들였습니다.
광화문 광장의 해학, 그 국정농단의 방망이는 포학하였으며
촛불은 바람을 타고 번지는 보수를 불태우는 산불이 되었습니다.
민주주의의 타락, 그 대중선동의 중우정치는
헌법을 농단하고 법치를 농단하는 광화문 굿판의 좀비가 되었습니다.
언론의 거짓 선동에 국회는 장단을 맞추고 검찰은 춤을 추며
법원은 기울어진 운동장의 몰이배가 되어 마녀사냥을 즐겼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의 통치는 자유 통일 정책이었으나
적화통일의 주체는 거짓된 인권과 평등과 평화의 옷을 입었습니다.
자유 대한민국의 진실과 자유 통일의 아이콘이 된 박근혜 대통령은
적성 세력의 먹이가 되면서 진실의 흔적을 남겼습니다.
진실의 주체가 된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실체적 믿음의 진실은
장강의 대하를 이루는 태극기 물결의 열망이 되었습니다.
국정농단의 허위는
실체적 진실의 믿음으로 붕괴될 것인가?
여기에 국회의 탄핵으로 정규제 TV와 청와대 인터뷰에서 밝힌 박근혜 대통령의 실체적 진실의 믿음은
탄핵의 역풍을 일으킬 애국 국민의 하나된 힘이었습니다.
거짓의 산을 무너뜨릴 유일한 세력은
자유 대한민국을 사랑하는 자유의 진실에 깨어난 애국 국민의 각성, 그 자체였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의 진실에 대한 열망은
촛불을 끄는 태극기 물결의 바람이었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의 법정 투쟁은
법원의 국정 농단에 대한 진실의 날조와 왜곡에 대한 저항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박근헤 대통령은 6개월 동안의 재판을 통한 법원에 대한 불신으로 법정 투쟁을 선언하면서
한 사람의 배신자를 언급하며 탄핵의 배후에 대한 실마리를 제공하였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이 재판을 거부하며 말씀한 배신의 그 한 사람은 누구일까?
배신의 도미노 현상은
배신의 그 한 사람에 대한 실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지적 안목의 배신자, 그 한 사람에 대한 발언은
자유 대한민국의 반란 세력, 그 배신의 행위에 대한 총체적 촌철살인이었습니다.
배신의 그 한 사람에 편승되지 않는 각성된 애국 시민은
자유 대한민국의 수호자가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박근혜 대통령은 헌재의 파면선고 후 청와대를 떠나 삼성동 사저에 들어 가면서
진실은 비록 시간은 오래 걸리겠지만 반드시 밝혀질 것이라는 묵시적 말씀을 남겼습니다.
그리고 구속되기전 삼성동 사저에세 조원진 의원에게 남긴 말씀은
눈덩이를 뭉치는 작은 돌을 말씀하시면서 자유 애국 시민의 결집을 호소하였습니다.
그렇게 탄생한 각성된 애국 국민의 태극기 애국 물결은
마른 나뭇가지에 둥지튼 태극기 물결의 바람새 대한 애국당이 되었습니다.
대한 애국당의 태극기 물결은
실체적 진실의 믿음으로 박근혜 대통령의 무죄 석방과 좌파 정권의 붕괴와 자유 통일을 위해
사즉생의 결사항전의 태극 전사가 되었습니다.
과연 대한 애국당의 실체적 믿음은 풀무의 연단을 거친 출애굽의 이스라엘 처럼
아말렉과 모압과 암몬을 무찌르고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을 정복할 수 있을 것인가?
결국 배신의 도미노 현상은
대한애국당을 우리공화당으로 만든 홍문종 의원의 배신과 18문수의 배신,
그리고 우파 유튜브의 배신과 태극기 애국 시민의 분열로 파멸의 길로 치달았습니다.
거짓 선동의 대명사가 된 방송과 언론이 건재하고
불법 탄핵과 재판에 관여한 국회와 검찰과 법원이 건재한 대한민국은
참된 진실의 비전마저 상실한 무주공산, 그 어둠의 통로를 지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