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매일 일기를 꾸준히 쓰다보면 허탈한 영혼에 글로리(영광)가 채워지는 독특한 경험을 겪는다. 단지 소름이 돋는다면 그것은 감히 '카타르시스에 의한 자아도취' 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나는 이 달콤한 어둠의 협곡의 웅장한 광경만을 감상하지 않을 것이다. 맨손으로 벽을 짚고 올라와 절경을 마주할 것이다. 그리곤 다시 일기를 쓰려 협곡 아래로 빠지고, 알게 모르게 조금씩 '물방울 형태의 안김'을 주는 신의 실루엣을 보려 가파른 절벽 오르기를 마다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다가 석양을 등지고 어두운 바닥을 보겠지, 따쓰한 일출의 온기를 등으로 느끼며 돌이켜보겠지.
우리가 무심코 거울속의 자신을 보듯, 혼란의 불경한 쾌감과 금싸라기 같은 찬란의 총애를 구걸하는 일은 나날을 밀도있게 글에 터뜨리는 것이다.
영광은 인내의 고른 갈기를 휘날리며 백색 간달프의 가냘픈 지팡이와 함께 '자신과의 싸움'을 종결지으려 참혹한 전쟁 말미에 구세군으로 가담한다.
하루에 벌리는 실수가 눈에 띄게 잦아지면, 미움이 실롭(거대거미)의 몸집만큼 커져 주변을 어슬렁거린다. 쫓아내고 싶어도 겁이 나 마음대로 쫓아내지 못하는 그 큰 덩치를 '자존감 갑옷'이 해져버린 그때의 나는 스스로가 무가치하다고 느낄 것이다. 이 구간을 반복하면 일상의 언어가 철학자 니체가 경계한 '괴물을 오래 보는 상태'가 되어버리므로, 초자아(superego)와 가장 먼 존재가 되며, 자아는 급기야 이드(id)에 씹어먹혀 눈 뜨고 바라볼 수 없을 정도의 비참한 괴물이 되고 말 것이다.
곤두박질 친 분노의 화살들이 날아올 마지막이 언제일지 모르게 되며, 이 세상의 모든 만물보다 자신의 격을 낮추게 되고 '인간으로서의 존재가 아무런 의미기 없다'고도 느낀다. 무신론자로서의 삶을 질책하고 비난하고, 그러다 또 다시 새로운 종교를 찾아가 두 손모아 빌고, 그러다가 꼬구라지고, 다시 일어서고. 결국 새로운 분노를 낳는 영원한 108번뇌의 무시무시한 채찍으로부터 옥죄이고 마는 것이다.
언젠가 양어머니께서는 내게 말하셨다. "그 누구라도 너를 못되게 하고, 나쁘게 할 순 없어. 가령 그렇다고 할 지라도 도미니코(세례명)의 지혜로 잘 이겨낼 거라 믿어." 그리고 인생의 스승님은 1년동안 나를 더 좋은 곳으로 인도하는 노력을 하셨다. 이토록 무한적인 사랑을 실현하는 분들에게 등을 돌린 배신자, 그 배후는 나였다. 질풍노도의 시기. 사랑의 테두리 안에 배척되길 두려워하면서도 '비행의 카약'을 타고 두 노를 결코 다가가지 않으려는 저항점으로 역이용했다. 제 얼굴에 침 뱉기. 아니, 안으로 굽은 팔에 쓰나미 일으키기.
딱 그땐 그랬다. 나빠지길 바랬고 더 악해졌으면 하는, 쏜살같이 아래로 흐르는 계곡물에서 위를 바라보며 히히덕거리길 좋아하는, 뾰족하고 모난 회빛깔과 허연 돌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반대다. 물아일체. '그것'이 되려면 이소룡 선생님의 '물이 되어라' 라는 격언을 흩어진 정신들을 불러모아 십시일반으로 중첩시켜야 가능한 일.
혼탁한 물에 비치는 우리 자신은 왠만해서는 쉽게 보이지 않는다.
물은 끊임없이 쏟아지고 있고. 새로운 물은 갈아지고. 그러나 흔들거림은 멈출 수 없고. 어지럼증은 와리가리의 대명사로, 올바른 중립을 항시 거부. 그래, 기다려보자. 조금 더. 힘을 빼자.
이 세상의 모든 물을 닮고 싶다.
악취와 비린내가 풍기는 하류의 고인 오염수, 한 곳. 오직 위만을 바라보는 깊은 산 속의 연못, 전통사기에 담긴 잔잔하고 뜨듯한 보이차.
지구를 덮은 파랑색 모자이크.
"스노쿨링 아저씨, 잠수복 좀 빌려주세요. 오늘은 블루 홀로 뛰어들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