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레터 63/즐거운 친구모임]같은 교문校門 들고나기 3년
인연 중의 으뜸은 ‘가족’일 것이나, 가방끈 인연으로는 고등학교 동창과 동문이 최고일 듯하다. 70년대 중반(73-75년) 같은 교문을 3년 동안 등하교 같이 했다는 이유 하나로 동창들의 단점까지도 덮어주는 미덕을 발휘하니 신기한 일이다. 역시 사람은 혼자서는 못산다는 게 맞는 말같다. 재경동문회가 본격적으로 가동된(블로그 등) 게 밀레니엄이 시작하는 2000년이라던가. 6회 졸업생 100여명이 해마다 6월 6일 소풍을 가기 시작했다. 그것도 대부분 부부동반(많을 때에는 35쌍도 되었다). 20년 가까운 세월이었으니 대단하다면 대단했다. 코로나로 중단된 게 벌써 3년째이어서 유감이지만 말이다.
친구의 부인들을 무조건 ‘형수’라 부른 것은 아주 잘한 일이었다. 2008년인가는 관광버스 4대를 대절, 설악산과 하조대 등을 다녀왔다(평년엔 3대). 오죽했으면 2008년 6월초 중앙일보에 한 면 통째로 우리의 연례행사인 소풍 이야기가 대서특필되었을까. https://www.joongang.co.kr/article/3200935. 남고생들이 ‘전라고’였으니 형수들은 모두 ‘가상의 전라여고 6회’ 졸업생이었다. 남고생들이야 그렇다쳐도 여고생들의 친목도 세월이 쌓이다보니 ‘언니, 동생’하며 대단했다. 중국 등 해외여행도 보통 15쌍이 되었으니 말이다.
아무튼, 코로나는 이런저런 모임이나 행사의 풍속도를 확 바뀌게 했다. 경조사가 대표적일 것이나, 동창모임도 마음 놓고 할 수가 없었다. 1년에 서울 곳곳에서 10여회 열리던 번개팅을 3년간 한번도 못했으니 답답할 일. 숨통이 트여야 사람이 살아갈 것이 아니겠는가. 이제 조금 풀린 듯, 몸과 마음이 근질근질하던 차. 연말도 가까워지니, 한 친구가 강남지역에 사는 친구들만이라도 모여 회포를 풀자며 25여명에게 카톡을 보냈다. 불감청고소원. 그렇게 만난 것이 지난 월요일 오후 5시 잠실역 8번출구 김명자굴국밥집. 꼭 참석하겠다는 친구 중 감기, 모친 별세 등으로 서너 명이 빠졌으나 15명이 모였다. 번개나 다름없는 1주일 전의 알림치고는 ‘대박’인 셈. 오는 순서대로 착착 앉아가며 악수를 한다. 여자 셋이 모이면 접시가 깨진다는 말도 있지만, 익어가는 60대 후반 남자들의 수다도 보통은 넘는다. 한마디로 시끄럽다. 게다가 술잔이 날라다닌다. 그 와중에 어떤 친구는 작은 탁상시계를 안기는가하면, 남원에서 급히 올라온 지리산 약초전문가는 말린 각종 약초를 봉지봉지 가져왔다. 참 고마운 우정들이다.
그런데, 강남지역에 사는 것으로 알고 있는 친구들을 대상으로 보냈기 때문에 본의 아니게 누락된 친구들이 있을 터, 이해를 구한다. 그날의 식사과 술값을 원래는 추렴키로 했으나, 그간 정례모임이 너무 뜸했고 10여건의 경조사 기부금이 쌓였으므로 회비에서 부담하겠다는 회장단의 의견을 존중했다. 50여만원. 물가가 올라도 너무 오른 것이 단품 안주값이 최소 2만원(굴전, 꼬막무침, 술국 등). 홍어삼합은 1접시 58000원. 식탁이 4개였으니 그것만도 23만 2천원이다. 흐흐. 남춘천에서 달려온 우리의 왕회장 인우를 비롯해 남양주 별내 성주城主 지암, 국궁 3단 우보, 양재동 ‘삼김’의 추억을 안겨준 여초, 가양주의 달인 달우, 모친에 이어 장인어른 섬기기에 바쁜 마군사. 지병에도 불구하고 동기회 살림살이에 열성인 고천, 매주 화요일 전국의 명산 터트는 순암, 테니스와 골프로 여가가 없는 상암, 문화재 발굴요원인 지리산 산사나이 고룡, 한때 ‘문화영화’으로 우리의 심신을 달래준 구암, 자전거 기부왕 청암, 언제나 수줍고 말수가 적은 우진, 언제나 시끄러운 엔터테이너인 파평 윤씨 그리고 필자(옥수수와 콩, 이모작 완수로 한턱 내라는 말에 “말도 안되는 소리. 벼룩에 간을 빼먹어라”며 일축).
대한민국의 희한하다면 희한한 고등학교의 친구들은 대부분 호號를 사용한다. 흐흐. 백수 과로사하게 생긴 강회장은 선약으로 고창행(맛있는 것만 먹고 다녀 질투가 남). 현대의 재무통이었던 박형은 맨먼저 참석하겠다는 댓글을 보냈건만 예고없는 모친상을 당하고, 성재와 락재는 감기기운으로, 지우는 외국에서 누님이 오는 바람에 가족모임 불참. 그렇게 11월말의 밤은 깊어갔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