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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3332
12월7일 [성 암브로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대림 제2주간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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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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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9AIe7P0ra7E(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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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성령의 바람이 불어오면 우리 인생 어떻게 뒤바뀔지 모릅니다!>
암브로시오 주교님(340~397)은 당대 잘 나가던 인물이었습니다. 법학을 공부해 변호사로 활동했으며, 당대 세계의 중심이었던 로마 제국의 고위직 공무원으로 살았습니다.
놀랍게도 암브로시오는 서른살 나이에 이탈리아 북부 리구리아와 에밀리아 주의 총독이랄까 지사 정도 되는 높은 관직에 올랐습니다. 그는 맡은 일에 대한 책임감과 타오르는 열정, 다양한 아이디어로 황제의 신임을 톡톡히 받던 사람으로서 전도양양, 승승장구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암브로시오는 서로 날카롭게 대립하며 끝없는 다툼을 계속하던 아리우스 이단과 정통 가톨릭 사이를 중재하기 위한 중재자로 성당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강단에 서자마자 그의 타고난 인품과 유려한 말솜씨 그리고 탁월한 중재 능력이 즉시 드러났습니다. 그런 모습은 대성당에 운집한 사람들에게 큰 감명을 주었습니다.
마침 밀라노 주교좌가 공석인 상태였는데, 한참 중재를 하는데 어느 순간 한 아이가 일어나더니 이렇게 외쳤습니다.
“암브로시오를 주교로!”
그러자 군중까지 합세해서 “암브로시오 주교님! 암브로시오 주교님!” 하고 외치기 시작했습니다. 그 소식을 전해 들은 주교단은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심각한 걸림돌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는 아직 세례도 받지 않았습니다. 성직 특히 주교직은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본의 아니게 즉시 세례를 받았고, 주교로 서품되어 교구장이 되었습니다. 주교가 되자마자 세속의 재산을 청산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습니다.
암브로시오 주교님의 인생 참으로 놀랍습니다. 가톨릭교회 신자가 아니었던 그였습니다. 그러나 군중의 환호와 박수에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불과 8일 후에 주교가 되었습니다.
거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연륜이 짧았지만, 이 세상 그 어떤 주교보다도 열정적으로 사목활동에 임했습니다. 늦게 시작한 만큼 하루를 일 년처럼, 천 년처럼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 결과 역사에 길이 남을 불세출의 큰 성인으로 거듭나게 되었습니다.
주교로서 자신의 결핍을 잘 알고 있었던 그는 겸손하게 가장 밑바닥에서부터 신학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그 누구보다도 더 열심히 연구하고 사목자로서도 충실했습니다.
그 결과 암브로시오 주교는 아우구스티누스, 예로니모, 그레고리오 대교황과 함께 가톨릭교회 4대 교부 중 한 명으로 칭송받게 되었습니다
보십시오! 성령의 바람이 불어오면 우리 인생 어떻게 뒤바뀔지 모릅니다. 관건은 우리가 마음의 문을 활짝 여는 일입니다. 그리고 한번 물꼬를 터주신 주님께 감사드리면서, 새 삶을 살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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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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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피곤하게 만드는 것은 내 마음일 뿐>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안식’에 관해 말씀하십니다. 당신의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배우면 안식을 누린다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마음이 아니면 안식이 없다는 뜻입니다.
희랍어로 안식은 ‘아나파우시스’, 곧 ‘쉼’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이 아니면 우리 마음은 쉬지 않습니다. 파라오의 압제에서 일한 것처럼 계속 일하고 지쳐갑니다. 하지만 사탄은 그렇게 피곤한 것이 외부의 요인이지, 나의 마음 때문임을 보지 못하게 합니다.
학대받고 비참하게 버려진 채 발견된 강아지는 며칠 동안 벽에 머리를 박고 식음을 전폐합니다. 뼈가 드러날 정도의 앙상한 몸, 피부를 장악한 옴, 온몸에 묻은 오물까지 심한 학대를 견뎌왔음이 확실시되었습니다. 그는 세상을 등졌고 사람을 등졌습니다. 사람이 주는 것은 아무것도 먹으려 하지 않고 그냥 벽만 바라보았습니다. 녀석은 지금 하고 싶은 것도 없고, 심지어 우는 것도 할 수 없는 끝없는 충격에 휩싸여 있었습니다.
이 아이를 어떻게 치유할 수 있을까요? 인간의 언어로는 불가능합니다. 인간을 불신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녀석의 마음의 문을 열어줄 열쇠는 의외의 곳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엔젤이라는 이 개와 비슷한 처지의 유기견을 발견하여 데려온 것입니다. 이 녀석도 돌봄을 받지 못해 굉장히 야윈 상태였지만 비교적 씩씩하고 그래도 인간을 믿고 따르는 마음을 가졌습니다.
엔젤이 이 녀석을 보자 구석에서 나와 녀석을 반기기 시작하였습니다. 꼬리를 신나게 흔들며 녀석과 함께 뛰놀았습니다. 구조단체는 이 녀석이 엔젤과 피부색, 나이가 비슷하다는 점, 그리고 둘의 사이를 보곤 엔젤의 형제견이라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사람을 따르는 데 거리낌이 없었던 클리프는 엔젤에게 ‘사람은 믿을 수 있는 존재들’이란 마음을 알려주었습니다. 엔젤은 조금씩 클리프에게서 이 마음을 받아들였고 사람들에게 마음의 문을 열기 시작하였습니다. 사람들에게 자신을 맡기기 시작한 것입니다. 사람들을 바라보고 사람들이 주는 음식을 먹기 시작하였습니다. 6개월쯤 지나서 엔젤은 이제 완전히 자기 껍데기에서 벗어나 클리프의 마음을 품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목소리를 되찾고 맛있는 음식도 즐기게 되었습니다. 건강한 몸을 되찾았고 곱디고운 빛깔의 털을 맘껏 뽐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일을 하시기 위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두려워하고 하느님을 원망하며 자신의 마음을 믿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파라오의 종살이였습니다. 힘들고 지치면서도 이것이 행복이라 여겼습니다. 하느님께 마음의 문을 여는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배신이라 생각했습니다. 우리 마음을 바꿔줄 그리스도께서 오시지 않으셨다면 지옥도 행복이라 여길 수 있는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오셔서 십자가에 달리면서도 하느님은 좋으신 분이란 마음을 넣어주셨습니다. 그 마음을 받아들인 이들은 이제 하느님께 마음의 문을 엽니다. 그리고 그분은 좋으신 분이란 믿음을 가지게 됩니다. 믿음은 마음의 영역입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지니고 있습니다.”(1코린 2,16)
그 마음은 성체를 통해 우리 안에 들어오십니다. 제가 성체를 영할 때 “그래, 너 나에게 많이 주었니? 난 네게 다 주었다”라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이 ‘다’가 그분의 ‘마음’임을 압니다. 그분의 마음을 받으면 이제 무거운 짐이 사라집니다. 휴식이 시작됩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산다는 것은 어떤 것을 의미할까요? 그리스도의 마음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야곱은 에사우의 옷을 입었습니다. 에사우라고 믿고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멍에’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멍에가 되십니다. 내가 그리스도라 믿으면 그분의 마음이 나에게 장착됩니다. 엔젤이 자신도 클리프처럼 될 수 있다고 믿지 않았다면 어땠을까요? 결코 클리프의 마음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러면 영원히 안식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갈망합시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갈망하면 그리스도처럼 살게 되고 그러면 자신도 모르게 그리스도가 됩니다. 오즈의 마법사에서 나무꾼이 그러했습니다. 나무꾼은 따듯한 심장을 가지고 싶어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조금씩 그렇게 행동하게 되었고 나중에 그의 마음 안에 이미 따듯한 심장이 생겨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니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갈망합시다.’ 그러면 내 안에 그분의 심장이 생성됩니다. 그러면 안식을 누리게 됩니다.
저는 어렸을 때부터 마음이 참 차갑다고 느꼈습니다. 그래서 따듯한 심장을 원했습니다. 그랬더니 조금씩 마음이 따듯해짐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그 마음이 그리스도의 마음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저도 마치 엔젤처럼 예수님과 사귀고 싶었습니다. 예수님을 더 사랑하고 싶었습니다. 그랬더니 예수님을 더 알고 싶어졌습니다. 그렇게 읽은 책이 하.사.시.입니다. 이 책을 읽으며 예수님을 더 사랑하게 되었고 그러다 보니 예수님 마음을 닮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확신합니다. 그분의 마음을 장착할 때 나의 마음은 사라지고 그렇게 덜 피곤하게 되고 비로소 휴식이 찾아온다는 것을. 그래서 제 사제서품 구가 오늘 복음입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마태 11,29)
나의 마음이 나를 쉬지 못하게 만들고 피곤하게 하는 유일한 원인임을 깨달읍시다. 그리고 예수님을 사랑합시다. 그러면 그분께서 당신 심장을 주시고 우리는 뱀과 파라오, 사탄의 괴롭힘에서 벗어나 참된 휴식을 누리게 됩니다. 예수님을 이 일을 하러 세상에 오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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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고 물으신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도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라고도 물으셨습니다. 갈릴래아에 혜성같이 등장하신 예수님에 대해서 사람들은 놀랐습니다. ‘하느님나라’라는 기쁜 소식을 선포하셨고, 그분의 말씀에는 새로운 권위가 있었습니다. 많은 표징을 보여주셨습니다. 아픈 사람을 치유시켜 주셨고, 마귀를 쫓아내셨고,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셨고, 풍랑을 잠재우셨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예언자라고 생각했습니다. 죽었던 세례자 요한이 살아났다고 생각했습니다. 엘리야가 다시 돌아왔다고 생각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스승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입니다.’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궁금했던 것만큼 예수님께서도 사람들이 예수님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하셨던 것 같습니다. 사람들에 따라서 예수님에 대한 생각도 달랐습니다. 기존의 권위를 지키려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체제를 전복하려는 위험한 사람으로 보였습니다. 감추고 싶은 것이 많은 사람에게 예수님은 하느님의 심판자와 같았습니다. 그러나 가난하고, 외롭고, 병들고, 아팠던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임마누엘’이었습니다. 저도 가끔은 사람들이 저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할 때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저를 ‘예스 맨’이라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제가 ‘좋아요’라고 말을 한다고 합니다.
대림 시기를 지내면서 이사야 예언자의 이야기를 듣고 있습니다. 예레미야 예언자는 하느님의 부르심에 ‘저는 아이라서 말을 못 합니다.’라고 응답했지만, 이사야 예언자는 하느님의 부르심에 ‘제가 있습니다. 저를 보내 주십시오.’라고 응답했습니다. 예언자는 앞일을 미리 보는 사람이 아닙니다. 예언자는 시대의 사명과 표징을 하느님의 백성을 위해서 선포하는 사람입니다. 유배지의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서 희망을 이야기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자비하심과 권능을 이야기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사야 예언자로부터 위로를 얻었고, 용기를 얻었고, 희망을 보았습니다. 오늘 제1 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젊은이들도 피곤하여 지치고 청년들도 비틀거리기 마련이지만, 주님께 바라는 이들은 새 힘을 얻고 독수리처럼 날개 치며 올라간다. 그들은 뛰어도 지칠 줄 모르고 걸어도 피곤한 줄 모른다.” 제게도 큰 위로와 용기를 주는 말씀입니다. 장거리 운전할 때도 있습니다. 비행기를 타야 할 때도 있습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를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새 힘을 주시리라 믿습니다. 지금 힘들고, 어려운 길을 가는 분들이 있을 겁니다. 적막감과 외로움에 주체할 수 없을 만큼 괴로운 분들이 있을 겁니다. 그런 분들이 계신다면 오늘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에 용기를 얻으시면 좋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닌 사람’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이 세상에 왔지만, 그 목적과 의미를 모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보물처럼 여기지만 영원한 생명을 얻기에는 아무 소용이 없는 것들을 지고 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끊임없이 욕망이라는 바벨탑을 오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이웃에게 상처를 주는 사람이 있습니다. 권력이라는 불기둥, 재물이라는 불기둥, 명예라는 불기둥에 뛰어들려는 사람이 있습니다. 교만함 때문에 사랑받지 못하고, 열등감 때문에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모두 주님께로 오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안식을 얻으리라 말씀하십니다. 행복은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해야 할 일을 좋아하는 것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언젠가 적어 놓은 글인데, 누구의 이야기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읽으면 읽을수록 마음에 와닿습니다. 신문을 만드는 일, 홍보를 위해서 본당을 찾아가는 일, 강의를 준비하는 것들은 제가 해야 할 일들입니다. 이런 일들을 좋아할 수 있다면 저는 무척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 겁니다. 우리가 의무감으로 하는 일들,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일들을 좋아한다면 우리는 행복한 인생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삶의 기준을 ‘하느님의 영광’으로 생각한다면 모든 것이 은총이요, 모든 것이 축복입니다. 십자가도, 부활의 영광도 다 축복입니다. 십자가 없는 부활, 죽음을 넘어서지 않는 부활은 없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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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11,28-30: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28절) 주님께서는 율법의 멍에를 멜 힘조차 없는 지친 사람들에게 말씀하신 것이다. 악마에게 시달리며 무거운 짐을 지고 무수한 죄에 억눌린 우상 숭배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29절) 우리는 그분에게서 기적을 일으키거나 죽은 이를 되살리는 법을 배울 것이 아니라,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29절)한 것을 배우라고 하신다.
건물을 세우려면 터부터 닦고, 건물이 높으면 높을수록 터를 더 깊게 파야 한다. 건물을 세우려면 먼저 기초를 닦기 위해 아래로 내려가야 한다. 그분의 겸손을 배울 때, 멍에는 편하고 짐은 가벼워진다. 왜 주님께서는 그 길을 좁은 길이라고 하셨을까? 게으른 사람들에게는 좁은 길이다. 그러나 잘 배운 이들에게는 그 계명이 가볍다. 설사 잠깐 육체적 고통이 따른다 해도, 지금 희망 안에 양육되고 있는 사람은 그 고통을 쉽게 견디어 내는 신심이 깊은 사람이다. 그러면 왜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이 어렵게 보이는 것을 요구하시는가? 이것이 어렵게 보이는 것은 그 멍에를 메고 그분의 말씀을 믿는다면 얼마나 편하고 가벼운 짐인지를 체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분의 짐은 관습과 규정이 아니라, 영혼의 결심이기 때문이다.
생명을 원하고 좋은 날들을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부정과 악의의 멍에를 벗어버려야 한다. 모든 악덕의 멍에를 벗어버리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편하고 가벼운 멍에를 멜 수 없다. 그리스도의 멍에를 힘들다고 여기는 것은 세상에 물든 마음으로 하늘의 것을 사랑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마음은 아직 그리스도께로 오지 않았기 때문에 그분의 멍에를 메고 그분의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배울 수가 없다.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29절) 세상 주인들의 짐은 힘을 점점 더 빠지게 하지만, 그리스도의 짐은 그 짐을 진 이들을 오히려 도와준다. 우리가 은총을 지고 가는 것이 아니라, 은총이 우리를 지고 가며, 우리가 은총을 돕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도우라고 은총이 우리에게 주어졌다. 주님께 감사하며 살아가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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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수원교구 정진만 안젤로 신부님]
마태오 복음 11~12장은 메시아 예수님에 대한 부정적 반응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지만, 각 장의 마무리(11,25-30; 12,46-50 참조)는 긍정적 분위기가 만들어지면서 13장 1-8절에서 소개되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준비합니다. 오늘 복음은 11장의 마지막 부분으로, 앞선 25-27절과 밀접한 관계를 이루고 있습니다. 11장 25-30절은 같은 문학적 형식을 가진 문장으로 구성되어 있지는 않지만, 같은 주제(하늘 나라의 역설적 가치, 예수님을 통하여 하느님 백성이 되는 특권)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시선은 잠재적 제자들, 곧 아직 예수님을 따르지 않는 이들을 향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초대하십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그들이 짊어지고 있는 ‘무거운 짐’은 사람들의 행위를 지나치게 규제하려는 율법 학자들의 요구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23,4 참조) 예수님께서는 무거운 짐을 지고 고생하는 이들을 초대하시며 그들에게 ‘안식’을 약속하십니다. 그러나 그들이 안식을 누리려면 먼저 갖추어야 할 조건이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멍에’를 메고 예수님께 배워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음이 온유하시고 겸손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5,5; 21,5 참조) 율법 학자들이 토라(율법)의 멍에로 사람들을 얽매고 구속하였다면, 예수님의 멍에는 관계를 새롭게 만들고, 그 관계는 배움으로 깊어집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안식을 찾을 수 있습니다.
오늘 온유하시고 겸손하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예수님의 초대는 모두에게 열려 있지만, 그 초대에 모든 사람이 응답하는 것은 아닙니다. 만일 예수님의 초대에 응답하지 못하고 있다면, 무엇이 선택과 결정을 주저하게 하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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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최용진 레미지오 신부님]
<눈송이의 무게>
예수께서 사셨던 당시 이스라엘에는 십계명에서 파생되어 나온 613가지의 율법이 있었는데 이 많은 율법은 개인적 양심의 역할은 전혀 고려되지 않은 채 무조건 지켜야 했습니다.
게다가 율법학자들의 권위에 대한 복종까지 요구되었으니 보통 사람들의 어려움은 그야말로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모양이었습니다.
이러한 율법으로부터의 안식을 위하여 예수께서 편한 멍에와 가벼운 짐을 제시하셨으니 다름 아닌 사랑입니다. 이제 우리는 사랑의 법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다른 사람을 만날 때 특히 다른 사람의 실수를 보았을 때 그 사람을 사랑으로 바라보며 살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세상의 짐은 무겁고 예수님의 짐은 가볍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그렇게 느끼십니까? 혹시 세상의 무게에다가 예수님의 짐까지 지고 있다고 생각되십니까, 아니면 예수님의 짐이 무겁게 느껴지십니까?
어느 날 아주 작은 박새가 비둘기에게 물었습니다. “눈송이의 무게를 알고 있니?” 비둘기가 대답했습니다. “눈송이의 무게라고? 눈송이에 무슨 무게가 있겠어. 허공처럼 전혀 무게가 없겠지.”
“그렇다면 내 이야기를 들어봐.” 박새가 말했습니다. “눈 내리는 전나무 가지에 앉아 있었어. 할 일도 없고 해서 눈송이 숫자를 세기 시작했지. 가지 위에 쌓이는 눈송이 숫자를 말이야. 눈송이는 정확히 374만 1,952개였어. 그런데 말이야….” 박새의 잔잔한 목소리가 이어졌습니다.
“그다음 374만 1,953번째 눈송이가 가지에 내려앉으니까 가지가 그만 뚝 부러져 버렸어. 무게가 없는 눈송이 하나가 내려앉았는데 말이야!” 박새의 이야기를 듣고 한참 생각에 잠긴 비둘기가 나지막이 말했습니다.
“그래, 맞아. 단 한 사람의 목소리가 부족한지도 몰라. 세상이 변화하는 데는.”
눈송이 하나가 무슨 무게가 있겠는가마는 어느 순간 떨어진 눈송이 하나에 가지가 부러진 것은 아닐까요. 그 한 송이가 내려오기 전까지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마 상상도 못 했겠지요.
세상의 변화도 우리의 따뜻한 말 한마디가 있어야 하는지 모릅니다. 우리의 말에 무슨 힘이 있겠는가마는 눈송이 하나에도 가지가 부러지듯이 말입니다.
이제 우리의 짐도 변함없이 무겁다고 느끼겠지만 단 한 번의 기도를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 짐이 가벼워진다면 그건 그 짐이 바뀌어서가 아니라 바로 주님이 함께 져주시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이렇게 나 혼자가 아닌 누군가와 짐을 함께 지고 가는 길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함께 지고 가신다면 우리의 인생길은 가볍게 갈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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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박상대 마르코 신부님]
<사랑의 멍에>
매일미사의 준비를 돕기 위해 신자들이 손쉽게 쓰는 소책자 <매일미사>의 오늘 미사에 봉독되는 복음을 보면, 그 첫 부분이 "그때에 예수께서 말씀하셨다"는 덧붙인 말로 연결되어 있다.
이는 복음의 본문으로 들어가는 전주(前奏), 또는 인트로(intro)의 역할을 맡아 연결을 매끄럽게 하려고 덧붙여진 말이다.
그런데 이 덧붙인 말이 오늘 복음의 진가를 다소 흐리게 만들고 있다. 그 이유는 오늘 복음이 가르침 형식의 단순한 "말씀"이기보다 앞서간 "찬양기도"(마태 11,25-27)에 직접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늘 복음은 하늘과 땅의 주인이신 아버지께서 안다는 사람들과 똑똑하다는 사람들에게 하늘나라의 신비를 감추시고 오히려 철부지 어린아이들에게 나타내 보이신 것에 대하여 감사드리며 이를 찬양하는(25절) 예수님의 기도 안으로 이해될 수 있다.
즉 앞의 부분(25-27절)은 하느님께 드리는 감사와 찬양의 기도이고, 오늘 복음(28-30절)은 인간을 향한 초대의 기도인 셈이다.
예수께서는 "다 나에게로 오너라" 하시며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사람"들을 초대하신다. 그리고는 "내가 편히 쉬게 하리라"고 약속하신다.
예수께서는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라고 초대하시면서 "너희의 영혼이 안식을 얻을 것이다"라고 약속하신다.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다는 말씀이 초대의 이유이고, 초대받은 자에게 약속한 내용이다.
"멍에"란 아무리 생각해도 편하지 않고 무거운 짐이다. 멍에는 원래 달구지나 쟁기의 채를 잡아매기 위하여 소나 말의 목에 가로 얹는 막대로서 그 자체의 무게만 해도 만만치 않다.
그것을 사람의 목에 맨다면 그 무게 때문에 누구도 몸을 굽히지 않을 수 없다.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멍에는 어떤 처지나 형편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하도록 얽어매거나 억누르는 것을 비유한 것으로서 "율법"을 의미한다.
바리사이파와 율법학자들이 제시하는 율법의 멍에는 사람을 옭아매고 무겁게 짓누르고 자유를 속박하지만, 예수께서 주시는 율법의 멍에는 편하고 가벼우며 자유와 영원한 안식을 준다는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의 멍에도 결코 가볍게 여길 것이 아니다. 우리가 산상설교(마태 5-7장)에서 배웠듯이 예수께서 주시는 율법은 유대교 율법 이상의 정심과 정의를 요구한다.
그래서 예수께서 주시는 멍에는 율법이 아니라 사랑이다. 바로 사랑의 멍에라는 것이다. 이 멍에가 가볍고 편한 이유는 예수께서 스스로 지고 가시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먼저 이 멍에를 매고 자신을 굽히셔서 우리 죄인의 반열에 서셨고, 우리 죄인을 위하여 기꺼이 죽음에까지 지고 가셨기 때문이다.
나 또한 예수님의 뒤를 따라 사랑의 멍에를 기꺼이 지고 갈 때, 이웃에게도 이 멍에를 함께 지자고 권유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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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손현기 모세 신부님]
<세상을 쉽게 살아가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생각한다.>
세상을 쉽게 살아가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의 어려움과 근심, 걱정을 하고 있다.
자기 자신이 제일 어렵고 자기 혼자만 힘든 것 같지만 사실은 모두가 나름대로 살기 위해서 하루하루를 힘들게 살아가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그러한 현실에서 벗어나려고 한다. 그때뿐이지만 삶의 걱정을 잊어보려고 술을 많이 마시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각박한 현실에서 도피하려고 괴상한 종교에 심취하기도 하기도 하고 심지어 어떤 사람은 삶의 현실에서 벗어나려고 스스로의 생명을 끊어버리는 행동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변하는 것은 없고 어려운 현실은 그대로이고 오히려 더 큰 실망과 좌절을 겪게 될 뿐이다. 잘못된 길로 계속 가게 되면 더 큰 수렁에 빠지게 된다.
사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신앙인도 마찬가지로 삶의 어려움을 안고 살아간다. 하지만 신앙인이 가는 길은 힘들고 어렵지만 가야 하는 그 길로 가야 한다. 현실을 피하지 않고 오히려 삶의 현실을 기쁘게 받아들이고 마지못해 사는 것이 아니고 적극적으로 삶을 가꾸어 나가야 한다.
또 신앙인은 허상을 쫓아 살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열심히 살아야 한다. 좌절과 실패도 겪게 되지만 그런 것까지도 이겨내고 매일 매일을 힘차게 살아야 하겠다.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그 길을 따라가야 한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의 영혼이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우리에게 위로가 되고 힘이 되는 말씀이다. 신앙인이 바른 길을 가기 위해서는 예수님께 배워야 한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사랑의 멍에’를 메는 것을 배워야 한다. 사랑의 멍에를 지지 않고서는 우리의 삶의 어려움과 근심, 걱정을 내려놓을 수 없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는 모습을 통해서, 당신의 온 삶을 통해서 삶을 무게를 덜고 좀더 가볍고 기쁘게 그리고 적극적으로 사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다.
지금 내가 겪고 있는 삶의 어려움, 근심 걱정을 내려놓고 예수님이 지워주시는 사랑의 멍에를 지고 살면 나도 모르게 훨씬 편안해지고 행복해지는 것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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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사람>
마태오 11,28-30 (내 멍에를 메어라)
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사람>
나의 짐을
내려놓고
당신의 짐을
집니다
나의 멍에를
풀어버리고
당신의 멍에를
멥니다
나의 사람을
놓아주고
당신의 사람을
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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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편한 멍에와 가벼운 짐>
몸은 고달프고 힘이 들지만, 본연의 일을 하고 있으면 기쁩니다. 그러나 자기가 하는 일이 억지로, 마지못해 하는 일이 되면 무거운 짐이요, 멍에가 될 것입니다. 마땅히 해야 할 일, 꼭 해야 할 일을 즐기면서 기쁘게 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마태11,28). 고 하셨습니다. 당시에는 사람들이 무거운 짐과 멍에를 메고 괴로워했습니다. 무엇보다 억눌리고 고된, 가난의 생활이 짐이 되고 힘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율법의 수많은 규정을 지켜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누구나 지키기만 하면 살 수 있는 구원과 생명을 위해 주어졌던 율법(에제키엘 20,13). 을 율법학자들은 수백 가지의 특수한 규정을 만들어 견딜 수 없는 짐이 되게 하였습니다. 법을 만든 그들도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사람을 위한 율법이 아니라 율법을 위해 사람이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율법은 죄를 지은 사람에게 벌을 주는 도구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서 배워라”(마태11,28). 하시며 산상 설교를 통해 참된 행복과 율법(마태5장-7장)을 철저하게 가르치셨습니다. 율법학자들은 법에 사람을 맞추었지만, 예수님께서는 사람을 위한 법을 확인하셨습니다. 율법은 죄의 심판인 벌을 강조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벌이 아니라 죄의 용서를 통해 멍에를 거두어주고 짐을 내려주셨습니다. 율법을 폐기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랑으로 완성하러 오셨습니다. 이제 “하느님의 계명은 무거운 짐이 아닙니다”(1요한5,3).
우리 삶의 여정에는 각자가 지고 가야 할 삶의 무게가 있습니다. 주님과 함께한다고 해서 그 짐이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주 하느님께서는 홍해를 없애주시는 기적을 베푸신 것이 아니라 홍해를 갈라 길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는 어렵고 고달픈 삶의 무게를 아버지 하느님의 사랑으로, 연민의 눈길로 보아주시고 함께 걸어가 주십니다. 어렵고 힘들 때 누군가 함께 해 주면 위로가 되고 희망이 살아나듯 예수님의 온유함과 겸손한 마음에서 나온 그분의 말씀과 눈길은 매섭고 날카로운 바리사이, 율법학자를 넘어 큰 힘이 됩니다. 사실 부드러운 것이 강한 것을 이깁니다. 냉철하고 날카로우며 차가운 율법학자는 부드럽고 온유하고 겸손한 예수님을 이길 수 없습니다. 주님의 멍에는 편하고 짐이 가벼운 이유입니다.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고달픔에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나의 삶을 봉헌하고 끊임없이 사랑을 실천하면 내적인 평화와 기쁨, 행복을 맛보게 됩니다. 사실 “사랑한다는 것은 율법을 완성하는 것입니다”(로마13,10). 주님의 계명을 준수하고 계명의 의미를 살려고 최선을 다하면 반드시 예수님의 멍에는 위로의 원천이 되고 인간적인 욕심을 포기하는 힘이 될 것입니다. 세속의 멍에를 벗고 예수님의 멍에를 선택해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가르침은 완전하여 생기를 돋게 하고 주님의 법은 참되어 어수룩한 이를 슬기롭게 하네. 주님의 규정은 올발라서 마음을 기쁘게 하고 주님의 계명은 맑아서 눈에 빛을 주네’(시편19,8-9). 고달픈 삶의 여정 안에서도 주님의 멍에를, 그리고 주님께서 주신 짐을 기꺼이 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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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고등학생 때, 한 여학생을 짝사랑했던 적이 있습니다. 하얀 피부, 언제나 밝게 웃는 모습, 그리고 말도 얼마나 예쁘게 하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사귀고 싶다’라는 생각이 간절했습니다. 하지만 연애 경험이 전혀 없는 저에게, 또 남 앞에서 제대로 말하지 못하는 저에게, 무엇보다 신부가 되겠다고 예비신학생 모임에 나가고 있는 저에게, 그 여학생에게 다가갈 용기는 전혀 없었습니다.
문득 그때 그 여학생에게 고백하고 정말로 사귀게 되었다면 어떠했을까를 생각해봅니다. 지금보다 더 행복할까요? 신부가 아닌 신랑의 삶에 더 만족스러워하고 있을까요?
확실한 사실은 모든 것이 불확실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불확실함을 받아들이고 지속적인 변화를 스스로 만들어야 자기 삶을 행복으로 이끌 수 있다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사람은 어떤 동물보다도 적응력이 뛰어납니다. 그래서 불확실한 세상에서도 편안하게 즐기며 살 수도 있는 것입니다.
불확실한 현실을 고통과 시련으로 받아들여서 좌절하고 절망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서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는 하느님 나라를 희망하며, 불확실한 현실을 힘차게 사는 것이 바로 주님의 뜻에 맞게 사는 것입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마태 11,28)라고 말씀하십니다. 불확실한 현실 속에서 바로 주님만을 바라보며 주님께 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도 스스로 멍에를 메셨습니다. 멍에는 소나 나귀 등의 목에 얹어 쟁기나 수레를 끄는 목제 도구입니다. 또 전쟁 포로나 노예의 목에 씌우는 굴종의 도구를 뜻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가장 낮은 자의 모습을 스스로 선택해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과 함께하면 안식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멍에를 편하게 해 주셨고, 짐을 가볍게 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고통과 시련이 가득한 것으로 보이는 불확실한 현실에서 용기를 내어 다시 희망을 간직해야 할 때입니다. 이를 위해 반드시 주님께 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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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힘들 때 내가 찾는 곳은 어디?>
열심한 신자들이 고백성사를 볼 때 많이 하는 고백이 다른 기도는 잘하는 편인데 저녁 기도는 피곤해서 자주 빼먹는다는 겁니다. 그러면 저는 이렇게 권하는 것이 잘못된 것인지 모르지만 피곤해서 빼먹을 바에는 누워서라도 기도하라고 합니다. 막말로 기도 안 하는 것보다 누워서라도 하는 것이 낫지 않습니까?
사실 기도라는 것이 정해진 기도문을 꼭 무릎 꿇고 해야만 되는 게 아니라 하느님 앞에 머물거나 하느님 안에 머물면 되는 것이고, 더욱이 피곤할 때는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는 오늘 주님 말씀처럼 주님께로 나아가 주님 안에 머무는 것이 기도이고 피곤을 푸는 것이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기도란 형식이 아니라 마음이고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 머묾이라는 뜻이지요. 진정 마음이 주님께로 향하여 나아가고 주님 안에 머물며 사랑에 흠뻑 젖는 겁니다.
고백성사 얘기를 또 하면 너무 힘들어서 점쟁이한테 갔다는 얘기를 적잖이 듣는데 그때 마음이 참 아프고, 특히 저와 모르는 사이가 아닌 분들이 점쟁이한테 갔다는 얘기를 들으면 마음이 아픈 것을 넘어서 제가 참 죄송스럽기까지 합니다.
힘들면 하느님께 가야 하는데 점쟁이한테 간 것이 마음 아프고, 하느님 모습이 보이지 않고 하느님 말씀이 귀에 들리지 않아서 점쟁이한테 가는 거라면 제게라도 오면 될 텐데 저라는 존재가 오고 싶지 않거나 곁을 주지 않거나 바쁜 척하거나 아무튼 그렇게 해서 오시지들 않는 것 같아 죄송스러운 겁니다.
그래서 저는 꼭 말씀드립니다. 점쟁이한테 가지 말고 저에게 오시고, 이러저러한 이유로 직접 오시기 어려우면 전화라도 하시라고.
물론 정작 가야 할 곳은 제가 아니라 하느님이고 그래서 저는 오늘 말씀을 상기시키며 하느님께 달려가라고 말씀드리지요.
사실 우리가 진정 올바른 신앙인이라면 지치고 힘들 때 제일 먼저 떠오르는 분이 바로 하느님이어야 할 겁니다. 그래서 힘들 때 엄마도 생각나고 사랑하는 사람도 생각나지만 "오너라"는 주님의 초대가 제일 먼저 생각나 달려가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님께 가서 무엇을 해야 합니까?
제 생각에 주님께 가서 뭘 꼭 해야 하는 것 아니지만 그래도 굳이 뭘 한다면 그것이 바로 기도이고, 기도하는 것도 뭘 청원하든지 찬미 찬양하고 감사드리기도 하지만 앞서 말씀드린 대로 주님 안에 머물며 주님 사랑에 흠뻑 젖는 것이요, 그럼으로써 지친 우리가 거기서 힘을 얻는 것 그것이 기도입니다.
다음으로 우리가 힘들 때 주님께 가서 해야 할 것은 배우는 것입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당신에게 와서 "배워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께 가서 힘을 얻을 뿐 아니라 짐을 가볍게 지는 법을 배워야 하는데 그것이 뭐냐 하면 주님의 멍에를 메는 것입니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라고 주님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정녕 주님의 멍에로 짐을 지면 가볍습니까? 멍에란 것이 본시 불편한 건데 주님의 멍에는 어떤 멍에이길래 편합니까?
주님의 멍에는 온유와 겸손한 마음이기에 편하다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왜 나에게 이런 짐이?'라고 거역하는 마음이 우리의 짐을 더 무겁게 하고 힘들게 하는 그 반대의 이치로 우리가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면 우리의 십자가가 덜 무거울 겁니다.
물론 오늘은 그 말씀을 하지 않으셨지만 사랑이라는 멍에로 지면 덜 무거운 정도가 아니라 가볍고 더 나아가 뿌듯하겠지요. 그렇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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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느님은 누구인가?>
- 언제나 우리를 먼져 초대 하시는 분 -
제가 감명깊게 읽은 책이 시오노 나나미가 쓴 15권의 “로마인 이야기”입니다. 그중 14권의 표지가 특이합니다. 13권 까지는 황제가 표지 사진에 나왔는데 14권의 표지는 제목부터 별납니다. “그리스도의 승리”라는 제목과 더불어 황제가 아닌 오늘 기념미사를 봉헌하는 성 암브로시오의 초상화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성 암브로시오를 통해 보편적인 교회의 권위가 황제의 권위보다 더 빛나게 더 빛나게 되었다는 사실의 상징적인 표현입니다.
오늘은 성 암브로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입니다. 암브로시오의 이름 뜻은 그리스어로 ‘불멸不滅’이란 뜻인데 이름 뜻대로 불멸의 성인이 되었습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현대의 인물로 지금 현존하는 성인처럼 느껴집니다. 성인은 주교 서품 과정도 참 특이합니다. 자비하신 하느님의 섭리로 보아야 합니다.
많은 회중이 모여 주교 선출을 의논하고 있을 때 한 소년이 “주교는 암브로시오!”라고 외쳤고 민심은 천심이라 시민들의 절대적인 지지로 주교로 선출되었습니다. 당시 암브로시오는 신자가 아니었기에 일주일후 세례를 받고 주교품에 오릅니다. 성인의 업적은 타의 추종을 불허합니다. 주교직의 수행중에도 그의 신학적 업적은 탁월하기에 그는 아우구스티노, 예로니모, 성 대 그레고리오와 더불어 서방의 4대 교부로 불립니다.
참으로 영성적인 인물로 교회에 끼친 영향도 지대했고 강론은 유명했으며 많은 영적 잠언들은 지금도 여전히 만날 수 있습니다. 특히 아우구스티노를 결정적으로 회심시킨 인물로 그에게 세례를 주었습니다. 아우구스티노의 ‘고백록’ 중 암브로시오에 대한 감동적인 실화를 소개합니다. 언제 읽어도 새롭고 큰 깨우침을 주는 일화입니다.
“그는 사람들과 함께 있지 않을 때는, 아주 짧은 시간뿐 이었지만, 꼭 필요한 요기로 몸을 돌보거나 독서로 정신을 가다듬었습니다. 그가 책을 읽을 때에도 눈은 책갈피를 더듬어 나가고 마음은 터득한 바를 뒤씹고 있었지만 목소리와 혀는 쉬고 있었습니다.
가끔 저희가 그를 찾아가도 갔는데 누구든지 들어가지 못하게 금하는 법도 없었고, 또 누가 찾아왔다고 자기에게 알리게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가 소리없이 책을 묵독하고 있음을 보았고, 그럴 때면 저희도 하릴없이 소리 내지 않고 한참동안 말없이 그냥 앉아있다가 가만히 자리를 뜨곤 하였습니다.
그처럼 정신을 집중하고 있는 사람에게 누가 번거로움을 끼칠 엄두가 나겠습니까? 제 고민을 그에게 털어놓기로 하자면 그가 한가해야 했는데 그가 그런 여유가 있는 경우는 좀처럼 눈에 띄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저 백성 가운데서 진리의 말씀을 올바르게 전하는 그의 말씀을 주일마다 들을 뿐이었습니다.”
성 아우구스티노의 이 생생한 증언을 통해 성 암브로시오의 참모습을 보게 됩니다. 성 암브로시오의 죽음을 앞뒀을 때의 감동적 임종어입니다. 그가 얼마나 죽음을 갈망하여 주님께 가고 싶어 했는지 깨닫습니다.
“내가 이 세상을 떠날 날이 어찌 이리 많이 남았단 말인가! 오 주여! 어서 빨리 오소서! 저를 거절하지 마옵소서!”
참 좋은 하느님이십니다. 성인은 모두가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성인뿐 아니라 우리가 모두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이런 주님께서 우리를 친히 찾아오시는 대림시기입니다. “하느님을 찾는 사람”만 있는 게 아니라, “사람을 찾는 하느님”도 있습니다. 25년 전 써놓은 짧은 자작시도 이런 진리를 함축합니다.
“나무에게 하늘은 가도가도 멀기만 하다
아예 고요한 호수가 되어 하늘을 담자”
활동의 나무가 아닌 관상의 호수가 되어 오시는, 함께 계신 주님을 모시자는 것입니다. 주님은 늘 우리를 찾아오시고 초대하시어 우리를 만나주시고 한없는 은총을 내려 주시니. 바로 이 대림시기가, 이 미사시간이 바로 그러합니다.
오늘 제1독서 이사야서는 바빌론 유배중 절망에 빠진 이스라엘 유배자들에 대한 하느님의 초대입니다. 이들의 신앙을 환기시켜 새롭게 하는 말씀으로 하느님의 위대하심을 체험하고 이런 희망의 하느님을 만나라는 초대입니다.
“이스라엘아, 네가 어찌 이렇게 말하느냐? 나의 길은 주님께 숨겨져 있고, 나의 권리는 나의 하느님께서 못 보신 채 없어져 버린다.”
이렇게 바빌론 유배 중 실의와 절망에 빠져있는 이스라인들에게 분발을 촉구하는 주님의 자기 계시가 우리에겐 신선한 충격입니다.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 장엄하게 고백됩니다.
“주님은 영원하신 하느님, 땅끝까지 창조하신 분이시다. 그분께서는 피곤한 줄도 모르시고, 그분의 슬기는 헤아릴 길이 없다. 그분께서는 피곤한 이에게 힘을 주시고, 기운이 없는 이에게 기력을 북돋아 주신다. 젊은이들도 피곤하여 지치고, 청년들도 비틀거리기 마련이지만, 주님께 바라는 이들은 새 힘을 얻고, 독수리처럼 날개 치며 올라간다. 그들은 뛰어도 지칠 줄 모르고, 걸어도 피곤한 줄 모른다.”
바로 오늘 복음의 예수님과 무수한 성인들, 현재의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이런 하느님을 만난 분들입니다. 87세 고령의 프란치스코 교황님에게 피곤한 기색은 결코 찾을 수 없고 늘 미소띤 모습입니다.
제1독서에 오늘 복음도 주님의 초대가 선행됩니다. 우리가 할 일은 다만 주님의 초대에 응답하는 일뿐입니다. 당시의 이스라엘은 물론 오늘날 고단하고 외롭게 살아가는 모든 이에게 활짝 열려 있는 주님의 초대입니다. 바로 이런 주님의 초대를 상징하는 미사전례입니다. 예수님이야말로 우리의 유일한 영혼의 쉼터이자 샘터요 배움터입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세상에 이런 초대가 필요하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누구나 영혼 깊이에서는 이런 주님을 찾습니다. 흡사 제1독서의 하느님을 연상케 합니다. 고해 인생이란 말처럼 삶은 끊임없는 전쟁이자 무거운 짐입니다. 주님을 만날 때 전쟁은 평화로 짐은 선물로 변합니다.
그러나 결코 값싼 안식은 없습니다. 주님께 온유와 겸손을 배워야 합니다. 평생 주님께 배우고 훈련해야 할 온유와 겸손의 수행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만나 날로 주님과 일치가 깊어질수록 온유와 겸손에 영혼의 안식입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우리의 세례가, 우리가 몸담은 교회가 바로 주님의 멍에를 상징합니다. 그러니 이제 주님께 주님의 배움터 인생에서, 교회에서 부단히 온유와 겸손을 배워도 훈련하는 것입니다. 이때 진정한 안식이요 우리의 불편한 멍에는 주님의 편한 멍에로, 우리의 무거운 짐은 주님의 가벼운 짐으로 변합니다.
인생 짐을 인생 선물로 전환하는 방법은 이길 뿐입니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당신의 샘터이자 쉼터이자 배움터인 이 미사전례에 초대해 응답한 우리 모두에게 온유와 겸손, 치유를 선물하십니다. 지상에서 최고의 힐링센타가 가톨릭교회의 미사전례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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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마태11,28)
<예수님의 멍에!>
오늘 복음(마태11,28-30)은 '내 멍에를 메어라'는 말씀입니다. 주님이신 예수님께서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짊어진 이들', 곧 '죄의 짐'과 '일상에서 지게 되는 삶의 무게와 염려와 걱정과 갈등의 무거운 짐' 때문에 고생하는 이들을 부르십니다. 그들에게 '안식'을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안식을 얻기 위한 대전제'로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신 예수님의 멍에를 메라.'고 하십니다.
'멍에'는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소가 짐을 실어 나르는 마차(달구지)나 쟁기를 끌때, '소 목 위에 얻는 둥근 나무 막대'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멍에는 무엇이고, 예수님의 멍에를 멘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예수님의 멍에'는 짊어진 무거운 짐 때문에 지쳐있는 우리를 자유와 해방으로 이끄는 '예수님의 말씀', 곧 '예수님 자체'입니다. '예수님의 삶과 죽음 자체'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멍에를 멘다는 것'은 '예수님 부르심의 응답'이요, '예수님 안에 머뭄'이고, '예수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독서(이사40,25-31)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우리에게 오시는 주님(메시아)을 두고 이렇게 찬미합니다.
"그분께서는 피곤할 줄도 지칠 줄도 모르시고, 그분의 슬기는 헤아릴 길이 없다. 그분께서는 피곤한 이에게 힘을 주시고, 기운이 없는 이에게 기력을 북돋아 주신다."(40,28-29)
나에게 힘을 주시러 오시는 분, 나를 살리시러 오시는 주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리면서, 오늘도 주님의 멍에를 메고 주님을 맞이하러 달려갑시다! 그래서 지금 여기에서 안식을 누리고, 자유와 해방을 얻도록 합시다!
"보라, 당신 백성 구원하러 주님이 오시리니, 주님을 맞이하러 달려가는 이는 복되어라."(복음 환호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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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m.youtube.com/watch?v=5TM7qwsU6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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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마태 11, 28)
고생하며 사는
우리들 삶입니다.
먼저
무거운 짐을
주님께
내려놓습니다.
주님께서는
지쳐있는
우리들에게
안식을 주십니다.
온유하고 겸손하신
주님의 마음을
만납니다.
주님의 멍에도
주님의 십자가도
모두 우리를 위한
은총의 선물입니다.
은총을 배우고
감사를 배웁니다.
감사보다 더 좋은
휴식은 없습니다.
멍에 없는
안식으로는
주님의
참된 안식을
얻을 수 없습니다.
주님을 떠나
참된 안식을
누릴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멍에는 편하고
주님께서
지어주신 짐은
참으로
가볍습니다.
불평과 불만이 아닌
주님께 다시
배우는 삶의
축복입니다.
내려놓을 수 있는
주님이 계셔
참으로
편안합니다.
내려놓을 수 없는
주님과 우리의
사랑입니다.
참된 사랑은
온유하고
겸손하지만
때론 멍에가 되고
짐이 되기도 합니다.
신앙도 사랑도
이와 같습니다.
완벽한 신앙
완벽한 사랑은
숨이 막힙니다.
그렇게 살 수도
없습니다.
때론 멍에처럼
다가오는
수도공동체의 삶도
주님께서 중심이 되면
편하고 가벼워집니다.
공동체의 주인은
주님이십니다.
내려놓는 법을
휴식하는 법을
다시 멍에를 메고
따르는 법을 배웁니다.
휴식에도 길이 있고
사랑에도 길이 있고
신앙에도 길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주신
십자가를 통해
진실로 배웁니다.
불필요한 멍에를
우리에게
주시는 주님이
아니십니다.
사랑이라는
신앙의 길은
주님께 힘을 얻는
은총의 길입니다.
은총을 언제나
가득 채워주시는
주님을 만나는
은총의 오늘입니다.
버겁고 무거운
멍에도 짐도
우리를 알기에
우리를 위한
참된 사랑 앞에
고개를 숙입니다.
십자가도
멍에도
짐도
주님을 향해
머리를 숙입니다.
겸손과 온유를
다시 배우는
대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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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이름,본명,지역(본당),축일,연령,연락처]를 문자로 보내주세요.
010-3284-9295 | 카톡ID jijive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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