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신도는 1860년 평남 강서의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성년이 된 후 강서군 증산면 오흥리에 사는 유생 손형준과 결혼하였고,
네 아들을 낳았다.
1902년 맏아들 손정도가 관리시험을 보러 나갔다가 돌아오기 전까지는
평범한 조선 전통 유교 집안의 안주인으로 살았다.
손정도는 관리시험을 치르기 위해 평양으로 가던 중에 한 집에 유숙하였다.
그날 밤 어느 목사를 만나 그를 통해 신학문과 크리스토교에 대해 설명을 듣고
몸이 떨리는 감동을 체험하고 곧바로 크리스토교인이 되었다.
손정도는 다음날 아침 자신의 상투를 자르고 집으로 돌아와
집에 있던 사당을 때려 부쉈다.
아버지와 친척들은 그를 ‘미쳐도 단단히 미친 사람’이라면서 쫓아냈다.
그러자 오신도는 아들 손정도를 도와 그가 평양으로 가도록 주선하였고,
며느리 박신일에게도 남편을 찾아 나서라고 하였습니다.
손정도는 무어 선교사의 도움으로 숭실중학교에 진학하였고,
1907년 평양을 휩쓴 대부흥운동에 자극받아 전도자가 되기로 결심하여
서울의 감리교 협성신학교에서 공부한 후 1911년에 목사가 되었다.
오신도가 언제부터 크리스토교인이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진취적인 아들처럼 한 번 크리스토교인이 되자
그는 개인적이고 소극적인 신앙생활에 만족하지 않고 적극적인 전도생활에 나섰다.
이로 인해 그는 전도부인으로 임명 받아
평양 인근의 지역을 돌며 복음을 전할 수 있었다.
그는 루퍼스 부인, 로빈스, 루퍼스, 노블 부인 등을 도우면서
주로 평양 강서 진남포 증산 봉산 등지에서 활약하였다.
노년이 되어서도 그의 활동은 동료 선교사들의 감탄을 자아낼 만한 것이었다.
그와 함께 했던 루퍼스 선교사는 1910년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
“우리 전도부인 오신도의 보고는 다음과 같습니다.
9개 성경반을 통해 1,327명을 가르쳤으며
봄 가을로 평양에서 열리는 사경회와 에스티 양이 주관하는 정규 성경반도 참석하였다.
또 지난 1년 동안 104개 마을, 2,810리를 돌며 전도하였습니다.
한 번은 강도를 만났는데 돈을 요구하였다.
그녀는 돈을 주는 대신 그에게 전도할 기회를 얻었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하라’는 바울의 말씀을 성취한 셈이다.”
그러나 이 같은 그의 활동은 1912년 중단되었다.
겉으로의 이유는 둘째 아들의 죽음과 남편의 질병 때문이었다.
그러나 실질적인 이유는 만주에서 활동하던 맏아들 손정도 목사 때문이었다.
손정도 목사는 일제의 조작으로 ‘가츠라 암살음모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되었고,
북간도 무관학교 설립기금 모금운동 혐의까지 받아
전남 진도에 유배되는 악형을 겪어야 했다.
따라서 모친도 일경의 감시를 받아 자의반 타의반으로 전도부인직을 내놓고 말았다.
아들 손정도는 1 년간의 진도 유배생활을 마치고
정동제일교회에서 교회를 크게 부흥시키는 목회를 하다가 1918년 말 교회를 사임하고
상해로 망명해 3·1운동을 해외에서 추진하였고,
3·1운동 직후 의정원 의장 등 상해임시정부 요인으로 본격적인 독립운동을 추진하였다.
이와 함께 국내에서는 임시정부의 활동을 지원하는 여성독립운동이
여러 방면에서 추진되었는데 그 중 하나가 ‘애국부인회’였다.
이 같은 애국부인회를 평양에 조직하기 위해 오신도는
60세의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다시 전면에 나섰다.
평양에서의 애국부인회는 철저히 교회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감리교와 장로교 양 교파의 교회와,
또 교회가 운영하던 학교와 병원이 조직의 기초가 되었기 때문이다.
평양의 애국부인회는 1919년 6월 감리교와 장로교 양 교파에서
별개의 조직으로 만들어졌다.
감리교의 애국부인회는 남산현교회 교인이며 기홀병원 직원으로 일하던 박승일을 비롯하여 손정도 목사의 딸인 손진실 이성실 최신덕 들이 주도하여 조직하였다.
처음에는 감리교와 장로교의 조직을 별도로 운영하였으나
같은 목적의 같은 운동체이기에 연합하여 하나의 운동체로 활동하는 것이
보다 효율적이라는 의견에 통합하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그해 11월 상순 평양 신양리에 있는
숭의여학교 출신 김경희의 집에서 ‘대한애국부인회’를 결성하였다.
이때 오신도는 이미 60이 된 고령이었으나 총재로 추대되었다.
그는 과거 전도부인 시절 복음 들고 찾아다니던 평남 일대를 순회하며 군자금을 모금하고 조직을 확대시켜 나갔고, 헌금은 상해 임시 정부로 전달하였다.
체포되기까지 1년 동안 보낸 헌금은 2,417원에 달했으며
이 중 오신도 자신이 모금한 것만도 2백 원이었습니다.
애국부인회는 여성의 몸으로 독립운동 현장에 투신하여 남성 못지않은 활약을 보였다는 점 외에 대다수 남성 독립운동가들이 투옥되었거나 망명 혹은 피신함으로써 생겨난 독립운동 공백을 교회여성들이 메웠다는 점,
그리고 감리교와 장로교 여성들이 교파를 초월하여 연합 독립운동 기구를 조직하고
활동했다는 점에서 특별한 의미를 지닌 여성독립운동 단체다.
그러나 이 조직은 1920년 10월에 일경에 탄로나 회원들이 체포되고 중단되었다.
평양 강서 진남포 증산 함종에 검거선풍이 일어 도피한 사람을 제외하고도
50여 명이 체포되었다.
오신도도 체포되었고 혹독한 심문과 조사 과정을 거친 뒤 1년 징역형을 선고받아
평양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그는 며느리 박신일과 손정도가 있는 중국 길림으로 망명하였다.
당시 손정도 목사는 임시정부를 떠나 만주 길림으로 옮겨
길림한인교회를 담임하는 한편 만주 각지에 흩어져 있는
무장독립단체들과 긴밀한 연락을 취하면서 독립운동을 계속하고 있었다.
오신도는 이곳에서 아들을 뒷바라지하고, 교회를 돕는 것을 낙으로 삼았다.
그러나 아들 손정도 목사가 과로로 건강을 헤쳐 교회를 사임하면서
오신도는 귀국하여 평양과 강서군 증산의 고향집에 머물다가
1933년 9월 5일 74세로 별세하였다. 2006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오신도는 목회자이며 독립운동가인 손정도 목사를 훌륭하게 키워낸 어머니다.
그리고 아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모범을 보였다.
손정도를 변화시킨 복음을 받아들였고, 복음을 전하는 일에 적극 나섰다.
또 손정도 목사가 독립운동에 헌신하자 그도 독립운동에 참여하여 전적으로 헌신하며
고난을 당하였다.
그 아들에 그 어머니였던 것입니다.
출처 : 기독교대한감리회 사회평신도국 자료『2015년 평신도 월례회 공과』
감리교회를 빛낸 평신도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