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5일 연중 제31주간 화요일
<큰길과 울타리 쪽으로 나가 사람들을 들어오게 하여, 내 집이 가득 차게 하여라.>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4,15-24
그때에 15 예수님과 함께 식탁에 앉아 있던 이들 가운데 어떤 사람이 그분께,
“하느님의 나라에서 음식을 먹게 될 사람은 행복합니다.” 하고 말하였다.
16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베풀고 많은 사람을 초대하였다.
17 그리고 잔치 시간이 되자 종을 보내어 초대받은 이들에게, ‘이제 준비가 되었으니 오십시오.’ 하고 전하게 하였다.
18 그런데 그들은 모두 하나같이 양해를 구하기 시작하였다.
첫째 사람은 ‘내가 밭을 샀는데 나가서 그것을 보아야 하오. 부디 양해해 주시오.’ 하고 그에게 말하였다.
19 다른 사람은 ‘내가 겨릿소 다섯 쌍을 샀는데 그것들을 부려 보려고 가는 길이오. 부디 양해해 주시오.’ 하였다.
20 또 다른 사람은 ‘나는 방금 장가를 들었소. 그러니 갈 수가 없다오.’ 하였다.
21 종이 돌아와 주인에게 그대로 알렸다. 그러자 집주인이 노하여 종에게 일렀다.
‘어서 고을의 한길과 골목으로 나가 가난한 이들과 장애인들과 눈먼 이들과 다리저는 이들을 이리로 데려오너라.’
22 얼마 뒤에 종이 ‘주인님, 분부하신 대로 하였습니다만 아직도 자리가 남았습니다.’ 하자,
23 주인이 다시 종에게 일렀다. ‘큰길과 울타리 쪽으로 나가 어떻게 해서라도 사람들을 들어오게 하여,
내 집이 가득 차게 하여라.’
24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처음에 초대를 받았던 그 사람들 가운데에서는 아무도
내 잔치 음식을 맛보지 못할 것이다.”
처음에 초대받은 사람들
혼인 잔치를 차리고 사람들을 초대하는 혼주와 초대받은 사람들을 생각해 봅니다. 결혼시즌이 되면 많은 사람들이 결혼을 합니다. 이 가을에도 청첩장이 내게도 많이 왔습니다. 어떤 결혼은 주례를 서야할 자리도 있고, 하객으로 참석도 해야 합니다. 그런데 부득이 참석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어 축의금을 우체국에 가서 부치면서 축하의 인사를 미리 하기도 합니다. 그런 때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미안함이 가득합니다. 하객으로 참석하는 것은 축하의 뜻을 표현하는 것 외에 축복의 의미가 더 많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결혼식장에 참석하지 않고 식당에 가서 식사만 하고 오는 사람들이라도 축복을 하러 먼 길을 시간을 내서 참석하였기 때문에 참석하고 안하고는 많은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예전에 시골에서 살 때 혼인잔치는 참 풍성하였습니다. 사람들이 며칠씩 잔치를 베풀고 초대를 하지 않으면 삐지기까지 합니다. 또 인근에서는 초대하지 않아도 의례 가는 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 것이 인심이고, 정이고, 사랑이었습니다. 혹시 혼주와 정말 틀어진 사이로 왕래가 없던 사람이라도 잔치를 핑계로 화해하고 잔치 술로 풀었습니다. 동네 사람들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지금처럼 예식장에서 15분 만에 결혼식을 끝내고 사진을 찍고, 피로연에서 뷔페 음식으로 소란스러운 결혼식장 모습이 꼭 도매 떼기 시장 같아서 오히려 이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결혼식장은 그렇게 사람들이 많이 모이고 축하객으로 붐벼야 좋은 법입니다. 시끄러운 사람들 속에서 정이 묻어나고 결혼식을 핑계로 오랫동안 보지 못하였던 고향 사람들도 만나고, 친구들도 만나고, 축하하는 축복의 말이 오가야 정이 묻어나고 사랑이 깊어지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처음에 초대받은 이들은 유대인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초대를 달갑게 여기지 않습니다. 혼인 잔치를 베푼 혼주는 그 잔치를 빛내줄 사람들을 근사한 사람들로 초대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여러 가지 핑계를 대면서 거절합니다. 그 핑계가 참 재미있습니다.
새로 산 땅을 보러간다는 것입니다. 재산을 모으는 재미가 아주 좋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축복하는 것보다 돈을 모으고 모은 재산을 보는 재미가 아주 쏠쏠하다는 것입니다. 전혀 급하지 않은 일을 하러 가는 것에 핑계를 두고 있습니다.
그리고 겨릿소를 부리러 가야한다는 것도 급하지 않은 일입니다. 그는 일하는 재미에 빠져있는 사람입니다. 겨릿소는 쟁기질을 하는데 능숙한 소와 능숙하지 않은 소를 짝으로 지워 쟁기질을 가르치는 일입니다.
장가를 들었으므로 아내와 떨어질 수 없어서 잔치에 참가할 수 없다는 사람의 핑계는 더 웃깁니다. 자신이 축복을 받았으면 이제 그 축복을 돌려줄 줄도 알아야 합니다. 감사할 일이 있으면 감사해야 하는 것이 인간의 도리입니다.
복음에서 처음에 초대받은 이들은 유대인들만이 아닙니다. 바로 우리들도 그렇게 초대를 받았습니다. 지금도 매일 성찬식이 열립니다. 잔치가 열리고 주님은 그 잔치에 당신을 내놓고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어쩌면 적어도 주일날만이라도 성전에서 잔치에 오겠지 하시며 고개를 빼시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렇게 초대장을 언제나 발송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전혀 급하지 않고 전혀 소중하지 않은 일에 매달려 그 초청을 거절하고 있는 것입니다. 일주일에 한 번 열리는 주일미사에도 참석치 않고 핑계를 댑니다. 그래서 주일미사에 참석률이 점점 떨어지고 있습니다. 약 70%의 초대받은 이들이 핑계를 대면서 거절합니다. 텅 빈 자리를 보시고 주님은 가슴 아파 하실 것입니다.
아무라도 불러들여 당신의 성전을 가득히 채우고 싶어 하시는 주님의 성심(聖心)을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사람들이 성전을 가득히 메우고 큰소리로 성가를 부르며 영성체 시간이 길어질수록 주님은 기뻐하실 것입니다. 가득 채워진 손님들에게 주님은 크게 십자가를 그리며 강복을 주실 것입니다. 그렇게 축복해 주시기를 간절히 바라고 계실 것입니다. 우리 모두 정성을 다하여 주님의 잔치에 참여합시다. 비록 가난하고, 가진 것 없고, 눈멀어서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장애를 가지고 있어서 똑바로 걷지 못하고 언제나 샛길로 새면서 살고 있는 보잘 것 없는 처지지만 주님의 초청을 받았으니 기를 펴고 떳떳하게 용기를 내서 성찬에 참례합시다. 그래도 명색이 처음에 초대받은 사람들이니 말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자신을 낮추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도 그분을 드높이 올리셨습니다.>
▥ 사도 바오로의 필리피서 말씀입니다. 2,5-11
형제 여러분,
5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바로 그 마음을 여러분 안에 간직하십시오.
6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7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8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9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도 그분을 드높이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분께 주셨습니다.
10 그리하여 예수님의 이름 앞에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에 있는 자들이 다 무릎을 꿇고
11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고 모두 고백하며 하느님 아버지께 영광을 드리게 하셨습니다.
축일11월 5일 성녀 엘리사벳 (Elizabeth)
신분 : 신약인물, 부인
활동 연도 : +1세기경
같은 이름 : 엘라, 엘리자베스, 엘리자벳, 엘리제, 이사벨, 이사벨라
마리아의 사촌인 성녀 엘리사벳(Elisabeth)은 유다 임금 헤로데 시대에 아비야 조에 속한 사제 성 즈카르야(Zacharias)의 아내이자 구세주의 오심을 준비한 세례자 요한(Joannes Baptistae, 6월 24일)의 어머니이다. 루카 복음서 1장에 따르면, 성녀 엘리사벳은 사제 아론(Aaron)의 자손으로 남편과 함께 주님의 모든 계명과 규정에 따라 흠 없이 살아가는 사람이었지만 나이가 들도록 아이가 없었다. 그녀가 아이를 못 낳는 여자였을 뿐 아니라 부부가 이미 나이가 많았기 때문이다. 성 즈카르야는 자신의 차례가 되어 하느님 앞에서 사제 직무를 수행하기 위해 주님의 성소에 분향하러 들어갔다가 주님의 천사를 만났다. 주님의 천사는 두려움에 사로잡힌 성 즈카르야에게 ‘아내 엘리사벳이 아들을 낳을 것이고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며 자신은 세례자 요한의 탄생을 예고하러 파견된 가브리엘(Gabriel, 9월 29일) 천사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미 나이가 많았던 그는 이 사실을 의심함으로써 아이가 태어날 때까지 말문이 막혀 말을 하지 못했다.
성녀 엘리사벳은 동정 마리아가 천사 가브리엘로부터 예수님의 탄생 예고를 들었을 때 이미 임신한 지 여섯 달이었고, 그로 말미암아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에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는 것을 몸소 보여주는 표징이 되어 마리아의 응답에 큰 힘이 되어주었다. 그리고 성모 마리아의 방문을 받았을 때 성령을 가득히 받아 큰소리로 외쳤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보십시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루카 1,42-45) 이렇듯 성녀 엘리사벳은 성모 마리아와 함께 루카 복음에서 하느님의 구원역사를 여는 주도적인 인물로 전해지고 있다.
성녀 엘리사벳이 해산달이 차서 아들을 낳자 이웃과 친척들은 모두 기뻐하며 아기의 이름을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즈카르야라고 부르려 했다. 그때 성녀 엘리사벳은 아이 이름을 요한이라 해야 한다고 했다. 의아해하는 이들에게 성 즈카르야는 글 쓰는 판에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썼고, 그 즉시 입이 열리고 혀가 풀려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 하느님을 찬미했다. 성령으로 가득 찬 그는 이렇게 예언하였다.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는 찬미받으소서. 그분께서는 당신 백성을 찾아와 속량하시고 당신 종 다윗 집안에서 우리를 위하여 힘센 구원자를 일으키셨습니다. … 우리 하느님의 크신 자비로 높은 곳에서 별이 우리를 찾아오시어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아 있는 이들을 비추시고 우리 발을 평화의 길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루카 1,68-79) ‘즈카르야의 노래’(Benedictus)는 ‘마리아의 노래’(Magnificat, 루카 1,46-55) · ‘시메온의 노래’(Nunc Dimittis, 루카 2,29-32)와 함께 루카 복음서에서 대표적으로 아름다운 하느님 찬가이다. 그래서 가톨릭교회는 매일 시간전례(성무일도) 기도를 바칠 때 아침에 즈카르야의 노래를, 저녁에 마리아의 노래 그리고 끝기도에서 시메온의 노래를 바친다.
오늘 축일을 맞은 엘리사벳 (Elizabeth) 자매들에게 주님의 축복이 가득하시길 기도합니다.
야고보 아저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