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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樂soccer 원문보기 글쓴이: 샤이바니
(편의상 1인칭으로 작성했습니다.)
2016년 5월 25일.
여느 날과 다름없는 하루였다. 5월의 봄기운을 마저 만끽하기도 전에 미해군 병원선 USNS Mercy는 샌디에고를 출항해 하와이를 거쳐 동티모르로 향하는 여정에 올라 있었다. 하루의 일과를 거의 다 마쳐갈 즈음, 뜻밖의 전화가 걸려왔다. 함의 보급장교인 Y 대령(진)이었다.
-이 하사, 곧 있으면 부함장께서 사무실로 찾아가실테니 기다리고 있게.
부함장이?
항해를 시작한지 불과 2주 정도밖에 되지 않은 날이었고, 부함장이 나를 찾아올 이유는 마뜩이 없어보였다.
"네, 알겠습니다. 혹시 무슨 일때문에 오시는 중인지 여쭈어봐도 되겠습니까?"
-그건... 부함장께서 설명하실 걸세. 근데..
들려오는 목소리가 그리 어둡지많은 않은 것이, 뭔가 나쁜 일 때문은 아닐 것이라는 예감이 들어 잠시 한시름이 놓였다.
-..자네, 한국어는 잘하나?
"..네?"
-한국어로 대화가 가능한가? 통역도?
상상도 못한 질문이 수화기 너머로 들려왔다.
"네, 당연합니다. 한국어로 대화, 통역 다 가능하고 읽고 쓸 수도 있습니다."
-그래? 알겠네.
..물론 한국에서 초등학교 과정만 마쳤다는 얘기는 굳이 덧붙이진 않았다.
손에 쥔 "칼의 노래"를 한영사전이나 옥편없이 완독할 수 있을 정도면 잘한다고 해도 되는 것이겠지.
잠시 후, 간호장교로 복무 중인 K모 대위를 비롯한 부함장이 평소라면 절대 찾아올리 없는 내 사무실로 찾아왔다. 부함장도 그렇지만 K모 대위의 등장도 뜻밖이었다. 한국계라는 것만 알고 있을뿐 한번도 말도 섞어본 적이 없는데..
팬케잌 하우스에 가면 푸짐하게 퍼다줄 것 마냥 사람 좋아보이는 부함장은 왠일로 처음보는 심각한 표정으로 보급장교가 내게 했던 질문을 똑같이 했고, 나는 똑같이 대답했다. 내 대답에 만족한 듯 표정이 밝아진 부함장은 나를 찾아온 이유에 대해 말해주었다.
"근해에서 항해 중인 한국 해군 잠수함으로부터 응급환자가 발생했다는 연락을 받았네. 그 환자를 우리 함에서 치료할 예정인데, 그 인도 과정은 물론이고 환자가 함에 도착한 이후로 통역을 할 수 있겠나?"
음, 되짚어 보자면 2008년엔 미해군 공문서를 한국어로 번역한 공로가 포착(?)되어 인도양에서 이란으로 향하는 북한의 밀수선을 잡는 임무에 통역병으로 투입되었다. 2011년 말부터는 진해에서 근무를 시작해 갖가지 자잘한 통역을 도맡은 것은 물론, 그 화룡정점으로 2014년엔 미해군과 한국해군 원사들의 회동에서 11시간 동안 통역을 했다. 이정도 쯤이야.
"당연합니다. 할 수 있습니다."
부함장이 떠나고 나는 K 대위와 항해를 시작하고 처음으로 얘기를 나눌 수 있었다. K 대위도 한국계라는 것을 익히 알고 있었기에 왜 K 대위가 아닌 나에게 이런 임무가 주어졌는지 궁금했는데 알고보니 그녀는 2세라서 한국어에 그리 익숙치가 않았고 더군다나 갖가지 의료용어를 한국어로는 모르기 때문에 고사했다고 했다. 사실 따지고보면 나도 의료용어를 모르기는 마찬가지인데...(게다가 나는 병과마저 보급과가 아닌가!) K대위가 나에게 의료용어도 번역할 수 있느냐고 물어보았다. 그리고 그 테스트 겸으로 내게 Pancreas 가 무엇이냐고 물어보았다.
"음..췌장입니다."
"췌..장? 그게 맞아?"
아니, 지도 모르면서 테스트 겸으로 물어보는 건 뭐지?
"췌장이 확실합니다."
일본이 자랑하는 천재 외과의 아사다 류타로 문하에서.. 아니, 의룡 전 25권을 독파하면서 이쥬잉 노보루와 함께 갈고닦은 의료용어는 폼이 아니었다. 모르긴 몰라도 K대위는 바티스타 수술이 뭔지도 모를 것이다.
두유 노 바티스타? 두유 노 팀 메디컬 드래곤?
그런데 사실 내가 맡은 통역업무는 환자를 담당하는 것만이 아니라 환자의 인도과정까지 모두 다 포함된 것이라, 내게는 한국 해군 잠수함과 랑데뷰하기로 예정된 다음날 아침의 서너시간 전인 새벽 3시부터 대기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워낙에 아침잠이 깊고 많은 나인지라 숙소에서 편하게 잠드는 것은 어불성설이었고, 나는 창고에서 야전용 침상을 하나 구해 사무실에 펼쳐놓고 잠에 들었다.
새벽 3시. 함교로부터 연락이 왔..어야 하는데 오질 않았다. 안그래도 의룡을 다시 독파하면서 갖가지 의료용어를 옮겨적고 함의 그지같은 인터넷으로 여러 용어들을 변역하면서 준비하는 것 때문에 12시가 넘어 겨우 잠에 들어 힘들었는데.. 3시에 온다는 연락은 오지도 않고 사무실 의자에 앉아 졸린 눈을 부벼가며 대기하는 것은 고역이었다.
아침 6시. 예정된 시간을 세시간이나 넘기고나서야 함교로부터 연락이 왔다. 부리나케 뛰어간 함교에는 전단장을 비롯해 높으신 분들이 곧 벌어질 일에 잔뜩 고무된 채 상기된 표정으로 있었다. 알고보니 이번 환자 이송건은 한국해군과는 16년만에 처음 있는 일이란다. 항해를 시작하고 처음으로 얘기를 나눠본 전단장은 내게 커피를 권했다. 갓 우려낸 커피는 잠을 쫓기에 충분했다.
함에 탑재된 두 대의 MH-60S 헬기 중 한대가 이륙을 준비하면서 함교에는 곧이어 온갖 의무장교들이 올라와 카메라를 들고 함의 좌현 너머 수평선을 촬영하기 시작했다. 뭔가 하고 눈을 잔뜩 찌푸리고 보니, 수평선 가까이에 검은 물체가 보였다. 수상 항해 중인 잠수함이었다. 그리고 그제서야 내가 지금 환자의 목숨이 달린 일에 처해있구나라는 느낌이 피부로 와닿았다. 사람의 목숨이 내게 달려있었다. 그것도 한국해군 군인의 목숨이.
"이 하사! 무전! 무전!"
함의 키를 잡고있는 민간항해사로부터 나를 부르는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와 정신을 차리고 무전기를 잡았다. 무전에서는 조금은 짧고 투박하지만 분명한 어조의 영어로 교신을 하고 있는 한국해군 잠수함 승조원의 목소리가 들렸다. 뭐라고 시작해야하나..잠시 망설였다. 조금은 우습게 들리겠지만 함의 이름을 뭐라고 밝혀야하나가 제일 고민되었다. 혀를 굴리는 머얼시라고 해야하나 아니면 멀시라고 해야하나 그것도 아니면 R을 쌩까고 머시라고 해야하나. 그러나 이윽고 뇌리를 친 생각은..
-제가 여러분을 돌보겠어요.
"대한민국 해군 잠수함, 여기는 미합중국 해군 병원선 메르시함입니다."
그렇지. Mercy는 메르시 밖에 없잖아?
"메르시함에서 한국어 통역을 맡은 미해군 이XX하사입니다. 잘 들리십니까?"
너무나도 유창하고 낭랑한(...) 내 한국어에 당황했는지 무전이 잠시 끊겼지만 이윽고 대답이 들렸다.
-미해군 병원선. 미해군 병원선. 여기는 대한민국 해군 잠수함입니다. 잘 들립니다.
좋아 좋아. 한차례 교신이 오고가자 그때부터는 내 세상인듯 한껏 어깨의 짐이 덜어진 것 같았다. 가벼웠다. 사실 2008년에 북한의 밀수선을 잡는 임무에 투입되었을때도 이렇게 내가 무전기를 잡고 싶었다. 그러지 못해서 너무 아쉬웠던 기억때문일까, 무전기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가고 입가엔 미소마저 머금어졌다.
"대한민국 해군 잠수함, 미해군 병원선 메르시함입니다. 현재 속도 x노트를 유지 중이며 침로는.."
민간항해사가 적어준 정보를 읊으며 병원선과 잠수함 사이의 거리를 유지하며 침로를 조절해나갔다. 내게 주어진 임무는 민간 항해사가 적어준 정보들을 한국어로 전달하고 한국 해군 잠수함으로부터 오는 정보를 영어로 민간 항해사에게 전달해, 환자를 이송하는 과정에 있어서 두 함의 충돌을 방지하며 가장 좋은 속도를 유지하도록 교신하는 것. 쉽다면 쉽고 어렵다면 어려운 임무였다. 아니 사실은 좀 쉬웠다. 다만 사람 목숨이 달린 일이기에 경거망동 하지않고 진중하려 했을 뿐이었다.
데프콘을 읽으며 배워둔 한국 군대식 숫자세기 공하나둘삼넷오여섯칠팔아홉
의룡을 읽으며 배워둔 갖가지 의료용어들.
Mercy는 메르시.
밀덕과 일본만화 오타쿠와 겜덕의 혼종인 나는 그렇게 무전으로 무쌍을 펼치고 있었다.
함교의 창문 너머로 보이는 한국 해군의 잠수함은 작았다. 장보고급이 작은 것이야 익히 알고 있었지만 잠수함 위에서 호버링하고 있는 헬기에 비해서도 그리 커보이지 않았다. 한국에서 멀리 떨어진 이 망망대해에서 저 작은 잠수함으로 항해 중인 잠수함 승조원들이 안쓰러웠다. 게다가 응급환자가 발생했는데 만약에 우리도 없었다면 그 환자는 어떻게 됐을까? 다행이었다. 그들이 항해를 하고있는 근해에 우리가 있는 것도 다행이었고, 원활하게 통역을 할 수 있는 내가 있는 것도 다행이었다. 행운이었고 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또 이번 항해에서 이렇게 보람을 얻는구나, 라는 생각도 들었고.
헬기는 함을 이함해 무사히 대한민국 해군 잠수함으로부터 환자를 받아들였고, 환자가 함의 비행갑판에 도착하고부터는 의무장교들이 활약할 때였다. K대위가 환자가 도착한 당분간은 통역을 맡는다 했지만 왠지 내가 환자에게 달려가야 안심이 될 것만 같았다. 췌장도 모르면서 뭔 통역을..
"Petty officer Lee, please tell them that the patient and his escort are onboard. That will be our last transmission. Thank you for your work. Well done."
전단장의 말을 수첩에 받아적고 무전기를 잡았다. 마지막 교신을 남길 시간이었다. 솔직히 조금은 가슴이 뭉클했다. 그렇게 저들은 또다시 저 작은 잠수함으로 목적지까지 우리보단, 적어도 이 큰 병원선에 타고있는 우리들보단 힘든 항해를 하겠지. 이 큰 병원선에서 항해나가는 거 싫다고 집에 가고 싶다고 징징대는 우리 보급계 막내 신병노무 섀키들을 저 잠수함에 태우면 반나절도 안가 자살 소동을 일으킬텐데..
"대한민국 해군 잠수함, 여기는 미해군 병원선 메르시함입니다."
침로를 변경해 조금씩 멀어지는 잠수함을 한번 보고 여러가지 메모를 끄적인 수첩을 보았다.
"환자와 동행 1명은 무사히 병원선에 도착했습니다. "
다만 그대로 무전을 끝내기엔, 그냥 전단장이 적어준 말로만 교신하고 끝내기엔 좀..
뭔가 좀 아쉬웠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전단장이 내가 무슨말을 하는지도 모를텐데. 에라 모르겠다.
"이제 앞으로 긴 항해가 되실텐데, 정말로 수고가 많으십니다. 귀함의 무사항해와 건승을 기원합니다."
재빠르게 전단장 눈치를 한번 보았는데 뭔 말했는지는 모르는 눈치였다.
사실 끝에 필승, 을 덧붙이려다 손발이 오그라들 것 같아 그만두었다.
-미해군 병원선. 대한민국 해군 잠수함입니다. 함장님께서 감사하다고 전하십니다. 이 하사께서도 무사항해하십시요.
그렇게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대한민국 해군 잠수함과의 교신은 종료되었다. 무전을 마치고 함교를 나오면서 무언가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가슴벅찬 감동을 받았다.
함으로 이송된 환자는 무사히 수술을 마치고 어느정도 회복기간을 거친 후 한국으로 돌아갔다. 함에서는 내가 맡은 일에 대해 여러가지로 잠시동안은 떠들썩했지만 이내 잠잠해졌다.
그리고 항해는 아무일도 없었던 것처럼 계속되었다.
여담1. 수술에는 환부를 그..뭐라고 해야하나 수술 부위를 최대한 작게하는 minimally invasive surgery가 사용되었다. 메이신 대학병원에서사망률 0을 기록하신 카토 아키라 교수님 덕분에 무사히 저침습수술법이라는 확실하진 않지만 제법 그럴듯한 용어로 통역할 수가 있었다. (viva 의룡!)
여담2. 환자와 함께 동행한 한국 해군 장교로부터 "함장님께서 저에게 한국어 잘하는 이 하사가 병원선에 있으니 동행 안해도 되겠다고 하셨습니다" 라는 말을 들었다. 초등교육 6년 만세다.
여담3. K대위랑은 그 후로도 가끔 얘기를 나누었다. 알고보니 K 대위는 나랑 동갑이었다. 생일은 내가 좀 빨라서 나더러 "오빠네?"라고 딱 한번 해줬다. 뭐 그래서 K 대위랑은 전화번호도 주고받고 제법 친해졌다. 싱글이고. 귀엽고. 같은 동네 살고.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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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도 간만에 글을 써보니 끝을 어떻게 내야할 지 모르겠네요..
아무튼, 이렇게 이번 항해때 있었던 특별한 일을 소개해드렸습니다.
민감할 수 있어 한국해군 잠수함 이름과 환자의 병명은 기록하지지 않았습니다.
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링크를 클릭하시면 이번 일에 대한 영어 기사를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
첫댓글 와.. 글만 읽어도 뭔가 감동이 오는데 당사자면 진짜 뿌듯했을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