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재하"한국 팝 발라드의 시작"
1987년 10월 31일까지 유재하는 빛을 발하지 못한 원석이었지만 하루가 지난 11월 1일에 일어난 교통사고로 그는 천사가 됐고, 그의 음악은 영원한 보석으로 빛난다. 무대 위에서 팬들의 환호를 듣고 싶어 했던 스물여섯 살의 순수한 청년은 그렇게 비극적인 천재로 환생해 우리 대중음악을 조용히 끌어올렸다. 1997년에 유영석, 신해철, 여행스케치, 이적, 이소라, 조규찬 등이 모여서 발표한 헌정 앨범 <다시 돌아온 그대 위해>는 유재하의 그림자가 얼마나 깊고 넓은지를 보여준다.
천부적인 감성으로 탄생한 '사랑하기 때문에' 와 '내 마음에 비친 내 모습', '가리워진 길', '그대 내 품에' 등에서 드러난 클래식과 가요의 접목은 한국적 발라드의 시작을 알린 서막이었다. 가수 한동준은 "클래식을 바탕으로 한 음의 배열이 기존 가요와 완전히 달라서 정말 놀랐다. 가사도 서정성의 절정이었고, '우리들의 사랑' 이나 '텅 빈 오늘 밤'에서 들려주는 리듬에 대한 시도도 달랐다."며 유재하의 음악을 높이 평가한다.
그는 누구인가?
1962년 6월 6일 경북 안동에서 태어난 유재하는 클래식의 이성을 소유했지만 감성은 대중음악이었다. 1981년, 한양대 음대에 진학한 그는 라이오넬 리치나 필 콜린스, 배리 매닐로우, 엘튼 존 같은 감성적인 팝을 좋아했다. 이전에도 클래식을 전공한 가수는 있었지만 고전음악을 바탕으로 작곡하고 노래도 부르면서 편곡까지 완수한 사람은 유재하가 최초였다. 사랑과 평화 출신의 김명곤을 비롯한 몇 명이서 거의 모든 편곡을 도맡아 하던 시기에 가수가 작사 작곡을 넘어 편곡까지 한 것은 유재하가 유일하다. 가수에 의한 음악 자주권이 완성된 셈이다.
여기에 충격을 받은 신승훈은 유재하의 사망 3주기인 1990년 11월 1일에 데뷔앨범을 발표해 헌정의 마음을 표했지만 공교롭게도 그해 11월 1일은 유재하에게 솔로활동을 계기를 만들어준 김현식이 세상을 떠난 날이기도 하다. 미국의 싱어 송라이터 돈 맥클린이 'American pie'에서 초기 로큰롤 가수 버디 홀리가 비행기 사고로 요절한 1959년 2월 3일을 '음악이 죽은 날' 로 정의한 것처럼 때문에 11월 1일은 '대한민국의 대중음악이 죽은 날'로 기록된다.
유재하는 아름다운 선율에 어울리는 여린 음색처럼 내성적이고 소극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일에 대한 집중력은 과감한 결단을 내렸고, 그것은 음악에 대한 자신감으로 환원됐다. 대학생이던 1984년에 김광민과 정원영의 주선으로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의 세컨드 건반주자가 된 유재하는 당시 위대한 탄생의 베이시스트였던 송홍섭에게 당찬 부탁을 했다. "대학생이던 유재하는 얌전하고 성품도 깨끗했지만 팝에 대한 욕망은 대단했다. 어느 날 조용필 선배한테 전해달라며 노트에 직접 적은 두 곡의 악보를 조심스럽게 내밀었다. 그 노래가 '사랑하기 때문에'와 '우리들의 사랑'이었다. 당시로선 생경했던 장조와 단조가 융합된 발라드에 매력을 느낀 조용필은 1985년에 '사랑하기 때문에'를 수록했지만 유재하는 자신이 의도한대로 나오지 않아 많이 아쉬워했다"고 한다.
단 한장의 앨범, 발라드의 기준이 되다
유재하 사랑하기 때문에 자켓 이미지
그는 결국 2년 후에 자신의 앨범에 직접 녹음하는 정공법을 택했다. 1986년에는 죽마고우 전태관과 그의 친구 김종진, 나중에 빛과 소금을 결성하는 장기호와 함께 김현식의 3집 앨범 제작에 들어간다. 이때 김현식은 네 명에게 각자 노래를 만들어오면 그 곡들을 부르겠다고 밝혔고 이에 고무된 유재하는 야심차게 다섯 곡을 제시했지만 김현식은 그 중에서 '가리워진 길' 하나만을 취입했다. 여기서 좌절감을 느낀 유재하는 자신의 솔로음반 제작으로 시선을 돌렸고, 산고(産苦)로 탄생한 것이 1987년 그의 유일한 앨범 <사랑하기 때문에>였다. 음반은 훗날 한국 대중음악에 지각변동을 일으켰지만 그때는 몰랐다. 당시 방송국 심의에 떨어지고 일본 야마다 가요제에 출품한 '지난날' 이 예선에서 탈락하자 크게 상심한 유재하는 국내 음악 전문지와의 인터뷰에서 자조 섞인 상실감과 자괴감을 드러냈다.
"제 노래 들어보셨어요? 우습죠?"
음반을 발표하고 TV 프로그램 <젊음의 행진>에 출연하게 된 유재하는 '비애' 를 작곡해 준 가수 한영애에게 전화를 걸어 "누나! 나 텔레비전에 나가! 난 대중가수가 될 거야"라고 벅찬 마음을 숨김없이 표현했다. 그는 허영심도 없었고, 허세도 부리지 않았다. 음악으로 유명해지고, 인기를 얻고 싶은 심정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순수한 청년이었다.
그의 음악적 유산
대중가수가 되는 것을 반대했던 유재하의 아버지 유일청씨는 아들의 음악 업적을 기리기 위해 음반수익과 성금으로 유재하 장학회를 설립했다. 이 장학회 주관으로 1989년부터 매년 거행되는 유재하 음악경연대회를 통해 등장한 조규찬, 유희열, 김연우, 정지찬, 스윗 소로우, 강현민, 이한철, 심현보, 방시혁, 옥상달빛 등은 한국의 천재 아티스트가 뿌린 풍요로운 음악 유산을 수확하고 있다.
그의 죽음으로 잉태된 수많은 조각들은 모여서 하나의 거대한 작품으로 승화됐고, 지금까지도 우리와 함께 호흡하고 삶을 위무한다. 근래는 실력파 후배들을 배출한 유재하 음악경연대회와 영화 <살인의 추억>에 흘러나왔던 '우울한 편지' 로 수렴되는 경향이 있지만 그의 음악은 시간의 흐름에 비례하는 역사와 평가를 쌓아간다. 유재하는 1987년 11월 1일에 짧은 일생을 마쳤지만 대한민국의 대중음악은 그날, 새로운 출발을 시작했다.
글쓴이 : 소승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