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아가씨가 나름대로의 정의감에 입각하여, 나의 무지함과 반진보적이며, 반민주적인 면을 크게 훈계하고 있는데, 그의 말이 모든 점에서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특히 급진적인 몇 가지 페미 정책으로 민중을 위한 진보 정당의 정책인 양 민중을 조삼모사하다가 지지율이 추락하여 위기를 맞고 있는 민노당과 열린우리당에 대해 잠시 고찰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에서 유용한 면이 있다.
목숨을 걸어본다는 것. 사랑을 하려거든 목숨 바쳐라 하는 노래도 있지만, 아직 목숨을 바칠 만한 여자를 만나지는 못한 듯 이성을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는 식으로 어떤 여자를 사랑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나는 지금 두 아이의 아버지이고, 앞으로 막내를 하나 더 낳아 세 아이의 아버지로서 내 가족을 위해서 기꺼이 목숨을 바칠 각오가 되어 있다. 아버지가 된다는 것이 목숨을 바치는 것이지만, 나는 이른바 사회주의 혁명을 위해서 이 목숨을 바치기로 각오하여 20대 중반에서 삼십대 중반까지 민중의 세상을 만들고자 일을 해왔다. 나는 물론 에스오(사회주의 조직)의 주목할 만한 간부는 아니었다. 그리고 내가 속해 있던 에스오가 그렇게 막강한 것도 아니었다. 그렇지만, 여름 바지 하나와 운동화 한 켤레로 일년 사시사철을 생활하며, “라면이 없었다면 어떻게 운동을 했을지 몰라? “하면서, 두 가지의 긴장된 생활을 해왔다. 하나는 오픈된 공간의 반합법적 전국 조직의 간사 활동을 여러 위원회에서 했으며, 하나는 비밀에 부쳐진 비합법적 에스오의 단위 팀장 활동이었다.
집에 들어가지 못하는 날이 태반이었으며, 머리맡에 신발을 두고 자면서, 창문을 통해서 지붕을 넘어 도망가는 루트를 생각하며 늘 잠을 설치는 긴장된 생활을 해야 했다. 나의 어리석음도 컸고, 이른바 안정된 가정을 도저히 꾸밀 것 같지 않은 나의 조건도 컸던지 칠년이나 사랑하며 결혼하기로 맹세했던 그녀는 결국 떠나갔다. 내 주변에는 ‘사’자 들어가는 여자 동지도 많았지만, 그녀들은 동지일 뿐 이성의 대상으로는 여겨지지 않았다. 후배들도 마찬가지였다. 어쨌든 우리나라 최고의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했지만 판검사 되는 것을 과감하게 버리고, 시골에 계신 부모님을 배신한 채 하루 종일 전깃줄을 나르는 공장에 들어간 후배들과 노조를 만들고, 대학의 학생들과 만나며, “민중이 주인 되는 참세상 자유 위하여 시퍼렇게 쑥물 들어도 강물 저어 가리라”하는 노래를 전율에 떨며 불러왔다.
과거 세상을 완전히 뒤집어버리겠다는 열정이 남아 있어서, 돈을 버는 일에 비교적 빠르게 적응하여, 가정을 꾸려갈 만큼 경제적 안정을 이루어내기는 했으나, 왠지 시들시들하다.
그런데 나는 지금 왜 글을 쓰고 있는가? 도대체 이런 글쓰기가 무슨 소용이 있다고, 이러고 있는가? 심심해서 그런 것인가? 아니다 그렇지 않다 나와 함께 활동하던 오픈된 공간의 사람들은 지금 다 정치적 기득권자로 되어 있고, 그 주변에는 음식을 보고 몰려드는 파리들처럼 수많은 이들이 찾아와 성시를 이루고 있다. 이들은 어느 새 자기 나름대로의 자그나마한 어떤 권력들을 지니고 행사할 수 있는 위치에 올라와 있는 것이다.
두 번의 집권이 그렇게 만들었던 것이다. 김대중이 집권하고 끝날 줄 알았던 것이, 노무현으로 이어지면서 사람들의 태도가 확 달라진 것이다. 나는 돈을 버는 일에 종사하느라고 나만 그 날 그 때의 그 뜨거웠던 열정이 식고, 그 맑은 순수함이 흐려진 줄만 알았는데, 그런 것이 아니었다. 차라리 내가 내 힘으로 돈을 벌고 있다는 것이 떳떳했다. 정부에서 돈을 받지 않는다는 것, 그것이 차라리 나를 더 자유롭고 순수하게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나와 함께 길을 걸었던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많다. 그들에게 이런 식으로라도 말을 하고 싶은 가 보다. 내가 한토마에서 재미있게 접해 본 말이 바로 ‘꼴페미’였다. 아무런 성의 차별 의식이 없이 여성들과 함께 활동을 해 오던 나로서는 페미니즘에 대해서 아주 친숙했으며, 이를 적극 지지하고, 그런 정책들을 지지했으므로, ‘꼴페미’라는 말에 대해서 거부감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내가 이제 자연스럽게 잘 사용하는 말이 바로 그 꼴페미이다. 지은희 전 여성부 장관이 주도하고 선두 지휘한 성매매 처벌 특별법과 그 활동 등을 지켜보면서, 나는 도대체가 옳은 점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 여성부 장관, 여성부 직원, 그리고 기자, 그리고 게시판에서 만나는 하급의 자칭 페미니스트들을 보면서, 과거 우리 운동권의 여성들과는 이질적인 - 사실 이기적인 - 논리들의 흐름에 적잖이 놀랐다. 지금은 그 이유를 알았다. 현재 페미니스트라고 나서는 자들은 사실, 한국 민주주의 운동의 중심과는 좀 떨어져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물론 부천서 성고문을 당한 권인숙이 있지만, 김신명숙이라든가 곽배희라든가 하는 사람들은 아니다.
이들은 때론 “밉지만 함께 가야 할 반쪽에 대한 보고서” 등을 쓰면서, 남녀평등과 동시에 남녀가 서로 조화롭게 잘 살기 위한 패러다임을 가진 그런 페미니스트들이 아니다. 그와 같은 ‘여성모임’을 이끌어 왔던, 학생 운동, 노동 운동을 병행해왔던 페미니스트가 대부분 아니다.
공지영은? 그는 훌륭한 작가이기는 하지만, 사실 그는 페미니스트는 아니다. 페미니즘의 어떤 경향을 소설적으로 수용하여 표현했을 뿐이다. 양귀자, 그 역시 페미니스트는 아니다. 그 역시 페미니즘을 한국 여성 문제를 바라보는 한 시각으로 차용했을 뿐이다. 박완서, 그 분은 더더욱 페미니스트는 아니다. 페미니스트는 강은교, 김승희, 최승자 등의 시인이고, 이들에게는 배워야 할 점이 많다. 이 분들은 진정한 남녀 평등을 주장하며, 여성의 이기주의에 대해 나름대로 냉엄한 비판을 하신다. 이런 분들이 여성 가족부를 맡으신다면, 아마도 매우 다른 정책이 나올 것이다.
대한민국을 자기 손바닥 위에 올려놓기라도 한 듯 설쳐대는 페미니스트들은 단연 곽배희, 지은희 등이고 김신명숙, 고은광순, 그리고 ‘공자를 울린 여자’라는 필명을 가지고 시집도 아닌 시집을 낸 여자 등... 호주제 폐지를 주장하다가 요즘은 명절 돌아가며 쇠자라는 운동을 펼치는 정나일선이 등. 이 사람들의 경향은 남성 비하를 곧 여성 운동이라고 생각하는 듯, 여성 비하를 남성 운동이라고 생각하는 마초들과 서로 공생하며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고 높여가는 꼴페미들이다.
덕분에 난데없이 페미니즘 서적들을 사서 읽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내가 생각했던 페미니즘과 지금 유행하고 있는 페미니즘의 간극을 깨닫게 되었으며, 나름대로 서양의 급진적 페미니즘의 폐해를 알려 나가야 하는 것, 그리고 한국에서 안티페미니즘 이론과 운동이 소개되어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된 것이다.
물론 나는 전문적 학자와는 거리가 있다. 그러나 나는 과거 한국 사회를 이론적으로 분석하여 그 사회를 변혁할 변혁 이론들을 학습하고 개발하며, 적용했고, 그 때 그 때의 정세를 분석하여 전술 지침 등을 마련하던 감각을 가진 사람이다.
따라서 나는 그 감각으로써 문제를 제기할 뿐 그 문제를 더 깊게 학술적으로 파고들 수도 없고, 운동의 방식으로 실천해 나갈 수도 없다. 그렇게 하려면 나는 다시 한 번 삶의 전환점을 백팔십도 바꾸어야 한다.
이 게시판의 신사장님이나 짚신한짝 님의 글들은 한국 안티페미니즘(남자로부터의 해방을 궁극으로 하는 급진 페미니즘의 변형으로 복잡하게 틀지워진 한국의 이기주의적인 변종 페미니즘의 폐해와 극단적 활동 등을 비판하고 반대하는 이론)의 초기 단계의 선구적인 것으로서 다소 거칠지만(인터넷 글의 특징 상 어쩔 수 없음, 물론 내 글은 더 거칠고 격이 낮을 때가 많음), 한국 페미니즘에 대한 안티로서, 한국의 남녀평등의 바른 방향 설정을 위해 매우 값어치 있는 글이라고 생각한다.
미국의 급진적 페미니즘에 대한 소개는 이 게시판의 5단 이론가 님이 많이 해 주시고 , 자료도 많이 확보하여 제시해 왔다.
고로 나는 미국의 급진적 페미니즘의 문제점에 대해서 그만 하기로 하고, 미국의 급진적 페미니즘이 한국에 그대로 적용될 때, 이미 서구의 사회주의적 페미니스트, 또는 안티페미니즘으로서의 제3의 페미니즘에 의해 비판된 그대로, 한 번 현 여성 정책의 문제점을 지적해 보고자 한다. 물론 이것은 인상적인 비평일 수 있다. 그러나 이 비평은 신문 보도와 자료를 토대로 한 것이므로, 내가 고의적으로 여성부의 정책이나 여성 운동을 무조건 폄훼하고자 하는 의도로 이러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아주었으면 한다.
60년대 이후의 급진적 페미니즘은 남성을 가해자나 지배자, 여성을 피지배자나 피해자로 놓고 출발한다. 남성 전체를 가해자로 놓기 때문에 여성은 국가와 민족, 인종과 계층을 뛰어넘어 공통된 피지배 경험과 피해 경험으로 단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자체가 전 여성을 단결을 가져와 여성 운동을 발전시킨 점은 분명하게 있으나 적어도 두 가지 점에서 문제가 있는 것이다.
첫째, 여성들 사이에 존재하는 지배와 피지배라는 계층적인 문제로 인한 여성에 의한 여성 지배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오히려 소외 여성에 대한 지배 여성의 기득권을 심화하는 면이 있다는 것이다..
대한민국의 결혼한 비정규직 여성 노동자의 입장에서 한 번 생각해 보자. 결혼한 비정규직 여성 노동자의 입장에서 가장 시급하게 해결되어야 할 문제는 이른바 가정의 경제적 안정이다. 불안한 일자리가 안정되어야 하는 것이며 남편과 자녀와 부모 등을 부양할 수 있는 안정적인 수입이 최우선이 되는 것이다. 어떤 여성 노동자는 부부가 평등할 수도, 불평등할 수도 있으나, 부부 간의 평등 자체가 이슈가 되기보다는 비정규직 문제 해결 자체가 이슈가 되므로, 이 부부는 일단 서로 단결하여 비정규직 문제를 해결해 보고 싶은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자신이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해결해 줄 것 같은 공약을 제시해 놓고는 성매매 처벌 특별법이라든가 호주제 폐지라든가 출산 휴가 확대라든가 육아휴직이라든가 하는 것이 이슈가 되어서 늘 논란이 된다고 해 보자. 이런 것들이 과연 이 결혼한, 또는 결혼하지 않은 비정규직 여성 노동자에게 무슨 혜택이 된다는 말인가? 비정규직 노동자들도 세금을 내지만, 직접세, 간접세... 자동차 기름 만원을 주유하면 육천 원이 간접세로 들어간다. 이런 세금들이 자신에게는 혜택으로 돌아오지 않고, 이른바 엘리트 여성들에게 혜택이 돌아가 여성 정책이 비정규직 여성을 오히려 소외시킨다. 이는 전업 주부의 입장에서 볼 때도 마찬가지이다. 전업주부는 출산 유급 휴가도 없고, 유아원에 아이를 대부분 보내지 않으므로, 육아 보조비를 받는 것도 아니며, 유급 육아 휴직도 없다. 그렇다면 자기 남편은 없는 호주머니를 털어서 다른 남자의 반듯한 직장을 가진 엘리트 여성을 지원하고 있는 것 아닌가? 이는 농어촌 여성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국회에서 육아 정책과 관련한 공청회를 할 때 농어촌 여성이 대거 몰려 왔다. 육아 정책 자체가 도시 중심이거나 반듯한 직장에 다니는 여성 중심으로 되어, 농어촌 여성은 이중 삼중으로 어려움에 처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문제가 한국 여성 운동의 주류에서 가려져 있고, 엉뚱한 남녀 대결이 이런 문제에 대한 관심을 틀어버리는 것, 이것이 문제인 것이다.
남편과 아내가 함께 손을 잡고, 자기 가정에도 실질적 혜택이 돌아오도록 힘을 합쳐서 도시의 중산층 이상 중심으로 펼쳐지는 여성 정책을 소외된 민중 여성 중심으로 그 방향이 바뀌어질 수 있도록 해야 함에도, 한국 여성 운동이 제시하는 남녀 대결 구도로 가정에서 부부가 괜한 말다툼이나 하고 있는 것이다.
호주제 폐지, 아내도 자식에게 성을 물려주겠다, 부부 강간죄를 신설해야 한다, 명절을 쇠지 말자, 명절을 번갈아 쇠야 한다, 왜 명절날 나는 전을 부쳐야 하나, 쩍벌남을 오므리로 허벅지를 찢어서 지하철 쓰레기통에 버려야 한다, 군대를 해체해야 한다, 여자도 바람 피울 권리가 있다, 여자의 외도도 허용해야 한다 등등.
더욱이 텔레비전 아침 방송, 아침 드라마, 주말 연속극, 심야 드라마 등등이 상업적 페미니즘에 근거한 불륜 미화 등으로 여성의 해방을 잘못 주입시켜서, 민중의 소외된 가정의 소외 의식을 불륜 등의 문제로 왜곡시키게 한다.
그러나 우리가 종로구 명륜동의 빌라에서 살던 국회의원 노무현, 점펴 스타일의 허름한 그가 구루마를 끌면서 눈물을 닦는 모습이 텔레비전에 광고로 나왔을 때, 그리고 민주노동당의 노회찬이 나와서 삼겹살 판을 갈아야 한다면서, 시원시원하게 차떼기 당을 공격할 때, 우리 민중은 이들을 지지하며, 보다 나은 살림살이를 꿈꾸어 왔다.
그리고 1년, 2년, 3년... 민중의 살림살이는 나아졌는가? 과연 민중의 실질적 삶에 도움을 주는 정책은 실현되고 구현되었는가?
국가보안법 문제와 같은 정치적인 것은 차치하자. 우리 민중의 살림살이에 직접적인 영향을 줄 수 있는 어떤 정책이 어떻게 추진되었는가? 민노당과 열린우리당은 과연 어떤 정치적 이슈를 제기하면서 나라를 경영해 왔는가?
왜 민노당은 단 둘 밖에 없는 지역구 중에서 한 구역을 잃었던 것일까? 대기업의 노조들은 하나씩 둘씩 급속도로 부패에 연루되었으며, 민주노총은 정파적으로 분열되어서 폭력이 난무하는 모습을 연이어 보여 주어 우리를 실망시키는 와중,,,, 이 이념의 공백기에, 언론과 신문은 온통 호주제나 성매매 문제, 군가산점 부활 문제나 부부 강간죄나 부부 스와핑 문제나 하는 페미니즘적 이슈로 그럭저럭 국민들의 관심을 끌면서, 갔고, 열린우리당과 민노당은 그것을 진보로 내세워, 민중을 대변한다는 이미지 허상을 만들어 지지를 이끌어 내려고 했던 것 같다. 급기야 민노당에서 제작한 비정규직 포스터에서 남녀가 “자기야 우리 정규직 되면 결혼하자‘라는 내용이 동성애자를 차별하고, 여성을 비하하는 이미지를 심어 준다는 성소수자 위원회의 비판과 더불어서 폐기되는 일대의 낭비가 저질러진다. 페미니스트들이 비판하는 성리학적 세계관이라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이와 같은 페미스트들의 사고와 태도 그 자체가 그들이 비판하는 성리학적 세계관인 것이다. 도대체 비정규직 여성의 입장에서 그래서 그 포스터가 뭐가 어쨌다고, 다 만들어 놓은 것을 폐기하고 ‘쥐랄’이란 말인가, 이것들이 모여서 그런 ‘시비’ 다툼이나 하고, 비정규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실질적 실천적 행동은 보이지 않으니...!!
민중은 분명히 바보가 아니다. 민중이 바보가 아니라는 것은 민노당과 열린우리당, 특히 열린우리당이 민중의 이익이라고 내세우는 진보적 정책으로서의 여성 정책 자체가 국민의 실생활에 도움을 주기는커녕 그냥 세상을 시끄럽게 하거나 기존의 문제를 더 악화시킬 것이라는 것을 오랜 경험에서 오는 직관으로 이미 다 알고 있기 때문이다. 왜 일찍이 동양과 한국의 성현들이 “경천근민”하라고 하셨을까? 민중의 살아 있는 생각들을 진리의 기준으로 생각하고 행동해야 국가 정책이 바르고, 국민의 복리가 증진되는, 사회통합을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국민이 80퍼센트 이상이 호주제 전면 폐지를 반대하는데, 그냥 폐지해 버려. 국민이 원하지도 않는데, 국민은 아직도 권위주의 시대에 머물러 있고, 여당과 대통령, 그리고 민노당 그들은 21세기를 선도하고 있다고. 그래서 어리석은 국민이 대통령과 정부 여당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그래 목에 칼이 들어와도 바른 말을 해야 할 지식인 교수가 청와대에 들어가서 대통령의 말 실수와 그릇된 사고를 그렇게 옹호하고 나서는가? 그러고도 민중이 지지해 주기를 바라는가? 그 동안은 한나라당이 미워서, 그 군사독재, 정경유착, 차떼기당이 싫어서 지지해 주었지만, 열린우리당 너희를 국민들이 싫어할 줄은 몰랐는가? 도대체 그 오만함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인가? 책상에 앉아 있지 말고 민중 속으로 들어가 보란 말이야! 성매매 문제를 해결하려면 성매매 여성 속에 들어가 있던 김강자 전 종암 경찰서장의 말을 귀담아 듣고, 그런 지혜를 최대한으로 반영,활용해야 할 것 아냐! 그런데 서울대학교에서 강연하는 김강자 전 서장을 찾아가 떼로 몰려가 방해나 해대고, 철저하게 배격해 버리는 너희 페미것들이 무슨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 집창촌 주변의 서민 경제만 작살나고, 강남으로 몰려간 대딸방은 더욱 대박이 나고, 바로 우리들 집 앞으로 성매매가 더 파고들었잖아. 그렇게도 풍선효과를 얘기하고, 제한적 허용주의를 생각해 보라 하고 - 이미 법학에서 연구가 상당히 진행된 걸로 알고 있음. 그러나 이대 페미들의 협소한 패러다임에 맞지 않으면 도대체가 받아들이지 않음 - 성매매와 연결된 공무원의 비리구조부터 타격하라고 그렇게 훈수를 둬도! 기껏 불쌍한 외항선원들 성매매 현장이나 찾아가서 세금 뿌리면서, 지들은 해외 관광이나 하면서, 돈도 벌고, 의미 있는 운동도 하고.
그러니까 한 번 자동차에서 내려서 걸어가 보란 말이야. 국회의 그 책상에서 나와서 너희들이 지나쳐 가는 ‘사이의 공간’, 민중들의 삶을 들여다보란 말이야. 버스를 타 보란 말이야. 정류장 근처에 노점상들의 표정을 보고, 얘기를 들어 보고, 술집에 가서, 서민들이 무슨 얘기를 하는지, 집들이 몰려 있는 골목길에서 도대체 무슨 얘기들이 오가고 있는지, 동네 수퍼 앞에서 맥주나 소주를 놓고 동네 아주머니 아저씨들이 뭐라고 하는지. 농어촌에서 아이를 빈 집에 두고 바다로 밭으로 나가는 아주머니들을 만나 보란 말이야.
둘째, 남성 전체가 가해자라면 여성해방의 주된 방향은 남성을 공격하거나, 가부장 중심의 가정 질서를 공격하게 됨으로써, 남녀갈등과 가정 해체를 더욱 가속화한다는 것이다. 서구의 남성 가해자, 여성 피해자로 출발하는 급진적 페미니즘은 레즈비언 페미니즘으로까지 변형되고 레즈비언 페미니스트들에 의한 이성애자 페미니스트을 억압하는 문제가 페미니즘 내부에 새로운 문제거리로 등장하고 있다.
올해 5월인가, 세계 여성의 날을 맞아 한국 성폭력 상담소에서 지하철에서 성폭력 추방을 위한 퍼포먼스가 있었고, 이것이 언론에 보도되었다. 한국 성 폭력 상담소는 사단법인일 것이고, 사단법인이 맞다면 정부, 특히 여성가족부로부터 재정적 지원을 받을 것이다. 그런데 웬 쩍벌남 퇴치 퍼포먼스인가, 그것도 고문 기구를 연상시키는 오므리라는 살벌한 도구로 주리를 틀면서.. 나도 한 번 지하철을 타보았다. 남자 여자 다 다리 벌리던데, 왜 남자만 쩍벌남인가? 백 번을 양보해서 남자만이 다리를 벌려서 여성들에게 성적 수치감(?)을 준다고 치자. 그렇다고 해도 그것을 오므리로 주리를 틀어 버리는 것이 과연 ‘운동’이고, 휴머니즘일 수 있는가?
게다가 조선일보의 페미 기자는 남성이 다리 벌리는 것을 원숭이에 빗대어 비하한다... 과거 남자들이 했던 못된 짓거리 따라하기가 남녀평등이고 여성 해방인지, 남성이 여성을 성희롱해왔듯이 이제 여성들도 그렇게 남자를 성희롱하며 비하해야 쾌감을 느끼겠다는 것인지,,, 그것이 예술적 행위에 그치면 그만이지만, 그런 것이 텔레비전 드라마, 광고, 그리고 지하철과 길거리에서 공연되게끔 정책 방향이 수립된다면, 이건 분명하게 잘못된 것이고, 비판되어야 한다. 전교조에서 학생들에게 ‘이 새끼’ 등의 저질스런 말이 튀어나오는 편향된 부시, 고이즈미 비판 자료를 그대로 수업하는 것은 분명히 잘못된 것이다.
마찬가지로 학교에서 수행하고 있는 남녀 평등 교육, 그리고 여성부 홈페이지의 어린이 양성평등 교육 - 언론에 보도되자 부랴부랴 삭제하고 사과문을 게재했지 - 등은 ‘아버지’에게 부정적 이미지를 심어 주어서, 부지불식간에 남성을 혐오하거나 비하하게 하는 편향으로서 분명히 비판되어야 한다.
이런 것을 비판하는 안티페미니스트가 과연 잘못된 것인가? 아니면 이런 비판을 받아들이지 않고, 낡고 위험하고 급진적인 서구의 협소한 패러다임으로서의 페미니즘의 틀만으로 세상을 재단하는 꼴페미스러움이 잘못인가?
과연 노무현과 열린우리당, 그리고 민주노동당이 들어서서 가져온 신선한 정치, 그리고 민중을 위한 실질적 정책, 아니 정책은 아니더라도 민중을 위한 실질적 이슈들... 왜 이런 것들은 만들어내지 못하는가?
노무현 대통령이 오죽 답답했으면 지은희에게, 유아원이나 유치원에 정부 보조금을 주지 말고, 유아를 둔 주부에게 직접 보조금을 지급하는 방식으로 바꾸어 보라고 주문을 했겠는가? 그렇지만 꼴페미 지은희가 말을 들을 리가 없지..
그러는 상황 하에 여성 운동의 학생 부대인 이화여대는 군대 해체를 위한 양심적 병역 거부 운동을 지지하는 운동을 하면서, 군인을 비하하고, 전쟁이 나면 여자가 강간당한다고 전쟁 반대를 외치면서 국방부 벽에 페인트로 군대 해체를 써대고도 잡혀가지 않는 민주화된 세상에서, 할 짓이 없으니, 돈 들고 그런 낭비를 하면서, 정작 이 사회의 중대한 그늘은 무엇이고, 어디에 어떻게 햇볕을 쬐어야할지 고민이 없다.
인터넷 신문 일면, 게시판 등에 바로 이 페미성 기사가 아니면 한나라당의 수준 낮은 전여옥의 더러운 입과 열린 우리당의 난잡한 욕설 오감, 청와대와 박근혜의 뜽금없는 정체성 논쟁(?) 이런 상황 하에서 국민들은 지치고 짜증이 난 것이며, 그 책임은 일단 정부 여당에게 돌아간 것이다.
첫댓글 물고기도 먹이가 없는곳은 가지않듯이 한번잃은 민심은 되찿기란 쉬운일이 아닐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