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모두가 아는 ‘서시’, 정작 윤동주는 자신의 시집을 한 권도 보지 못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국에서 학교를 다녔다면 그다음 구절까지 자연스럽게 떠올리는 사람이 많다. <서시>와 <별 헤는 밤>, 그리고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는 이제 한 시인의 작품을 넘어 여러 세대가 함께 배운 문장이 됐다.
그런데 윤동주는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시집을 생전에 한 권도 받아보지 못했다.
1941년 연희전문 졸업을 앞둔 윤동주는 자신이 쓴 시 가운데 19편을 골랐다. 맨 앞에는 새로 쓴 <서시>를 놓고, 직접 원고를 옮겨 적어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제목의 묶음을 세 부 만들었다.
한 부는 자신이 가지고, 한 부는 스승 이양하에게, 나머지 한 부는 가까운 후배 정병욱에게 건넸다.
원래는 졸업을 기념해 책으로 내고 싶었다. 하지만 조선어로 쓴 글조차 자유롭게 발표하기 어려웠던 시절이었다. 일제의 검열을 걱정한 이양하는 지금 출판하는 것은 위험하다며 말렸고, 윤동주는 뜻을 접었다.
그때는 아무도 몰랐다.
세 부 가운데 정병욱이 받은 한 부가 훗날 윤동주의 시를 되살리는 가장 중요한 원고가 될 줄은.
정병욱 역시 안전한 곳에 있지 못했다. 1944년 학병으로 끌려가게 되자 그는 윤동주의 원고를 전남 광양 망덕포구의 집에 가져가 어머니 박아지에게 맡겼다.
어머니는 종이뭉치를 명주 보자기로 싸고 항아리에 넣었다. 그리고 집 마룻장을 뜯어 바닥을 깊이 판 뒤 항아리를 묻었다. 그 위에는 책상과 서류함까지 올려놓았다.
시 한 편을 보관하는 데 이런 일이 필요했던 시대였다.
윤동주는 그 원고가 광양의 마루 밑에 숨어 있는 동안 일본에 있었다. 1943년 일본 경찰에 체포됐고, 조선의 독립과 민족문화를 주장했다는 이유로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1945년 2월 16일, 후쿠오카형무소에서 생을 마쳤다.
광복은 불과 반년 뒤에 찾아왔다. 윤동주는 자신의 시를 마음 놓고 출판할 수 있는 날도,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제목이 책 표지에 찍히는 순간도 보지 못했다.
반면 정병욱은 살아 돌아왔다.
어머니가 지켜낸 항아리도 그대로였다. 윤동주 자신과 이양하가 가지고 있던 두 원고는 행방을 알 수 없게 됐지만, 마루 밑에 숨겨졌던 한 부는 남았다.
정병욱과 윤동주의 친구 강처중 등은 이 원고와 유족이 수습한 작품을 모았다.
1948년, 윤동주가 세상을 떠난 지 3년 만에 31편을 실은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나왔다. 이후 새로운 작품들이 더해지며 우리가 지금 읽는 윤동주의 문학이 갖춰졌다.
정병욱은 훗날 자신의 평생에서 가장 보람 있고 자랑스러운 일이 윤동주의 시를 간직했다가 세상에 알린 일이었다고 회고했다. (한국경제)
지금 광양 망덕포구에는 그 집이 아직 남아 있다. 교과서에서 너무 익숙하게 읽었던 <서시>가 한때는 들키지 않기 위해 명주 보자기에 싸여 항아리 속에 들어가 있었다는 흔적도 그곳에 남아 있다.
윤동주는 자신의 첫 시집을 보지 못했다. 하지만 누군가 그 종이를 버리지 않았고, 누군가는 아들이 맡긴 원고를 마룻바닥 아래까지 숨겨 지켰다.
한때 세상 밖으로 나오지 못해 땅 아래 숨어 있던 문장들은, 지금 한국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소리 내어 읽는 시가 됐다.
(출처 - 잊지 못할 80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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