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마다 성경을
(사도행전 17 : 10-15)
바울 일행의 데살로니가 선교는 그 도시의 불량배들 때문에 죽음의 위기를 느끼면서도 성공리에 끝났으며, 하나님께서는 그 일행들을 다시 베뢰아로 인도하셨습니다. 베뢰아에서 사도바울은 어떻게 전도하였습니까?
1.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였습니다.(11절)
데살로니가에서 박해를 받은 바울과 실라가 박해를 피하여 밤중에 베뢰아로 갔습니다. 베뢰아의 유대인들은 데살로니가 유대인들과는 달리 그리스도의 복음에 관하여 편견이나 선입견에 사로잡혀 있지 않았습니다. 이들에게는 보다 자유스러운 사고와 신앙이 있었으며, 아무리 이질적인 지식, 이론, 철학이라 할지라도 어디까지나 받아들이고 포용하려는 마음들이 있었습니다.
마음이 열려져 있는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바울이 말씀을 전할 때, 자기가 알고 있는 지식을 가지고 판단한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을 들을 때 온 마음을 다 열고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습니다.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은혜를 사모한다는 것입니다. 능력을 사모했다는 것입니다. 축복을 사모했다는 것입니다. 사랑을 사모했다는 것입니다.
--날마다 성경을 상고했다는 것은 성경을 날마다 읽었고 경험했다는 것입니다. 날마다 성경을 상고했습니다.
요한복음 5장 39절에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디모데후서 3장 15절에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누가복음 24장 32절에 “그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기록된 성경말씀을 깨달을 것뿐만 아니라 실제 생활해서 성경말씀이 체험되었다는 것입니다. 말씀이 살아 있다는 것을 체험했다는 것입니다. 이론이 아니라 실재를 경험했다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사람들은 비록 번성한 항구도시에 살고 있었지만 저들의 마음은 폐쇄적이었습니다. 바다는 열려져 있었지만 사람들의 마음은 닫혀 있었습니다. 문화는 개방되었지만 세계관은 닫혀 있었습니다. 그러나 산으로 둘려 싸여 있는 작은 내륙 도시에 불과한 베뢰아 사람들은 마음이 활짝 열려져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3장 20절에 에 “볼찌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했습니다. 베뢰아 사람들은 마음의 문을 열고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니 말씀이 저들 위에 역사했습니다. 저들의 인생이 달라졌습니다.
사람을 물가로 데려갈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물을 먹는 것은 오직 자신의 입을 열어야 가능한 것입니다. 영적으로 은혜 받는 것도 마음의 문을 열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가장 신사적인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자신의 마음의 문을 열고 하나님을 받아들이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마음의 문을 열고 하나님의 가치관을 받아들이는 사람입니다. 자기가 알고 있는 지식으로 하나님을 판단하지 않고, 하나님이 자신의 생각과 가치를 판단하도록 맡기는 것이 마음을 여는 일입니다. 이런 점에서 베뢰아 성도들은 마음을 활짝 열고서 하나님이 주시는 새 세계를 받아들였습니다.
하나님이 잘되게 되는 사람은 성경말씀에 마음의 문을 엽니다. 축복의 문을 엽니다. 믿음의 문을 엽니다.
2. 믿는 사람이 많아졌습니다.(12절)
이 얼마나 중요한 말씀입니까? 말씀을 집중적으로 받았습니다. 온 마음을 기울여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다는 얘기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마음을 다해서, 열심히, 주의를 집중해서 들었다는 것이지요. 얼마나 귀한 일입니까? 공부를 잘하는 비결도 별것 아닙니다. 얼마나 집중하는 훈련이 잘되어 있느냐에 달렸습니다. 주위가 산만하다는 것은 공부할 때 딴 생각하고, 집중하지 않는다는 얘기입니다.
신앙생활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말씀 잘 듣는 사람이 영적으로 성숙합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납니다. 들어야 역사가 일어납니다. 듣더라도 그냥 듣는 것이 아니라 한 말씀이라도 놓치기 아까워하면서 들어야 합니다. 꿀보다 송이 꿀보다 더 달콤하다고 믿고 들어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 이 말씀이 내 속에 있는 불안과 염려를 이기게 만들고, 이 말씀이 내 인생 전체를 지배하게 되고, 나중에는 영적인 권세가 생겨 모든 환난을 능히 이기는 자가 됩니다.
역대하 20장 6절에 “이르되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는 하늘에서 하나님이 아니시니이까 이방 사람들의 모든 나라를 다스리지 아니하시나이까 주의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능히 주와 맞설 사람이 없나이다”
남유다 여호사밧을 치고자 모압자손과 암몬 자손들과 마온 사람들과 함께 왔습니다. 연합군대가 쳐 들어 왔을 때 여호사밧은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이 큰무리를 우리가 대적할 능력이 없고 어떻게 할 줄도 알지 못하옵고 오직 주만 바라보나이다”
하나님께서 이기게 하여 주셨습니다. 여호와께 감사하세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도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치게 하시므로 그들이 패하였습니다.
사도바울의 설교 내용은 어디로 가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도’가 전부였는데, 이들은 그것이 사실인지 아닌지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였습니다. 성경 그 자체에서 진리를 찾으려고 하였습니다. 그 결과 많은 신자를 얻게 되었는데 이방인 개종자들 중에는, 지적으로 물질적으로 유력한 사람들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음을 보여줍니다.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그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 또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 아니하니 하였습니다.
역대상 23장 3절에 “레위 사람은 삼십 세 이상으로 계수하니 모든 남자의 수가 삼만 팔천 명인데”
사도행전 4장 4절에 “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 믿는 자가 많으니 남자의 수가 약 오천이나 되었더라”
믿는 사람이 많았다고 했습니다. 전도가 수평이동이 아니라 예수님을 알지 못했던 사람이 예수님을 알게 되고 믿는 사람이 많아 졌다는 것입니다. 신앙생활하다가 낙심되었던 사람들이 예수님을 다시 믿는 사람이 되도록 권면해야 합니다. 여기에 귀부인들이 있었고 남자들이 있었습니다. 교회에 귀부인과 남자들이 많아져야 합니다. 남자들이 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귀부인들이 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큰 일을 해야 할 사람이 모여야 합니다.
3. 저들도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13절)
사도바울의 회당전도는 이방선교의 효과적 전략이 되었습니다. 또한 그것은 예수님께서 안식일마다 회당예배에 참석하고 거기서 복음을 전하셨던 방법의 계승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회당 전도는 전도자들에게 있어 유대인들의 표적이 되어 핍박의 결정적인 요인이 되기도 했습니다. 사도바울이 베뢰아에서 복음을 전하고 있다는 소식을 쉽게 전해들은 데살로니가 유대인들은 약 80km나 떨어져 있는 이곳까지 쫓아와서 사람들을 선동하여 전도 사역을 방해 하였습니다. 마치 바울의 1차전도 여행 때 비시디아 안디옥과 이고니온에 살던 유대인들이 루스드라까지 따라와서 바울 전도를 방해하고 돌로 치던 것과 같습니다(행 14:19-20). 이런 유대인의 완악한 태도는 복음에 대한 오해와 영적 무지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큰 죄악을 저지르게 되는 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엡 4:17-20).
다윗을 보세요. 이스라엘과 오랜 적대관계였던 암몬 왕이 죽었습니다. 적대관계지만 왕이 죽으면 통상적으로 조문사절단을 보내지 않습니까? 다윗은 신하를 보내어 암몬 왕을 조문하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상식이 통하지 않는 암몬 왕 하눈이 조문사절단이 자기 나라를 정탐하러 왔다고 수치를 주어서 돌려보냅니다.
다윗의 신하들은 수염을 깎이고, 입고 있던 바지도 중동볼기까지 잘렸습니다. 긴바지를 다 잘라버리고 팬티처럼 입혀서 돌려보낸 것입니다. 이때 다윗의 너그러움이 드러납니다. 창피를 당하고, 형편없는 몰골로 왕 앞에 부끄럽게 설 신하들의 마음을 배려했습니다. 자신도 화가 나지만 어려움을 당한 신하들의 마음을 다정다감하게 헤아려 수염이 다 자랄 때까지 여리고에 머물게 했습니다. 다윗은 왕이지만 아래 사람을 배려할 줄 알았고, 너그러움으로 대하는 신사였습니다.
데살로니가에서 바울을 박해하던 유대인들이 백리나 떨어진 베레아까지 찾아와서 난동을 부리고 행패를 부렸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원수 갚지 않았습니다. 왜 대응하지 않았습니까? 백리까지 쫓아와서 자신을 박해하는 유대인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나한테 비한다면 당신들은 그래도 약과요! 나도 한때는 교리에 갇혀서 사람 죽이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던 사람이요!'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믿고 있는 교리에 틀에 갇혀서 스데반을 죽이는 일을 당연하게 여겼습니다. 그것도 모자라 나중에는 국경선을 넘어 다메섹에까지 가서 예수 믿는 사람을 잡기에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극성스러움이나 지금의 저들의 극성이나 다를 게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의 성질로 보아서는 한판 붙어야 직성이 풀릴 것 같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대항하거나 응징하지 않고 그대로 아덴으로 내려갑니다. 바울은 왜 극렬한 유대인을 피해 아덴으로 내려갔을까요?
그것은 바울을 박해하는 사람이 이방인 아니라 유대인이기 때문입니다.
전도하다가 보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전도방해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보통 차전도를 하면 차 마시는 사람들이 다른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이 오래동안 머무르고 전도방해한다는 것입니다.
교리에 갇혀서 패쇄적이어서 그렇지 저들도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이방사람들의 눈이 있어요.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끼리 싸웁니다. 같은 민족기리 싸웁니다. 대응하고 싸우다가는 하나님의 영광을 가릴 것 같으니 신사적으로 물러난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박해는 오히려 복음을 신속하게 여러 지방으로 전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바울의 생명과 사명을 아끼는 신자들이 바울의 신변을 호위하고 아덴으로 가게 하였으며, 곧이어 실라와 디모데까지 보내기로 했습니다.
사도 바울의 선교여행은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우리가 이웃에게 복음을 전하는데 어떤 어려움이 있습니까?
데살로니가에서 와서 복음을 전하는데 방해하는 사람들이 생겼습니다.
방해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극복했습니까?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였습니다.
실라와 디모데를 같이 오게 했습니다.
성경상고와 사람동역입니다. 방해하는 사람도 품을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