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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강산풍우정-
우리나라로치면 박서장군?
원숭환(袁崇煥, 1584년 - 1630년)은 명나라 말기의 무장이다. 자는 원소(元素)이며, 현재 광동성 동관 출신으로 하카족이었다.
뛰어난 전략으로 요동과 요서(현재 요녕성 남부)에서 후금군에 승리해 삼국 시대의 이름난 군사인 제갈량에 비견되면서 찬사를 받았다. 군사에 대해서도 배려 깊은 인물이었지만, 명 왕조 내부의 알력 다툼으로 처형됐다.
1622년 천계 2년에 병부 직방 주사에 임명됐다. 이 때, 위장을 하고 혼자서 적의 진영에 가서 정보를 수집하면서 영원성 개축(또는 보수)의 전략적 중요성을 강하게 느꼈기 때문에 귀국 후 여진족과 국경 지대인 요동 지역 방위를 위해 지원했다. 그리고 산해관의 외곽으로 영원성 (현재의 흥행성 현성)을 축성했다. 이 성은 성벽의 높이는 10.2m, 성벽의 두께는 기저부에 약 9.6m, 상단에 약 7.7m이며, 거의 사각형이며, 4개의 문을 갖고 있었다. 그곳에 군신의 반대를 무릅쓰고, 포르투갈에서 최신식 대포( "홍이포")를 들여와 성에 설치하여 총병 만계, 참장 조대수의 보좌를 받아 병사를 잘 훈련시켰다.
1626년 천계 6년 1월, 누르하치의 후금군이 쳐들어왔지만, 이들을 격퇴(영원성 전투)했고 공적으로 병부시랑 요동순무 주지관외 군사로 임명되었다. 이듬해 1627년 영원성과 금주성에서 홍타이지를 격퇴하였다.
숭정 원년 (1628년)에는 병부상서 우부도어사(右副都御史)가 되었다. 동시에 가도(皮島)를 거점으로 교역을 하고 있던 명나라 하급 장교의 모문룡을 직무 태만의 이유로 주살했다.
현재의 영원성 남문
원숭환이 죽은 뒤 요동(遼東)을 방위하던 병사들의 사기는 급격히 저하되었으며 명군(明軍) 장수들은 잇달아 후금(後金)에 투항하였다. 이로써 명(明)은 급격히 몰락의 길로 들어섰다. 명(明)이 멸망하고 만주족(滿洲族)의 청(淸, 1636∼1912)이 중국을 지배하자, 원숭환은 한족(漢族)들에게 과거 송(宋, 960∼1279) 시대에 금(金, 1115∼1234)에 맞서다가 진회(秦檜, 1090 ~ 1155)의 음모로 억울하게 죽은 악비(岳飛, 1103~1141)와 함께 ‘반청 흥한(反淸興漢)’의 영웅으로 숭앙되었다.
당시 청나라는 누르하치가 죽고 극도의 긴장과 권력다툼으로 혼란스러울때였다. 명나라는 그 기회를 못잡았다.
국고는 바닥이나고 이자성의 반란군은 베이징을 함락시켜버린다..
(아!! 원통하다 원숭환이 살고 청이 자멸했다면.....)
하지만 희망은있었다. 이자성과 오삼계!!!
이둘이 합쳤으면 한족의나라는 이어졌을겁니다.
이자성(李自成, 1606년 9월 22일 ~ 1644년)은 명나라 말기의 농민 반란 지도자이다.
초대 황제가 되어 수도인 베이징[北京]으로 진격했다. 이자성은 숭정제를 배신한 환관들에 의해 쉽게 수도를 차지할 수 있었지만 그곳을 오래 장악하지는 못했다. 그것은 명에 충성하던 오삼계(吳三桂:1612~78)가 북동부 변경에 있던 만주족을 중국으로 끌어들여 명의 회복을 도모했기 때문이었다. 명과 만주족의 연합군에 의해 그는 수도에서 쫓겨나 중국 북부의 후베이 성으로 도망쳤으나, 그곳에서 지역 주민들에 의해 살해되었다고 한다.
(오삼계는 관.영 기병이라는 최정예병이 있었는대 이는 청군이 두려워하던 존재다. 그리고 이때 잔존세력들과
그는 청이 제시한 고관직을 받아들여 그후 거의 30년 동안 청을 위해 싸웠다. 1659년 오삼계는 남서부지역에 있던 명의 잔존세력을 소탕할 책임을 맡았는데,(간신!!!) 이 임무를 수행한 후 남서부 윈난 성[雲南省]의 행정적·군사적 전권을 쥐게 되었다. 그는 이같은 권한을 이용해 윈난 성과 그에 인접한 구이저우 성[貴州省]을 거의 독립된 번국(藩國)으로 만들어, 세금을 징수하고 배타적인 상권을 수립해나갔다. 같은 시기에 이웃 남부지역 광둥 성[廣東省]과 푸젠 성[福建省]에서도 다른 두 장군 경정충(耿精忠)과 상지신(尙之信)이 이와 비슷한 번국을 세웠는데, 그결과 중국 남부 전역에 걸쳐 청에 대항할 수 있는 세력이 형성되었다.
오삼계의 애인 진원원
"......"
이자성이 오삼계를 돕고 오삼계가 이자성을 도왔다면 됬지만,
오삼계는 팔기군과 대순을 멸망시키게된다.
첫댓글 만력 말년 이후의 명나라는 그야말로 "관성으로 나아가는 배"의 상황이었습니다. 특히 왜란과 청군의 침입으로 개판된 화북지역(구체적으로 북직례, 산동)은 토적들의 소굴로 전락하였고, 중앙정부의 통제력이 먹혀들지 않을 지경이었죠...-_-; 산동의 경우는 지방관의 1/3 정도만 임지에 부임했고, 나머지는 토적이 두려워 부임을 회피하거나 부임 도중 토적에게 참살당했습니다. 심지어는 토적을 진압하려는 관군의 횡포를 보다못한 지역의 향신들이 관군을 성안에 들이지 않기 위해 관군과 사투를 벌이는 개막장 상황이 연출되죠...ㄷㄷ 여기에 청군이 수차례 침입하여 북직례, 산동은 물론 남직례까지 쳐내려옵니다.
당시 농민들의 상황은 이렇습니다. 농번기에는 농민이 되었다가 나라에서 조세를 걷을 철이 되면 일제히 토적이 되었고, 이들을 회유하면 다시 농사를 시작했다가 다시 토적이 되기를 반복했죠. 토적들의 활동이 워낙 활발하다 보니, 살려면 토적이 될 수 밖에 없는 어처구니 없는 상황이 됩니다. 여기에 청군의 방어를 위해 대규모 징세를 행하면서 아예 농민들이 일제히 토적이 되고요. 당시 명나라가 살아날 수 있는 가망은 그닥 높지 않습니다. 몇몇 인물들이 나왔다고 망하는 나라가 살아나는 것은 아니죠...^^; 원숭환이 영원성에서 지키는 상황에서도, 청군은 영원성을 우회해서 북직례를 드나들었습니다...-_-;
명나라는 이미 활력을 잃고 만주족이란 외세침입이 없었어도 농민반란으로 천명을 잃어가고 있던상황이지요. 부패하고 거대한 관료조직. 사치스럽고 궁정과 정쟁.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원숭환은 상당히 과평가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국내의 혼란한 상황을 보건데 관외에 거점방어를한것은 오히려 국력만 낭비한 요소가 더 컸다고 생각합니다.
차라리 거용관과 산해관 중심으로한 장성방어체제가 훨씬 좋은선택이었을것 같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