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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 믿음으로 자백해야 하나?
(6) 그래야 과거를 잊고 전진할 수 있다.
사람이 절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는가 하면 반드시 잊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은혜'는 잊지 말아야 하고, 과거의 '성공'과 '죄'는 잊어야 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반대로 합니다. 잊이 말아야 할 것은 잊고, 잊어야 할 것은 기억합니다. 바울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빌립보서 3:13-14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김세윤 교수님은 빌립보서를 강해하면서 이 구절에 대해 이렇게 썼습니다.
"단거리 주자가 뒤를 돌아보아서는 안 됩니다. 앞만 보고 달려야 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잊어버리고자 하는 '뒤에 있는 것들'은 자신이 과거 유대인으로서 성취한 것들과 교회의 핍박자로서의 저지른 죄를 모두 포함합니다. 그가 자신의 과거의 성취에 연연하면 그는 자만해져서 그리스도를 얻고자 하는 경주에 매진하지 못할 것입니다. 또 과거의 실패나 죄에 대한 애석함과 죄책감에 짓눌려 있어도 심령이 병들고 믿음이 뒤틀려 건전한 성화의 길을 가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이 모든 것들을 다 잊어버린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빌립보교회에 쓴 두 가지,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한 것'에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바울이 효과적인 사역을 위해 자신의 과거를 잊어야 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부름을 받기 전 지독한 박해자였습니다.
디모데전서 1:11-16 "이 교훈은 내게 맡기신바 복되신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을 따름이니라.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성경은 그가 스데반을 돌로 쳐 죽이는 자리에 있었다고 말합니다.
사도행전 7:58 "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사울은 스데반을 죽이는 것에 찬성했습니다.
사도행전 8:1 "사울은 그가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사도행전을 더 읽어내려가면, 누가가 바울에 관해 이렇게 쓴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9:1-2 "사울이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가져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따르는 사람을 만나면 남녀를 막론하고 결박하여 예수살렘으로 잡아오려 함이라."
이것이 바로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라고 말했을 때 의미한 것들입니다. 믿는 자들을 핍박하고, 스데반을 죽이는 일에 찬성하고, 교회에 부렸던 행패를 계속 기억하는 것은 바울에게는 끔찍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바울은 그것을 잊어버리는 법을 배워야 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았으면, 바울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이루지 못했을 것이며, 하나님께서 명하신 사역과 직분을 감당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잊어버리는 법을 배우지 못하면 하나님의 계획을 성취할 수 없습니다. 자신의 잠재력을 모두 발휘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처럼 우리도 과거를 잊어버리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노벨 헤이즈 목사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과거의 경험이 '예비하신 주님의 계획'에 걸림돌이 되게 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단이 그 경험들을 이용해서 당신의 인생을 노략질하려 할 것입니다. 과거는 뒤에 남겨두고 주님과 함께 전진해야 합니다."
존 에카르트 목사님은 흥미로운 말을 했는데,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예수님을 믿은 후에도 여전히 과거에 묶이고 얽매인 채 살아가는 많은 믿는 자들을 사역해왔다. 과거는 사슬이 되어 당신이 현재를 누리지 못하게 하고 미래의 성공도 빼앗아 버릴 수 있다.
한 젊은 청년에게 축사사역을 하던 중 절대 그를 떠나지 않겠다고 호언장담하는 강력한 영 하나가 드러났다. 내가 그 영에게 정체를 밝히도록 명령하자 자신의 이름을 '과거'라고 대답했다. 그 영은 젊은이가 성공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을 영위하지 못하도록 과거에 묶어놓는 것이 자신의 임무라고 설명하기 시작했다. 실제로 그 청년은 이혼을 했었고 그 과거가 계속해서 그를 괴롭혔던 것이다. 이 경험은 상처들과 고통을 안겨준 과거에 묶여서 온전하게 회복되지 못하게 방해하는 임무를 맡은 셀 수 없이 많은 영들이 사람들에게 배정되어 있다는 사실에 대해 알게 해주었다. 이러한 상처들의 많은 부분들은 곪게 되어 더러운 영들의 처소가 된다."
이제, 믿음으로 자백하고 자신의 과거를 잊어버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아시겠지요! 그렇다면 믿음으로 자백하고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들이십시오. 그리고 자신의 과거를 깨끗이 잊으십시오.
흔히 있는 말입니다만, 과거에 큰 죄를 지은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자신을 크게 사용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제 일류가 되기는 글렀고 2류나 3류가 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자기가 지은 죄를 생각할 때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참소하는 자인 사탄이 지어낸 거짓말입니다. 릭 조이너는 『추수』라는 책에서 이런 생각을 다음과 같이 반박했습니다.
"다가오고 있는 날에 가장 큰 생명을 교회에 가져올 사역자 중 얼마는 지난날 큰 과오를 저지른 이들일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완전히 낭패하여 모든 인간의 노력과 힘의 막바지에 다다른 후에야 주님의 쓰임을 받게 됐다는 것은 성경적으로 또 역사적으로 실재하는 일들이다. 높임을 받기 전 겸손이 오는 것이다.
우리는 이 같은 전례를 족장들의 생활에서 본다. 아브라함은 이삭 전에 이스마엘을 낳았다. 요셉은 해와 달과 별들이 그에게 절하는 것을 보았지만 먼저 노예, 다음에는 죄수의 몸이 되어야만 했다. 모세는 자기 자신의 힘으로 자기 동족들을 구원하려 했지만 하나님이 그를 쓰실 수 있기까지 그당시 가장 천한 직업이었던 목자로서 광야에서 40년을 보내야만 했다. 다윗은 뒤이을 왕으로 기름부음 받은 후 망명객으로 여러 해를 보내며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 받아 장차 다스리게 되어있는 바로 그 백성으로부터 숨어 다녔다. 베드로는 주님의 가장 위대한 증인이 되기 전에 주님을 부인한 배반자였고, 바울은 '은혜의 사도'가 되기 전에는 교회를 죽도록 핍박한 죄인 중의 괴수였다. 이 같은 일은 모든 사람에게 한결같이 그렇다고 할 수 없다고 해도 아주 위대한 영적 전진을 위해 쓰임받는 이들에게는 참된 것으로 보인다. 교회의 많은 장로들과 교부들은 누구라도 그처럼 실패와 연단으로 깨어지지 않은 자에게는 거의 신뢰를 두지 않는 것이 상례였다.
창세기 3장에서부터 끝까지 성경은 한 가지 중요 주제를 다룬다. 구속. 어떤 면에서 하나님은 구속하시는 사업을 하는 것이다. 그분의 마음은 잃어버린 것들을 찾아 회복시키시는 것이다. 이것 때문에 극심한 영적 실패를 체험한 사람 중에 많은 수가 그 실패 때문에 주님께 더 쓸모 있는 사람이 된다. 주님은 그들을 회복시키시고 강하게 쓰실 것이다. 이런 실패로 인한 겸손함이 주님으로 하여금 그들에게 더 많은 영적 권세를 주시도록 한다. 주님을 부인한 후의 베드로에게 주님이 하셨듯이 ... "
여러분이 이와 함께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는데, 로마서 11장 29절입니다.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
하나님은 우리가 "사망에 이르는 죄"(요일5:16)를 범하지 않는 한 우리에게 대한 그분의 부르심을 절대로 철회하지 않으십니다. 이것은 케네스 해긴 목사님의 책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마지막 기회
나는 1945년에 텍사스 서부지방에서 집회를 하고 있었습니다. 교회의 이사 한 분이 내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해긴 목사님, 내가 목사님께 질문 하나를 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 교회의 전임목사가 그 건물을 지었고, 이곳 15,000명의 도시에서 30년간 목회를 하였다고 설명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내를 떠나 이 작은 도시에서 다른 여자와 만나서 살았습니다. 그는 그 여자와 결혼하지 않고 같이 살았습니다.
내가 그 교회에 설교를 하러 갔을 때는 그 전임목사가 다른 여자와 함께 그 교회를 떠난 지 수년이 지난 후였습니다. 그 목사가 떠난 후에는 매년 다른 목사가 오지만 한 일 년쯤 있다가 또 떠나버리곤 했습니다. 교회는 그 전임목사가 다른 여자와 도망간 것 때문에 생긴 나쁜 소문을 소멸시키려고 노력했습니다. 그 전임목사는 아직도 같은 도시에 그 여자와 함께 살고 있었고 그는 도박장을 운영하며 그 외에도 옳지 않은 사업들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삶의 방식이 교회에 대한 나쁜 소문을 만들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무튼 이 이사는 내게 말했습니다. '해긴 목사님, 한 3주쯤 전 주일날 아침 그 전임목사가 갑자기 교회의 주일예배에 온 것입니다. 교회의 한 여자가 공중에서 방언을 말했습니다. 그리고 이 전임목사가 일어나서 방언 통변을 하였습니다. 이것이 옳은 일입니까? 이것이 하나님이 한 일일까요?'
내가 말했습니다. '당신은 구약에서 사울이 타락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졌을 때 선지자들고 함께 하면서 예언하기 시작(사무엘상 19장을 읽어보십시오)했다는 것을 읽어보지 못했습니까? 성경은 하나님의 은사와 소명에는 후회가 없다고 말합니다(롬11:29). 그렇지만 그것은 하나님이 사울의 죄를 눈감아준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래서 내가 통변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인가를 판단하기 전에 그 메시지가 무엇이었는지 말해주십시오.'
그 이사는 말했습니다. '우리는 모두 놀랐습니다. 처음 부분은 기억할 수 없지만 끝은 이렇게 맺었어요. '이것이 너를 마지막 부르는 소리이다. 나는 너에게 마지막 기회를 주고 있는 것이다.'
이 일이 일어났을 때는 그 전임목사가 하나님과 교제가 있은 지 한 3년쯤 되는 때였습니다. 그 이사는 내게 말했습니다. '그가 그 통변을 마치자 큰 소리로 '나는 여기 있는 모든 사람들이 내가 예수님은 지옥에나 가라고 말한다는 것을 알기 원합니다!'라고 말하고는 돌아서서 교회에서 나가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이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전임목사가 그 메시지를 통변하면서 '이것이 너를 부르는 마지막 소리이다. 너의 마지막 기회이다'라고 한 것이 옳은 통변이었습니까?'
나는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로 온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사람에게 초자연적으로 말하고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그의 영으로부터 성령이 그에게 말하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그 통변은 몸 된 교회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말씀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 말씀을 들었습니다. 자비로우신 하나님께서 마지막 기회를 그에게 주어서 회개하고 죄에서 돌아서게 하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그것을 거절한 것입니다. 그는 성령이 그에게 하시는 말씀을 잘 통변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결정을 하고 그리스도를 그의 의지로 신중하게 부인한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이 '사망에 이르는 죄'를 짓고 버림받기 전에는, 절대로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이 철회되지 않습니다.
그러면 왜 그렇게 하실까요? 그것은 그 사람을 회복시켜서 다시 쓰고 싶어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바람이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입니다.
그런데 아주사 부흥 때 크게 쓰임받은 윌리엄 시무어 목사님은 이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본의 아니게 악영향을 끼쳤습니다. 케네스 해긴 목사님은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이라는 책에서 그것을 다음과 같이 소개했습니다.
"W. J. 시무어(W. J. Seymour) 형제는 1906년에 휴스턴 아래에 있는 텍사스 앨빈에서 캘리포니아로 왔고, 그 후 로스앤젤레스의 아주사 스트리트 미션(Azusa Street Mission)에서 성령의 부으심에 강력하게 쓰임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오순절 운도 초창기에는 거의 대부분의 오순절 운동 사람들이 히브리서 6장과 10장을 설교하면서 사람들이 실족하면(타락하면) 다시는 하나님과의 교제로 돌아갈 수 없다고 말했다고 했습니다. 마귀는 말씀에 대한 무지를 틈타 하나님의 백성을 도둑질하고, 눈을 멀게 하며, 멸망시키기 위해서 이런 가르침을 이용하였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성경구절들을 살펴봅시다. 그 구절들은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이라는 우리의 논의에도 들어맞습니다.
히브리서 6:4-6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놓고 욕되게 함이라."
히브리서 10:26-29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태울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 모세의 법을 폐한 자도 두세 증인으로 말미암아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죽었거든 하물며 하나님의 아들을 짓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가 당연히 받을 형벌은 얼마나 더 무겁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
그때 이 나이든 설교자들 중 한 분이 텍사스 코르시카나에서 주일 오후에 거리집회를 어떻게 가졌는지 이야기했습니다.
그는 헌금을 거두지 않았지만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축복하셔서 그의 발 앞에 돈을 던지게 하셨습니다. 이 일은 지금같이 돈이 그리 많지 않던 20세기 초에 일어난 일입니다. 그러나 그는 상당한 헌금을 받았습니다. 그가 나중에 헌금을 세어보았을 때 28달러였습니다. 그는 부자처럼 느껴졌고, 그 돈은 당시에 한 달 봉급의 액수였습니다.
집회 후에 널로 된 보도를 따라 걸어가고 있었는데(당시의 보도는 널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다른 거리집회에서부터 알고 있던 한 늙은 주정뱅이가 술집의 회전문을 밀치면서 나왔습니다(당시 텍사스에는 술집 문이 열려있었습니다).
늙은 주정뱅이가 비틀거리면서 그 설교자에게 다가와 소리를 고래고래 질러대며 '할렐루야라고 말해봐!'라고 하였습니다. 그 늙은 주정뱅이는 천천히 걸으면서 계속해서 요구했습니다. '할렐루야라고 말해봐. 안 그러면 내가 너를 때려눕힐테다!'
그 설교자는 '저는 할렐루야라고 말할 만큼이나 어리석었죠. 그러자 그 사람이 나를 때렸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 술주정뱅이는 설교자를 쳤고, 설교자는 술집 창문을 박살내고 그 안으로 쓰러졌습니다. 그것이 그가 기억하는 마지막이었습니다. 그는 맥주병 더미로 쓰러졌는데, 나중에 구경꾼들이 말하기를 그가 양손에 맥주병을 들고는 그 술주정뱅이를 거의 죽을 만큼 두들겨 패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는 우리에게 말했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을 만큼 몹시 화가 났었습니다.'
그가 정신을 차렸을 때 구경꾼들이 그를 술주정뱅이로부터 떼어내고 있었습니다. 경찰이 두 사람 모두 체포했습니다. 그는 싸웠다는 이유로 벌금을 물어야 했습니다. 오순절 사람이요, 순복음 교단 사람이자 방언을 말하는 설교자가 싸우다니!
그가 듣고 가르쳤던 대로라면, 당신은 이와 같이 죄를 짓고 실족할 경우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는 '내가 죽으면 지옥에 가겠지. 그렇다면 나는 이생에서 할 수 있는 한 모든 것을 하는 게 나을지도 몰라'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는 수중에 남은 몇 달러를 가지고 기차를 잡아타고는 휴스턴으로 가서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는 마침내 캘리포니아까지 오게 되었고, 약 12년 동안이나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서 술 마시고, 노름하며, 다른 여자들과 관계를 맺는 등 모든 것을 다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러는 동안에도 성령님이 자신을 계속 다루고 계셨다고 했습니다.
당시 캘리포니아에는 순복음 교회가 그리 많지 않았지만 그는 전화번호부를 뒤져서 그 교단의 교회를 찾아냈습니다. 그는 교회의 목사에게 전화를 걸어 '제가 찾아가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라고 말했고, 목사는 '좋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는 목사에게 말했습니다. '제가 은혜의 때에 죄를 지어서 하나님께 돌아갈 수 없다면, 성령님이 저를 혼자 버려두고 떠나셨으면 합니다.'
순복음 교회의 목사가 말했습니다. '아닙니다. 우리는 그런 가르침이 잘못된 것이란 것을 알았습니다. 그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 목사는 그와 함께 기도해주었고, 그는 하나님과의 교제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그가 그렇게 하자마자, '설교의 은사(the Preach)'는 여전히 거기에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은 후회하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는 텍사스에 아내와 자녀들을 남겨두고 떠나온 상태였습니다. 그가 한 첫 번째 일은 전화를 걸어서 아내와 자녀들이 어디에 있는지 알아보는 것이었습니다(그는 지옥에 가게 될 것이란 생각에 묶여 있어서 전에는 연락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캘리포니아에서 가족과 재결합하고 다시 말씀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순복음 교단에서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강력한 기름부음을 받고 하나님의 쓰임을 받았습니다. 내가 오순절 운동에 들어왔을 때 그에 관한 소식을 들었는데, 대부분의 설교자들보다 더 큰 기름부음이 그에게 임하였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은 후회하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 간증의 주인공처럼 극단적인 경우는 드뭅니다. 그러나 죄책감 때문에 선뜻 봉사에 참여하지 못하거나 자기의 잠재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여러분 가운데 그런 분들이 있다면 잘 들으시기 바랍니다. 어느 누구에게도 하나님을 섬길 자격이 없습니다. 예수님과 천사들을 제외하고 인간은 모두 예수님의 피를 통해서만 하나님을 섬길 자격을 얻을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9:13-14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를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하게 하여 거룩하게 하거든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
피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가능하게 합니다. 어떤 분은 "이 구절이 실제로 그런 의미인가요?"라고 묻고 싶을 것입니다. 예. 그런 의미입니다. 그 증거로 그 전에 나오는 구절들을 보십시오.
히브리서 9:1-7 "첫 언약에도 섬기는 예법과 세상에 속한 성소가 있더라. 예비한 첫 장막이 있고 그 안에 등잔대와 상과 진설병이 있으니 이는 성소라 일컫고 또 둘재 휘장 뒤에 있는 장막을 지성소라 일컫나니 금향로와 사면을 금으로 싼 언약궤가 있고 그 안에 만나를 담은 금 항아리와 아론의 싹 난 지팡이와 언약의 돌 판들이 있고 그 위에 속죄소를 덮는 영광의 그룹들이 있으니 이것들에 관하여는 이제 낱낱이 말할 수 없노라. 이 모든 것을 이같이 예비하였으니 제사장들이 항상 첫 장막에 들어가 섬기는 예식을 행하고 오직 둘째 장막은 대제사장이 홀로 일 년에 한 번 들어가되 자기와 백성의 허물을 위하여 드리는 피 없이는 아니하나니"
대제사장일지라도 피를 의지하지 않고는 성전에 들어갈 수도, 하나님을 섬길 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기자는 이것을 예수님의 피와 하나님을 섬기는 것에 적용합니다.
히브리서 9:8-14 "성령이 이러써 보이신 것은 첫 장막이 서 있을 동안에는 성소에 들어가는 길이 아직 나타나지 아니한 것이라. 이 장막은 현재까지의 비유니 이에 따라 드리는 예물과 제사는 섬기는 자를 그 양심상 온전하게 할 수 없나니 이런 것은 먹고 마시는 것과 여러 가지 씻는 것과 함께 육체의 예법일 뿐이며 개혁할 때까지 맡겨 둔 것이니라. 그리스도께서는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것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를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하게 하여 거룩하게 하거든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
오직 예수님의 피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가능하게 해줍니다. 누구도 예외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 피를 의지하여 죄를 자백하고 과거를 잊고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뭐가 이상합니까? 그러므로 낙심하지 말고 예수님의 피를 믿으십시오. 그래서 하나님을 당당하게 섬기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케네스 해긴 목사님의 소책자 『다가오는 회복』에 나오는 내용을 여러분에게 소개해드리고 싶습니다. 거기에 보면 해긴 목사님이 하나님께 받은 '예언'이 나옵니다.
"참으로 만군의 주가 말한다. 예비하라. 준비하라. 나와 동행하고 나의 성령에 민감하여라. 너와 네 가족이 축복받을 뿐 아니라 네 이웃도 축복받을 것이다. 그리고 네가 만날 모든 이들이 축복받을 것이다. 주의 축복이 거대한 강처럼 흐를 것이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이렇게 말했다. '오, 저는 그것을 놓쳤습니다. 저는 과거 곧 제가 저지른 그 실수들과 잘못들과 실패들과 그 끔찍한 나쁜 것과 죄에 대해 잊어버릴 수만 있다면 좋을텐데요.'
참으로 주가 말한다. 나의 피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기지 말라. 기억하라. 나의 피 곧 보혈, 신성한 피, 하나님의 신성한 아들의 피가 죄를 제거하기 위해 흘려졌다. 그리고 참으로 주가 선포하였다. 나 곧 나는 너의 허물을 도말하는 자라. 그러므로 나는 너의 죄악을 기억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과거를 곱씹어 생각하지 말라. 더 이상 과거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그리고 원수가 네 생각에 그런 그림을 떠올리면, 그냥 웃고 이렇게 말해라. '하, 하, 하, 하. 마귀야, 그것은 있지도 않아. 그것은 있지도 않아. 아버지께서 그것을 완전히 제거해 버리셨거든 피가 완전히 씻어버렸어. 이제 나는 그분 안에 서 있다!'
원수가 끈질기게 굴 수도 있지만, 그럴수록 더 많이 웃어라. 원수의 면전에서 웃어주어라. 그러면 그는 도망하고 숨을 것이다. 너는 하나님의 능력 가운데, 그분의 사랑과 자비 가운데 거하리라.
그러나 어떤 이들은 말했다. '주님은 나를 절대로 사용하실 수 없을 것이에요. 나는 너무도 약하고 무가치한 자예요. 나는 너무도 부족한 자예요.'
참으로 만군의 주가 말한다. 사람이 보는 눈이나 사람의 지성이 생각하는 판단을 따라 네 자신을 판단하지 말라. 오히려 나의 말씀의 계시를 따라 네 자신을 판단하라. 허물을 도말하였고 너의 죄악을 기억나게 하기를 거부했던 장본인이 바로 나임을 기억하라.
너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지은 장본인이 바로 나이다. 말씀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서 창조하셨다'(엡2:10)고 말씀하기 때문이다. 나는 나의 임재 가운데 설 수 없고, 오히려 나로부터 꽁무니를 빼며, 나에게서 달아나면서 '나는 무가치하고 실패한 몹쓸 자입니다'라고 울부짖는 새로운 피조물을 짓지 아니하였다.
그렇다. 보혈로 씻기고, 그분의 말씀으로 깨끗해지며, 그분의 성령으로 충만해진 자는 그분의 아들이 되었다. 참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그러니 오라! 보혈을 힘입어 담대히 나의 보좌로 들어와서 너의 구하는 바를 알려지게 하라.
네가 그곳에 속한다는 것을 깨달아라. 그리고 네 영에 거하는 나의 성령에 민감해지기 시작하라. 이는 그분이 너를 모든 진리로 인도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분이 너에게 장래의 일들을 보여줄 것이다!
그리고 주님은 모든 사람을 쓰실 것이다. 그리스도의 몸에서 사용되지 않는 지체는 없다.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의 몸에서 전임사역자가 될 수는 없겠지만, 나름의 자리(위치)에서 기능 할 수는 있다. 그러니, 네 자리(위치)를 차지하라."
여러분, 이 예언을 굳게 붙잡으십시오. 그리고 믿음으로 자백하십시오.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들이고 자신을 용서하고 자신의 과거를 말끔히 잊으십시오. 그래서 사도 바울처럼 과거가 발목을 잡지 못하게 하고, 하나님이 주신 은사와 부르심대로 끝까지 그리고 크게 쓰임받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