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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공포보다 더 무서운 이름 귀왕혈
제1장 멸문지화(滅門之禍)
산악과 같이 선 노인.
그 앞에 조용히 무릎을 꿇은 백의인.
바람이 여전히 세차게 불고 있었다. 다시 노인의 말소리가 바람을 흩뜨렸다.
『중원에는 네 사형이 있다』
『!』
깊은 물과 같던 백의인의 얼굴에 처음으로 떨림이 일어났다.
『사형… 이란 말입니까?』
노인은 고개를 끄떡였다.
『그렇다. 아직까지 말해주지 못했지만 네게는 먼저 입문한 사형이 있으며, 그는
지금 사명을 띠고 중원에 가 있다…』
백의인은 아직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사부를 보고 있었다.
『사부님… 그건…』
백발노인은 마치 그의 말을 막듯이 고개를 끄떡였다.
『이 일이 일맥단전(一脈單傳)하는 수호신문의 율법에 어긋남은 분명하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취해진 부득이한 조치…』
하늘은 여전히 회색으로 어둡다.
우우우….
눈보라는 점점 더 기승을 부리며 두 사람을 감싸고 있다.
노인의 말소리도 은은히 눈보라의 외침에 묻히고 있었다.
-왜 이런 편법이 필요하였는가는 세월이 흐른 뒤, 네 스스로 알게 될 것이며 대한
수호신문의 정통(正統) 또한 그때 비로소 이어지게 될 것이다!
세월의 흐름 또한 그 음성의 잔향(殘響)을 따라 쉼없이 흐른다. 하지만 백두산은
여전히 세월을 뛰어넘어 그 자리에 위대한 모습으로 자리하고 있다.
* * *
죽음보다 무서운 것이 있는가? 있다면, 그것은 죽음 직전에 느껴지는
공포(恐怖)이리라.
여기 그 공포보다 더 무서운 이름이 있으니, 그 이름은 바로 귀왕혈(鬼王血)이라!
어둠.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수많은 팔을 가진 악마상이 음산히 숨을 쉬고 있었다.
악마상은 기괴한 모습의 제단 위에 모셔져 있다.
어둠에 잠긴 제단의 높이는 일장여….
제단의 위에 자리한 그 악마상은 음산한 숨결과 같이 휘늘어진 휘장에 의해 좌우로
가리워져 더욱 기괴한 모습이었다.
문득 어둠 속에서 공기가 가늘게 흔들렸다.
그리고 그 제단의 앞에 소리도 없이 나타난 것은 한 사람의 흑포인.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나타난 그 흑포인의 전신은 먹물과 같은 흑포(黑袍)를 온통
뒤집어쓰고 있었다. 어두운 밤에 앙상한 나뭇가지가 일렁이는 것과 같다고나 할까.
『앙천사독(殃天邪毒)이 현신하여 귀왕(鬼王)의 명 을 기다립니다!』
낮은 음성이 그에게서 흘러나왔다.
순간, 어둠을 꿰뚫으며 제단 위 악마상의 눈에서 무서운 한망(寒芒)이 일어났다.
마치 심야의 하늘을 찢는 번갯불과 같은 빛이었다. 번갯불과 명백히 다른 점은
그것이 소름끼치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 앞에 존재하는 사람들을
모조리 공포로 떨게 만들….
앙천사독이라 자칭한 흑포괴인이 고개를 들었다.
마치 어둠을 들이받기라도 할 듯이 그의 머리는 거의 완벽한 대머리. 길게 자라
어깨까지 늘어진 머리카락은 실로 셀 수 있을 정도의 몇가닥에 불과했다. 더구나,
그의 얼굴은 온통 주름살투성이인지라 모든 것이 주름살 속에 파묻힌 듯한 착각이
들 지경이었다. 그 주름살 사이로 갈라진 틈에서 한가닥 기괴한 녹광(綠光)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그것이야말로 그의 눈이었다.
그때였다. 어디서 나타난 것일까.
악마상의 앞에서 두루마리 하나가 너울거리며 그의 앞으로 천천히 떨어져 내렸다.
그의 앞에 당도한 두루마리는 마치 누가 잡아당기기라도 한 듯이 쫘악, 펼쳐졌다.
거기서 드러난 것은 살아 움직일 듯 생생한 느낌의 중년인의 상반신 화상. 갓
50으로 보이는 그의 전신에서는 당당한 위풍이 절로 느껴져왔다.
『대장군 곽천수(郭天帥)다』
악마상에게서 심금을 파고드는 음성이 들려왔다.
『그 혼자만입니까?』
앙천사독이 두루마리의 중년인을 무심한 눈으로 바라보면서 입을 열었다.
『청부된 것은 그의 죽음이다. 나머지는 네게 맡기겠다』
그 말에 음산하고도 무표정한 웃음이 앙천사독의 눈매에 서렸다.
하긴 그것도 웃음이라 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눈빛에 음산한 흔들림이 일어났을 뿐이고 입가의 주름살이 잠시간 흉하게 깊어졌을
뿐이었으니까.
그는 아무 말 없이 독수리의 발과 같이 깡마른 손을 들었다. 그것과 함께 그의
눈앞에 펼쳐져 있던 두루마리가 격심한 폭풍에 휘말려 사라지는 조각배 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두루마리에 그려진 곽천수라는 중년인의 화상 중,
얼굴부분만이 가루로 화해 사라진 것이다.
그것과 함께 악마상의 눈에서 흘러나오던 빛이 꺼졌다. 다시 침묵이 찾아왔다.
어둠이 되살아났다.
팔척장신의 곽천수는 산악같이 굳건하고 당당했다
금릉(金陵)은 삼국시대 오(吳)의 손권(孫權)이래로 누대의 왕조가 도읍한 곳이다.
당시 고성의 주위 만 이십리이며 그 이름은 건업(建業)이라 불리어졌었다.
지난 날 제갈무후는 이 금릉을 일컬어 용이 서리고 범이 웅크린
형상(龍蟠虎踞)이라 하였거니와, 진(晉), 송(宋), 제(齊), 남당(南唐) 등 역대
왕조의 도읍지였던 이곳은 명(明)에 이르러 주원장(朱元璋)이 원(元)에 이어
천하를 통일하면서 하늘의 뜻을 따른다는 뜻으로 응천부(應天府)라 이름하며
도읍했다.
후일, 이 응천부는 명이 수도를 북경(北京)으로 옮기게 되자, 남경(南京)으로
이름이 바뀌게 되었다.
백화만발(百花滿發).
활짝 피어난 꽃들이 벌과 나비들의 살랑거림에 간지러운듯 진저리를 치고 있는
오후다.
새들이 하늘 높이 날며 지저귀고 있었다.
음월정(吟月亭)에서 바라보는 경치는 언제나처럼 평화로웠다. 음월정을 둘러싼
연못은 연잎이 푸르름을 자랑하며 연못을 덮고 있다.
이끼낀 거대한 정원석들로 둘러싸인 연못은 이 저택이 어제 오늘 세워진 것이
아님을 역사로 말한다.
음월정은 가산(假山)을 뒤로 하고 그 연못가에 세워져 있었다.
곽천수는 그 음월정에서 뒷짐을 진채로 우뚝 서 있었다.
당금 조정에서 가장 뛰어난 무장.
팔척장신을 자랑하는 그의 모습은 산악과도 같이 굳건하고도 당당했다.
명태조 주원장이 그의 뒤를 이어 2세황제가 된 손자 윤문을 부탁한
고명신탁(顧命信託)을 받은 사람중 하나가 바로 그였다.
주변의 평화로움과는 달리, 그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
어제, 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주왕(周王) 숙(▦)의 폐서인(廢庶人) 결정이
내려졌다.
뿐만 아니라 그는 운남(雲南)으로 유배되었다.
일개 유랑승려에서 일어나 천하를 휘어잡은 일대의 인물 주원장이 간 다음, 그
뒤를 이은 혜제(惠帝-후일 그는 건문제(建文帝)라 불리게 된다)는 어질고 착한
성품이었지만 천하를 호령하던 할아버지에는 도저히 비길 수 없었다.
주원장은 황태자이자, 혜제의 아버지인 표(標)가 죽고 나자 후일 있을지도 모를
반란을 염려해 수많은 옥사(獄事)를 일으켜 그를 따라 명을 세운 수많은 공신들을
모두 죽였다.
그렇게 되어 주원장이 죽고 난 다음에는 감히 반란을 일으킬만한 힘을 가진 자는
있을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그의 아들들인 제왕(諸王)의 힘은 여전히 막강했다.
주나라가 천하를 통일하면서 시작한 봉건제(封建制)는 천하를 왕실과 공훈신하에게
나라를 봉(封)하는 것에서 출발했다. 통일 진(秦)에 이르러 강력한 중앙집권제가
시행되었지만, 그것은 명초 천하를 통일한 주원장에 의해 다시 시행되었다.
그것은 천하를 주씨의 손아래 두겠다는 가천하(家天下) 사상에서 유래한다.
1368년 천하를 통일한 주원장은 명을 세운 뒤, 주대(周代)의 봉건제도를 본따서
모두 스물다섯 명을 왕으로 봉했다.
그중 스물네 명이 주원장의 아들이었다.
결국 각처에 스물 다섯 명의 제후(諸侯)를 거느린 것이 명의 황제인 셈이었다.
명을 건국한 주원장의 아들들은 그야말로 역전의 용장(勇將)들이었다. 아버지를
따라 종횡무진 천하를 누빈 그들인 것이다.
각처에서 할거하고 있는 혜제의 숙부, 주원장의 아들들은 제각기 그 지역의 병권을
쥐고 있었다. 그것은 힘을 의미했다.
그것을 염려한 혜제는 그가 믿고 있던 제태(齊泰)와 황자징(黃子澄), 당대의
대유학자인 방호유(方孝孺)등과 의논해 그들의 힘을 약화시키려 획책하고 있었다.
주왕 숙의 폐서인 결정은 바로 그러한 첫 움직임이었다.
곽천수는 천천히 음월정을 거닐었다.
바람이 그의 뺨을 간지럽히고 연꽃을 흔들어 놓는다.
하지만 무거운 마음은 여전했다.
태조 주원장이 죽은지 이제 겨우 삼개월이다.
젊은 황제의 움직임은 너무 성급했다. 비록 주왕에게 잘못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폐서인도 모자라 유배까지 시킨다는 것은 그것을 빌미삼은 삭번(削蕃)의 첫
움직임을 누가 모르랴.
삭번이란 왕들의 권력을 해제하여 그 권력을 중앙에 귀속시킴을 이른다.
강력한 세력을 가진 제왕들을 생각한다면 확실히 이 삭번의 계는 시의적절한
것이다.
하지만 병부상서 제태나 태상경 황자징 등은 문신이라 이러한 일을 추진할만한
능력이 없었다.
궁지에 몰린 쥐는 고양이를 무는 법이다.
하물며, 연왕(燕王) 태를 비롯한 제왕들은 결코 쥐가 아니었다. 어쩌면 고양이는
그들일 수도 있었다.
난세가 온다, 드디어 움직일 때가 된 것인가
『어쩌면…… 이 일로 인해 천하는 다시 한번 난세의 폭풍 속으로 빠져들게
될런지도 모른다……』
우뚝 선채로 곽천수는 중얼거렸다.
「난세(亂世)라…… 난세란 말인가!」
곽천수는 가슴이 갑자기 힘차게 뛰는 것을 느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아빠!』
그의 귓전에 천둥 같은 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것은 가히 마른 하늘에 날벼락과 같은 위세인지라 깊은 생각에 잠겨있던
곽천수는 가슴이 철렁하도록 놀랐다. 과장을 하자면 하마터면 음월정에서 굴러
떨어져 연못속으로 빠져버릴뻔 했다고나 할까.
놀라 뒤를 돌아보는 곽천수의 뒤에서는 댕기머리를 땋아 올린 귀여운 화복소녀가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놀랐죠?』
까르르…… 웃음을 터뜨리는 화복소녀의 나이는 이제 십육칠세가량. 동그스럼한
얼굴은 빼어난 미모는 아니라도 아름답고 귀여운 기태가 역력했다.
흰 피부의 얼굴 가운데에서 흑요석(黑曜石)과 같은 눈이 반짝이고 있는데,
누구라도 첫눈에 고생을 모르고 자란 귀한 자손임을 알 수 있는 모습이었다.
곽부용(郭芙蓉).
곽천수가 늙그막에 본 막내딸이 바로 그녀였다. 그야말로 금지옥엽,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인지라 최소한 장군부내에서는 그녀를 건드릴 사람은 없었다. 가히
무소불위(無所不爲)의 존재라고나 할까.
『쯧쯔……』
곽천수는 그녀가 버들허리를 부여잡고 웃음을 감추지 못하는 것을 보고는 혀를
찼다.
『도대체가 계집아이라는 녀석이 목청만 커가지고 얌전한 구석이라고는 눈을 씻고
봐도 찾을 수가 없으니 장차……』
『시집장가 어쩌고 또 그 말씀하시려는 거죠?』
말도 채 끝나기 전에 곽부용은 생글거리며 말꼬리 속으로 불쑥, 고개를 내민다.
말썽을 부리기로 말하자면 도대체가 건드릴 수가 없는 말괄량이가 바로 곽부용이다.
이 녀석이 또 무슨 트집을 잡으려고……
내심 쓴웃음을 지은 곽천수는 짐짓 고개를 저었다.
『그럴리가! 우리 공주님이야 사람 놀라게 하는 것만 빼면 세상에서 보기 드문
요조숙녀인데 그럴리가 있나?』
말을 돌리긴 했지만 그런다고 단념할 그녀가 아니다.
『그거 빼지 않으면요?』
여전히 눈빛이 보석과 같이 반짝이고 있었다.
허허…… 곽천수가 짐짓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런다고 달라질게 있나? 침선(針線)에서 요리에 이르기까지 우리 공주님이 뭐
못하는게 있어야지. 그래, 무슨 일로 여기까지 나온 거지? 날 찾아온건 아닌 것
같은데?』
곽천수는 말을 돌렸다.
그의 물음에 생각이 난 듯 곽부용이 주위를 돌아 보면서 입을 열었다.
『오빠는 어디 있죠?』
『서재에 없던?』
『피이…… 있으면 여기까지 와서 찾겠어요?』
『글쎄다……. 오전에는 못 본 것 같은데? 서재에 없으면 아마 주작가의
만박서림(萬博書林)에 가 있겠지』
곽부용은 그 말에 인상을 쓰면서 머리를 짚더니 종알거렸다.
『아빠는 어쩌자고 이 위대한 장군부의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을 그렇게 골샌님으로
키우시는 거예요? 나참…… 이렇게 나가다간 내가 칼들고 전장에 나가야 되는거
아닌지 모르겠네. 어떻게 된 샌님이 하루 종일 책만 붙들고 살아? 장가갈 생각도
않고……』
곽부용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바쁘게 정자에서 사라졌다.
「녀석……」
그녀의 뒷모습을 곽천수는 희미한 웃음을 떠올린 채 바라보고 있었다.
몸이 약했던 그녀의 엄마 곽부인은 그녀를 낳고는 산고를 이기지 못해 채 열흘을
넘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그야말로 엄마 얼굴도 보지 못하고 자라난 그녀이지만 곽천수의 걱정과는 달리
무럭무럭 자라나 누구나가 다 인정하는 장군부의 꽃이 되었다.
늘 웃음을 잃지 않는 해맑은 성격을 곽부용은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녀의 졸랑졸랑한 뒷모습에서 다시 연못으로 시선을 돌리는 곽천수의 얼굴은
자상한 아버지의 것에서 다시 근엄한 대장군의 것으로 굳어져 있었다.
「난세가 온다!」
그의 눈에서 불길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것은 세상의 혼돈(混沌)을 걱정하는 우국지사의 눈이 아니었다.
「드디어 움직일 때가 된 것인가? 그처럼 기다리던 ……」
곽천수는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구름이 세차게 일어나고 있었다.
쏴아아…… 휘늘어진 버들들이 불어오는 바람에 전신으로 흐느끼고 있다.
연못에서도 파문이 인다.
곽천수는 그 바람에 전신을 맡긴 채 우뚝 서 하늘을 쳐다보고 있었다.
고려의 멸망(滅亡)!
그 천추(千秋)의 한(恨)이 일어난지 이미 6년여…… 과연 기다림의 세월은 끝이
나고 그 치욕을 갚을 수 있을 것인가? 하늘이여, 하늘이여……
굽어 살피소서!!
고서더미를 뒤지는 유약한 책벌레 유생
금릉 응천부는 주원장이 도읍한 이래, 중원천하의 중심이 되었다. 당연히 천하의
문물이 이곳에 집중되었고 거리의 번화함은 눈부실 정도였다.
가히 하루가 달라지고 있다고 할까.
주작가(朱雀街)는 그 응천부의 중심에서 조금 떨어진 곳이다. 북적거리던 소란함도
조금쯤은 덜하고 사람들의 움직임도 그리 바쁘게 여겨지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이곳이 마냥 한적한 것만은 아니다.
절경(絶景)으로 유명한 막수호(莫愁湖)가 바로 주작가 뒤에 있기 때문이다. 호수를
찾는 유람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데 어찌 한가하기만 하겠는가.
이곳이 다른 곳에 비해 조용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이곳이 바로 서점가이기
때문이다.
구하기 힘든 서적들을 찾는 유생들의 발길이 어찌 소란스러우랴. 당연히 조용히
느껴질 수밖에.
그중 가장 규모가 큰 곳은 역시 만박서림이다.
만박서림은 진사 급제를 한 유학사(劉學士)가 시작한 것으로 시간이 지나면서
응천부 제일을 자랑하는 서점이 되었다.
만박서림에 들어서는 사람은 일단 그 규모에 질리게 된다.
사람의 키를 넘는 서가(書架)가 사방으로 절벽같이 버티고 늘어서 있음을 보면
누구라도 입을 벌리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천장에 닿을 듯 늘어선 서가도 모자라, 여기저기 구석구석까지 또 책이
쌓여 있음을 보노라면 이곳의 이름이 왜 만박서림인가를 알고도 남음이 있다.
그렇게 책이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아무렇게나 쌓여 있는 곳에서 부스럭거리고
있는 사람 하나가 있었다.
『지독하네. 이젠 저 고서더미까지 갔구먼. 설마 여기 있는 것들 중에는 볼 게
없다는 말이야?』
유생차림으로 보이는 그 사람을 지켜보고 있던 만박서림의 점원 하나가 혀를 찼다.
그 말에 곁에서 끙끙거리며 책정리를 하던 점원 하나가 힐끗 그 유생을 보곤
어이가 없는 듯 동료 점원을 돌아보았다.
『멍청하긴… 넌 어떻게 된 녀석이 아직도 장군부의 곽공자도 몰라?』
『곽공자?』
처음 입을 열었던 점원의 눈빛이 달라졌다.
『아니, 그럼 저 책벌레가 세상에 신동으로 소문난 그 곽공자란 말이냐?』
『누가 아니래? 내년에 있다는 전시(殿試;3년에 한번씩 있는 대과)가 있기도 전에
이미 장원으로 확정이 된 거나 다름이 없다는 바로 그 곽공자란 말이야. 세살
때부터 이미 사서삼경을 외우기 시작했다는데, 웬만한 책이 그의 눈에 차기나
하겠어?』
『제기랄!』
그 말에 먼저 점원이 혀를 찼다.
같은 사람일진대…
역시 하늘은 공평치가 못해.
점원은 입맛을 다셨다.
고서는 먼지더미 속에서 뒹굴고 있었다.
그가 본 고서들은 이미 수를 헤아릴 수 없었지만 그래도 대부분 정리가 된
것들이다. 하지만 그가 지금 뒤지고 있는 것들은 어저께 들어온 것이라고 했다.
보관 상태가 좋지 않아 손을 움직일 때마다 먼지가 풀풀 일어났다.
숨만 크게 쉬어도 기침이 났다. 숨을 가늘게 쉬면서 책을 뒤지던 그는 들여다보던
책에서 눈을 떼고 그 책을 내려놓았다.
그가 찾는 것은 이런 인쇄본이 아니었다.
그는 손에 들었던 고서를 내려놓고 다시 위태롭게 쌓여 있는 고서더미로 손을
가져갔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오빠아-!』
갑자기 날카로운 교성이 그의 귀청을 뒤흔들었다.
정신을 놓고 있었다고나 할까. 책에만 신경을 쓰고 있었던 그는 깜짝 놀라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고서더미를 왈칵 움켜쥐고 말았다.
그러지않아도 비틀거리며 외줄로 위태롭게 겨우 쌓여 있던 고서더미였다. 그런
불의의 타격을 견딜 리 없었다. 꿈틀하던 고서더미는 한줄이 무너지자, 그 뒤에
있던 줄까지 한꺼번에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으악?!』
고서더미의 밑동을 엉겁결에 움켜쥔 그가 그 책벼락을 뒤집어쓰게 된 것은
자명했다.
종이가루와 먼지가 구름처럼 일어났다.
『아이구… 이 책벌레… 종일 찾았잖아?』
처억하니 허리춤에다 손을 얹은 채, 책더미에 깔려 버둥거리는 그를 보며
종알거리는 것은 곽부용이었다.
책바다 속에서 먼지를 허옇게 뒤집어쓰고서 허우적거리는 저 책벌레야말로 그녀의
하나밖에 없는 오빠인 곽승고(郭承高)였다.
올해 나이 열아홉.
송옥(宋玉) 반악(潘岳)을 빰치는 미남은 아니지만 우뚝한 콧날 가운데 자리한
서글서글한 눈매에 깃들인 총기는 그를 지적으로 보이게 하기에 충분하고도
남았다. 하긴 세살 때부터 신동 소리를 듣던 그가 지적으로 보이지 않는다면 그
또한 이상한 일이 될 것이다.
아버지를 따라 말을 달리고 검을 휘두르는 것이 아니라, 밥먹고 자는 시간마저
아끼며 책만 끼고 있는 그의 안색은 흰 빛이 드러나게 창백했다.
유약하게 보임은 당연하였고, 책을 뒤집어쓴 채 눈을 끔벅이고 있는 그의 모습은
가히 책벌레의 전형과도 같았다.
제 1막 멸문지화(滅門之禍)
『난 또 누군가 했더니…』
나타난 것이 곽부용임을 알아본 곽승고가 책먼지에 콜록거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제발 그 소리 좀 지르지 않을 수 없니? 넌 도대체 뭘 먹고 그렇게 기운이 좋아서
걸핏하면 고함…』
『빨랑 일어나요! 지금 그런 말 하고 있을 때에요?』
곽부용이 곽승고의 소맷자락을 잡아당겼다.
『왜 그래?』
『몰라서 물어요? 지금이 몇시인데 아직도 여기서 이러고 있는 거예요? 빨랑
가요!』
곽부용은 폭포수처럼 말을 쏟아내면서 무조건 곽승고의 소맷자락을 잡아당겼다.
이 힘이란 게 또 만만치가 않아서 곽승고는 엎어지며 자빠지며 중심조차 제대로
잡지 못하고 그녀에게 끌려가야만 했다.
그의 머리에서 책 한권이 툭 떨어진 것은 바로 그때였다.
힐끗 쳐다보는 그의 시선에 「원세조밀기(元世祖密記)」라는 책 제목이 들어왔다.
오래 되고 낡아 너덜너덜한 책이었다.
아마도 쌓여 있던 책더미 중에서 그의 머리 위에 떨어졌던 것이리라.
그것을 본 곽승고의 눈빛은 조금 묘하게 변했다.
하지만 지금 그것을 보거나 어떻게 할 여유가 있을 리 없었다.
곽승고는 그 낡아빠진 고서를 엉겁결에 손에 쥔 채로 허둥지둥 그녀의 손에 끌려
만박서림을 떠나야 하였다.
그 모습은 심히 한심한지라 서림에 있던 사람 모두가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멀뚱히
서 있었다.
『도대체가 사람이 양심이 있어야지! 약란 언니가 얼마나 눈이 빠지게 기다릴는지
생각이나 해봤어요? 세상에…』
곽부용의 종알거림만이 여운처럼 남았다.
수서문(水西門) 바깥에 위치한 막수호(莫愁湖)는 응천부의 절경중 하나다.
찰랑이는 푸른 물결 아스라이 저 멀리 청량산(淸凉山)이 그림처럼 자리하고 호변을
가득 메운 버들은 휘영청 늘어져 불어오는 바람에 조용히 전신을 흔든다.
노을이 서서히 가라앉고 있었다.
보이는 모든 것들이 그렇게 황금빛이었다.
호수 위에 뜬 조각배들 또한 황금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절경이라 불리는 이유를 알고도 남을 경치였다.
푸른 가운데, 노을빛에 물들어 기이한 빛으로 아롱지며 호수면에서 흔들리고 있는
호변의 버드나무들.
거기에 기대듯 서서 불어오는 바람에 치맛자락을 펄럭이고 있는 여인 하나가
있었다.
여인이라고 부르기엔 아직 이르다고 할까.
나이는 채 스물이 되지 않아 보였다.
하지만, 그린 듯한 아미에 호수처럼 맑고 커다란 봉목(鳳目)이며 앵두 같은 입술
등은 그녀의 모든 것이 미인이라 불림에 조금도 모자람이 없음을 말하고도 남는다.
버드나무 숲에서 흔들리는 버들가지에 기댄 채 저녁 노을에 취한 듯 치맛자락을
펄럭이며 그윽히 호수를 바라보면서 서 있는 절세가인.
그 자체로 이미 모든 것은 한폭의 그림(天然入畵)에 다름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도 보는 사람에 따라서는 다르게 보이는 모양이다.
『봐! 아직도 저렇게 멍청하게 서서 기다리고 있잖아?』
곽승고를 끌고 나타난 곽부용은 호숫가의 그녀를 보곤 연신 입술을 삐죽였다.
그녀를 발견한 곽승고의 얼굴에 난처한 빛이 드러났다. 얼마나 급하게 끌려왔던지
그의 손에는 만박서림에서 가지고 나온 그 낡은 책이 그대로 들려 있었다.
『약란 언니는 정말 마음씨도 좋아. 두 시간이나 기다려주다니! 나 같으면 어림도
없지!』
곽부용이 다시 종알거렸다.
『아, 빨랑 가서 빌지 않고 뭘하고 있어요?』
엉거주춤한 곽승고를 보면서 곽부용이 매섭게 눈을 흘겼다.
『너, 너는?』
『나야, 다 저녁때 되어 가는 판에 집에 가서 홀로 계신 아빠 수발 들어드려야지!
내가 오빠처럼 사랑놀음이나 하고 있을 시간이 있는 줄 알아? 나도 바쁜
사람이야!』
단숨에 격류가 몰아치듯 말을 쏟아낸 곽부용은 휑하니 몸을 돌리더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졸랑졸랑 걸어가기 시작했다.
멍청하게 그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곽승고의 얼굴에 문득 훈훈한 웃음이
피어올랐다.
「녀석… 이젠 아주 엄마 노릇을 하려고 한다니까…」
장군부에 그녀가 없다면 아마 참으로 삭막하리라.
그녀의 모습이 사라지는 것을 보고 고개를 흔들며 몸을 돌리던 곽승고의 안색이
멈칫, 굳어졌다.
호수를 바라보고 있던 그 황의의 미녀가 어느새 시선을 돌려 그를 보고 있었던
것이다.
잠시…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흘러갔다.
침묵을 깬 것은 약란이라 불리는 황의의 미녀였다.
『벌써 오셨군요?』
그대가 내 곁에 평생 같이 있게 될 것임을…
벌써라는 말의 뜻은 참으로 묘한지라 곽승고는 어색하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미안, 미안… 책속에 빠져 있다 보니 미처 시간을 살피지를 못해서 말이오』
『나오고 싶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나요?』
어색했던 곽승고의 얼굴이 일순간에 굳어졌다.
『……』
그는 입을 다물었다.
『오늘은 그 말을 듣고 싶어서 곽대가를 기다렸어요. 불과 몇개월 전만 해도 나는
당신을 위해 밥 짓고 빨래하는 아낙이 될 것임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어요…』
심중의 격동을 억제하지 못하는 듯 약란은 입술을 물었다.
『하지만 언제인가부터 당신은 달라졌어요』
『약란』
『달라졌어요! 왜?』
그녀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왜죠? 이 약란이 무슨 잘못을 했기에?』
그 옛날부터 여자의 눈물이란 것은 남자에게는 가히 치명적인 무기다. 그 어떤
영웅호걸도 사랑하는 여자의 눈물 앞에서 그것을 이겨낸 역사가 없음이 또한
진실이다.
곽승고는 머리를 흔들었다.
『아니. 매에게는 아무런 잘못도 없어. 단지…』
머리를 흔든 그는 이내 가슴이 무너질 듯 한숨을 쉬면서 이제 호수 전체를 짙은
황금빛으로 도배하며 스러져가는 낙조의 최후를 바라보았다.
막수호 전체가 침몰하고 있는 듯하였다.
가슴이 터질 듯 답답했다.
방약란(方若蘭)은 당대의 거유(巨儒)로 이름높은 방효유의 조카딸이었다. 장년의
나이로서 천하제일의 석학이라는 칭호를 받는 방효유의 조카딸인 그녀는
응천부에서도 이름난 미녀였다. 하지만 그녀는 방효유의 조카딸로서가 아니라
일신의 재주로서 이름높은 재녀이기도 했다.
그녀와 곽승고의 만남은 오래 전에 시작되었다.
시종들이 한눈을 파는 틈에 몰래 물놀이를 나갔던 그녀가 막수호에 빠져
허우적거릴 때 마침 고기를 잡으러 그곳에 나왔던 곽승고가 그녀를 구했던 것이다.
옛날 이야기의 한 장면과 같은 그 만남은 마침 격렬한 소나기가 쏟아지는 바람에
더 오래 이어졌다.
버드나무 아래서 오도가도 못하고 앞도 보이지 않게 쏟아지는 소나기 속에
웅크리고 앉아 오돌오돌 떨고 있는 방약란을 곽승고가 꼬옥 부둥켜 안고 있는 것을
발견한 것은 폭우 속을 헤치고 사방을 헤매던 방가의 시종들이었다.
그렇게 시작된 두 사람의 만남을 방해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리고 10년…. 둘의 만남은 이젠 깊은 정(情)으로 맺어진 상태였다.
누구라도 두 사람이 결혼하게 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둘은 그렇게 정다웠고 집안에서도 그들을 축복하는 상태였다.
그런데 어느날부터 변화가 생겼다.
곽승고가 그녀를 기피하기 시작한 것이다.
아무런 이유도 없었다.
최소한 방약란은 그 이유를 짐작조차 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친한 곽부용도 그 까닭은 알지 못했다.
『방황?』
방약란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곽승고를 보았다.
곽승고는 고개를 끄떡였다.
『그래. 방황이야. 잠시… 방황을 했었던 것뿐이야. 하지만 이젠 끝났어. 그리고
이 자리에서 말할 수 있는 것은 내가 언제까지라도 란매의 곁에 있을 것이라는
거야』
『…!』
방약란의 눈매가 격동으로 떨렸다. 호수와 같이 크게 맑은 두 눈이 참을 수 없이
출렁이는 듯하였다.
곽승고는 그녀의 말을 기다리지 않았다.
그는 빙긋이 웃으며 방약란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것으로 되지 않았나? 내가 란매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으로?』
방약란은 가슴이 뛰었다.
주변의 노을이 모조리 황금빛으로 변하고 눈앞에 무지개가 피어오르는 것 같았다.
좀전까지 그렇게 쓸쓸하던 황금빛 노을이었다.
『곽대가!』
외마디 부르짖음.
거기에는 수많은 감정의 소용돌이가 얽히고 설켜 있었다.
외침과 함께 방약란은 곽승고의 품속에 몸을 던졌다.
누가 보아도 좋았다. 아니 모두에게 보여주고 싶기도 했다.
곽승고는 힘주어 방약란을 부둥켜 안았다.
『믿어. 그리고 의심치 말아. 란매가 내 곁에 내 사람으로서 평생 같이 있게 될
것임을…』
그래 이제는 널 놓치지 않겠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곽승고는 방약란을 소중하게 안은 채 나직이 중얼거렸다.
『무, 무슨 말씀이십니까?』
곽승고는 두 눈을 부릅떴다.
방금 자신이 들은 말을 그는 믿을 수 없었다.
그의 앞에는 산처럼 완강하게 그의 아버지 곽천수가 앉아 있었다.
『란매와의 교제를 끊다니? 다시는 만나지도 말라니? 대체 무엇 때문입니까?』
곽승고는 격하게 말을 쏟아내고 있었다.
아마도 아버지의 앞에서 이렇게 격한 어조를 사용한 것은 그가 태어난 이래 처음일
것이었다.
『너와 그 아이는 맺어질 수 없다』
곽천수의 음성은 간단하고도 단호했다.
그 눈빛에는 확신이 깃들어 있었다.
곽승고는 알고 있었다.
그의 아버지 곽천수가 저러한 태도로 말할 때에는 하늘이 무너져도 그 뜻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왜? 무엇 때문입니까? 얼마전까지도 아버님께선…!』
곽천수의 말로 인해 곽승고의 말은 더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그 이유는 지금 말할 수 없다』
곽승고를 바라보는 곽천수의 눈길은 이글이글 횃불과 같이 타오르고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른 다음이라면 알고자 하지 않아도 알게 되리라. 네게는 따로
해야 할 일이 있음을…』
따로 해야 할 일.
그것이 무엇인지는 곽승고는 지금도 알지 못했다.
방약란을 안고 있는 지금 이 순간까지도.
* * *
밤하늘.
은하수가 보석을 뿌린 듯 총총하다.
구름 한 점 없이 맑게 갠 밤하늘에 흰 궤적이 한줄기 일직선으로 그어지고 있었다.
그 궤적은 마치 유성이 떨어지듯이 그렇게 장군부를 향해 날아들었다.
구구구…
날아든 비둘기는 창틀에 앉아서 낮게 울었다.
손 하나가 뻗어나와서 비둘기를 자신의 손 위에다 올려놓았다. 비둘기는
퍼득거리지만 날아가진 않았다.
그 비둘기는 소식을 전하기 위해 훈련된 전서구(傳書鳩)인 것이다.
그 손은 비둘기의 다리에 묶인 동관(銅管) 속에서 정교하게 접어진 작은 종이
두루마리를 꺼냈다.
비둘기를 다시 창틀에다 내려놓고 촛불 아래서 그 종이 두루마리를 읽고 있는
사람은 바로 대장군 곽천수였다.
그의 안색은 심각하고도 무거웠다.
다시 한 번 종이에 적힌 내용을 읽어본 곽천수는 그 종이를 촛불에다 갖다댔다.
종이가 비틀거린다 싶은 순간에 그것은 이내 화염에 휩싸여 사라졌다.
종이 두루마리를 태운 곽천수는 서안(書案)에 있던 세필(細筆)을 들어 종이에
일필휘지하여 비둘기의 다리에 묶인 동관 속에 넣었다.
부리로 날개를 다듬고 있던 비둘기는 그의 손에 의해 다시금 하늘로 날아올랐다.
장군부의 상공으로 떠오른 비둘기는 한 바퀴를 돌더니 이내 방향을 잡고
일직선으로 날아가기 시작했다.
「계획을 앞당겨 시행코자 하오. 승고에게 자신의 신분과 이제부터 그가 해야 할
일을 알려주도록 하시오. 3일 후, 승고를 만나기 위해 친히 응천부로 가겠소…」
날아가는 전서구를 바라보고 있는 대장군 곽천수의 안색은 침중하게 굳어져 있었다.
「승고에게 자신의 신세내력을 알려주는 것은 그가 내년의 전시에서 장원을 하고
난 다음의 일로 예정되어 있었다! 그것은 본인의 신분을 알고 난 다음에 생길
만약의 사태를 대비한 포석…」
곽천수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잡혔다.
「그런데 지금 당장 알려주라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전서구의 흰 궤적은 이미 보이지 않았다.
밤하늘의 별은 여전히 아무일도 없었던 듯이 초롱초롱했다.
「그분께서도 대세의 흐름을 급박하다고 판단하신 것일까? 아니면… 대업에 어떤
차질이라도 발생한 것이란 말인가」
문득 그는 깊은 시름에 잠긴 숨을 토해냈다.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깊은 시름과 함께 눈을 내려감은 그의 모습은 여전히 강인한 산악과 같다.
하지만, 다시 눈을 뜬 그의 눈에서는 비수와 같은 광채가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결국 와신상담의 세월은 끝이 난 것 같군! 그렇다면…』
『뭘 그렇게 혼자서 중얼거리세요?』
느닷없이 뒤에서 들려온 음성에 의해 곽천수의 생각은 중단되어 버렸다.
아니 끊겨버렸다고나 할까.
깜짝 놀란 곽천수의 뒤에는 어느새 호기심에 가득 찬 눈을 보석처럼 반짝이면서
고개를 내민 곽부용이 자리했다.
『넌 도대체…?』
곽천수는 어이가 없는 듯 자신의 앞에서 눈을 깜박이고 있는 곽부용을 보았다.
곽천수에게로 고개를 들이민 곽부용의 눈은 장난스레 웃고 있었다.
『어떻게 된 애가 고양이처럼 소리도 없이 사방을 돌아다니느냐는 거죠?』
냉큼 곽천수의 말을 받은 곽부용은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그야 당연하죠! 부용인 무가(武家)의 딸이니까 몸이 버들처럼 가볍거든요?』
곽부용은 활짝 웃는 얼굴로 종알거리면서 그 자리에서 보라는 듯 몸을 빙그르르
돌려 보인다. 발 움직임이 마치 바람과 같다.
어릴 때부터 말괄량이로 자라면서 그의 부장들에게서 검술까지 배워대던 녀석이다.
게다가 춤사위가 제법인 상태이니 몸 움직임이 가벼울 수밖에.
쓴 웃음을 짓던 곽천수는 문득 입을 열었다.
『네 오라비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느냐?』
곽부용은 춤추듯 돌리던 몸을 멈추었다. 아버지를 향한 그 얼굴에는 웃음기가
떠올라 있었다.
『벌써 올 리가 없죠! 오늘은 조금 늦을 거예요』
『늦어?』
곽천수는 고개를 갸웃하곤 곽부용을 쳐다보았다.
『너… 만박서림까지 네 오라비를 찾아가서 무슨 짓을 한 거냐? 무슨 짓을
했길래…』
『아빤… 내가 무슨 짓을 해요?』
『그런데 네 오라비가 왜 늦게 돌아온다는 거냐?』
『글쎄… 그게 왜 그렇죠?』
곽부용은 오히려 반문했다.
맑은 두 눈을 깜박이며 생각에 잠긴 그녀의 표정에 곽천수는 어이가 없었다.
식지를 앵두빛 입술에다 대고 짐짓 생각에 잠긴 그녀의 표정은 제법 진지했다.
그녀가 아!하고 탄성을 토해낸 것은 바로 다음 순간이었다.
『그렇네요. 이제야 생각이 났어요』
소리친 그녀는 곽천수를 보고 배시시 웃었다.
『생각을 해보니까, 그건 비밀되겠네요!』
『뭐라고?』
기가 막힌 듯한 곽천수의 표정에 곽부용은 까르르 웃음을 터뜨리더니 불쑥 얼굴을
곽천수의 턱밑에다 들이밀었다.
『그보다 배고프지 않으세요? 잠시만 기다리세요! 제가 금세 기가 막힌 거 만들어
가지고 올게요!』
대답을 기다리는 법은 없다.
마지막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곽부용은 빙글 몸을 돌려 팔랑거리며 문밖으로
뛰어나가고 있었다.
「녀석…」
마치 홀린 듯이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곽천수의 얼굴에 희미한 웃음이
떠오르는가 싶더니, 이내 그것은 납덩이처럼 굳어져갔다.
「너의 얼굴에서만은 언제까지라도 그 웃음이 사라지지 말았으면 하는 것이 내
바람이었는데 이제는 그것도 장담할 수 없는 일이 되겠구나…」
영문 모를 소리를 중얼거리면서 깊게 탄식한 그는 무거운 시선을 천천히 하늘로
가져갔다.
비둘기가 그었던 하늘의 궤적은 이미 보이지도 않았다.
한가지 분명한 것은 조정에서는 연락을 하기 위해서 전서구를 사용하는 법은
없다는 것이다.
강변에는 갈대가 우거져 있다.
물오른 버들은 강바람에 살랑이고 어둠은 이미 사위를 강하게 내리누르고 있었다.
주변에서 들리던 웃음소리와 풍류가락은 들리지 않은 지 오래. 어둠이 내렸다고 그
소리가 그친 것이 아니라, 곽승고가 걷고 있는 곳이 갈대가 우거진 한적한
강변이기 때문이었다.
사람의 키만큼 무성한 갈대숲이 강변을 덮고 있는데, 어디에서 풍류를 찾을 수
있으랴.
강변을 걷는 곽승고의 발길은 무거웠다.
이제부터 그는 싸워야 했다.
한번도 거역한 적이 없는, 그가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는 아버지 곽천수의 명에
항거해야 하는 것이다.
그의 말대로 그녀를 포기할 수는 없었다.
그렇게 하기에는 방약란의 존재가 그의 가슴에서 차지하고 있는 비중이 너무 컸다.
『아버님께는 죄송하지만…』
곽승고는 다짐하듯 지긋이 입술을 깨물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으악-!』
심금을 울리는 참혹한 외마디 비명이 들려온 것은.
곽승고의 전신이 일순 굳어졌다.
비명이 터져나온 곳이 얼마 떨어지지 않은 버드나무 숲속이었던 까닭이다. 갈대가
우거지고, 그 강변 안쪽으로 다시 버드나무가 무성했다.
사람이 숨어 있어도 제대로 보이지 않을 숲속에서 느닷없이 터져나온 비명은
곽승고를 놀라게 하기에 족하였다.
『으아악-!』
그가 걸음을 멈추고 그곳을 바라보는 순간에 단말마의 비명이 또다시 들려왔다.
그처럼 참혹했던 전란(戰亂)이 사라진 것도 이미 오래. 태조 주원장이
원훈대신(元勳大臣)들을 갖가지 죄목으로 죽이던 옥사(獄事)도 옛일.
비록 날이 어두워지고는 있다고 하지만 경사(京師)에서 살인이란 말인가.
서생이라고는 하지만 무가(武家)의 장손인 그다.
손에 검을 쥐면 웬만한 도적 따위와는 충분히 상대할 수 있는 능력을 그는 가지고
있었다.
곽승고는 다음 순간에 비명이 들려온 곳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숲은 의외로 깊다.
버드나무가 덩치를 자랑하며 팔을 벌리고 있고, 사방에는 수풀이 우거져 대낮이라
할지라도 충분히 햇빛을 가릴 만한 그늘을 가진 숲이었다.
「이쯤 어디에서 비명이 들린 것 같았는데…」
곽승고는 미간을 굳힌 채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바로 그때였다.
무엇인가가 불쑥 수풀 속에서 튀어나와 그의 발목을 움켜잡은 것은.
「으헉?!」
돌연한 사태에 아래를 내려다본 곽승고는 기겁을 했다.
그것은 피투성이가 된 손이었다.
비명을 듣고는 어두워진 숲속에 들어와서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돌연
발목을 잡는 피투성이의 손이 나타난 것이다. 제 아무리 심장이 튼튼하다 해도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곽승고의 뒤편.
아름드리 버드나무 밑의 무성한 수풀 속에 피투성이의 백발노인 한 사람이 엎어져
있었는데 곽승고의 발목을 잡은 것은 그의 손이었다.
하지만 그 손에는 이미 힘이 없어 곽승고가 놀라 뒤로 물러서는 순간에 발목을
잡은 그 손은 풀어져 버리고 말았다.
『으으윽…』
황삼의 백발노인은 곽승고를 향해 피투성이의 손을 휘저었다. 일어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지만 이미 몸이 말을 듣지 않는 것 같았다.
『누, 누구시오?』
『으, 으윽! 그… 그들… 그들이…!』
곽승고의 외침에 백발노인이 쥐어짜듯이 중얼거렸다.
그로서는 전신의 모든 기력을 다해 외치는 듯했지만 그 소리는 귀를 갖다대야 들릴
만큼 작았다.
『노인장, 제 말이 들립니까?』
그의 기식이 엄엄함을 직감한 곽승고는 한쪽 무릎을 꿇으며 그를 부축했다.
그의 말소리를 들은 백발노인은 눈을 희번덕거리더니 이내 두 눈에 공포의 빛을
드러냈다.
그는 마치 눈앞에 있는 무엇을 쫓아내기라도 하듯이 두 손을 휘저으며 소리쳤다.
『귀, 귀왕… 귀왕혀얼(鬼王血)…!』
말과 함께 그의 입에서 붉은 선혈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그의
머리는 누가 잡아당긴 듯이 곽승고의 팔에 힘없이 걸쳐졌다.
『이런 일이…!』
곽승고는 그의 시신을 내려다보며 신음했다.
백발노인은 부릅뜬 두눈에 뚜렷한 공포를 드러내고서 그렇게 그의 품에서 죽어간
것이다.
『귀왕혈? 귀왕혈이란 것이 무엇이기에 이 노인이 죽어가면서까지 그렇게
공포스러워한 것일까…』
잠시 노인의 시신을 내려다보고 있던 곽승고는 나직이 신음했다.
갑자기 주위의 정적이 무겁게 그를 짓눌러왔다.
공연히 가슴이 섬뜩해져 고개를 들던 곽승고의 눈빛이 굳어졌다.
희끗희끗한 그림자가 앞쪽에서 번뜩인 것 같았기 때문이다.
노인을 조심스레 바닥에 누이고 몇 걸음 앞으로 나선 곽승고는 부지중에 숨을
몰아쉬었다.
그의 앞쪽에는 숲 가운데 형성된 공터와 같은 초지가 있는데, 그곳에는
목불인견(目不忍見)의 참상이 벌어져 있었던 것이다.
주인 잃은 검도(劍刀)가 어지러이 널려진 가운데 팔다리가 날아가고 목이 베어져
죽어 넘어진 시체 십여 구가 거기에 쓰러져 있었다.
짙은 피비린내를 풍기면서….
그를 더욱 놀라게 한 것은 그 죽어 넘어진 사람들 가운데 등을 보인 채 우뚝 선
황의인이었다. 날렵한 황색 무복을 입은 그는 죽은 사람들에게 허리를 구부리고
무엇인가를 살펴보고 있는데, 그의 손에는 검 한 자루가 들려 있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이 참극(慘劇)은…?
공포스러운 생각을 하게 된 곽승고가 암암리에 숨을 들이켠 순간에 황의인은 이미
그의 기척을 느낀 듯 뒤를 돌아보고 있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서로를 보게 되었다.
그 순간, 곽승고는 한가닥 바람이 스침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의 신형은 마치
거짓말처럼 곽승고의 눈앞에 서 있었다.
뿐인가.
대체 언제 뽑혔을까?
분명히 손에 검집째 들려 있는 것 같았던 그의 검은 이미 검집을 벗어나 곽승고의
목젖에 바짝 닿아 있었다.
서리 같은 검기가 곽승고의 전신을 핍박해왔다.
『넌 누구냐?』
황의인은 싸늘히 물어왔다.
그의 눈빛은 목소리만큼이나 찼다.
갓 삼십쯤 되었을까. 아니면 그보다 젊을까? 언뜻 보면 이십대처럼 보이기도 했다.
단아한 그 얼굴은 얼음조각을 해놓은 듯 차가워 나이를 짐작키 어려웠다.
섬뜩한 검끝을 목젖으로 느끼며 곽승고는 오히려 반문했다.
『당신은 누구요?』
이러한 상황하에서 반문을 할 수 있는 담량을 지닌 사람은 그리 쉽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황의인의 차가운 눈동자에 묘한 빛이 스쳐갔다.
황의인은 곽승고의 아래 위를 단숨에 훑어보더니 의미를 알 수 없는 싸늘한 웃음을
떠올렸다.
『맹랑하군! 감히 이런 상황하에서 말대꾸를 하다니… 죽음이 겁나지 않는단
말이냐?』
『……』
곽승고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대신 그는 자신의 목에다 검을 겨누고 있는 황의인의 눈을 보고 있었다. 그가
손에 조금만 힘을 주면 자신은 이 자리에 시체가 되어 넘어지리라.
전신으로 긴장이 살처럼 달려갔다. 진땀이 한방울 곽승고의 이마에 솟아났다.
하지만 그는 묵묵히 그를 보고 우뚝 서 있을 따름이었다.
『서생치고는 대담하군』
황의인은 내뱉듯 중얼거리곤 검을 거두었다.
검을 거두는가 싶은 순간에 그 검은 이미 검집에 들어가 있었다. 검자루의 끝에
달린 붉은 수실이 흔들리고 있음이 그 검이 움직였음을 의미할 정도로 그 움직임은
놀랍게도 빨랐다.
『돌아가라. 여기는 너와 같은 서생이 있을 곳이 아니다』
말과 함께 그는 몸을 돌렸다.
『무엇 때문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죽인 것이오? 당신은 국법이 두렵지도 않소?』
하지만 곽승고의 입에서 쏟아져나온 말은 그의 발길을 붙들기에 족했다.
황의인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곽승고를 보았다.
그의 눈빛은 여전히 서리처럼 찼다.
『죽고 싶으냐?』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그 눈빛만큼 무감정했다.
『전혀. 당신이 나를 죽이고자 한다면 나는 이미 이 자리에 시체로 누워 있겠지!
나는 단지 당신이 왜 이렇게 많은 사람을 죽인 것인지 알고 싶을 뿐이오. 아무도
다른 사람을…』
곽승고는 더이상 말을 계속할 수 없었다.
번쩍 하는 순간에 다시 황의인의 검끝이 그의 목젖을 찌르고 있었으므로.
눈앞의 그를 보고 있었음에도 그가 언제 어떻게 검을 뽑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다만 찌르는 듯한 고통과 함께 그의 검끝이 그의 목젖을 파고들고 있음을 느낄 수
있을 뿐이었다.
『쓸데없는 간섭은 명을 재촉한다』.
황의인은 여전히 차갑게 말했다.
『……』
곽승고는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그의 전신에서 뿜어져나오는 기세는 그가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더구나
그의 검끝에 찔린 목젖에서는 선혈이 목을 타고 가슴으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눈빛은 흔들리지 않았다. 목젖을 찔러오는 검끝의 고통으로 인해
눈살을 찌푸렸을 뿐, 그는 흔들림없는 태도로 자신의 앞에 선 황의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제법 뼈대가 있군! 한가지만 말해주지. 한번 뽑았던 검은 다시 뽑을 수
있음을…』
황의인은 곽승고의 눈을 보고 있다가 싸늘히 말했다.
『이 사람들은 내가 아니라 귀왕혈에 의해 죽었다』
그는 말과 함께 검을 거두었다.
『귀왕혈?』
『그렇다. 죽이고자 하는 자가 있다면 지옥끝까지라도 쫓아가서 죽이고야 마는,
무서운 살인청부 집단이 그들이다. 이 이상은 너와 같은 서생이 알 일이 아니다.
그만 돌아가라』
황의인은 몸을 돌렸다.
아마 그는 근래에 들어 가장 많은 말을 한 셈이었다.
곽승고는 더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저 황의인은 그가 지금까지 보았던 무사들과는 그 격이 틀렸다. 장군부에는 수많은
검수(劍手)들이 드나들지만 저 사람과 같은 놀라운 신수를 보여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는 자신을 죽이려면 열번도 더 죽일 수 있었다.
이 참극이 귀왕혈에 의해 일어났다는 그의 말은 틀림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알지 못했다.
귀왕혈이란 처음 듣는 단어가 자신과 어떤 관련을 가지게 될 것인지….
* * *
팡!
격렬하게 뻗어나는 손 하나.
소름끼치는 음향이 그 손이 이르는 곳에서 터져나왔다. 피보라를 뿌리며 그 손에
부딪친 장한이 날아갔다.
손은 미처 장한의 목에 이르지도 않았는데 장한의 목은 쇠절구에라도 부딪친 듯이
끔찍한 소리와 함께 수풀 속에 나뒹굴었다. 그 목에 붙은 머리는 거의 몸체에서
떨어져 흐늘거렸다.
독수리의 발톱과 같이 움츠린 형태로 뻗어났던 그 손의 주인공은 어둠 속에 선명히
드러나는 백의를 걸친 사람이었다.
말이 백의지, 옷은 온통 붉은 물감을 칠한 듯 피로 붉게 얼룩져 있었으며 얼굴은
산발된 머리카락이 온통 뒤덮고 있어서 그 모양조차 제대로 알아보기 힘들었다.
하지만 어둠 속에서도, 산발된 머리카락 속에서도 정광(精光)을 뿜어내고 있는 그
눈빛은 그가 범상한 사람이 아님을 의미했다.
그러나 그가 막 자신의 앞을 가로막았던 한 사람을 날려보내는 순간에 그 눈에는
격렬한 고통의 빛이 떠올랐다.
검 한 자루.
어느새 음산한 기색의 흑의인 하나가 검 한 자루를 산발 백의인의 가슴에다
쑤셔넣고 있었다.
가슴이 불로 지지는 듯했다.
검은 그의 가슴을 관통하고 등 뒤까지 비어져 나올 정도로 맹렬하게 그의 가슴을
꿰뚫었다.
그의 가슴을 검으로 꿰뚫은 자가 회심의 미소를 떠올리기도 전에 산발 괴인은 방금
전에 장한을 날려보냈고 거둬들이던 응조(鷹爪)로 자신의 가슴을 꿰뚫은 장검을
쳤다.
땅! 하는 소리와 함께 검이 두동강이 났다.
그의 가슴에다 검을 쑤셔박았던 흑의인의 눈에 경악이 떠오름과 동시에 그 손은
이미 그 흑의인의 얼굴을 손바닥으로 누르고 있었다.
『와아악!』
참혹한 비명.
흑의인의 얼굴이 마치 두부가 벽에 부딪친 것처럼 터져나가면서 날아갔다.
부르르르…
흑의인을 날려보낸 산발 괴인의 손이 경련했다.
그는 가슴을 움켜쥔 채로 옆에 있던 아름드리 나무에 쓰러질 듯이 어깨를 기댔다.
『크으으으…!』
참으려 해도 참을 수 없이 고통의 신음이 그의 입을 비집고 흘러나왔다.
그의 일신에 잠재한 깊고 두터운 내공의 힘이 아니었다면 그는 지금까지 버티고
있지 못했을 것이었다.
가슴을 움켜쥔 손가락 사이로 선혈이 샘솟듯 솟구치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전신에서 흘러나올 피는 이제 그리 많지 않았다. 산발을 한 그의 머리카락 사이로
드러난 얼굴에서도 피는 아직까지 계속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의 형상은 가히 참혹, 그것이었다.
헉헉거리며 가쁜 숨을 내쉬던 산발 괴인은 다짐하듯 중얼거렸다.
『어, 어떤 일이 있더라도 이 음모는… 이 음모만은…』
산발 괴인은 이를 악물고는 그 자리를 떠나기 시작했다.
그가 떠난 자리에는 흑의인들의 시신 대여섯 구가 참혹했던 격전을 말하듯 쓰러져
있었다. 그의 가슴에 검을 찔러넣었던 흑의인은 그를 추격하던 자들 중에서 마지막
한명이었다.
주위를 사납게 휩쓰는 피비린내는 하늘마저 찌푸리게 하여 달은 구름 속에 숨었다.
어둠이 더욱 짙게 내리는 숲에는 세찬 바람이 휙휙 몰아쳐 나뭇가지를 뒤흔드니
정경(情景)은 더욱 음산 공포스러웠다.
산발 괴인이 그 자리를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방갓을 쓴 사람 하나가 소리도
없이 숲속에 나타났다.
손에는 보검을 들었다. 정치(精緻)한 형상으로 만들어진 검집만으로도 평범한
물건이 아님을 알 수 있을 듯한 그 검의 검자루에서는 붉고 푸른 수실 두 가닥이
흔들리고 있었다.
백의 경장을 한 그의 눈은 방갓 속에서 싸늘하게 빛났다.
강호인으로서 밤에 백의를 입고 다닌다 함은 그가 강호 초년생이거나 아니면
대단한 자신을 가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주위의 처참한 정경을 보고도 눈살 하나 찌푸리지 않고 침착하게 주변을
둘러보는 그의 태도를 보고 강호에 처음 발을 디딘 사람이라고 생각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었다.
날카롭게 주변을 쓸어본 그는 이윽고 산발 괴인이 마지막으로 어깨를 기대었던
나무에 희미하게 남아 있는 핏자국을 찾아내고는 나직히 중얼거렸다.
『과연 대단하군. 그 몸으로서도 내 수하 고수들을 물리치고 이곳을 벗어났단
말인가』
말뜻은 놀랍다는 것 같지만 산발 괴인이 사라진 쪽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얼음처럼 차갑다.
『하지만… 넌 세상에 남아 있어서는 아니될 존재다. 내가 있기에…』
말의 여운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의 신형은 어둠을 뚫고서 숲속으로 사라졌다.
단 한 번의 도약으로 어둠 속으로 묻혀버린 그의 경공은 강호를 놀라게 하기에
족할 정도였다.
휘이잉…
다시금 세찬 바람이 버려진 주검들을 휘감아 돌았다.
번쩍! 꽈르릉! 꽝!
뒤를 이어서 밤하늘에 마른 번개가 먹구름을 뚫고서 진저리를 치며 땅으로
곤두박질쳤다.
* * *
깨진 쪽박과 같이 허공에 걸린 달은 겨우 손톱만 했다.
그나마 불어대는 바람으로 인해 구름에 가렸다 나타났다 하는 판이니 이 밤의
야경은 별 볼 일이 없었다.
고관대작들의 거리라는 서관대로(西官大路) 깊숙이 위치한 방가대원(方家大阮)은
이름과는 달리 그리 엄청난 규모는 아니다. 하지만 흙담벽 집에서 사는 서민들과는
여전히 비교조차 할 수 없는 것이 고관들의 삶이다.
방가대원의 후원 이층 누각에는 방약란의 침실이 있다.
방약란은 누각의 난간에 나와서 구름 속에 내팽개쳐졌다가 다시 기를 쓰고 구름
밖으로 날카로운 뿔을 내미는 상현달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곽승고의 얼굴이 그 하늘에서, 달에서 떠올랐다 사라졌다.
사랑해요…
방약란은 나직이 중얼거렸다.
그러했다.
그녀는 그를 사랑했다.
저 달이 구름에 가려 빛을 잃을지라도 그 자리에 있는 것처럼, 달마다 차고
이즈러져도 그 자리에서 다시 또 떠오르는 것처럼 그렇게 그를 사랑했다.
언제까지라도 그렇게…
그는 돌아가면서 곧 매파(媒婆)를 보내서 정식으로 청혼을 하겠다고 했다.
방약란은 그의 들판과 같이 넓은 가슴의 아늑함을 떠올리곤 얼굴이 붉어졌다. 그의
부인이, 아내가 되는 것이다.
그럼 언제나 그의 곁에 있게 될 것이고…
사랑에 빠진 규중 처녀의 가슴은 기대로 부풀었다.
마치 곽승고의 얼굴을 그 속에서 찾아내기라도 할 듯이 그렇게 달빛을 쫓고 있던
방약란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누르며 몸을 돌렸다.
『아!』
창문을 닫고 몸을 돌리던 방약란은 탁자에 조용히 앉아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대체 언제, 어디에서 나타난 것일까?
대황촉이 사위를 밝히고 있는 방약란의 침실, 그 가운데 있는 탁자 의자에 회색빛
승의를 입은 여승 한 사람이 앉아 조용히 염주를 굴리면서 그녀를 보고 웃고
있었다.
눈가에 잔주름이 서린 여승의 얼굴은 자애로웠다.
『사부님?』
노니(老尼)를 발견한 방약란은 놀란 기색이 이내 기쁨으로 바뀌어 비 맞은 참새가
둥지로 날아들듯이 노니의 가슴으로 돌격해 들어갔다.
『아이쿠쿠… 이런 녀석이 있나? 늙은 스승 갈비 부러지겠구나. 대체 언제까지
이렇게 어리광만 부릴 생각이냐?』
노니는 그녀를 안으며 짐짓 비명을 터뜨렸다.
『어쩌면 그렇게 오시질 않으셨어요? 제가 그간 얼마나 사부님을 보고 싶어했는지
아세요?』
방약란은 노니의 목을 끌어안고서 활짝 웃었다.
『그렇더냐? 흠… 노납이 보기엔 별로 그런 것 같지도 않은데?』
『사부님은?』
방약란이 눈을 흘겼다.
노니는 방약란의 애교에 그녀의 등을 두드리며 인자한 웃음을 떠올렸다.
『사실은 뜻하지 않은 일들이 자꾸만 생겨서 말이다…. 그래, 그간 잘 있었느냐?』
『그럼요. 제자는 이렇게 건강한 걸요! 그런데 일년이 넘도록 소식 한 번
없으시더니 기별도 없이 갑자기 어쩐 일이세요?』
그녀의 되물음에 노니의 자애한 안색이 조금 굳어졌다.
『갑죽음의 공포보다 더 무서운 이름 귀왕혈
제1장 멸문지화(滅門之禍)
산악과 같이 선 노인.
그 앞에 조용히 무릎을 꿇은 백의인.
바람이 여전히 세차게 불고 있었다. 다시 노인의 말소리가 바람을 흩뜨렸다.
『중원에는 네 사형이 있다』
『!』
깊은 물과 같던 백의인의 얼굴에 처음으로 떨림이 일어났다.
『사형… 이란 말입니까?』
노인은 고개를 끄떡였다.
『그렇다. 아직까지 말해주지 못했지만 네게는 먼저 입문한 사형이 있으며, 그는
지금 사명을 띠고 중원에 가 있다…』
백의인은 아직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사부를 보고 있었다.
『사부님… 그건…』
백발노인은 마치 그의 말을 막듯이 고개를 끄떡였다.
『이 일이 일맥단전(一脈單傳)하는 수호신문의 율법에 어긋남은 분명하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취해진 부득이한 조치…』
하늘은 여전히 회색으로 어둡다.
우우우….
눈보라는 점점 더 기승을 부리며 두 사람을 감싸고 있다.
노인의 말소리도 은은히 눈보라의 외침에 묻히고 있었다.
-왜 이런 편법이 필요하였는가는 세월이 흐른 뒤, 네 스스로 알게 될 것이며 대한
수호신문의 정통(正統) 또한 그때 비로소 이어지게 될 것이다!
세월의 흐름 또한 그 음성의 잔향(殘響)을 따라 쉼없이 흐른다. 하지만 백두산은
여전히 세월을 뛰어넘어 그 자리에 위대한 모습으로 자리하고 있다.
* * *
죽음보다 무서운 것이 있는가? 있다면, 그것은 죽음 직전에 느껴지는
공포(恐怖)이리라.
여기 그 공포보다 더 무서운 이름이 있으니, 그 이름은 바로 귀왕혈(鬼王血)이라!
어둠.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수많은 팔을 가진 악마상이 음산히 숨을 쉬고 있었다.
악마상은 기괴한 모습의 제단 위에 모셔져 있다.
어둠에 잠긴 제단의 높이는 일장여….
제단의 위에 자리한 그 악마상은 음산한 숨결과 같이 휘늘어진 휘장에 의해 좌우로
가리워져 더욱 기괴한 모습이었다.
문득 어둠 속에서 공기가 가늘게 흔들렸다.
그리고 그 제단의 앞에 소리도 없이 나타난 것은 한 사람의 흑포인.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나타난 그 흑포인의 전신은 먹물과 같은 흑포(黑袍)를 온통
뒤집어쓰고 있었다. 어두운 밤에 앙상한 나뭇가지가 일렁이는 것과 같다고나 할까.
『앙천사독(殃天邪毒)이 현신하여 귀왕(鬼王)의 명 을 기다립니다!』
낮은 음성이 그에게서 흘러나왔다.
순간, 어둠을 꿰뚫으며 제단 위 악마상의 눈에서 무서운 한망(寒芒)이 일어났다.
마치 심야의 하늘을 찢는 번갯불과 같은 빛이었다. 번갯불과 명백히 다른 점은
그것이 소름끼치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 앞에 존재하는 사람들을
모조리 공포로 떨게 만들….
앙천사독이라 자칭한 흑포괴인이 고개를 들었다.
마치 어둠을 들이받기라도 할 듯이 그의 머리는 거의 완벽한 대머리. 길게 자라
어깨까지 늘어진 머리카락은 실로 셀 수 있을 정도의 몇가닥에 불과했다. 더구나,
그의 얼굴은 온통 주름살투성이인지라 모든 것이 주름살 속에 파묻힌 듯한 착각이
들 지경이었다. 그 주름살 사이로 갈라진 틈에서 한가닥 기괴한 녹광(綠光)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그것이야말로 그의 눈이었다.
그때였다. 어디서 나타난 것일까.
악마상의 앞에서 두루마리 하나가 너울거리며 그의 앞으로 천천히 떨어져 내렸다.
그의 앞에 당도한 두루마리는 마치 누가 잡아당기기라도 한 듯이 쫘악, 펼쳐졌다.
거기서 드러난 것은 살아 움직일 듯 생생한 느낌의 중년인의 상반신 화상. 갓
50으로 보이는 그의 전신에서는 당당한 위풍이 절로 느껴져왔다.
『대장군 곽천수(郭天帥)다』
악마상에게서 심금을 파고드는 음성이 들려왔다.
『그 혼자만입니까?』
앙천사독이 두루마리의 중년인을 무심한 눈으로 바라보면서 입을 열었다.
『청부된 것은 그의 죽음이다. 나머지는 네게 맡기겠다』
그 말에 음산하고도 무표정한 웃음이 앙천사독의 눈매에 서렸다.
하긴 그것도 웃음이라 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눈빛에 음산한 흔들림이 일어났을 뿐이고 입가의 주름살이 잠시간 흉하게 깊어졌을
뿐이었으니까.
그는 아무 말 없이 독수리의 발과 같이 깡마른 손을 들었다. 그것과 함께 그의
눈앞에 펼쳐져 있던 두루마리가 격심한 폭풍에 휘말려 사라지는 조각배 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두루마리에 그려진 곽천수라는 중년인의 화상 중,
얼굴부분만이 가루로 화해 사라진 것이다.
그것과 함께 악마상의 눈에서 흘러나오던 빛이 꺼졌다. 다시 침묵이 찾아왔다.
어둠이 되살아났다.
팔척장신의 곽천수는 산악같이 굳건하고 당당했다
금릉(金陵)은 삼국시대 오(吳)의 손권(孫權)이래로 누대의 왕조가 도읍한 곳이다.
당시 고성의 주위 만 이십리이며 그 이름은 건업(建業)이라 불리어졌었다.
지난 날 제갈무후는 이 금릉을 일컬어 용이 서리고 범이 웅크린
형상(龍蟠虎踞)이라 하였거니와, 진(晉), 송(宋), 제(齊), 남당(南唐) 등 역대
왕조의 도읍지였던 이곳은 명(明)에 이르러 주원장(朱元璋)이 원(元)에 이어
천하를 통일하면서 하늘의 뜻을 따른다는 뜻으로 응천부(應天府)라 이름하며
도읍했다.
후일, 이 응천부는 명이 수도를 북경(北京)으로 옮기게 되자, 남경(南京)으로
이름이 바뀌게 되었다.
백화만발(百花滿發).
활짝 피어난 꽃들이 벌과 나비들의 살랑거림에 간지러운듯 진저리를 치고 있는
오후다.
새들이 하늘 높이 날며 지저귀고 있었다.
음월정(吟月亭)에서 바라보는 경치는 언제나처럼 평화로웠다. 음월정을 둘러싼
연못은 연잎이 푸르름을 자랑하며 연못을 덮고 있다.
이끼낀 거대한 정원석들로 둘러싸인 연못은 이 저택이 어제 오늘 세워진 것이
아님을 역사로 말한다.
음월정은 가산(假山)을 뒤로 하고 그 연못가에 세워져 있었다.
곽천수는 그 음월정에서 뒷짐을 진채로 우뚝 서 있었다.
당금 조정에서 가장 뛰어난 무장.
팔척장신을 자랑하는 그의 모습은 산악과도 같이 굳건하고도 당당했다.
명태조 주원장이 그의 뒤를 이어 2세황제가 된 손자 윤문을 부탁한
고명신탁(顧命信託)을 받은 사람중 하나가 바로 그였다.
주변의 평화로움과는 달리, 그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
어제, 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주왕(周王) 숙(▦)의 폐서인(廢庶人) 결정이
내려졌다.
뿐만 아니라 그는 운남(雲南)으로 유배되었다.
일개 유랑승려에서 일어나 천하를 휘어잡은 일대의 인물 주원장이 간 다음, 그
뒤를 이은 혜제(惠帝-후일 그는 건문제(建文帝)라 불리게 된다)는 어질고 착한
성품이었지만 천하를 호령하던 할아버지에는 도저히 비길 수 없었다.
주원장은 황태자이자, 혜제의 아버지인 표(標)가 죽고 나자 후일 있을지도 모를
반란을 염려해 수많은 옥사(獄事)를 일으켜 그를 따라 명을 세운 수많은 공신들을
모두 죽였다.
그렇게 되어 주원장이 죽고 난 다음에는 감히 반란을 일으킬만한 힘을 가진 자는
있을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그의 아들들인 제왕(諸王)의 힘은 여전히 막강했다.
주나라가 천하를 통일하면서 시작한 봉건제(封建制)는 천하를 왕실과 공훈신하에게
나라를 봉(封)하는 것에서 출발했다. 통일 진(秦)에 이르러 강력한 중앙집권제가
시행되었지만, 그것은 명초 천하를 통일한 주원장에 의해 다시 시행되었다.
그것은 천하를 주씨의 손아래 두겠다는 가천하(家天下) 사상에서 유래한다.
1368년 천하를 통일한 주원장은 명을 세운 뒤, 주대(周代)의 봉건제도를 본따서
모두 스물다섯 명을 왕으로 봉했다.
그중 스물네 명이 주원장의 아들이었다.
결국 각처에 스물 다섯 명의 제후(諸侯)를 거느린 것이 명의 황제인 셈이었다.
명을 건국한 주원장의 아들들은 그야말로 역전의 용장(勇將)들이었다. 아버지를
따라 종횡무진 천하를 누빈 그들인 것이다.
각처에서 할거하고 있는 혜제의 숙부, 주원장의 아들들은 제각기 그 지역의 병권을
쥐고 있었다. 그것은 힘을 의미했다.
그것을 염려한 혜제는 그가 믿고 있던 제태(齊泰)와 황자징(黃子澄), 당대의
대유학자인 방호유(方孝孺)등과 의논해 그들의 힘을 약화시키려 획책하고 있었다.
주왕 숙의 폐서인 결정은 바로 그러한 첫 움직임이었다.
곽천수는 천천히 음월정을 거닐었다.
바람이 그의 뺨을 간지럽히고 연꽃을 흔들어 놓는다.
하지만 무거운 마음은 여전했다.
태조 주원장이 죽은지 이제 겨우 삼개월이다.
젊은 황제의 움직임은 너무 성급했다. 비록 주왕에게 잘못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폐서인도 모자라 유배까지 시킨다는 것은 그것을 빌미삼은 삭번(削蕃)의 첫
움직임을 누가 모르랴.
삭번이란 왕들의 권력을 해제하여 그 권력을 중앙에 귀속시킴을 이른다.
강력한 세력을 가진 제왕들을 생각한다면 확실히 이 삭번의 계는 시의적절한
것이다.
하지만 병부상서 제태나 태상경 황자징 등은 문신이라 이러한 일을 추진할만한
능력이 없었다.
궁지에 몰린 쥐는 고양이를 무는 법이다.
하물며, 연왕(燕王) 태를 비롯한 제왕들은 결코 쥐가 아니었다. 어쩌면 고양이는
그들일 수도 있었다.
난세가 온다, 드디어 움직일 때가 된 것인가
『어쩌면…… 이 일로 인해 천하는 다시 한번 난세의 폭풍 속으로 빠져들게
될런지도 모른다……』
우뚝 선채로 곽천수는 중얼거렸다.
「난세(亂世)라…… 난세란 말인가!」
곽천수는 가슴이 갑자기 힘차게 뛰는 것을 느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아빠!』
그의 귓전에 천둥 같은 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것은 가히 마른 하늘에 날벼락과 같은 위세인지라 깊은 생각에 잠겨있던
곽천수는 가슴이 철렁하도록 놀랐다. 과장을 하자면 하마터면 음월정에서 굴러
떨어져 연못속으로 빠져버릴뻔 했다고나 할까.
놀라 뒤를 돌아보는 곽천수의 뒤에서는 댕기머리를 땋아 올린 귀여운 화복소녀가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놀랐죠?』
까르르…… 웃음을 터뜨리는 화복소녀의 나이는 이제 십육칠세가량. 동그스럼한
얼굴은 빼어난 미모는 아니라도 아름답고 귀여운 기태가 역력했다.
흰 피부의 얼굴 가운데에서 흑요석(黑曜石)과 같은 눈이 반짝이고 있는데,
누구라도 첫눈에 고생을 모르고 자란 귀한 자손임을 알 수 있는 모습이었다.
곽부용(郭芙蓉).
곽천수가 늙그막에 본 막내딸이 바로 그녀였다. 그야말로 금지옥엽,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인지라 최소한 장군부내에서는 그녀를 건드릴 사람은 없었다. 가히
무소불위(無所不爲)의 존재라고나 할까.
『쯧쯔……』
곽천수는 그녀가 버들허리를 부여잡고 웃음을 감추지 못하는 것을 보고는 혀를
찼다.
『도대체가 계집아이라는 녀석이 목청만 커가지고 얌전한 구석이라고는 눈을 씻고
봐도 찾을 수가 없으니 장차……』
『시집장가 어쩌고 또 그 말씀하시려는 거죠?』
말도 채 끝나기 전에 곽부용은 생글거리며 말꼬리 속으로 불쑥, 고개를 내민다.
말썽을 부리기로 말하자면 도대체가 건드릴 수가 없는 말괄량이가 바로 곽부용이다.
이 녀석이 또 무슨 트집을 잡으려고……
내심 쓴웃음을 지은 곽천수는 짐짓 고개를 저었다.
『그럴리가! 우리 공주님이야 사람 놀라게 하는 것만 빼면 세상에서 보기 드문
요조숙녀인데 그럴리가 있나?』
말을 돌리긴 했지만 그런다고 단념할 그녀가 아니다.
『그거 빼지 않으면요?』
여전히 눈빛이 보석과 같이 반짝이고 있었다.
허허…… 곽천수가 짐짓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런다고 달라질게 있나? 침선(針線)에서 요리에 이르기까지 우리 공주님이 뭐
못하는게 있어야지. 그래, 무슨 일로 여기까지 나온 거지? 날 찾아온건 아닌 것
같은데?』
곽천수는 말을 돌렸다.
그의 물음에 생각이 난 듯 곽부용이 주위를 돌아 보면서 입을 열었다.
『오빠는 어디 있죠?』
『서재에 없던?』
『피이…… 있으면 여기까지 와서 찾겠어요?』
『글쎄다……. 오전에는 못 본 것 같은데? 서재에 없으면 아마 주작가의
만박서림(萬博書林)에 가 있겠지』
곽부용은 그 말에 인상을 쓰면서 머리를 짚더니 종알거렸다.
『아빠는 어쩌자고 이 위대한 장군부의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을 그렇게 골샌님으로
키우시는 거예요? 나참…… 이렇게 나가다간 내가 칼들고 전장에 나가야 되는거
아닌지 모르겠네. 어떻게 된 샌님이 하루 종일 책만 붙들고 살아? 장가갈 생각도
않고……』
곽부용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바쁘게 정자에서 사라졌다.
「녀석……」
그녀의 뒷모습을 곽천수는 희미한 웃음을 떠올린 채 바라보고 있었다.
몸이 약했던 그녀의 엄마 곽부인은 그녀를 낳고는 산고를 이기지 못해 채 열흘을
넘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그야말로 엄마 얼굴도 보지 못하고 자라난 그녀이지만 곽천수의 걱정과는 달리
무럭무럭 자라나 누구나가 다 인정하는 장군부의 꽃이 되었다.
늘 웃음을 잃지 않는 해맑은 성격을 곽부용은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녀의 졸랑졸랑한 뒷모습에서 다시 연못으로 시선을 돌리는 곽천수의 얼굴은
자상한 아버지의 것에서 다시 근엄한 대장군의 것으로 굳어져 있었다.
「난세가 온다!」
그의 눈에서 불길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것은 세상의 혼돈(混沌)을 걱정하는 우국지사의 눈이 아니었다.
「드디어 움직일 때가 된 것인가? 그처럼 기다리던 ……」
곽천수는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구름이 세차게 일어나고 있었다.
쏴아아…… 휘늘어진 버들들이 불어오는 바람에 전신으로 흐느끼고 있다.
연못에서도 파문이 인다.
곽천수는 그 바람에 전신을 맡긴 채 우뚝 서 하늘을 쳐다보고 있었다.
고려의 멸망(滅亡)!
그 천추(千秋)의 한(恨)이 일어난지 이미 6년여…… 과연 기다림의 세월은 끝이
나고 그 치욕을 갚을 수 있을 것인가? 하늘이여, 하늘이여……
굽어 살피소서!!
고서더미를 뒤지는 유약한 책벌레 유생
금릉 응천부는 주원장이 도읍한 이래, 중원천하의 중심이 되었다. 당연히 천하의
문물이 이곳에 집중되었고 거리의 번화함은 눈부실 정도였다.
가히 하루가 달라지고 있다고 할까.
주작가(朱雀街)는 그 응천부의 중심에서 조금 떨어진 곳이다. 북적거리던 소란함도
조금쯤은 덜하고 사람들의 움직임도 그리 바쁘게 여겨지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이곳이 마냥 한적한 것만은 아니다.
절경(絶景)으로 유명한 막수호(莫愁湖)가 바로 주작가 뒤에 있기 때문이다. 호수를
찾는 유람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데 어찌 한가하기만 하겠는가.
이곳이 다른 곳에 비해 조용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이곳이 바로 서점가이기
때문이다.
구하기 힘든 서적들을 찾는 유생들의 발길이 어찌 소란스러우랴. 당연히 조용히
느껴질 수밖에.
그중 가장 규모가 큰 곳은 역시 만박서림이다.
만박서림은 진사 급제를 한 유학사(劉學士)가 시작한 것으로 시간이 지나면서
응천부 제일을 자랑하는 서점이 되었다.
만박서림에 들어서는 사람은 일단 그 규모에 질리게 된다.
사람의 키를 넘는 서가(書架)가 사방으로 절벽같이 버티고 늘어서 있음을 보면
누구라도 입을 벌리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천장에 닿을 듯 늘어선 서가도 모자라, 여기저기 구석구석까지 또 책이
쌓여 있음을 보노라면 이곳의 이름이 왜 만박서림인가를 알고도 남음이 있다.
그렇게 책이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아무렇게나 쌓여 있는 곳에서 부스럭거리고
있는 사람 하나가 있었다.
『지독하네. 이젠 저 고서더미까지 갔구먼. 설마 여기 있는 것들 중에는 볼 게
없다는 말이야?』
유생차림으로 보이는 그 사람을 지켜보고 있던 만박서림의 점원 하나가 혀를 찼다.
그 말에 곁에서 끙끙거리며 책정리를 하던 점원 하나가 힐끗 그 유생을 보곤
어이가 없는 듯 동료 점원을 돌아보았다.
『멍청하긴… 넌 어떻게 된 녀석이 아직도 장군부의 곽공자도 몰라?』
『곽공자?』
처음 입을 열었던 점원의 눈빛이 달라졌다.
『아니, 그럼 저 책벌레가 세상에 신동으로 소문난 그 곽공자란 말이냐?』
『누가 아니래? 내년에 있다는 전시(殿試;3년에 한번씩 있는 대과)가 있기도 전에
이미 장원으로 확정이 된 거나 다름이 없다는 바로 그 곽공자란 말이야. 세살
때부터 이미 사서삼경을 외우기 시작했다는데, 웬만한 책이 그의 눈에 차기나
하겠어?』
『제기랄!』
그 말에 먼저 점원이 혀를 찼다.
같은 사람일진대…
역시 하늘은 공평치가 못해.
점원은 입맛을 다셨다.
고서는 먼지더미 속에서 뒹굴고 있었다.
그가 본 고서들은 이미 수를 헤아릴 수 없었지만 그래도 대부분 정리가 된
것들이다. 하지만 그가 지금 뒤지고 있는 것들은 어저께 들어온 것이라고 했다.
보관 상태가 좋지 않아 손을 움직일 때마다 먼지가 풀풀 일어났다.
숨만 크게 쉬어도 기침이 났다. 숨을 가늘게 쉬면서 책을 뒤지던 그는 들여다보던
책에서 눈을 떼고 그 책을 내려놓았다.
그가 찾는 것은 이런 인쇄본이 아니었다.
그는 손에 들었던 고서를 내려놓고 다시 위태롭게 쌓여 있는 고서더미로 손을
가져갔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오빠아-!』
갑자기 날카로운 교성이 그의 귀청을 뒤흔들었다.
정신을 놓고 있었다고나 할까. 책에만 신경을 쓰고 있었던 그는 깜짝 놀라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고서더미를 왈칵 움켜쥐고 말았다.
그러지않아도 비틀거리며 외줄로 위태롭게 겨우 쌓여 있던 고서더미였다. 그런
불의의 타격을 견딜 리 없었다. 꿈틀하던 고서더미는 한줄이 무너지자, 그 뒤에
있던 줄까지 한꺼번에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으악?!』
고서더미의 밑동을 엉겁결에 움켜쥔 그가 그 책벼락을 뒤집어쓰게 된 것은
자명했다.
종이가루와 먼지가 구름처럼 일어났다.
『아이구… 이 책벌레… 종일 찾았잖아?』
처억하니 허리춤에다 손을 얹은 채, 책더미에 깔려 버둥거리는 그를 보며
종알거리는 것은 곽부용이었다.
책바다 속에서 먼지를 허옇게 뒤집어쓰고서 허우적거리는 저 책벌레야말로 그녀의
하나밖에 없는 오빠인 곽승고(郭承高)였다.
올해 나이 열아홉.
송옥(宋玉) 반악(潘岳)을 빰치는 미남은 아니지만 우뚝한 콧날 가운데 자리한
서글서글한 눈매에 깃들인 총기는 그를 지적으로 보이게 하기에 충분하고도
남았다. 하긴 세살 때부터 신동 소리를 듣던 그가 지적으로 보이지 않는다면 그
또한 이상한 일이 될 것이다.
아버지를 따라 말을 달리고 검을 휘두르는 것이 아니라, 밥먹고 자는 시간마저
아끼며 책만 끼고 있는 그의 안색은 흰 빛이 드러나게 창백했다.
유약하게 보임은 당연하였고, 책을 뒤집어쓴 채 눈을 끔벅이고 있는 그의 모습은
가히 책벌레의 전형과도 같았다.
제 1막 멸문지화(滅門之禍)
『난 또 누군가 했더니…』
나타난 것이 곽부용임을 알아본 곽승고가 책먼지에 콜록거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제발 그 소리 좀 지르지 않을 수 없니? 넌 도대체 뭘 먹고 그렇게 기운이 좋아서
걸핏하면 고함…』
『빨랑 일어나요! 지금 그런 말 하고 있을 때에요?』
곽부용이 곽승고의 소맷자락을 잡아당겼다.
『왜 그래?』
『몰라서 물어요? 지금이 몇시인데 아직도 여기서 이러고 있는 거예요? 빨랑
가요!』
곽부용은 폭포수처럼 말을 쏟아내면서 무조건 곽승고의 소맷자락을 잡아당겼다.
이 힘이란 게 또 만만치가 않아서 곽승고는 엎어지며 자빠지며 중심조차 제대로
잡지 못하고 그녀에게 끌려가야만 했다.
그의 머리에서 책 한권이 툭 떨어진 것은 바로 그때였다.
힐끗 쳐다보는 그의 시선에 「원세조밀기(元世祖密記)」라는 책 제목이 들어왔다.
오래 되고 낡아 너덜너덜한 책이었다.
아마도 쌓여 있던 책더미 중에서 그의 머리 위에 떨어졌던 것이리라.
그것을 본 곽승고의 눈빛은 조금 묘하게 변했다.
하지만 지금 그것을 보거나 어떻게 할 여유가 있을 리 없었다.
곽승고는 그 낡아빠진 고서를 엉겁결에 손에 쥔 채로 허둥지둥 그녀의 손에 끌려
만박서림을 떠나야 하였다.
그 모습은 심히 한심한지라 서림에 있던 사람 모두가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멀뚱히
서 있었다.
『도대체가 사람이 양심이 있어야지! 약란 언니가 얼마나 눈이 빠지게 기다릴는지
생각이나 해봤어요? 세상에…』
곽부용의 종알거림만이 여운처럼 남았다.
수서문(水西門) 바깥에 위치한 막수호(莫愁湖)는 응천부의 절경중 하나다.
찰랑이는 푸른 물결 아스라이 저 멀리 청량산(淸凉山)이 그림처럼 자리하고 호변을
가득 메운 버들은 휘영청 늘어져 불어오는 바람에 조용히 전신을 흔든다.
노을이 서서히 가라앉고 있었다.
보이는 모든 것들이 그렇게 황금빛이었다.
호수 위에 뜬 조각배들 또한 황금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절경이라 불리는 이유를 알고도 남을 경치였다.
푸른 가운데, 노을빛에 물들어 기이한 빛으로 아롱지며 호수면에서 흔들리고 있는
호변의 버드나무들.
거기에 기대듯 서서 불어오는 바람에 치맛자락을 펄럭이고 있는 여인 하나가
있었다.
여인이라고 부르기엔 아직 이르다고 할까.
나이는 채 스물이 되지 않아 보였다.
하지만, 그린 듯한 아미에 호수처럼 맑고 커다란 봉목(鳳目)이며 앵두 같은 입술
등은 그녀의 모든 것이 미인이라 불림에 조금도 모자람이 없음을 말하고도 남는다.
버드나무 숲에서 흔들리는 버들가지에 기댄 채 저녁 노을에 취한 듯 치맛자락을
펄럭이며 그윽히 호수를 바라보면서 서 있는 절세가인.
그 자체로 이미 모든 것은 한폭의 그림(天然入畵)에 다름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도 보는 사람에 따라서는 다르게 보이는 모양이다.
『봐! 아직도 저렇게 멍청하게 서서 기다리고 있잖아?』
곽승고를 끌고 나타난 곽부용은 호숫가의 그녀를 보곤 연신 입술을 삐죽였다.
그녀를 발견한 곽승고의 얼굴에 난처한 빛이 드러났다. 얼마나 급하게 끌려왔던지
그의 손에는 만박서림에서 가지고 나온 그 낡은 책이 그대로 들려 있었다.
『약란 언니는 정말 마음씨도 좋아. 두 시간이나 기다려주다니! 나 같으면 어림도
없지!』
곽부용이 다시 종알거렸다.
『아, 빨랑 가서 빌지 않고 뭘하고 있어요?』
엉거주춤한 곽승고를 보면서 곽부용이 매섭게 눈을 흘겼다.
『너, 너는?』
『나야, 다 저녁때 되어 가는 판에 집에 가서 홀로 계신 아빠 수발 들어드려야지!
내가 오빠처럼 사랑놀음이나 하고 있을 시간이 있는 줄 알아? 나도 바쁜
사람이야!』
단숨에 격류가 몰아치듯 말을 쏟아낸 곽부용은 휑하니 몸을 돌리더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졸랑졸랑 걸어가기 시작했다.
멍청하게 그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곽승고의 얼굴에 문득 훈훈한 웃음이
피어올랐다.
「녀석… 이젠 아주 엄마 노릇을 하려고 한다니까…」
장군부에 그녀가 없다면 아마 참으로 삭막하리라.
그녀의 모습이 사라지는 것을 보고 고개를 흔들며 몸을 돌리던 곽승고의 안색이
멈칫, 굳어졌다.
호수를 바라보고 있던 그 황의의 미녀가 어느새 시선을 돌려 그를 보고 있었던
것이다.
잠시…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흘러갔다.
침묵을 깬 것은 약란이라 불리는 황의의 미녀였다.
『벌써 오셨군요?』
그대가 내 곁에 평생 같이 있게 될 것임을…
벌써라는 말의 뜻은 참으로 묘한지라 곽승고는 어색하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미안, 미안… 책속에 빠져 있다 보니 미처 시간을 살피지를 못해서 말이오』
『나오고 싶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나요?』
어색했던 곽승고의 얼굴이 일순간에 굳어졌다.
『……』
그는 입을 다물었다.
『오늘은 그 말을 듣고 싶어서 곽대가를 기다렸어요. 불과 몇개월 전만 해도 나는
당신을 위해 밥 짓고 빨래하는 아낙이 될 것임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어요…』
심중의 격동을 억제하지 못하는 듯 약란은 입술을 물었다.
『하지만 언제인가부터 당신은 달라졌어요』
『약란』
『달라졌어요! 왜?』
그녀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왜죠? 이 약란이 무슨 잘못을 했기에?』
그 옛날부터 여자의 눈물이란 것은 남자에게는 가히 치명적인 무기다. 그 어떤
영웅호걸도 사랑하는 여자의 눈물 앞에서 그것을 이겨낸 역사가 없음이 또한
진실이다.
곽승고는 머리를 흔들었다.
『아니. 매에게는 아무런 잘못도 없어. 단지…』
머리를 흔든 그는 이내 가슴이 무너질 듯 한숨을 쉬면서 이제 호수 전체를 짙은
황금빛으로 도배하며 스러져가는 낙조의 최후를 바라보았다.
막수호 전체가 침몰하고 있는 듯하였다.
가슴이 터질 듯 답답했다.
방약란(方若蘭)은 당대의 거유(巨儒)로 이름높은 방효유의 조카딸이었다. 장년의
나이로서 천하제일의 석학이라는 칭호를 받는 방효유의 조카딸인 그녀는
응천부에서도 이름난 미녀였다. 하지만 그녀는 방효유의 조카딸로서가 아니라
일신의 재주로서 이름높은 재녀이기도 했다.
그녀와 곽승고의 만남은 오래 전에 시작되었다.
시종들이 한눈을 파는 틈에 몰래 물놀이를 나갔던 그녀가 막수호에 빠져
허우적거릴 때 마침 고기를 잡으러 그곳에 나왔던 곽승고가 그녀를 구했던 것이다.
옛날 이야기의 한 장면과 같은 그 만남은 마침 격렬한 소나기가 쏟아지는 바람에
더 오래 이어졌다.
버드나무 아래서 오도가도 못하고 앞도 보이지 않게 쏟아지는 소나기 속에
웅크리고 앉아 오돌오돌 떨고 있는 방약란을 곽승고가 꼬옥 부둥켜 안고 있는 것을
발견한 것은 폭우 속을 헤치고 사방을 헤매던 방가의 시종들이었다.
그렇게 시작된 두 사람의 만남을 방해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리고 10년…. 둘의 만남은 이젠 깊은 정(情)으로 맺어진 상태였다.
누구라도 두 사람이 결혼하게 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둘은 그렇게 정다웠고 집안에서도 그들을 축복하는 상태였다.
그런데 어느날부터 변화가 생겼다.
곽승고가 그녀를 기피하기 시작한 것이다.
아무런 이유도 없었다.
최소한 방약란은 그 이유를 짐작조차 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친한 곽부용도 그 까닭은 알지 못했다.
『방황?』
방약란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곽승고를 보았다.
곽승고는 고개를 끄떡였다.
『그래. 방황이야. 잠시… 방황을 했었던 것뿐이야. 하지만 이젠 끝났어. 그리고
이 자리에서 말할 수 있는 것은 내가 언제까지라도 란매의 곁에 있을 것이라는
거야』
『…!』
방약란의 눈매가 격동으로 떨렸다. 호수와 같이 크게 맑은 두 눈이 참을 수 없이
출렁이는 듯하였다.
곽승고는 그녀의 말을 기다리지 않았다.
그는 빙긋이 웃으며 방약란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것으로 되지 않았나? 내가 란매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으로?』
방약란은 가슴이 뛰었다.
주변의 노을이 모조리 황금빛으로 변하고 눈앞에 무지개가 피어오르는 것 같았다.
좀전까지 그렇게 쓸쓸하던 황금빛 노을이었다.
『곽대가!』
외마디 부르짖음.
거기에는 수많은 감정의 소용돌이가 얽히고 설켜 있었다.
외침과 함께 방약란은 곽승고의 품속에 몸을 던졌다.
누가 보아도 좋았다. 아니 모두에게 보여주고 싶기도 했다.
곽승고는 힘주어 방약란을 부둥켜 안았다.
『믿어. 그리고 의심치 말아. 란매가 내 곁에 내 사람으로서 평생 같이 있게 될
것임을…』
그래 이제는 널 놓치지 않겠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곽승고는 방약란을 소중하게 안은 채 나직이 중얼거렸다.
『무, 무슨 말씀이십니까?』
곽승고는 두 눈을 부릅떴다.
방금 자신이 들은 말을 그는 믿을 수 없었다.
그의 앞에는 산처럼 완강하게 그의 아버지 곽천수가 앉아 있었다.
『란매와의 교제를 끊다니? 다시는 만나지도 말라니? 대체 무엇 때문입니까?』
곽승고는 격하게 말을 쏟아내고 있었다.
아마도 아버지의 앞에서 이렇게 격한 어조를 사용한 것은 그가 태어난 이래 처음일
것이었다.
『너와 그 아이는 맺어질 수 없다』
곽천수의 음성은 간단하고도 단호했다.
그 눈빛에는 확신이 깃들어 있었다.
곽승고는 알고 있었다.
그의 아버지 곽천수가 저러한 태도로 말할 때에는 하늘이 무너져도 그 뜻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왜? 무엇 때문입니까? 얼마전까지도 아버님께선…!』
곽천수의 말로 인해 곽승고의 말은 더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그 이유는 지금 말할 수 없다』
곽승고를 바라보는 곽천수의 눈길은 이글이글 횃불과 같이 타오르고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른 다음이라면 알고자 하지 않아도 알게 되리라. 네게는 따로
해야 할 일이 있음을…』
따로 해야 할 일.
그것이 무엇인지는 곽승고는 지금도 알지 못했다.
방약란을 안고 있는 지금 이 순간까지도.
* * *
밤하늘.
은하수가 보석을 뿌린 듯 총총하다.
구름 한 점 없이 맑게 갠 밤하늘에 흰 궤적이 한줄기 일직선으로 그어지고 있었다.
그 궤적은 마치 유성이 떨어지듯이 그렇게 장군부를 향해 날아들었다.
구구구…
날아든 비둘기는 창틀에 앉아서 낮게 울었다.
손 하나가 뻗어나와서 비둘기를 자신의 손 위에다 올려놓았다. 비둘기는
퍼득거리지만 날아가진 않았다.
그 비둘기는 소식을 전하기 위해 훈련된 전서구(傳書鳩)인 것이다.
그 손은 비둘기의 다리에 묶인 동관(銅管) 속에서 정교하게 접어진 작은 종이
두루마리를 꺼냈다.
비둘기를 다시 창틀에다 내려놓고 촛불 아래서 그 종이 두루마리를 읽고 있는
사람은 바로 대장군 곽천수였다.
그의 안색은 심각하고도 무거웠다.
다시 한 번 종이에 적힌 내용을 읽어본 곽천수는 그 종이를 촛불에다 갖다댔다.
종이가 비틀거린다 싶은 순간에 그것은 이내 화염에 휩싸여 사라졌다.
종이 두루마리를 태운 곽천수는 서안(書案)에 있던 세필(細筆)을 들어 종이에
일필휘지하여 비둘기의 다리에 묶인 동관 속에 넣었다.
부리로 날개를 다듬고 있던 비둘기는 그의 손에 의해 다시금 하늘로 날아올랐다.
장군부의 상공으로 떠오른 비둘기는 한 바퀴를 돌더니 이내 방향을 잡고
일직선으로 날아가기 시작했다.
「계획을 앞당겨 시행코자 하오. 승고에게 자신의 신분과 이제부터 그가 해야 할
일을 알려주도록 하시오. 3일 후, 승고를 만나기 위해 친히 응천부로 가겠소…」
날아가는 전서구를 바라보고 있는 대장군 곽천수의 안색은 침중하게 굳어져 있었다.
「승고에게 자신의 신세내력을 알려주는 것은 그가 내년의 전시에서 장원을 하고
난 다음의 일로 예정되어 있었다! 그것은 본인의 신분을 알고 난 다음에 생길
만약의 사태를 대비한 포석…」
곽천수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잡혔다.
「그런데 지금 당장 알려주라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전서구의 흰 궤적은 이미 보이지 않았다.
밤하늘의 별은 여전히 아무일도 없었던 듯이 초롱초롱했다.
「그분께서도 대세의 흐름을 급박하다고 판단하신 것일까? 아니면… 대업에 어떤
차질이라도 발생한 것이란 말인가」
문득 그는 깊은 시름에 잠긴 숨을 토해냈다.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깊은 시름과 함께 눈을 내려감은 그의 모습은 여전히 강인한 산악과 같다.
하지만, 다시 눈을 뜬 그의 눈에서는 비수와 같은 광채가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결국 와신상담의 세월은 끝이 난 것 같군! 그렇다면…』
『뭘 그렇게 혼자서 중얼거리세요?』
느닷없이 뒤에서 들려온 음성에 의해 곽천수의 생각은 중단되어 버렸다.
아니 끊겨버렸다고나 할까.
깜짝 놀란 곽천수의 뒤에는 어느새 호기심에 가득 찬 눈을 보석처럼 반짝이면서
고개를 내민 곽부용이 자리했다.
『넌 도대체…?』
곽천수는 어이가 없는 듯 자신의 앞에서 눈을 깜박이고 있는 곽부용을 보았다.
곽천수에게로 고개를 들이민 곽부용의 눈은 장난스레 웃고 있었다.
『어떻게 된 애가 고양이처럼 소리도 없이 사방을 돌아다니느냐는 거죠?』
냉큼 곽천수의 말을 받은 곽부용은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그야 당연하죠! 부용인 무가(武家)의 딸이니까 몸이 버들처럼 가볍거든요?』
곽부용은 활짝 웃는 얼굴로 종알거리면서 그 자리에서 보라는 듯 몸을 빙그르르
돌려 보인다. 발 움직임이 마치 바람과 같다.
어릴 때부터 말괄량이로 자라면서 그의 부장들에게서 검술까지 배워대던 녀석이다.
게다가 춤사위가 제법인 상태이니 몸 움직임이 가벼울 수밖에.
쓴 웃음을 짓던 곽천수는 문득 입을 열었다.
『네 오라비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느냐?』
곽부용은 춤추듯 돌리던 몸을 멈추었다. 아버지를 향한 그 얼굴에는 웃음기가
떠올라 있었다.
『벌써 올 리가 없죠! 오늘은 조금 늦을 거예요』
『늦어?』
곽천수는 고개를 갸웃하곤 곽부용을 쳐다보았다.
『너… 만박서림까지 네 오라비를 찾아가서 무슨 짓을 한 거냐? 무슨 짓을
했길래…』
『아빤… 내가 무슨 짓을 해요?』
『그런데 네 오라비가 왜 늦게 돌아온다는 거냐?』
『글쎄… 그게 왜 그렇죠?』
곽부용은 오히려 반문했다.
맑은 두 눈을 깜박이며 생각에 잠긴 그녀의 표정에 곽천수는 어이가 없었다.
식지를 앵두빛 입술에다 대고 짐짓 생각에 잠긴 그녀의 표정은 제법 진지했다.
그녀가 아!하고 탄성을 토해낸 것은 바로 다음 순간이었다.
『그렇네요. 이제야 생각이 났어요』
소리친 그녀는 곽천수를 보고 배시시 웃었다.
『생각을 해보니까, 그건 비밀되겠네요!』
『뭐라고?』
기가 막힌 듯한 곽천수의 표정에 곽부용은 까르르 웃음을 터뜨리더니 불쑥 얼굴을
곽천수의 턱밑에다 들이밀었다.
『그보다 배고프지 않으세요? 잠시만 기다리세요! 제가 금세 기가 막힌 거 만들어
가지고 올게요!』
대답을 기다리는 법은 없다.
마지막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곽부용은 빙글 몸을 돌려 팔랑거리며 문밖으로
뛰어나가고 있었다.
「녀석…」
마치 홀린 듯이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곽천수의 얼굴에 희미한 웃음이
떠오르는가 싶더니, 이내 그것은 납덩이처럼 굳어져갔다.
「너의 얼굴에서만은 언제까지라도 그 웃음이 사라지지 말았으면 하는 것이 내
바람이었는데 이제는 그것도 장담할 수 없는 일이 되겠구나…」
영문 모를 소리를 중얼거리면서 깊게 탄식한 그는 무거운 시선을 천천히 하늘로
가져갔다.
비둘기가 그었던 하늘의 궤적은 이미 보이지도 않았다.
한가지 분명한 것은 조정에서는 연락을 하기 위해서 전서구를 사용하는 법은
없다는 것이다.
강변에는 갈대가 우거져 있다.
물오른 버들은 강바람에 살랑이고 어둠은 이미 사위를 강하게 내리누르고 있었다.
주변에서 들리던 웃음소리와 풍류가락은 들리지 않은 지 오래. 어둠이 내렸다고 그
소리가 그친 것이 아니라, 곽승고가 걷고 있는 곳이 갈대가 우거진 한적한
강변이기 때문이었다.
사람의 키만큼 무성한 갈대숲이 강변을 덮고 있는데, 어디에서 풍류를 찾을 수
있으랴.
강변을 걷는 곽승고의 발길은 무거웠다.
이제부터 그는 싸워야 했다.
한번도 거역한 적이 없는, 그가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는 아버지 곽천수의 명에
항거해야 하는 것이다.
그의 말대로 그녀를 포기할 수는 없었다.
그렇게 하기에는 방약란의 존재가 그의 가슴에서 차지하고 있는 비중이 너무 컸다.
『아버님께는 죄송하지만…』
곽승고는 다짐하듯 지긋이 입술을 깨물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으악-!』
심금을 울리는 참혹한 외마디 비명이 들려온 것은.
곽승고의 전신이 일순 굳어졌다.
비명이 터져나온 곳이 얼마 떨어지지 않은 버드나무 숲속이었던 까닭이다. 갈대가
우거지고, 그 강변 안쪽으로 다시 버드나무가 무성했다.
사람이 숨어 있어도 제대로 보이지 않을 숲속에서 느닷없이 터져나온 비명은
곽승고를 놀라게 하기에 족하였다.
『으아악-!』
그가 걸음을 멈추고 그곳을 바라보는 순간에 단말마의 비명이 또다시 들려왔다.
그처럼 참혹했던 전란(戰亂)이 사라진 것도 이미 오래. 태조 주원장이
원훈대신(元勳大臣)들을 갖가지 죄목으로 죽이던 옥사(獄事)도 옛일.
비록 날이 어두워지고는 있다고 하지만 경사(京師)에서 살인이란 말인가.
서생이라고는 하지만 무가(武家)의 장손인 그다.
손에 검을 쥐면 웬만한 도적 따위와는 충분히 상대할 수 있는 능력을 그는 가지고
있었다.
곽승고는 다음 순간에 비명이 들려온 곳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숲은 의외로 깊다.
버드나무가 덩치를 자랑하며 팔을 벌리고 있고, 사방에는 수풀이 우거져 대낮이라
할지라도 충분히 햇빛을 가릴 만한 그늘을 가진 숲이었다.
「이쯤 어디에서 비명이 들린 것 같았는데…」
곽승고는 미간을 굳힌 채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바로 그때였다.
무엇인가가 불쑥 수풀 속에서 튀어나와 그의 발목을 움켜잡은 것은.
「으헉?!」
돌연한 사태에 아래를 내려다본 곽승고는 기겁을 했다.
그것은 피투성이가 된 손이었다.
비명을 듣고는 어두워진 숲속에 들어와서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돌연
발목을 잡는 피투성이의 손이 나타난 것이다. 제 아무리 심장이 튼튼하다 해도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곽승고의 뒤편.
아름드리 버드나무 밑의 무성한 수풀 속에 피투성이의 백발노인 한 사람이 엎어져
있었는데 곽승고의 발목을 잡은 것은 그의 손이었다.
하지만 그 손에는 이미 힘이 없어 곽승고가 놀라 뒤로 물러서는 순간에 발목을
잡은 그 손은 풀어져 버리고 말았다.
『으으윽…』
황삼의 백발노인은 곽승고를 향해 피투성이의 손을 휘저었다. 일어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지만 이미 몸이 말을 듣지 않는 것 같았다.
『누, 누구시오?』
『으, 으윽! 그… 그들… 그들이…!』
곽승고의 외침에 백발노인이 쥐어짜듯이 중얼거렸다.
그로서는 전신의 모든 기력을 다해 외치는 듯했지만 그 소리는 귀를 갖다대야 들릴
만큼 작았다.
『노인장, 제 말이 들립니까?』
그의 기식이 엄엄함을 직감한 곽승고는 한쪽 무릎을 꿇으며 그를 부축했다.
그의 말소리를 들은 백발노인은 눈을 희번덕거리더니 이내 두 눈에 공포의 빛을
드러냈다.
그는 마치 눈앞에 있는 무엇을 쫓아내기라도 하듯이 두 손을 휘저으며 소리쳤다.
『귀, 귀왕… 귀왕혀얼(鬼王血)…!』
말과 함께 그의 입에서 붉은 선혈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그의
머리는 누가 잡아당긴 듯이 곽승고의 팔에 힘없이 걸쳐졌다.
『이런 일이…!』
곽승고는 그의 시신을 내려다보며 신음했다.
백발노인은 부릅뜬 두눈에 뚜렷한 공포를 드러내고서 그렇게 그의 품에서 죽어간
것이다.
『귀왕혈? 귀왕혈이란 것이 무엇이기에 이 노인이 죽어가면서까지 그렇게
공포스러워한 것일까…』
잠시 노인의 시신을 내려다보고 있던 곽승고는 나직이 신음했다.
갑자기 주위의 정적이 무겁게 그를 짓눌러왔다.
공연히 가슴이 섬뜩해져 고개를 들던 곽승고의 눈빛이 굳어졌다.
희끗희끗한 그림자가 앞쪽에서 번뜩인 것 같았기 때문이다.
노인을 조심스레 바닥에 누이고 몇 걸음 앞으로 나선 곽승고는 부지중에 숨을
몰아쉬었다.
그의 앞쪽에는 숲 가운데 형성된 공터와 같은 초지가 있는데, 그곳에는
목불인견(目不忍見)의 참상이 벌어져 있었던 것이다.
주인 잃은 검도(劍刀)가 어지러이 널려진 가운데 팔다리가 날아가고 목이 베어져
죽어 넘어진 시체 십여 구가 거기에 쓰러져 있었다.
짙은 피비린내를 풍기면서….
그를 더욱 놀라게 한 것은 그 죽어 넘어진 사람들 가운데 등을 보인 채 우뚝 선
황의인이었다. 날렵한 황색 무복을 입은 그는 죽은 사람들에게 허리를 구부리고
무엇인가를 살펴보고 있는데, 그의 손에는 검 한 자루가 들려 있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이 참극(慘劇)은…?
공포스러운 생각을 하게 된 곽승고가 암암리에 숨을 들이켠 순간에 황의인은 이미
그의 기척을 느낀 듯 뒤를 돌아보고 있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서로를 보게 되었다.
그 순간, 곽승고는 한가닥 바람이 스침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의 신형은 마치
거짓말처럼 곽승고의 눈앞에 서 있었다.
뿐인가.
대체 언제 뽑혔을까?
분명히 손에 검집째 들려 있는 것 같았던 그의 검은 이미 검집을 벗어나 곽승고의
목젖에 바짝 닿아 있었다.
서리 같은 검기가 곽승고의 전신을 핍박해왔다.
『넌 누구냐?』
황의인은 싸늘히 물어왔다.
그의 눈빛은 목소리만큼이나 찼다.
갓 삼십쯤 되었을까. 아니면 그보다 젊을까? 언뜻 보면 이십대처럼 보이기도 했다.
단아한 그 얼굴은 얼음조각을 해놓은 듯 차가워 나이를 짐작키 어려웠다.
섬뜩한 검끝을 목젖으로 느끼며 곽승고는 오히려 반문했다.
『당신은 누구요?』
이러한 상황하에서 반문을 할 수 있는 담량을 지닌 사람은 그리 쉽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황의인의 차가운 눈동자에 묘한 빛이 스쳐갔다.
황의인은 곽승고의 아래 위를 단숨에 훑어보더니 의미를 알 수 없는 싸늘한 웃음을
떠올렸다.
『맹랑하군! 감히 이런 상황하에서 말대꾸를 하다니… 죽음이 겁나지 않는단
말이냐?』
『……』
곽승고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대신 그는 자신의 목에다 검을 겨누고 있는 황의인의 눈을 보고 있었다. 그가
손에 조금만 힘을 주면 자신은 이 자리에 시체가 되어 넘어지리라.
전신으로 긴장이 살처럼 달려갔다. 진땀이 한방울 곽승고의 이마에 솟아났다.
하지만 그는 묵묵히 그를 보고 우뚝 서 있을 따름이었다.
『서생치고는 대담하군』
황의인은 내뱉듯 중얼거리곤 검을 거두었다.
검을 거두는가 싶은 순간에 그 검은 이미 검집에 들어가 있었다. 검자루의 끝에
달린 붉은 수실이 흔들리고 있음이 그 검이 움직였음을 의미할 정도로 그 움직임은
놀랍게도 빨랐다.
『돌아가라. 여기는 너와 같은 서생이 있을 곳이 아니다』
말과 함께 그는 몸을 돌렸다.
『무엇 때문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죽인 것이오? 당신은 국법이 두렵지도 않소?』
하지만 곽승고의 입에서 쏟아져나온 말은 그의 발길을 붙들기에 족했다.
황의인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곽승고를 보았다.
그의 눈빛은 여전히 서리처럼 찼다.
『죽고 싶으냐?』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그 눈빛만큼 무감정했다.
『전혀. 당신이 나를 죽이고자 한다면 나는 이미 이 자리에 시체로 누워 있겠지!
나는 단지 당신이 왜 이렇게 많은 사람을 죽인 것인지 알고 싶을 뿐이오. 아무도
다른 사람을…』
곽승고는 더이상 말을 계속할 수 없었다.
번쩍 하는 순간에 다시 황의인의 검끝이 그의 목젖을 찌르고 있었으므로.
눈앞의 그를 보고 있었음에도 그가 언제 어떻게 검을 뽑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다만 찌르는 듯한 고통과 함께 그의 검끝이 그의 목젖을 파고들고 있음을 느낄 수
있을 뿐이었다.
『쓸데없는 간섭은 명을 재촉한다』.
황의인은 여전히 차갑게 말했다.
『……』
곽승고는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그의 전신에서 뿜어져나오는 기세는 그가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더구나
그의 검끝에 찔린 목젖에서는 선혈이 목을 타고 가슴으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눈빛은 흔들리지 않았다. 목젖을 찔러오는 검끝의 고통으로 인해
눈살을 찌푸렸을 뿐, 그는 흔들림없는 태도로 자신의 앞에 선 황의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제법 뼈대가 있군! 한가지만 말해주지. 한번 뽑았던 검은 다시 뽑을 수
있음을…』
황의인은 곽승고의 눈을 보고 있다가 싸늘히 말했다.
『이 사람들은 내가 아니라 귀왕혈에 의해 죽었다』
그는 말과 함께 검을 거두었다.
『귀왕혈?』
『그렇다. 죽이고자 하는 자가 있다면 지옥끝까지라도 쫓아가서 죽이고야 마는,
무서운 살인청부 집단이 그들이다. 이 이상은 너와 같은 서생이 알 일이 아니다.
그만 돌아가라』
황의인은 몸을 돌렸다.
아마 그는 근래에 들어 가장 많은 말을 한 셈이었다.
곽승고는 더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저 황의인은 그가 지금까지 보았던 무사들과는 그 격이 틀렸다. 장군부에는 수많은
검수(劍手)들이 드나들지만 저 사람과 같은 놀라운 신수를 보여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는 자신을 죽이려면 열번도 더 죽일 수 있었다.
이 참극이 귀왕혈에 의해 일어났다는 그의 말은 틀림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알지 못했다.
귀왕혈이란 처음 듣는 단어가 자신과 어떤 관련을 가지게 될 것인지….
* * *
팡!
격렬하게 뻗어나는 손 하나.
소름끼치는 음향이 그 손이 이르는 곳에서 터져나왔다. 피보라를 뿌리며 그 손에
부딪친 장한이 날아갔다.
손은 미처 장한의 목에 이르지도 않았는데 장한의 목은 쇠절구에라도 부딪친 듯이
끔찍한 소리와 함께 수풀 속에 나뒹굴었다. 그 목에 붙은 머리는 거의 몸체에서
떨어져 흐늘거렸다.
독수리의 발톱과 같이 움츠린 형태로 뻗어났던 그 손의 주인공은 어둠 속에 선명히
드러나는 백의를 걸친 사람이었다.
말이 백의지, 옷은 온통 붉은 물감을 칠한 듯 피로 붉게 얼룩져 있었으며 얼굴은
산발된 머리카락이 온통 뒤덮고 있어서 그 모양조차 제대로 알아보기 힘들었다.
하지만 어둠 속에서도, 산발된 머리카락 속에서도 정광(精光)을 뿜어내고 있는 그
눈빛은 그가 범상한 사람이 아님을 의미했다.
그러나 그가 막 자신의 앞을 가로막았던 한 사람을 날려보내는 순간에 그 눈에는
격렬한 고통의 빛이 떠올랐다.
검 한 자루.
어느새 음산한 기색의 흑의인 하나가 검 한 자루를 산발 백의인의 가슴에다
쑤셔넣고 있었다.
가슴이 불로 지지는 듯했다.
검은 그의 가슴을 관통하고 등 뒤까지 비어져 나올 정도로 맹렬하게 그의 가슴을
꿰뚫었다.
그의 가슴을 검으로 꿰뚫은 자가 회심의 미소를 떠올리기도 전에 산발 괴인은 방금
전에 장한을 날려보냈고 거둬들이던 응조(鷹爪)로 자신의 가슴을 꿰뚫은 장검을
쳤다.
땅! 하는 소리와 함께 검이 두동강이 났다.
그의 가슴에다 검을 쑤셔박았던 흑의인의 눈에 경악이 떠오름과 동시에 그 손은
이미 그 흑의인의 얼굴을 손바닥으로 누르고 있었다.
『와아악!』
참혹한 비명.
흑의인의 얼굴이 마치 두부가 벽에 부딪친 것처럼 터져나가면서 날아갔다.
부르르르…
흑의인을 날려보낸 산발 괴인의 손이 경련했다.
그는 가슴을 움켜쥔 채로 옆에 있던 아름드리 나무에 쓰러질 듯이 어깨를 기댔다.
『크으으으…!』
참으려 해도 참을 수 없이 고통의 신음이 그의 입을 비집고 흘러나왔다.
그의 일신에 잠재한 깊고 두터운 내공의 힘이 아니었다면 그는 지금까지 버티고
있지 못했을 것이었다.
가슴을 움켜쥔 손가락 사이로 선혈이 샘솟듯 솟구치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전신에서 흘러나올 피는 이제 그리 많지 않았다. 산발을 한 그의 머리카락 사이로
드러난 얼굴에서도 피는 아직까지 계속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의 형상은 가히 참혹, 그것이었다.
헉헉거리며 가쁜 숨을 내쉬던 산발 괴인은 다짐하듯 중얼거렸다.
『어, 어떤 일이 있더라도 이 음모는… 이 음모만은…』
산발 괴인은 이를 악물고는 그 자리를 떠나기 시작했다.
그가 떠난 자리에는 흑의인들의 시신 대여섯 구가 참혹했던 격전을 말하듯 쓰러져
있었다. 그의 가슴에 검을 찔러넣었던 흑의인은 그를 추격하던 자들 중에서 마지막
한명이었다.
주위를 사납게 휩쓰는 피비린내는 하늘마저 찌푸리게 하여 달은 구름 속에 숨었다.
어둠이 더욱 짙게 내리는 숲에는 세찬 바람이 휙휙 몰아쳐 나뭇가지를 뒤흔드니
정경(情景)은 더욱 음산 공포스러웠다.
산발 괴인이 그 자리를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방갓을 쓴 사람 하나가 소리도
없이 숲속에 나타났다.
손에는 보검을 들었다. 정치(精緻)한 형상으로 만들어진 검집만으로도 평범한
물건이 아님을 알 수 있을 듯한 그 검의 검자루에서는 붉고 푸른 수실 두 가닥이
흔들리고 있었다.
백의 경장을 한 그의 눈은 방갓 속에서 싸늘하게 빛났다.
강호인으로서 밤에 백의를 입고 다닌다 함은 그가 강호 초년생이거나 아니면
대단한 자신을 가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주위의 처참한 정경을 보고도 눈살 하나 찌푸리지 않고 침착하게 주변을
둘러보는 그의 태도를 보고 강호에 처음 발을 디딘 사람이라고 생각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었다.
날카롭게 주변을 쓸어본 그는 이윽고 산발 괴인이 마지막으로 어깨를 기대었던
나무에 희미하게 남아 있는 핏자국을 찾아내고는 나직히 중얼거렸다.
『과연 대단하군. 그 몸으로서도 내 수하 고수들을 물리치고 이곳을 벗어났단
말인가』
말뜻은 놀랍다는 것 같지만 산발 괴인이 사라진 쪽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얼음처럼 차갑다.
『하지만… 넌 세상에 남아 있어서는 아니될 존재다. 내가 있기에…』
말의 여운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의 신형은 어둠을 뚫고서 숲속으로 사라졌다.
단 한 번의 도약으로 어둠 속으로 묻혀버린 그의 경공은 강호를 놀라게 하기에
족할 정도였다.
휘이잉…
다시금 세찬 바람이 버려진 주검들을 휘감아 돌았다.
번쩍! 꽈르릉! 꽝!
뒤를 이어서 밤하늘에 마른 번개가 먹구름을 뚫고서 진저리를 치며 땅으로
곤두박질쳤다.
* * *
깨진 쪽박과 같이 허공에 걸린 달은 겨우 손톱만 했다.
그나마 불어대는 바람으로 인해 구름에 가렸다 나타났다 하는 판이니 이 밤의
야경은 별 볼 일이 없었다.
고관대작들의 거리라는 서관대로(西官大路) 깊숙이 위치한 방가대원(方家大阮)은
이름과는 달리 그리 엄청난 규모는 아니다. 하지만 흙담벽 집에서 사는 서민들과는
여전히 비교조차 할 수 없는 것이 고관들의 삶이다.
방가대원의 후원 이층 누각에는 방약란의 침실이 있다.
방약란은 누각의 난간에 나와서 구름 속에 내팽개쳐졌다가 다시 기를 쓰고 구름
밖으로 날카로운 뿔을 내미는 상현달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곽승고의 얼굴이 그 하늘에서, 달에서 떠올랐다 사라졌다.
사랑해요…
방약란은 나직이 중얼거렸다.
그러했다.
그녀는 그를 사랑했다.
저 달이 구름에 가려 빛을 잃을지라도 그 자리에 있는 것처럼, 달마다 차고
이즈러져도 그 자리에서 다시 또 떠오르는 것처럼 그렇게 그를 사랑했다.
언제까지라도 그렇게…
그는 돌아가면서 곧 매파(媒婆)를 보내서 정식으로 청혼을 하겠다고 했다.
방약란은 그의 들판과 같이 넓은 가슴의 아늑함을 떠올리곤 얼굴이 붉어졌다. 그의
부인이, 아내가 되는 것이다.
그럼 언제나 그의 곁에 있게 될 것이고…
사랑에 빠진 규중 처녀의 가슴은 기대로 부풀었다.
마치 곽승고의 얼굴을 그 속에서 찾아내기라도 할 듯이 그렇게 달빛을 쫓고 있던
방약란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누르며 몸을 돌렸다.
『아!』
창문을 닫고 몸을 돌리던 방약란은 탁자에 조용히 앉아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대체 언제, 어디에서 나타난 것일까?
대황촉이 사위를 밝히고 있는 방약란의 침실, 그 가운데 있는 탁자 의자에 회색빛
승의를 입은 여승 한 사람이 앉아 조용히 염주를 굴리면서 그녀를 보고 웃고
있었다.
눈가에 잔주름이 서린 여승의 얼굴은 자애로웠다.
『사부님?』
노니(老尼)를 발견한 방약란은 놀란 기색이 이내 기쁨으로 바뀌어 비 맞은 참새가
둥지로 날아들듯이 노니의 가슴으로 돌격해 들어갔다.
『아이쿠쿠… 이런 녀석이 있나? 늙은 스승 갈비 부러지겠구나. 대체 언제까지
이렇게 어리광만 부릴 생각이냐?』
노니는 그녀를 안으며 짐짓 비명을 터뜨렸다.
『어쩌면 그렇게 오시질 않으셨어요? 제가 그간 얼마나 사부님을 보고 싶어했는지
아세요?』
방약란은 노니의 목을 끌어안고서 활짝 웃었다.
『그렇더냐? 흠… 노납이 보기엔 별로 그런 것 같지도 않은데?』
『사부님은?』
방약란이 눈을 흘겼다.
노니는 방약란의 애교에 그녀의 등을 두드리며 인자한 웃음을 떠올렸다.
『사실은 뜻하지 않은 일들이 자꾸만 생겨서 말이다…. 그래, 그간 잘 있었느냐?』
『그럼요. 제자는 이렇게 건강한 걸요! 그런데 일년이 넘도록 소식 한 번
없으시더니 기별도 없이 갑자기 어쩐 일이세요?』
그녀의 되물음에 노니의 자애한 안색이 조금 굳어졌다.
『갑죽음의 공포보다 더 무서운 이름 귀왕혈
제1장 멸문지화(滅門之禍)
산악과 같이 선 노인.
그 앞에 조용히 무릎을 꿇은 백의인.
바람이 여전히 세차게 불고 있었다. 다시 노인의 말소리가 바람을 흩뜨렸다.
『중원에는 네 사형이 있다』
『!』
깊은 물과 같던 백의인의 얼굴에 처음으로 떨림이 일어났다.
『사형… 이란 말입니까?』
노인은 고개를 끄떡였다.
『그렇다. 아직까지 말해주지 못했지만 네게는 먼저 입문한 사형이 있으며, 그는
지금 사명을 띠고 중원에 가 있다…』
백의인은 아직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사부를 보고 있었다.
『사부님… 그건…』
백발노인은 마치 그의 말을 막듯이 고개를 끄떡였다.
『이 일이 일맥단전(一脈單傳)하는 수호신문의 율법에 어긋남은 분명하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취해진 부득이한 조치…』
하늘은 여전히 회색으로 어둡다.
우우우….
눈보라는 점점 더 기승을 부리며 두 사람을 감싸고 있다.
노인의 말소리도 은은히 눈보라의 외침에 묻히고 있었다.
-왜 이런 편법이 필요하였는가는 세월이 흐른 뒤, 네 스스로 알게 될 것이며 대한
수호신문의 정통(正統) 또한 그때 비로소 이어지게 될 것이다!
세월의 흐름 또한 그 음성의 잔향(殘響)을 따라 쉼없이 흐른다. 하지만 백두산은
여전히 세월을 뛰어넘어 그 자리에 위대한 모습으로 자리하고 있다.
* * *
죽음보다 무서운 것이 있는가? 있다면, 그것은 죽음 직전에 느껴지는
공포(恐怖)이리라.
여기 그 공포보다 더 무서운 이름이 있으니, 그 이름은 바로 귀왕혈(鬼王血)이라!
어둠.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수많은 팔을 가진 악마상이 음산히 숨을 쉬고 있었다.
악마상은 기괴한 모습의 제단 위에 모셔져 있다.
어둠에 잠긴 제단의 높이는 일장여….
제단의 위에 자리한 그 악마상은 음산한 숨결과 같이 휘늘어진 휘장에 의해 좌우로
가리워져 더욱 기괴한 모습이었다.
문득 어둠 속에서 공기가 가늘게 흔들렸다.
그리고 그 제단의 앞에 소리도 없이 나타난 것은 한 사람의 흑포인.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나타난 그 흑포인의 전신은 먹물과 같은 흑포(黑袍)를 온통
뒤집어쓰고 있었다. 어두운 밤에 앙상한 나뭇가지가 일렁이는 것과 같다고나 할까.
『앙천사독(殃天邪毒)이 현신하여 귀왕(鬼王)의 명 을 기다립니다!』
낮은 음성이 그에게서 흘러나왔다.
순간, 어둠을 꿰뚫으며 제단 위 악마상의 눈에서 무서운 한망(寒芒)이 일어났다.
마치 심야의 하늘을 찢는 번갯불과 같은 빛이었다. 번갯불과 명백히 다른 점은
그것이 소름끼치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 앞에 존재하는 사람들을
모조리 공포로 떨게 만들….
앙천사독이라 자칭한 흑포괴인이 고개를 들었다.
마치 어둠을 들이받기라도 할 듯이 그의 머리는 거의 완벽한 대머리. 길게 자라
어깨까지 늘어진 머리카락은 실로 셀 수 있을 정도의 몇가닥에 불과했다. 더구나,
그의 얼굴은 온통 주름살투성이인지라 모든 것이 주름살 속에 파묻힌 듯한 착각이
들 지경이었다. 그 주름살 사이로 갈라진 틈에서 한가닥 기괴한 녹광(綠光)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그것이야말로 그의 눈이었다.
그때였다. 어디서 나타난 것일까.
악마상의 앞에서 두루마리 하나가 너울거리며 그의 앞으로 천천히 떨어져 내렸다.
그의 앞에 당도한 두루마리는 마치 누가 잡아당기기라도 한 듯이 쫘악, 펼쳐졌다.
거기서 드러난 것은 살아 움직일 듯 생생한 느낌의 중년인의 상반신 화상. 갓
50으로 보이는 그의 전신에서는 당당한 위풍이 절로 느껴져왔다.
『대장군 곽천수(郭天帥)다』
악마상에게서 심금을 파고드는 음성이 들려왔다.
『그 혼자만입니까?』
앙천사독이 두루마리의 중년인을 무심한 눈으로 바라보면서 입을 열었다.
『청부된 것은 그의 죽음이다. 나머지는 네게 맡기겠다』
그 말에 음산하고도 무표정한 웃음이 앙천사독의 눈매에 서렸다.
하긴 그것도 웃음이라 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눈빛에 음산한 흔들림이 일어났을 뿐이고 입가의 주름살이 잠시간 흉하게 깊어졌을
뿐이었으니까.
그는 아무 말 없이 독수리의 발과 같이 깡마른 손을 들었다. 그것과 함께 그의
눈앞에 펼쳐져 있던 두루마리가 격심한 폭풍에 휘말려 사라지는 조각배 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두루마리에 그려진 곽천수라는 중년인의 화상 중,
얼굴부분만이 가루로 화해 사라진 것이다.
그것과 함께 악마상의 눈에서 흘러나오던 빛이 꺼졌다. 다시 침묵이 찾아왔다.
어둠이 되살아났다.
팔척장신의 곽천수는 산악같이 굳건하고 당당했다
금릉(金陵)은 삼국시대 오(吳)의 손권(孫權)이래로 누대의 왕조가 도읍한 곳이다.
당시 고성의 주위 만 이십리이며 그 이름은 건업(建業)이라 불리어졌었다.
지난 날 제갈무후는 이 금릉을 일컬어 용이 서리고 범이 웅크린
형상(龍蟠虎踞)이라 하였거니와, 진(晉), 송(宋), 제(齊), 남당(南唐) 등 역대
왕조의 도읍지였던 이곳은 명(明)에 이르러 주원장(朱元璋)이 원(元)에 이어
천하를 통일하면서 하늘의 뜻을 따른다는 뜻으로 응천부(應天府)라 이름하며
도읍했다.
후일, 이 응천부는 명이 수도를 북경(北京)으로 옮기게 되자, 남경(南京)으로
이름이 바뀌게 되었다.
백화만발(百花滿發).
활짝 피어난 꽃들이 벌과 나비들의 살랑거림에 간지러운듯 진저리를 치고 있는
오후다.
새들이 하늘 높이 날며 지저귀고 있었다.
음월정(吟月亭)에서 바라보는 경치는 언제나처럼 평화로웠다. 음월정을 둘러싼
연못은 연잎이 푸르름을 자랑하며 연못을 덮고 있다.
이끼낀 거대한 정원석들로 둘러싸인 연못은 이 저택이 어제 오늘 세워진 것이
아님을 역사로 말한다.
음월정은 가산(假山)을 뒤로 하고 그 연못가에 세워져 있었다.
곽천수는 그 음월정에서 뒷짐을 진채로 우뚝 서 있었다.
당금 조정에서 가장 뛰어난 무장.
팔척장신을 자랑하는 그의 모습은 산악과도 같이 굳건하고도 당당했다.
명태조 주원장이 그의 뒤를 이어 2세황제가 된 손자 윤문을 부탁한
고명신탁(顧命信託)을 받은 사람중 하나가 바로 그였다.
주변의 평화로움과는 달리, 그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
어제, 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주왕(周王) 숙(▦)의 폐서인(廢庶人) 결정이
내려졌다.
뿐만 아니라 그는 운남(雲南)으로 유배되었다.
일개 유랑승려에서 일어나 천하를 휘어잡은 일대의 인물 주원장이 간 다음, 그
뒤를 이은 혜제(惠帝-후일 그는 건문제(建文帝)라 불리게 된다)는 어질고 착한
성품이었지만 천하를 호령하던 할아버지에는 도저히 비길 수 없었다.
주원장은 황태자이자, 혜제의 아버지인 표(標)가 죽고 나자 후일 있을지도 모를
반란을 염려해 수많은 옥사(獄事)를 일으켜 그를 따라 명을 세운 수많은 공신들을
모두 죽였다.
그렇게 되어 주원장이 죽고 난 다음에는 감히 반란을 일으킬만한 힘을 가진 자는
있을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그의 아들들인 제왕(諸王)의 힘은 여전히 막강했다.
주나라가 천하를 통일하면서 시작한 봉건제(封建制)는 천하를 왕실과 공훈신하에게
나라를 봉(封)하는 것에서 출발했다. 통일 진(秦)에 이르러 강력한 중앙집권제가
시행되었지만, 그것은 명초 천하를 통일한 주원장에 의해 다시 시행되었다.
그것은 천하를 주씨의 손아래 두겠다는 가천하(家天下) 사상에서 유래한다.
1368년 천하를 통일한 주원장은 명을 세운 뒤, 주대(周代)의 봉건제도를 본따서
모두 스물다섯 명을 왕으로 봉했다.
그중 스물네 명이 주원장의 아들이었다.
결국 각처에 스물 다섯 명의 제후(諸侯)를 거느린 것이 명의 황제인 셈이었다.
명을 건국한 주원장의 아들들은 그야말로 역전의 용장(勇將)들이었다. 아버지를
따라 종횡무진 천하를 누빈 그들인 것이다.
각처에서 할거하고 있는 혜제의 숙부, 주원장의 아들들은 제각기 그 지역의 병권을
쥐고 있었다. 그것은 힘을 의미했다.
그것을 염려한 혜제는 그가 믿고 있던 제태(齊泰)와 황자징(黃子澄), 당대의
대유학자인 방호유(方孝孺)등과 의논해 그들의 힘을 약화시키려 획책하고 있었다.
주왕 숙의 폐서인 결정은 바로 그러한 첫 움직임이었다.
곽천수는 천천히 음월정을 거닐었다.
바람이 그의 뺨을 간지럽히고 연꽃을 흔들어 놓는다.
하지만 무거운 마음은 여전했다.
태조 주원장이 죽은지 이제 겨우 삼개월이다.
젊은 황제의 움직임은 너무 성급했다. 비록 주왕에게 잘못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폐서인도 모자라 유배까지 시킨다는 것은 그것을 빌미삼은 삭번(削蕃)의 첫
움직임을 누가 모르랴.
삭번이란 왕들의 권력을 해제하여 그 권력을 중앙에 귀속시킴을 이른다.
강력한 세력을 가진 제왕들을 생각한다면 확실히 이 삭번의 계는 시의적절한
것이다.
하지만 병부상서 제태나 태상경 황자징 등은 문신이라 이러한 일을 추진할만한
능력이 없었다.
궁지에 몰린 쥐는 고양이를 무는 법이다.
하물며, 연왕(燕王) 태를 비롯한 제왕들은 결코 쥐가 아니었다. 어쩌면 고양이는
그들일 수도 있었다.
난세가 온다, 드디어 움직일 때가 된 것인가
『어쩌면…… 이 일로 인해 천하는 다시 한번 난세의 폭풍 속으로 빠져들게
될런지도 모른다……』
우뚝 선채로 곽천수는 중얼거렸다.
「난세(亂世)라…… 난세란 말인가!」
곽천수는 가슴이 갑자기 힘차게 뛰는 것을 느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아빠!』
그의 귓전에 천둥 같은 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것은 가히 마른 하늘에 날벼락과 같은 위세인지라 깊은 생각에 잠겨있던
곽천수는 가슴이 철렁하도록 놀랐다. 과장을 하자면 하마터면 음월정에서 굴러
떨어져 연못속으로 빠져버릴뻔 했다고나 할까.
놀라 뒤를 돌아보는 곽천수의 뒤에서는 댕기머리를 땋아 올린 귀여운 화복소녀가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놀랐죠?』
까르르…… 웃음을 터뜨리는 화복소녀의 나이는 이제 십육칠세가량. 동그스럼한
얼굴은 빼어난 미모는 아니라도 아름답고 귀여운 기태가 역력했다.
흰 피부의 얼굴 가운데에서 흑요석(黑曜石)과 같은 눈이 반짝이고 있는데,
누구라도 첫눈에 고생을 모르고 자란 귀한 자손임을 알 수 있는 모습이었다.
곽부용(郭芙蓉).
곽천수가 늙그막에 본 막내딸이 바로 그녀였다. 그야말로 금지옥엽,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인지라 최소한 장군부내에서는 그녀를 건드릴 사람은 없었다. 가히
무소불위(無所不爲)의 존재라고나 할까.
『쯧쯔……』
곽천수는 그녀가 버들허리를 부여잡고 웃음을 감추지 못하는 것을 보고는 혀를
찼다.
『도대체가 계집아이라는 녀석이 목청만 커가지고 얌전한 구석이라고는 눈을 씻고
봐도 찾을 수가 없으니 장차……』
『시집장가 어쩌고 또 그 말씀하시려는 거죠?』
말도 채 끝나기 전에 곽부용은 생글거리며 말꼬리 속으로 불쑥, 고개를 내민다.
말썽을 부리기로 말하자면 도대체가 건드릴 수가 없는 말괄량이가 바로 곽부용이다.
이 녀석이 또 무슨 트집을 잡으려고……
내심 쓴웃음을 지은 곽천수는 짐짓 고개를 저었다.
『그럴리가! 우리 공주님이야 사람 놀라게 하는 것만 빼면 세상에서 보기 드문
요조숙녀인데 그럴리가 있나?』
말을 돌리긴 했지만 그런다고 단념할 그녀가 아니다.
『그거 빼지 않으면요?』
여전히 눈빛이 보석과 같이 반짝이고 있었다.
허허…… 곽천수가 짐짓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런다고 달라질게 있나? 침선(針線)에서 요리에 이르기까지 우리 공주님이 뭐
못하는게 있어야지. 그래, 무슨 일로 여기까지 나온 거지? 날 찾아온건 아닌 것
같은데?』
곽천수는 말을 돌렸다.
그의 물음에 생각이 난 듯 곽부용이 주위를 돌아 보면서 입을 열었다.
『오빠는 어디 있죠?』
『서재에 없던?』
『피이…… 있으면 여기까지 와서 찾겠어요?』
『글쎄다……. 오전에는 못 본 것 같은데? 서재에 없으면 아마 주작가의
만박서림(萬博書林)에 가 있겠지』
곽부용은 그 말에 인상을 쓰면서 머리를 짚더니 종알거렸다.
『아빠는 어쩌자고 이 위대한 장군부의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을 그렇게 골샌님으로
키우시는 거예요? 나참…… 이렇게 나가다간 내가 칼들고 전장에 나가야 되는거
아닌지 모르겠네. 어떻게 된 샌님이 하루 종일 책만 붙들고 살아? 장가갈 생각도
않고……』
곽부용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바쁘게 정자에서 사라졌다.
「녀석……」
그녀의 뒷모습을 곽천수는 희미한 웃음을 떠올린 채 바라보고 있었다.
몸이 약했던 그녀의 엄마 곽부인은 그녀를 낳고는 산고를 이기지 못해 채 열흘을
넘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그야말로 엄마 얼굴도 보지 못하고 자라난 그녀이지만 곽천수의 걱정과는 달리
무럭무럭 자라나 누구나가 다 인정하는 장군부의 꽃이 되었다.
늘 웃음을 잃지 않는 해맑은 성격을 곽부용은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녀의 졸랑졸랑한 뒷모습에서 다시 연못으로 시선을 돌리는 곽천수의 얼굴은
자상한 아버지의 것에서 다시 근엄한 대장군의 것으로 굳어져 있었다.
「난세가 온다!」
그의 눈에서 불길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것은 세상의 혼돈(混沌)을 걱정하는 우국지사의 눈이 아니었다.
「드디어 움직일 때가 된 것인가? 그처럼 기다리던 ……」
곽천수는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구름이 세차게 일어나고 있었다.
쏴아아…… 휘늘어진 버들들이 불어오는 바람에 전신으로 흐느끼고 있다.
연못에서도 파문이 인다.
곽천수는 그 바람에 전신을 맡긴 채 우뚝 서 하늘을 쳐다보고 있었다.
고려의 멸망(滅亡)!
그 천추(千秋)의 한(恨)이 일어난지 이미 6년여…… 과연 기다림의 세월은 끝이
나고 그 치욕을 갚을 수 있을 것인가? 하늘이여, 하늘이여……
굽어 살피소서!!
고서더미를 뒤지는 유약한 책벌레 유생
금릉 응천부는 주원장이 도읍한 이래, 중원천하의 중심이 되었다. 당연히 천하의
문물이 이곳에 집중되었고 거리의 번화함은 눈부실 정도였다.
가히 하루가 달라지고 있다고 할까.
주작가(朱雀街)는 그 응천부의 중심에서 조금 떨어진 곳이다. 북적거리던 소란함도
조금쯤은 덜하고 사람들의 움직임도 그리 바쁘게 여겨지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이곳이 마냥 한적한 것만은 아니다.
절경(絶景)으로 유명한 막수호(莫愁湖)가 바로 주작가 뒤에 있기 때문이다. 호수를
찾는 유람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데 어찌 한가하기만 하겠는가.
이곳이 다른 곳에 비해 조용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이곳이 바로 서점가이기
때문이다.
구하기 힘든 서적들을 찾는 유생들의 발길이 어찌 소란스러우랴. 당연히 조용히
느껴질 수밖에.
그중 가장 규모가 큰 곳은 역시 만박서림이다.
만박서림은 진사 급제를 한 유학사(劉學士)가 시작한 것으로 시간이 지나면서
응천부 제일을 자랑하는 서점이 되었다.
만박서림에 들어서는 사람은 일단 그 규모에 질리게 된다.
사람의 키를 넘는 서가(書架)가 사방으로 절벽같이 버티고 늘어서 있음을 보면
누구라도 입을 벌리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천장에 닿을 듯 늘어선 서가도 모자라, 여기저기 구석구석까지 또 책이
쌓여 있음을 보노라면 이곳의 이름이 왜 만박서림인가를 알고도 남음이 있다.
그렇게 책이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아무렇게나 쌓여 있는 곳에서 부스럭거리고
있는 사람 하나가 있었다.
『지독하네. 이젠 저 고서더미까지 갔구먼. 설마 여기 있는 것들 중에는 볼 게
없다는 말이야?』
유생차림으로 보이는 그 사람을 지켜보고 있던 만박서림의 점원 하나가 혀를 찼다.
그 말에 곁에서 끙끙거리며 책정리를 하던 점원 하나가 힐끗 그 유생을 보곤
어이가 없는 듯 동료 점원을 돌아보았다.
『멍청하긴… 넌 어떻게 된 녀석이 아직도 장군부의 곽공자도 몰라?』
『곽공자?』
처음 입을 열었던 점원의 눈빛이 달라졌다.
『아니, 그럼 저 책벌레가 세상에 신동으로 소문난 그 곽공자란 말이냐?』
『누가 아니래? 내년에 있다는 전시(殿試;3년에 한번씩 있는 대과)가 있기도 전에
이미 장원으로 확정이 된 거나 다름이 없다는 바로 그 곽공자란 말이야. 세살
때부터 이미 사서삼경을 외우기 시작했다는데, 웬만한 책이 그의 눈에 차기나
하겠어?』
『제기랄!』
그 말에 먼저 점원이 혀를 찼다.
같은 사람일진대…
역시 하늘은 공평치가 못해.
점원은 입맛을 다셨다.
고서는 먼지더미 속에서 뒹굴고 있었다.
그가 본 고서들은 이미 수를 헤아릴 수 없었지만 그래도 대부분 정리가 된
것들이다. 하지만 그가 지금 뒤지고 있는 것들은 어저께 들어온 것이라고 했다.
보관 상태가 좋지 않아 손을 움직일 때마다 먼지가 풀풀 일어났다.
숨만 크게 쉬어도 기침이 났다. 숨을 가늘게 쉬면서 책을 뒤지던 그는 들여다보던
책에서 눈을 떼고 그 책을 내려놓았다.
그가 찾는 것은 이런 인쇄본이 아니었다.
그는 손에 들었던 고서를 내려놓고 다시 위태롭게 쌓여 있는 고서더미로 손을
가져갔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오빠아-!』
갑자기 날카로운 교성이 그의 귀청을 뒤흔들었다.
정신을 놓고 있었다고나 할까. 책에만 신경을 쓰고 있었던 그는 깜짝 놀라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고서더미를 왈칵 움켜쥐고 말았다.
그러지않아도 비틀거리며 외줄로 위태롭게 겨우 쌓여 있던 고서더미였다. 그런
불의의 타격을 견딜 리 없었다. 꿈틀하던 고서더미는 한줄이 무너지자, 그 뒤에
있던 줄까지 한꺼번에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으악?!』
고서더미의 밑동을 엉겁결에 움켜쥔 그가 그 책벼락을 뒤집어쓰게 된 것은
자명했다.
종이가루와 먼지가 구름처럼 일어났다.
『아이구… 이 책벌레… 종일 찾았잖아?』
처억하니 허리춤에다 손을 얹은 채, 책더미에 깔려 버둥거리는 그를 보며
종알거리는 것은 곽부용이었다.
책바다 속에서 먼지를 허옇게 뒤집어쓰고서 허우적거리는 저 책벌레야말로 그녀의
하나밖에 없는 오빠인 곽승고(郭承高)였다.
올해 나이 열아홉.
송옥(宋玉) 반악(潘岳)을 빰치는 미남은 아니지만 우뚝한 콧날 가운데 자리한
서글서글한 눈매에 깃들인 총기는 그를 지적으로 보이게 하기에 충분하고도
남았다. 하긴 세살 때부터 신동 소리를 듣던 그가 지적으로 보이지 않는다면 그
또한 이상한 일이 될 것이다.
아버지를 따라 말을 달리고 검을 휘두르는 것이 아니라, 밥먹고 자는 시간마저
아끼며 책만 끼고 있는 그의 안색은 흰 빛이 드러나게 창백했다.
유약하게 보임은 당연하였고, 책을 뒤집어쓴 채 눈을 끔벅이고 있는 그의 모습은
가히 책벌레의 전형과도 같았다.
제 1막 멸문지화(滅門之禍)
『난 또 누군가 했더니…』
나타난 것이 곽부용임을 알아본 곽승고가 책먼지에 콜록거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제발 그 소리 좀 지르지 않을 수 없니? 넌 도대체 뭘 먹고 그렇게 기운이 좋아서
걸핏하면 고함…』
『빨랑 일어나요! 지금 그런 말 하고 있을 때에요?』
곽부용이 곽승고의 소맷자락을 잡아당겼다.
『왜 그래?』
『몰라서 물어요? 지금이 몇시인데 아직도 여기서 이러고 있는 거예요? 빨랑
가요!』
곽부용은 폭포수처럼 말을 쏟아내면서 무조건 곽승고의 소맷자락을 잡아당겼다.
이 힘이란 게 또 만만치가 않아서 곽승고는 엎어지며 자빠지며 중심조차 제대로
잡지 못하고 그녀에게 끌려가야만 했다.
그의 머리에서 책 한권이 툭 떨어진 것은 바로 그때였다.
힐끗 쳐다보는 그의 시선에 「원세조밀기(元世祖密記)」라는 책 제목이 들어왔다.
오래 되고 낡아 너덜너덜한 책이었다.
아마도 쌓여 있던 책더미 중에서 그의 머리 위에 떨어졌던 것이리라.
그것을 본 곽승고의 눈빛은 조금 묘하게 변했다.
하지만 지금 그것을 보거나 어떻게 할 여유가 있을 리 없었다.
곽승고는 그 낡아빠진 고서를 엉겁결에 손에 쥔 채로 허둥지둥 그녀의 손에 끌려
만박서림을 떠나야 하였다.
그 모습은 심히 한심한지라 서림에 있던 사람 모두가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멀뚱히
서 있었다.
『도대체가 사람이 양심이 있어야지! 약란 언니가 얼마나 눈이 빠지게 기다릴는지
생각이나 해봤어요? 세상에…』
곽부용의 종알거림만이 여운처럼 남았다.
수서문(水西門) 바깥에 위치한 막수호(莫愁湖)는 응천부의 절경중 하나다.
찰랑이는 푸른 물결 아스라이 저 멀리 청량산(淸凉山)이 그림처럼 자리하고 호변을
가득 메운 버들은 휘영청 늘어져 불어오는 바람에 조용히 전신을 흔든다.
노을이 서서히 가라앉고 있었다.
보이는 모든 것들이 그렇게 황금빛이었다.
호수 위에 뜬 조각배들 또한 황금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절경이라 불리는 이유를 알고도 남을 경치였다.
푸른 가운데, 노을빛에 물들어 기이한 빛으로 아롱지며 호수면에서 흔들리고 있는
호변의 버드나무들.
거기에 기대듯 서서 불어오는 바람에 치맛자락을 펄럭이고 있는 여인 하나가
있었다.
여인이라고 부르기엔 아직 이르다고 할까.
나이는 채 스물이 되지 않아 보였다.
하지만, 그린 듯한 아미에 호수처럼 맑고 커다란 봉목(鳳目)이며 앵두 같은 입술
등은 그녀의 모든 것이 미인이라 불림에 조금도 모자람이 없음을 말하고도 남는다.
버드나무 숲에서 흔들리는 버들가지에 기댄 채 저녁 노을에 취한 듯 치맛자락을
펄럭이며 그윽히 호수를 바라보면서 서 있는 절세가인.
그 자체로 이미 모든 것은 한폭의 그림(天然入畵)에 다름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도 보는 사람에 따라서는 다르게 보이는 모양이다.
『봐! 아직도 저렇게 멍청하게 서서 기다리고 있잖아?』
곽승고를 끌고 나타난 곽부용은 호숫가의 그녀를 보곤 연신 입술을 삐죽였다.
그녀를 발견한 곽승고의 얼굴에 난처한 빛이 드러났다. 얼마나 급하게 끌려왔던지
그의 손에는 만박서림에서 가지고 나온 그 낡은 책이 그대로 들려 있었다.
『약란 언니는 정말 마음씨도 좋아. 두 시간이나 기다려주다니! 나 같으면 어림도
없지!』
곽부용이 다시 종알거렸다.
『아, 빨랑 가서 빌지 않고 뭘하고 있어요?』
엉거주춤한 곽승고를 보면서 곽부용이 매섭게 눈을 흘겼다.
『너, 너는?』
『나야, 다 저녁때 되어 가는 판에 집에 가서 홀로 계신 아빠 수발 들어드려야지!
내가 오빠처럼 사랑놀음이나 하고 있을 시간이 있는 줄 알아? 나도 바쁜
사람이야!』
단숨에 격류가 몰아치듯 말을 쏟아낸 곽부용은 휑하니 몸을 돌리더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졸랑졸랑 걸어가기 시작했다.
멍청하게 그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곽승고의 얼굴에 문득 훈훈한 웃음이
피어올랐다.
「녀석… 이젠 아주 엄마 노릇을 하려고 한다니까…」
장군부에 그녀가 없다면 아마 참으로 삭막하리라.
그녀의 모습이 사라지는 것을 보고 고개를 흔들며 몸을 돌리던 곽승고의 안색이
멈칫, 굳어졌다.
호수를 바라보고 있던 그 황의의 미녀가 어느새 시선을 돌려 그를 보고 있었던
것이다.
잠시…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흘러갔다.
침묵을 깬 것은 약란이라 불리는 황의의 미녀였다.
『벌써 오셨군요?』
그대가 내 곁에 평생 같이 있게 될 것임을…
벌써라는 말의 뜻은 참으로 묘한지라 곽승고는 어색하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미안, 미안… 책속에 빠져 있다 보니 미처 시간을 살피지를 못해서 말이오』
『나오고 싶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나요?』
어색했던 곽승고의 얼굴이 일순간에 굳어졌다.
『……』
그는 입을 다물었다.
『오늘은 그 말을 듣고 싶어서 곽대가를 기다렸어요. 불과 몇개월 전만 해도 나는
당신을 위해 밥 짓고 빨래하는 아낙이 될 것임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어요…』
심중의 격동을 억제하지 못하는 듯 약란은 입술을 물었다.
『하지만 언제인가부터 당신은 달라졌어요』
『약란』
『달라졌어요! 왜?』
그녀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왜죠? 이 약란이 무슨 잘못을 했기에?』
그 옛날부터 여자의 눈물이란 것은 남자에게는 가히 치명적인 무기다. 그 어떤
영웅호걸도 사랑하는 여자의 눈물 앞에서 그것을 이겨낸 역사가 없음이 또한
진실이다.
곽승고는 머리를 흔들었다.
『아니. 매에게는 아무런 잘못도 없어. 단지…』
머리를 흔든 그는 이내 가슴이 무너질 듯 한숨을 쉬면서 이제 호수 전체를 짙은
황금빛으로 도배하며 스러져가는 낙조의 최후를 바라보았다.
막수호 전체가 침몰하고 있는 듯하였다.
가슴이 터질 듯 답답했다.
방약란(方若蘭)은 당대의 거유(巨儒)로 이름높은 방효유의 조카딸이었다. 장년의
나이로서 천하제일의 석학이라는 칭호를 받는 방효유의 조카딸인 그녀는
응천부에서도 이름난 미녀였다. 하지만 그녀는 방효유의 조카딸로서가 아니라
일신의 재주로서 이름높은 재녀이기도 했다.
그녀와 곽승고의 만남은 오래 전에 시작되었다.
시종들이 한눈을 파는 틈에 몰래 물놀이를 나갔던 그녀가 막수호에 빠져
허우적거릴 때 마침 고기를 잡으러 그곳에 나왔던 곽승고가 그녀를 구했던 것이다.
옛날 이야기의 한 장면과 같은 그 만남은 마침 격렬한 소나기가 쏟아지는 바람에
더 오래 이어졌다.
버드나무 아래서 오도가도 못하고 앞도 보이지 않게 쏟아지는 소나기 속에
웅크리고 앉아 오돌오돌 떨고 있는 방약란을 곽승고가 꼬옥 부둥켜 안고 있는 것을
발견한 것은 폭우 속을 헤치고 사방을 헤매던 방가의 시종들이었다.
그렇게 시작된 두 사람의 만남을 방해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리고 10년…. 둘의 만남은 이젠 깊은 정(情)으로 맺어진 상태였다.
누구라도 두 사람이 결혼하게 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둘은 그렇게 정다웠고 집안에서도 그들을 축복하는 상태였다.
그런데 어느날부터 변화가 생겼다.
곽승고가 그녀를 기피하기 시작한 것이다.
아무런 이유도 없었다.
최소한 방약란은 그 이유를 짐작조차 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친한 곽부용도 그 까닭은 알지 못했다.
『방황?』
방약란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곽승고를 보았다.
곽승고는 고개를 끄떡였다.
『그래. 방황이야. 잠시… 방황을 했었던 것뿐이야. 하지만 이젠 끝났어. 그리고
이 자리에서 말할 수 있는 것은 내가 언제까지라도 란매의 곁에 있을 것이라는
거야』
『…!』
방약란의 눈매가 격동으로 떨렸다. 호수와 같이 크게 맑은 두 눈이 참을 수 없이
출렁이는 듯하였다.
곽승고는 그녀의 말을 기다리지 않았다.
그는 빙긋이 웃으며 방약란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것으로 되지 않았나? 내가 란매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으로?』
방약란은 가슴이 뛰었다.
주변의 노을이 모조리 황금빛으로 변하고 눈앞에 무지개가 피어오르는 것 같았다.
좀전까지 그렇게 쓸쓸하던 황금빛 노을이었다.
『곽대가!』
외마디 부르짖음.
거기에는 수많은 감정의 소용돌이가 얽히고 설켜 있었다.
외침과 함께 방약란은 곽승고의 품속에 몸을 던졌다.
누가 보아도 좋았다. 아니 모두에게 보여주고 싶기도 했다.
곽승고는 힘주어 방약란을 부둥켜 안았다.
『믿어. 그리고 의심치 말아. 란매가 내 곁에 내 사람으로서 평생 같이 있게 될
것임을…』
그래 이제는 널 놓치지 않겠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곽승고는 방약란을 소중하게 안은 채 나직이 중얼거렸다.
『무, 무슨 말씀이십니까?』
곽승고는 두 눈을 부릅떴다.
방금 자신이 들은 말을 그는 믿을 수 없었다.
그의 앞에는 산처럼 완강하게 그의 아버지 곽천수가 앉아 있었다.
『란매와의 교제를 끊다니? 다시는 만나지도 말라니? 대체 무엇 때문입니까?』
곽승고는 격하게 말을 쏟아내고 있었다.
아마도 아버지의 앞에서 이렇게 격한 어조를 사용한 것은 그가 태어난 이래 처음일
것이었다.
『너와 그 아이는 맺어질 수 없다』
곽천수의 음성은 간단하고도 단호했다.
그 눈빛에는 확신이 깃들어 있었다.
곽승고는 알고 있었다.
그의 아버지 곽천수가 저러한 태도로 말할 때에는 하늘이 무너져도 그 뜻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왜? 무엇 때문입니까? 얼마전까지도 아버님께선…!』
곽천수의 말로 인해 곽승고의 말은 더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그 이유는 지금 말할 수 없다』
곽승고를 바라보는 곽천수의 눈길은 이글이글 횃불과 같이 타오르고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른 다음이라면 알고자 하지 않아도 알게 되리라. 네게는 따로
해야 할 일이 있음을…』
따로 해야 할 일.
그것이 무엇인지는 곽승고는 지금도 알지 못했다.
방약란을 안고 있는 지금 이 순간까지도.
* * *
밤하늘.
은하수가 보석을 뿌린 듯 총총하다.
구름 한 점 없이 맑게 갠 밤하늘에 흰 궤적이 한줄기 일직선으로 그어지고 있었다.
그 궤적은 마치 유성이 떨어지듯이 그렇게 장군부를 향해 날아들었다.
구구구…
날아든 비둘기는 창틀에 앉아서 낮게 울었다.
손 하나가 뻗어나와서 비둘기를 자신의 손 위에다 올려놓았다. 비둘기는
퍼득거리지만 날아가진 않았다.
그 비둘기는 소식을 전하기 위해 훈련된 전서구(傳書鳩)인 것이다.
그 손은 비둘기의 다리에 묶인 동관(銅管) 속에서 정교하게 접어진 작은 종이
두루마리를 꺼냈다.
비둘기를 다시 창틀에다 내려놓고 촛불 아래서 그 종이 두루마리를 읽고 있는
사람은 바로 대장군 곽천수였다.
그의 안색은 심각하고도 무거웠다.
다시 한 번 종이에 적힌 내용을 읽어본 곽천수는 그 종이를 촛불에다 갖다댔다.
종이가 비틀거린다 싶은 순간에 그것은 이내 화염에 휩싸여 사라졌다.
종이 두루마리를 태운 곽천수는 서안(書案)에 있던 세필(細筆)을 들어 종이에
일필휘지하여 비둘기의 다리에 묶인 동관 속에 넣었다.
부리로 날개를 다듬고 있던 비둘기는 그의 손에 의해 다시금 하늘로 날아올랐다.
장군부의 상공으로 떠오른 비둘기는 한 바퀴를 돌더니 이내 방향을 잡고
일직선으로 날아가기 시작했다.
「계획을 앞당겨 시행코자 하오. 승고에게 자신의 신분과 이제부터 그가 해야 할
일을 알려주도록 하시오. 3일 후, 승고를 만나기 위해 친히 응천부로 가겠소…」
날아가는 전서구를 바라보고 있는 대장군 곽천수의 안색은 침중하게 굳어져 있었다.
「승고에게 자신의 신세내력을 알려주는 것은 그가 내년의 전시에서 장원을 하고
난 다음의 일로 예정되어 있었다! 그것은 본인의 신분을 알고 난 다음에 생길
만약의 사태를 대비한 포석…」
곽천수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잡혔다.
「그런데 지금 당장 알려주라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전서구의 흰 궤적은 이미 보이지 않았다.
밤하늘의 별은 여전히 아무일도 없었던 듯이 초롱초롱했다.
「그분께서도 대세의 흐름을 급박하다고 판단하신 것일까? 아니면… 대업에 어떤
차질이라도 발생한 것이란 말인가」
문득 그는 깊은 시름에 잠긴 숨을 토해냈다.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깊은 시름과 함께 눈을 내려감은 그의 모습은 여전히 강인한 산악과 같다.
하지만, 다시 눈을 뜬 그의 눈에서는 비수와 같은 광채가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결국 와신상담의 세월은 끝이 난 것 같군! 그렇다면…』
『뭘 그렇게 혼자서 중얼거리세요?』
느닷없이 뒤에서 들려온 음성에 의해 곽천수의 생각은 중단되어 버렸다.
아니 끊겨버렸다고나 할까.
깜짝 놀란 곽천수의 뒤에는 어느새 호기심에 가득 찬 눈을 보석처럼 반짝이면서
고개를 내민 곽부용이 자리했다.
『넌 도대체…?』
곽천수는 어이가 없는 듯 자신의 앞에서 눈을 깜박이고 있는 곽부용을 보았다.
곽천수에게로 고개를 들이민 곽부용의 눈은 장난스레 웃고 있었다.
『어떻게 된 애가 고양이처럼 소리도 없이 사방을 돌아다니느냐는 거죠?』
냉큼 곽천수의 말을 받은 곽부용은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그야 당연하죠! 부용인 무가(武家)의 딸이니까 몸이 버들처럼 가볍거든요?』
곽부용은 활짝 웃는 얼굴로 종알거리면서 그 자리에서 보라는 듯 몸을 빙그르르
돌려 보인다. 발 움직임이 마치 바람과 같다.
어릴 때부터 말괄량이로 자라면서 그의 부장들에게서 검술까지 배워대던 녀석이다.
게다가 춤사위가 제법인 상태이니 몸 움직임이 가벼울 수밖에.
쓴 웃음을 짓던 곽천수는 문득 입을 열었다.
『네 오라비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느냐?』
곽부용은 춤추듯 돌리던 몸을 멈추었다. 아버지를 향한 그 얼굴에는 웃음기가
떠올라 있었다.
『벌써 올 리가 없죠! 오늘은 조금 늦을 거예요』
『늦어?』
곽천수는 고개를 갸웃하곤 곽부용을 쳐다보았다.
『너… 만박서림까지 네 오라비를 찾아가서 무슨 짓을 한 거냐? 무슨 짓을
했길래…』
『아빤… 내가 무슨 짓을 해요?』
『그런데 네 오라비가 왜 늦게 돌아온다는 거냐?』
『글쎄… 그게 왜 그렇죠?』
곽부용은 오히려 반문했다.
맑은 두 눈을 깜박이며 생각에 잠긴 그녀의 표정에 곽천수는 어이가 없었다.
식지를 앵두빛 입술에다 대고 짐짓 생각에 잠긴 그녀의 표정은 제법 진지했다.
그녀가 아!하고 탄성을 토해낸 것은 바로 다음 순간이었다.
『그렇네요. 이제야 생각이 났어요』
소리친 그녀는 곽천수를 보고 배시시 웃었다.
『생각을 해보니까, 그건 비밀되겠네요!』
『뭐라고?』
기가 막힌 듯한 곽천수의 표정에 곽부용은 까르르 웃음을 터뜨리더니 불쑥 얼굴을
곽천수의 턱밑에다 들이밀었다.
『그보다 배고프지 않으세요? 잠시만 기다리세요! 제가 금세 기가 막힌 거 만들어
가지고 올게요!』
대답을 기다리는 법은 없다.
마지막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곽부용은 빙글 몸을 돌려 팔랑거리며 문밖으로
뛰어나가고 있었다.
「녀석…」
마치 홀린 듯이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곽천수의 얼굴에 희미한 웃음이
떠오르는가 싶더니, 이내 그것은 납덩이처럼 굳어져갔다.
「너의 얼굴에서만은 언제까지라도 그 웃음이 사라지지 말았으면 하는 것이 내
바람이었는데 이제는 그것도 장담할 수 없는 일이 되겠구나…」
영문 모를 소리를 중얼거리면서 깊게 탄식한 그는 무거운 시선을 천천히 하늘로
가져갔다.
비둘기가 그었던 하늘의 궤적은 이미 보이지도 않았다.
한가지 분명한 것은 조정에서는 연락을 하기 위해서 전서구를 사용하는 법은
없다는 것이다.
강변에는 갈대가 우거져 있다.
물오른 버들은 강바람에 살랑이고 어둠은 이미 사위를 강하게 내리누르고 있었다.
주변에서 들리던 웃음소리와 풍류가락은 들리지 않은 지 오래. 어둠이 내렸다고 그
소리가 그친 것이 아니라, 곽승고가 걷고 있는 곳이 갈대가 우거진 한적한
강변이기 때문이었다.
사람의 키만큼 무성한 갈대숲이 강변을 덮고 있는데, 어디에서 풍류를 찾을 수
있으랴.
강변을 걷는 곽승고의 발길은 무거웠다.
이제부터 그는 싸워야 했다.
한번도 거역한 적이 없는, 그가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는 아버지 곽천수의 명에
항거해야 하는 것이다.
그의 말대로 그녀를 포기할 수는 없었다.
그렇게 하기에는 방약란의 존재가 그의 가슴에서 차지하고 있는 비중이 너무 컸다.
『아버님께는 죄송하지만…』
곽승고는 다짐하듯 지긋이 입술을 깨물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으악-!』
심금을 울리는 참혹한 외마디 비명이 들려온 것은.
곽승고의 전신이 일순 굳어졌다.
비명이 터져나온 곳이 얼마 떨어지지 않은 버드나무 숲속이었던 까닭이다. 갈대가
우거지고, 그 강변 안쪽으로 다시 버드나무가 무성했다.
사람이 숨어 있어도 제대로 보이지 않을 숲속에서 느닷없이 터져나온 비명은
곽승고를 놀라게 하기에 족하였다.
『으아악-!』
그가 걸음을 멈추고 그곳을 바라보는 순간에 단말마의 비명이 또다시 들려왔다.
그처럼 참혹했던 전란(戰亂)이 사라진 것도 이미 오래. 태조 주원장이
원훈대신(元勳大臣)들을 갖가지 죄목으로 죽이던 옥사(獄事)도 옛일.
비록 날이 어두워지고는 있다고 하지만 경사(京師)에서 살인이란 말인가.
서생이라고는 하지만 무가(武家)의 장손인 그다.
손에 검을 쥐면 웬만한 도적 따위와는 충분히 상대할 수 있는 능력을 그는 가지고
있었다.
곽승고는 다음 순간에 비명이 들려온 곳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숲은 의외로 깊다.
버드나무가 덩치를 자랑하며 팔을 벌리고 있고, 사방에는 수풀이 우거져 대낮이라
할지라도 충분히 햇빛을 가릴 만한 그늘을 가진 숲이었다.
「이쯤 어디에서 비명이 들린 것 같았는데…」
곽승고는 미간을 굳힌 채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바로 그때였다.
무엇인가가 불쑥 수풀 속에서 튀어나와 그의 발목을 움켜잡은 것은.
「으헉?!」
돌연한 사태에 아래를 내려다본 곽승고는 기겁을 했다.
그것은 피투성이가 된 손이었다.
비명을 듣고는 어두워진 숲속에 들어와서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돌연
발목을 잡는 피투성이의 손이 나타난 것이다. 제 아무리 심장이 튼튼하다 해도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곽승고의 뒤편.
아름드리 버드나무 밑의 무성한 수풀 속에 피투성이의 백발노인 한 사람이 엎어져
있었는데 곽승고의 발목을 잡은 것은 그의 손이었다.
하지만 그 손에는 이미 힘이 없어 곽승고가 놀라 뒤로 물러서는 순간에 발목을
잡은 그 손은 풀어져 버리고 말았다.
『으으윽…』
황삼의 백발노인은 곽승고를 향해 피투성이의 손을 휘저었다. 일어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지만 이미 몸이 말을 듣지 않는 것 같았다.
『누, 누구시오?』
『으, 으윽! 그… 그들… 그들이…!』
곽승고의 외침에 백발노인이 쥐어짜듯이 중얼거렸다.
그로서는 전신의 모든 기력을 다해 외치는 듯했지만 그 소리는 귀를 갖다대야 들릴
만큼 작았다.
『노인장, 제 말이 들립니까?』
그의 기식이 엄엄함을 직감한 곽승고는 한쪽 무릎을 꿇으며 그를 부축했다.
그의 말소리를 들은 백발노인은 눈을 희번덕거리더니 이내 두 눈에 공포의 빛을
드러냈다.
그는 마치 눈앞에 있는 무엇을 쫓아내기라도 하듯이 두 손을 휘저으며 소리쳤다.
『귀, 귀왕… 귀왕혀얼(鬼王血)…!』
말과 함께 그의 입에서 붉은 선혈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그의
머리는 누가 잡아당긴 듯이 곽승고의 팔에 힘없이 걸쳐졌다.
『이런 일이…!』
곽승고는 그의 시신을 내려다보며 신음했다.
백발노인은 부릅뜬 두눈에 뚜렷한 공포를 드러내고서 그렇게 그의 품에서 죽어간
것이다.
『귀왕혈? 귀왕혈이란 것이 무엇이기에 이 노인이 죽어가면서까지 그렇게
공포스러워한 것일까…』
잠시 노인의 시신을 내려다보고 있던 곽승고는 나직이 신음했다.
갑자기 주위의 정적이 무겁게 그를 짓눌러왔다.
공연히 가슴이 섬뜩해져 고개를 들던 곽승고의 눈빛이 굳어졌다.
희끗희끗한 그림자가 앞쪽에서 번뜩인 것 같았기 때문이다.
노인을 조심스레 바닥에 누이고 몇 걸음 앞으로 나선 곽승고는 부지중에 숨을
몰아쉬었다.
그의 앞쪽에는 숲 가운데 형성된 공터와 같은 초지가 있는데, 그곳에는
목불인견(目不忍見)의 참상이 벌어져 있었던 것이다.
주인 잃은 검도(劍刀)가 어지러이 널려진 가운데 팔다리가 날아가고 목이 베어져
죽어 넘어진 시체 십여 구가 거기에 쓰러져 있었다.
짙은 피비린내를 풍기면서….
그를 더욱 놀라게 한 것은 그 죽어 넘어진 사람들 가운데 등을 보인 채 우뚝 선
황의인이었다. 날렵한 황색 무복을 입은 그는 죽은 사람들에게 허리를 구부리고
무엇인가를 살펴보고 있는데, 그의 손에는 검 한 자루가 들려 있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이 참극(慘劇)은…?
공포스러운 생각을 하게 된 곽승고가 암암리에 숨을 들이켠 순간에 황의인은 이미
그의 기척을 느낀 듯 뒤를 돌아보고 있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서로를 보게 되었다.
그 순간, 곽승고는 한가닥 바람이 스침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의 신형은 마치
거짓말처럼 곽승고의 눈앞에 서 있었다.
뿐인가.
대체 언제 뽑혔을까?
분명히 손에 검집째 들려 있는 것 같았던 그의 검은 이미 검집을 벗어나 곽승고의
목젖에 바짝 닿아 있었다.
서리 같은 검기가 곽승고의 전신을 핍박해왔다.
『넌 누구냐?』
황의인은 싸늘히 물어왔다.
그의 눈빛은 목소리만큼이나 찼다.
갓 삼십쯤 되었을까. 아니면 그보다 젊을까? 언뜻 보면 이십대처럼 보이기도 했다.
단아한 그 얼굴은 얼음조각을 해놓은 듯 차가워 나이를 짐작키 어려웠다.
섬뜩한 검끝을 목젖으로 느끼며 곽승고는 오히려 반문했다.
『당신은 누구요?』
이러한 상황하에서 반문을 할 수 있는 담량을 지닌 사람은 그리 쉽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황의인의 차가운 눈동자에 묘한 빛이 스쳐갔다.
황의인은 곽승고의 아래 위를 단숨에 훑어보더니 의미를 알 수 없는 싸늘한 웃음을
떠올렸다.
『맹랑하군! 감히 이런 상황하에서 말대꾸를 하다니… 죽음이 겁나지 않는단
말이냐?』
『……』
곽승고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대신 그는 자신의 목에다 검을 겨누고 있는 황의인의 눈을 보고 있었다. 그가
손에 조금만 힘을 주면 자신은 이 자리에 시체가 되어 넘어지리라.
전신으로 긴장이 살처럼 달려갔다. 진땀이 한방울 곽승고의 이마에 솟아났다.
하지만 그는 묵묵히 그를 보고 우뚝 서 있을 따름이었다.
『서생치고는 대담하군』
황의인은 내뱉듯 중얼거리곤 검을 거두었다.
검을 거두는가 싶은 순간에 그 검은 이미 검집에 들어가 있었다. 검자루의 끝에
달린 붉은 수실이 흔들리고 있음이 그 검이 움직였음을 의미할 정도로 그 움직임은
놀랍게도 빨랐다.
『돌아가라. 여기는 너와 같은 서생이 있을 곳이 아니다』
말과 함께 그는 몸을 돌렸다.
『무엇 때문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죽인 것이오? 당신은 국법이 두렵지도 않소?』
하지만 곽승고의 입에서 쏟아져나온 말은 그의 발길을 붙들기에 족했다.
황의인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곽승고를 보았다.
그의 눈빛은 여전히 서리처럼 찼다.
『죽고 싶으냐?』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그 눈빛만큼 무감정했다.
『전혀. 당신이 나를 죽이고자 한다면 나는 이미 이 자리에 시체로 누워 있겠지!
나는 단지 당신이 왜 이렇게 많은 사람을 죽인 것인지 알고 싶을 뿐이오. 아무도
다른 사람을…』
곽승고는 더이상 말을 계속할 수 없었다.
번쩍 하는 순간에 다시 황의인의 검끝이 그의 목젖을 찌르고 있었으므로.
눈앞의 그를 보고 있었음에도 그가 언제 어떻게 검을 뽑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다만 찌르는 듯한 고통과 함께 그의 검끝이 그의 목젖을 파고들고 있음을 느낄 수
있을 뿐이었다.
『쓸데없는 간섭은 명을 재촉한다』.
황의인은 여전히 차갑게 말했다.
『……』
곽승고는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그의 전신에서 뿜어져나오는 기세는 그가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더구나
그의 검끝에 찔린 목젖에서는 선혈이 목을 타고 가슴으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눈빛은 흔들리지 않았다. 목젖을 찔러오는 검끝의 고통으로 인해
눈살을 찌푸렸을 뿐, 그는 흔들림없는 태도로 자신의 앞에 선 황의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제법 뼈대가 있군! 한가지만 말해주지. 한번 뽑았던 검은 다시 뽑을 수
있음을…』
황의인은 곽승고의 눈을 보고 있다가 싸늘히 말했다.
『이 사람들은 내가 아니라 귀왕혈에 의해 죽었다』
그는 말과 함께 검을 거두었다.
『귀왕혈?』
『그렇다. 죽이고자 하는 자가 있다면 지옥끝까지라도 쫓아가서 죽이고야 마는,
무서운 살인청부 집단이 그들이다. 이 이상은 너와 같은 서생이 알 일이 아니다.
그만 돌아가라』
황의인은 몸을 돌렸다.
아마 그는 근래에 들어 가장 많은 말을 한 셈이었다.
곽승고는 더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저 황의인은 그가 지금까지 보았던 무사들과는 그 격이 틀렸다. 장군부에는 수많은
검수(劍手)들이 드나들지만 저 사람과 같은 놀라운 신수를 보여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는 자신을 죽이려면 열번도 더 죽일 수 있었다.
이 참극이 귀왕혈에 의해 일어났다는 그의 말은 틀림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알지 못했다.
귀왕혈이란 처음 듣는 단어가 자신과 어떤 관련을 가지게 될 것인지….
* * *
팡!
격렬하게 뻗어나는 손 하나.
소름끼치는 음향이 그 손이 이르는 곳에서 터져나왔다. 피보라를 뿌리며 그 손에
부딪친 장한이 날아갔다.
손은 미처 장한의 목에 이르지도 않았는데 장한의 목은 쇠절구에라도 부딪친 듯이
끔찍한 소리와 함께 수풀 속에 나뒹굴었다. 그 목에 붙은 머리는 거의 몸체에서
떨어져 흐늘거렸다.
독수리의 발톱과 같이 움츠린 형태로 뻗어났던 그 손의 주인공은 어둠 속에 선명히
드러나는 백의를 걸친 사람이었다.
말이 백의지, 옷은 온통 붉은 물감을 칠한 듯 피로 붉게 얼룩져 있었으며 얼굴은
산발된 머리카락이 온통 뒤덮고 있어서 그 모양조차 제대로 알아보기 힘들었다.
하지만 어둠 속에서도, 산발된 머리카락 속에서도 정광(精光)을 뿜어내고 있는 그
눈빛은 그가 범상한 사람이 아님을 의미했다.
그러나 그가 막 자신의 앞을 가로막았던 한 사람을 날려보내는 순간에 그 눈에는
격렬한 고통의 빛이 떠올랐다.
검 한 자루.
어느새 음산한 기색의 흑의인 하나가 검 한 자루를 산발 백의인의 가슴에다
쑤셔넣고 있었다.
가슴이 불로 지지는 듯했다.
검은 그의 가슴을 관통하고 등 뒤까지 비어져 나올 정도로 맹렬하게 그의 가슴을
꿰뚫었다.
그의 가슴을 검으로 꿰뚫은 자가 회심의 미소를 떠올리기도 전에 산발 괴인은 방금
전에 장한을 날려보냈고 거둬들이던 응조(鷹爪)로 자신의 가슴을 꿰뚫은 장검을
쳤다.
땅! 하는 소리와 함께 검이 두동강이 났다.
그의 가슴에다 검을 쑤셔박았던 흑의인의 눈에 경악이 떠오름과 동시에 그 손은
이미 그 흑의인의 얼굴을 손바닥으로 누르고 있었다.
『와아악!』
참혹한 비명.
흑의인의 얼굴이 마치 두부가 벽에 부딪친 것처럼 터져나가면서 날아갔다.
부르르르…
흑의인을 날려보낸 산발 괴인의 손이 경련했다.
그는 가슴을 움켜쥔 채로 옆에 있던 아름드리 나무에 쓰러질 듯이 어깨를 기댔다.
『크으으으…!』
참으려 해도 참을 수 없이 고통의 신음이 그의 입을 비집고 흘러나왔다.
그의 일신에 잠재한 깊고 두터운 내공의 힘이 아니었다면 그는 지금까지 버티고
있지 못했을 것이었다.
가슴을 움켜쥔 손가락 사이로 선혈이 샘솟듯 솟구치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전신에서 흘러나올 피는 이제 그리 많지 않았다. 산발을 한 그의 머리카락 사이로
드러난 얼굴에서도 피는 아직까지 계속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의 형상은 가히 참혹, 그것이었다.
헉헉거리며 가쁜 숨을 내쉬던 산발 괴인은 다짐하듯 중얼거렸다.
『어, 어떤 일이 있더라도 이 음모는… 이 음모만은…』
산발 괴인은 이를 악물고는 그 자리를 떠나기 시작했다.
그가 떠난 자리에는 흑의인들의 시신 대여섯 구가 참혹했던 격전을 말하듯 쓰러져
있었다. 그의 가슴에 검을 찔러넣었던 흑의인은 그를 추격하던 자들 중에서 마지막
한명이었다.
주위를 사납게 휩쓰는 피비린내는 하늘마저 찌푸리게 하여 달은 구름 속에 숨었다.
어둠이 더욱 짙게 내리는 숲에는 세찬 바람이 휙휙 몰아쳐 나뭇가지를 뒤흔드니
정경(情景)은 더욱 음산 공포스러웠다.
산발 괴인이 그 자리를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방갓을 쓴 사람 하나가 소리도
없이 숲속에 나타났다.
손에는 보검을 들었다. 정치(精緻)한 형상으로 만들어진 검집만으로도 평범한
물건이 아님을 알 수 있을 듯한 그 검의 검자루에서는 붉고 푸른 수실 두 가닥이
흔들리고 있었다.
백의 경장을 한 그의 눈은 방갓 속에서 싸늘하게 빛났다.
강호인으로서 밤에 백의를 입고 다닌다 함은 그가 강호 초년생이거나 아니면
대단한 자신을 가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주위의 처참한 정경을 보고도 눈살 하나 찌푸리지 않고 침착하게 주변을
둘러보는 그의 태도를 보고 강호에 처음 발을 디딘 사람이라고 생각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었다.
날카롭게 주변을 쓸어본 그는 이윽고 산발 괴인이 마지막으로 어깨를 기대었던
나무에 희미하게 남아 있는 핏자국을 찾아내고는 나직히 중얼거렸다.
『과연 대단하군. 그 몸으로서도 내 수하 고수들을 물리치고 이곳을 벗어났단
말인가』
말뜻은 놀랍다는 것 같지만 산발 괴인이 사라진 쪽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얼음처럼 차갑다.
『하지만… 넌 세상에 남아 있어서는 아니될 존재다. 내가 있기에…』
말의 여운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의 신형은 어둠을 뚫고서 숲속으로 사라졌다.
단 한 번의 도약으로 어둠 속으로 묻혀버린 그의 경공은 강호를 놀라게 하기에
족할 정도였다.
휘이잉…
다시금 세찬 바람이 버려진 주검들을 휘감아 돌았다.
번쩍! 꽈르릉! 꽝!
뒤를 이어서 밤하늘에 마른 번개가 먹구름을 뚫고서 진저리를 치며 땅으로
곤두박질쳤다.
* * *
깨진 쪽박과 같이 허공에 걸린 달은 겨우 손톱만 했다.
그나마 불어대는 바람으로 인해 구름에 가렸다 나타났다 하는 판이니 이 밤의
야경은 별 볼 일이 없었다.
고관대작들의 거리라는 서관대로(西官大路) 깊숙이 위치한 방가대원(方家大阮)은
이름과는 달리 그리 엄청난 규모는 아니다. 하지만 흙담벽 집에서 사는 서민들과는
여전히 비교조차 할 수 없는 것이 고관들의 삶이다.
방가대원의 후원 이층 누각에는 방약란의 침실이 있다.
방약란은 누각의 난간에 나와서 구름 속에 내팽개쳐졌다가 다시 기를 쓰고 구름
밖으로 날카로운 뿔을 내미는 상현달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곽승고의 얼굴이 그 하늘에서, 달에서 떠올랐다 사라졌다.
사랑해요…
방약란은 나직이 중얼거렸다.
그러했다.
그녀는 그를 사랑했다.
저 달이 구름에 가려 빛을 잃을지라도 그 자리에 있는 것처럼, 달마다 차고
이즈러져도 그 자리에서 다시 또 떠오르는 것처럼 그렇게 그를 사랑했다.
언제까지라도 그렇게…
그는 돌아가면서 곧 매파(媒婆)를 보내서 정식으로 청혼을 하겠다고 했다.
방약란은 그의 들판과 같이 넓은 가슴의 아늑함을 떠올리곤 얼굴이 붉어졌다. 그의
부인이, 아내가 되는 것이다.
그럼 언제나 그의 곁에 있게 될 것이고…
사랑에 빠진 규중 처녀의 가슴은 기대로 부풀었다.
마치 곽승고의 얼굴을 그 속에서 찾아내기라도 할 듯이 그렇게 달빛을 쫓고 있던
방약란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누르며 몸을 돌렸다.
『아!』
창문을 닫고 몸을 돌리던 방약란은 탁자에 조용히 앉아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대체 언제, 어디에서 나타난 것일까?
대황촉이 사위를 밝히고 있는 방약란의 침실, 그 가운데 있는 탁자 의자에 회색빛
승의를 입은 여승 한 사람이 앉아 조용히 염주를 굴리면서 그녀를 보고 웃고
있었다.
눈가에 잔주름이 서린 여승의 얼굴은 자애로웠다.
『사부님?』
노니(老尼)를 발견한 방약란은 놀란 기색이 이내 기쁨으로 바뀌어 비 맞은 참새가
둥지로 날아들듯이 노니의 가슴으로 돌격해 들어갔다.
『아이쿠쿠… 이런 녀석이 있나? 늙은 스승 갈비 부러지겠구나. 대체 언제까지
이렇게 어리광만 부릴 생각이냐?』
노니는 그녀를 안으며 짐짓 비명을 터뜨렸다.
『어쩌면 그렇게 오시질 않으셨어요? 제가 그간 얼마나 사부님을 보고 싶어했는지
아세요?』
방약란은 노니의 목을 끌어안고서 활짝 웃었다.
『그렇더냐? 흠… 노납이 보기엔 별로 그런 것 같지도 않은데?』
『사부님은?』
방약란이 눈을 흘겼다.
노니는 방약란의 애교에 그녀의 등을 두드리며 인자한 웃음을 떠올렸다.
『사실은 뜻하지 않은 일들이 자꾸만 생겨서 말이다…. 그래, 그간 잘 있었느냐?』
『그럼요. 제자는 이렇게 건강한 걸요! 그런데 일년이 넘도록 소식 한 번
없으시더니 기별도 없이 갑자기 어쩐 일이세요?』
그녀의 되물음에 노니의 자애한 안색이 조금 굳어졌다.
『갑자기 일이 생겨서 하산하느라 네게 연락할 만한 여유가 없었구나』
『무슨 일이 있으시기에 그렇게 바쁘게…?』
방약란의 눈에는 의혹이 가득 찼다.
『그래, 너도 조금은 알고 있는 것이 좋겠지. 혹, 아직도 귀왕혈이란 이름을
기억하느냐?』
『귀왕혈이라면, 지난번에 오셨을 때 말씀하셨던 그 살인 청부집단 말씀이신가요?』
『그래. 그들의 만행이 지난 일년 사이에 극에 달해 더이상 그들의 발호를 두고 볼
수가 없게 되었다』
방약란의 눈빛이 반짝였다.
『그래서 사부님께서 그들을 혼내주려고 친히 하산하신 거로군요?』
그녀의 말에 노니의 얼굴에 쓴웃음이 피어났다.
『너는 이 사부가 천하제일의 고수라도 되는 줄 아는 게로구나. 귀왕혈의 만행이
이에 이르러 무림동도들은 그들을 공적(公敵)으로 지목하고 그들을 쫓기 시작했고,
무림중의 구대문파는 그 때문에 암중 회합을 갖기로 하였단다』
『그럼 사부님께서 아미파(峨嵋派)를 대표하여 산을 내려오신 것인가요?』
『그렇다』
노니의 대답에 방약란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구대문파(九大門派)란 소림(少林), 무당(武當)등 무림중에서 가장 강대한 세력을
가진 아홉문파를 일컫는다.
물론 당금에 이르러 이들 아홉문파가 천하제일은 아닐지는 몰라도 그들이 전통의
명문(名門)임을 부인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지난 수백 년 동안 강호상의 공도(公道)는 그들이 주지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보통 일이 아닌가 봐요. 구대문파가 비밀리에 모이기까지 하는 것을 본다면…』
『음. 이번 구대문파의 암중회동은 귀왕혈에 관한 것뿐만 아니라, 다른
사안(事案)까지 얽혀 있어서 그 동안 강호의 일에 상관치 않았던 이 늙은
스승까지도 몸을 뺄 수가 없었단다』
스스로를 늙었다고 칭하는 그 노니의 얼굴에는 별반 주름조차 없어서 기껏해야
사십대 후반 정도로 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세수 팔십을 넘긴 아미파의 장로(長老)인 금정신니(金頂神尼)였다.
금정신니는 당대 아미파의 장문인인 무진대사(無盡大師)의 사자(師姉;같은 스승
아래의 누나)로서 강호상에 잘 알려지지 않은 은거기인이라 할 수 있었다.
『그래, 그 동안 무공 연습은 많이 하였느냐?』
잠시 말을 멈추었던 금정신니는 방약란에게 물었다.
그 물음에 방약란은 자신있게 활짝 웃었다.
『그럼요! 지난 번에 전수해주신 금정산수(金頂散手)는 마음대로 펼칠 수 있구요,
관음선공(觀音禪功)도 곧 경지에 오를 수 있을 거예요』
『기특하구나. 불과 오년 만에 그런 경지에 이를 수 있었다니…』
그녀와 금정신니간의 사도(師徒)의 인연은 전적으로 금정신니에 의해 이루어졌었다.
중추절 바깥 나들이를 나왔던 방약란을 길에서 우연히 보게 된 금정신니가 그날
밤, 방약란을 찾아와 사제지의를 맺었던 것이다.
기본 토납법을 가르쳐준 금정신니는 일년이나 반년 만에 한 번씩 그녀를 찾아와서
무공을 가르쳐주었다. 아미산이 경사(南京)에서 수천여 리 떨어진 것을 감안한다면
그녀가 금정신니에게서 받는 사랑은 각별한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오년이 흐르게 되자 방약란은 누구도 모르는 사이에 상당한 무공을 지니게
되었다.
물론 규중 처녀의 몸인지라 그것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그녀의 사부인
금정신니는 그녀를 찾을 때마다 그녀의 내공으로서 근골을 씻어주었으므로 그
기초가 간단하지 않은 것은 사실이었다.
『좀더 무공을 열심히 수련해볼 생각은 없느냐?』
기특한 듯 고개를 끄덕이던 금정신니는 정색을 하더니 그녀를 보며 입을 떼었다.
그 물음에 방약란의 안색이 조금 달라졌다.
『네 자질은 백년에 하나 보기 힘든 출중한 것이라, 네가 전심전력으로 무공을
연마한다면 일대의 성취를 이룰 수 있을 것이다. 네 자질이 그와 같지 않았다면 이
사부가 굳이 규방(閨房)에 있는 너를 남의 눈을 피하면서까지 제자로 맞아들이지
않았을 것이고…』
속가의 제자에게 의발(衣鉢)을 전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대갓집의 천금에게 무턱대고 출가를 하라고 할 수는 더더욱 없는 일이
아니겠는가.
금정신니가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네가 전념하여 무공을 수련하겠다면, 이 사부는 네게 의발을 전할 생각이다.
반드시 출가를 하지 않아도 좋다』
금정신니의 제안은 파격적이었다.
그런만큼, 방약란은 함부로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저, 전…』
한참 눈을 아래로 내리깔고서 입술을 물고 있던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은 더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그러한 그녀의 태도를 금정신니는 자애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사랑하는 사람 때문이냐?』
『!』
그 말에 방약란은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자애한 스승의 눈이 그녀의 눈을 그윽이 바라보고 있었다.
『어, 어떻게 그걸 아셨어요?』
당황한 그녀의 태도에 금정신니는 가볍게 웃었다.
『사랑에 빠지게 되면 표가 나는 법이지. 누군지는 모르겠다만… 그를
좋아하느냐?』
『곧… 청혼을 하겠다고…』
더듬거리며 기어들어가는 음성으로 말을 하던 방약란은 얼굴이 홍시처럼 붉어져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애꿎은 옷자락만이 그녀의 손에서 혼이 나고 있었다.
『…』
조용히 그러한 그녀를 바라보고 있던 금정신니는 고개를 끄떡였다.
『그래. 그렇게 평범한 생을 살아갈 수만 있다면, 그럴 수만 있다면 어쩌면 그것이
여자에게는 가장 행복한 길일 수도 있겠지』
『죄송해요, 사부님. 제게 그렇게까지 큰 기대를 걸어주셨는데 보답도 못하고
실망을…』
『바보 같은 소리! 제자가 행복을 찾겠다는데 마다할 사부가 이 세상 어디에
있겠느냐?』
『사부님!』
금정신니의 다독임에 방약란이 그녀의 품속으로 몸을 던졌다.
『녀석… 이렇게 어리광만 부리면서 시집이 가고 싶단 말이지?』
가볍게 웃으며 그녀의 등을 토닥이는 금정신니의 안색은 어딘지 모르게 어두웠다.
「장상사(長相思)… 사랑으로 인하여 끊임없이 가슴을 태우며 살아야 할 운명을
타고 난 것이 너의 상(相)… 그러한 운명을 타고난 사람은 결코 평범한 아녀자의
삶을 누릴 수 없는 법이거늘… 아미타불…」
금정신니는 암암리에 깊게 탄식했다.
들떠 있는 나이어린 제자에게 무슨 말을 하랴.
그저 자신이 그녀의 상을 잘못 보았기를 바랄 뿐이다. 그러나 그런 일은 아직까지
한번도 없었다. 금정신니는 길가에서 점을 치는 일개 관상쟁이가 아니었다. 그것은
사랑하는 제자의 상을 잘못 볼 수 없다는 것에 다름이 아니었다.
구름이 하늘을 덮으며 밀려왔다.
세찬 바람이 휙휙 나뭇가지를 세차게 흔들었다.
머리를 풀어헤친 괴물과도 같은 형상으로 뜨락의 나무들이 창밖에서 춤을 추고
있었다.
어둠은 이제 시작이었다….
연경(燕京:북경)은 전조(前朝)인 원의 도읍이다.
그렇기에 연경의 규모는 명의 도읍인 경사(京師)에 못지 않아 성안에는 사두마차가
나란히 달릴 수 있는 거리가 바둑판처럼 쭉쭉 뻗어 있었고, 고루거각이 곳곳에 서
있었다.
태조 주원장이 경사에 도읍한 이후, 각지에 자신의 아들들을 봉하여 왕으로
삼으면서 이곳 연경은 그의 넷째 아들인 연왕(燕王) 주태에게 봉해졌다. 그의
아들들 중에서 가장 용맹하였던 그에게 경사에서 6천∼7천리나 떨어져 있는 변방의
방위를 맡기기 위해서였다.
연왕 주태는 그 기대에 어긋나지 않아 1380년 21세의 젊은 나이에 연왕으로 책봉이
된 이후, 끊임없이 몽고족을 토벌하여 태조 주원장으로부터 「짐에게 북쪽을
돌아볼(北顧) 염려가 없다」라는 칭찬을 받았다.
원이 멸망한 다음에도 그 잔존세력이 호시탐탐 중원을 노렸기 때문이다.
어둠 속에 묻힌 연왕부(燕王府)는 광대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 연왕부는 지난날 원의 황궁이었던 곳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연왕부 후원.
용포를 입은 장대한 체구의 한 사람이 뒷짐을 진 채로 우뚝 서 하늘을 보고 있었다.
뜨락 화단에서는 아직 화향(花香)이 그윽했다.
사방에 늘어선 석등에는 불이 밝혀져 밤에도 후원은 그다지 어둡지 않았다.
어둡다기보다는 운치가 있다고나 할까.
『결정을 하셔야 합니다.』
문득 어둠 속에서 낮은 음성이 들려왔다.
승려 차림의 한 사람이 용포를 입은 사람의 뒤쪽에 서 있음이 보인다.
60대의 나이인 듯한 그의 얼굴은 전형적인 모사(謀士)의 형상. 길고 날카로운
눈매가 승려답지 않게 어둠 속에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주왕전하의 폐서인은 단순히 그분에게 잘못이 있어서라기보다는 삭번의
서곡이라고 봐야 합니다.』
승려의 입에서 다시 나직한 음성이 울려나왔다.
그래도 용포인은 묵묵히 등을 보인 채 하늘을 보고 있을 따름이었다.
『제태와 황자징등은 기회를 봐서 대대적으로 삭번의 정책을 추진할 것입니다!
그들의 목표가 궁극적으로는 제왕(諸王)들 중 가장 용맹하고 영민하신 전하인 것은
의심할 바도 없습니다!』
승려의 음성이 불을 뿜었다.
마침내 용포인이 몸을 돌렸다.
각진 얼굴. 부리부리한 호목(虎目)에서는 정광이 번뜩인다. 마치 관제묘의
관운장이 살아나온 듯한 모습이다.
그가 바로 주원장의 스물다섯 명의 아들중 가장 영명하다는 연왕 주태인 것이다.
『그들이 나를 목표로 한다고 한들, 변방에 나와 있는 내가 어떻게 한단 말이오?』
그 말에 승려가 정색을 하였다.
『어떻게 하다니? 설마 앉아서 당하고 말겠단 말씀은 아니시겠지요?』
연왕 주태의 얼굴에 쓴 웃음이 돌았다.
『그럼, 나에게 반역이라도 하란 말이오? 내 조카에게?』
승려가 고개를 저었다.
『반역이 아닙니다! 반역이 아니라, 나라를 좀먹는 자들로부터 스스로를
자위하자는 일입니다』
『스스로를 지킨다… 자위라…』
그 말을 되뇌이는 연왕 주태의 얼굴에 웃음기가 돈다.
『어떻게 말이오? 나의 주위에는 이미 감시하는 자들이 겹겹이 늘어서 있으며,
조정에는 백만대군이 있지만 내게는 만여 명의 친위대가 있을 따름인데… 그런데도
그런 일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시오?』
비록 봉건제가 시행되었다고는 하지만 명대의 봉건제는 한(漢)이나 진의 왕과는
달리, 영유권과 재정권이 부여되어 있지 않았다. 현지 주둔군의 이동권만 가지고
있을 뿐이었다.
군의 지위권은 지역의 군 사령관이라고 할 수 있는 도지휘사(都指揮使)가, 행정은
포정사(布政使)가 맡고 있어서 왕부의 힘은 사실 대단하다고 볼 수가 없었다.
더구나, 삭번의 움직임이 일어나면서 원래 있던 도지휘사와 포정사까지 갈려 그의
일거일동을 감시하고 있는 판이었던 것이다.
승려의 눈빛이 다시 빛났다.
『물론입니다! 황제에겐 백만대군이 있지만 그 대군을 움직일 만한 장수가
없습니다! 그 숱한 역전의 명장(名將)들을 선황폐하께서 다 죄주어 죽이셨기
때문입니다. 백만 아니라, 천만의 군대가 있어도 부릴 장수가 없다면, 그 군대는
오합지졸에 다름이 아닙니다!』
주원장은 일대의 영걸(英傑)이었지만 또한 보기드문 폭군(暴君)이기도 하였다.
오죽하면 그 잔인함은 실로 천고에 예가 없었다고 후세에서 평하였으랴.
그는 평생 신하를 불신하여 재상의 제도를 폐지하여 육부(六部)로 권한을 나누었고
정장(廷杖)이라 하여 조신(朝臣)들의 상주가 눈에 거슬리면 그 자리에서
벌(杖)하였다. 심하면 조정에서 맞아 죽는 경우까지 있었다.
신하가 모욕을 받는 것은 비일비재하였고, 아침에 유언을 하고 등청했다가 저녁에
집으로 돌아오면 무사히 살아왔음을 가족과 함께 기뻐하였다는 웃지 못할 상황까지
벌어진 판이었다.
홍무 23(1390)년에 일어난 호유용(胡惟庸)의 옥사에서 피살된 사람은 무려
3만이었고, 그중 명장 이선장을 비롯한 후(侯)로 봉해진 공신(功臣)이 20여 명이나
되었다.
그나마 홍무 25(1392)년에 태자가 죽고 태자의 아들인 윤문(건문제)이 황태손으로
되자, 의심은 더욱 심해져서 홍무 26년에는 명장 남옥(藍玉)을 죄주어 죽이면서
연루되어 살해된 자가 1만5천에 달하였다.
그 숱한 명신준장(名臣俊將)은 그렇게 죽어갔던 것이다.
승려의 말에 연왕 주태는 고개를 저었다.
『그대는 잊은 모양이군. 조정에는 아직까지 그 대군을 수족처럼 부릴 수 있는
능력자가 있음을! 그가 비록 고려의 유신이기는 하지만, 책상밖에 모르는
황자징이나 제태등과는 차원이 다른 명장이오!』
싸늘한 웃음이 승려의 얼굴이 피어올랐다.
『죽은 자는 아무리 뛰어난 능력이 있어도 쓸 수가 없는 법입니다』
연왕 주태의 미간에 깊은 내천자가 그어졌다.
『…?』
그가 묵묵히 승려를 쳐다보자, 승려의 입매에 희미한 선이 하나 그어졌다.
웃음이었다.
『빈승이 어젯밤에 천기를 보았더니, 그의 수명은 오늘 밤까지였습니다』 『오늘
밤?』
『아미타불… 그렇습니다. 오늘 밤입니다.』
승려는 불호를 외면서 연왕을 향해 합장해 보이면서 가벼이 고개를 숙였다.
『…』
연왕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한참을 묵묵히 그를 보고 있다가 혼잣말 하듯
중얼거렸다.
『무슨 일을 하든지… 기왕 던져진 주사위라면 실수가 없는 결과가 나오는 것이
좋겠지』
그리고 그는 입을 다물고 다시 몸을 돌렸다.
하늘의 구름들이 불어오는 바람에 흩어지고 있었다.
휙휙-!
세찬 바람이 앞에 선 연왕 주태의 용포를 세차게 흔들고 있었다. 그는 마치 거대한
산악과 같은 모습으로 서 있는 듯했다.
위엄이 서려 있다고나 할까.
「스스로 움직이지 않아도 남으로 하여금 절로 움직이게 하는 능력을 가진 거대한
그릇… 이 분만이 흔들리는 명의 국세를 반석 위에 올려놓을 수 있으리라!」
승려는 그의 등을 바라보면서 잠시 감회에 젖다가 깊게 그에게 허리를
굽혀보이고는 뒷걸음질쳐 조용히 물러났다.
연왕 주태는 돌아보지 않았다.
그의 시야에는 마치 수정을 박아놓은 듯 휘황한 빛을 뿌리는 하늘이 있었다. 그
하늘 저편으로 착각인 듯 사실인 듯 밝은 유성(流星) 하나가 밤하늘에 확연한
궤적을 그리며 흐르고 있다.
결국 그 용맹한 곽천수가 간다는 것인가? 그가 없다면 한 번 해볼만한
도박(賭博)이다.
천하를 걸고서라도…!
* * *
꽝!
벼락이 쳤다.
밤하늘이 공포에 떨면서 산산조각으로 갈라졌다.
파편이 바람에 날리는 횟가루와 같이 대지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구름이 바람에
쫓겨 죽어라고 밤하늘을 달리고 있었다.
쏴쏴-!
곽승고가 장군부에 도착했을 때에는 빗줄기가 상당히 굵어진 다음이었다.
언제나 당당하고 활기에 차 있던 장군부는 기묘한 침묵 속에서 비를 맞고 서
있었다.
가장 먼저 곽승고의 눈을 비집고 쏘아져 온 것은 장군부의 대문 주위에 어지러히
쓰러져 있는 십여 명의 군사들의 모습이었다.
『조부장(趙部將)!』
망연자실했던 곽승고는 그중 한 사람을 보고 소리쳤다.
그가 끌어일으킨 사람의 머리에 겨우 걸려 있던 투구가 바닥에 나뒹굴며 그의
얼굴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튀어져나올 듯 부릅뜬 두 눈. 그 눈을 물들이고 있는 것은 시뻘건 불길과도 같은
핏물. 코에서도 피가 터졌다. 피는 입에서도 흘러내려 턱을 타고 고여 있었다.
참혹한 주검.
장군부의 대문에 쓰러져 있는 십여 명의 군사들의 죽음은 한결같은 모습이었다.
부릅뜬 눈은 물론 칠공에서 피를 흘린 참혹한 죽음, 공포스럽게도 그 눈에서는
검은 자위를 찾아볼 수 없었다. 마치 장님이라도 된 듯한 모습. 죽기 전에 당한
고통을 의미하듯이 그 얼굴은 끔직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곽승고는 전신이 얼음처럼 굳어져 옴을 느끼고는 반사적으로 장군부의 대문안을
쳐다보았다.
쏴쏴-!
빗소리 외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빗소리 가운데 반쯤 열린 장군부의 내부는 어둡기만 했다.
다음 순간에 곽승고는 대문을 박차고 장군부의 안으로 뛰쳐들어갔다.
하지만 다음 순간, 대문을 박차고 달려들어온 곽승고는 전율로서 그 자리에
굳어지고 말았다.
장군부는 대문에서부터 대청에 이르기까지 조약돌이 깔린 길이 있고 그 좌우로
뜨락과 화단이 있었다.
그런데, 그 길에 쓰러져 죽은 사람을 보라.
『이집사?!』
곽승고는 오십이 좀 넘은 그를 본 순간에 그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장군부의
대소사를 자기 일처럼 맡아하던 집사 이검룡(李劍龍). 그처럼 자상하고
부지런했던 그가 이 시간에 거기 누워 잘 리는 만에 하나도 없다.
꽝!
번개가 천지를 찢어발기는 것과 같은 순간에 벼락이 쳤다.
천지를 진동하는 울부짖음이 장군부를 뒤흔들었다.
곽승고의 전신이 공포와 긴장으로 팽팽하게 굳어졌다.
놀랍게도 화단에 그처럼 활짝 피어 있던 꽃들이 모조리 시들어가고 있었다. 가을이
아니라, 겨울을 만난 듯이 그대로 말라 비틀어져 무더기로 떨어졌다. 꽃뿐만
아니라 아예 줄기조차 말라 비틀어지고 있었다.
시체는 안으로 들어갈수록 많아졌다.
중문을 통과한 곽승고는 서너 명의 하인들이 목을 움켜쥐고 나뒹굴고 있음을
보았다.
그들의 주검 또한 앞서와 전혀 다르지 않았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이란 말인가!
너무도 믿을 수 없는 사태에 굳어져 있던 곽승고는 일순간 한 생각을 떠올리고는
갑자기 있는 힘을 다해 달리기 시작하였다.
방향을 바꾼 그의 앞에 나타나는 정경은 어디나 같았다.
꽃나무는 물론, 하늘을 찌를 듯 솟아있던 거목들도 모조리 말라 죽어가고 있었다.
연못에서는 잉어와 붕어들이 쏟아지는 빗줄기 속에서 배를 보이며 떠올라 죽어
있었다.
마치 죽음의 신(死神)이 장군부 전체를 휩쓸고 지나간 듯했다.
「취영루(翠影樓)」
아담하게 꾸며진 누각 하나.
곽승고는 늘 여기에 올 때마다 웃곤 했었다.
취영루의 주인은 그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게 여기는 하나밖에 없는 여동생,
곽부용의 거처이기 때문이다.
그 취영루의 입구 난간에 걸쳐진 시체 하나.
목을 움켜쥐고서 눈을 부릅뜬 그 시체의 형상이 아무리 참혹하다 해도 그 얼굴이
곽부용의 시녀인 월향(月香)임을 어찌 알아보지 못하랴.
『월햐앙…!』
신음처럼 그녀의 이름을 중얼거린 곽승고는 취영루의 문을 박차고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부용아! 부용아-!』
목이 터져라 부르며 그가 도달한 곳은 곽부용의 침실.
하지만 침대에도 어디에도 곽부용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모든 것은 곽부용의 평소 성격대로 단정히 정돈된 상태였다.
그런데, 그것이 오히려 숨막히는 적막으로 곽승고의 전신을 후려치고 있음은 또
무슨 일일까!
부용이는 어디로 간 것이란 말인가.
『아버님?!』
사방을 일별한 곽승고는 돌연 한 소리 외침과 함께 밖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사방 여기저기에는 목을 움켜쥐고 쓰러진 사람과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손가락이
문드러지게 땅바닥을 긁어대다가 죽어간 사람들의 모습이 널려져 있었다.
무심한 빗줄기는 더 거세게 쏟아진다.
사방은 더욱더 어두워졌다. 이따금 번뜩이는 번갯불 외에는 한치 앞을 분간하기
힘든 어둠이 주위를 휘감고 있었다.
『아버님! 아버니이…!』
목이 터져라 외치며 아버지 곽천수의 거처인 보국청(輔國廳)으로 통하는 월동문을
지나던 곽승고는 뭔가 물컹한 물체에 발이 걸려 그만 넘어지고 말았다.
넘어졌던 곽승고는 찰나간에 땅바닥에서 한바퀴 뒹굴며 땅을 짚고 몸을 일으켰다.
그 움직임은 일개 서생의 것만은 아니었다. 그는 장군부의 장손인 것이다.
하지만 몸을 일으키던 그는 그만 화석과 같이 굳어졌다.
자신의 발에 걸렸던 물체는 시체였다.
어둠 속에 쓰러져 굳어가고 있는 그 시체의 얼굴이 때마침 어둠을 밝힌 번갯불에
드러났다.
그처럼 발랄했던 그 얼굴이 거기 있었다.
하지만 그토록 발랄했던 얼굴은 거기 없었다.
남아 있는 것은 참혹한 주검. 죽어 있는 것은 바로 곽승고의 동생인 곽부용이었다.
그녀의 죽음 또한 다른 사람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목을 움켜쥔 채로 눈을 허옇게 까뒤집은 채 죽어 있는 곽부용.
『부, 부용아!』
단말마의 외침과 함께 곽승고는 곽부용을 부등켜 안았다.
늘 그처럼 밝은 웃음이 감돌던 입가에 흘러 있는 것은 웃음이 아니라 말라버린
검은 핏자국. 죽기 전의 고통을 말하듯 참혹히 일그러진 얼굴과 자신의 가슴팍을
쥐어뜯은 듯 갈기갈기 찢겨진 앞섶의 옷자락에는 핏자국이 낭자했다.
곽부용의 옆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는 그녀의 시녀인 무영(舞詠)이 쓰러져 있었다.
그녀의 주위에는 엎어진 소반에서 쏟아진 듯한 그릇과 음식, 술 등이 제멋대로
나뒹굴고 있음이 보였다.
더이상 보지 않아도 곽부용이 음식을 장만해 시녀 무영에게 들려 곽천수에게 가던
길임이 분명했다.
『부용아! 부용아!』
곽승고는 그녀의 얼굴을 감싸안고서 격렬하게 부르짖었다.
하지만 이미 눈을 감은 채 싸늘히 식어가고 있는 곽부용은 그의 부름에 대답하지
않았다.
목을 움켜쥔 채, 흰자위뿐인 눈을 부릅뜨고 있을 뿐이었다.
『부, 부용아아… 어, 어떻게 이런 일이…!』
곽승고의 전신이 걷잡을 수 없이 떨린다.
대체 이게 무슨 변이란 말인가.
그리고 어느 한순간, 곽승고는 갑자기 벼락을 맞은 듯 전신을 부르르 떨며 번쩍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의 앞에는 커다란 누각 한 채가 있었다.
보국청.
바로 아버지 곽천수의 거처였다.
다른 곳과는 달리 곽천수의 거처인 보국청에서는 희미한 불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반쯤 열린 문이 부는 바람에 이따금 흔들려 가느다랗게 삐걱거리는 소리를
흘려내고 있다.
생명의 숨결이 일순간에 모조리 사라져버린 듯한 곳에서 들리는 그 소리는
괴이하게도 빗소리를 뚫고서 크게 들렸다.
그 소리는 곽승고의 정신을 들게 한 소리이기도 했다.
『아버님-!』
곽승고는 신음하듯 중얼거렸다.
상황의 엄중함은 이미 상상을 초월한다.
그렇다면 아버지 곽천수의 생사도 장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아니, 어쩌면 이미
십중팔구….
곽승고는 조심스레 곽부용의 시신을 내려놓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는 문이 열린 보국청을 향해 서서히 걸음을 옮겨놓기 시작했다.
지금까지의 움직임과 달리 그 발걸음은 매우 느렸다. 어쩌면 이제 그의 앞에
나타날 결과를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아니면 그것을 보고 싶지 않은 것인지도
몰랐다.
보국청의 안은 희미한 불빛에 잠겨 있었다.
얼핏 보기에는 평소와 다름이 없는 듯하였다.
중앙의 「충의제일(忠義第一)」이라 쓰여진 현판도 등잔불에 우람한 필체를
변함없이 드러내고 있었고 중앙의 서탁(書卓)도 그대로였다. 늘 부용이가 꽂아놓던
탁자 위의 꽃도 여전했다.
하지만 다시 보니 전혀 그렇지 않았다.
탁자의 꽃이 흐트러져 있었다. 아니, 탁자 옆의 의자가 바닥에 넘어져 있었다.
불어드는 바람에 휘날리는 휘장 가운데에, 등잔불빛을 받으며 탁자 너머로 쓰러져
있는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마치 벽을 향해 기어가다가 쓰러진 듯 벽을 향해 바닥에 엎어진 채 굳어진 사람의
모습, 그가 기어간 듯한 자리에는 핏줄기가 길게 섬뜩함으로 끌리고 있었다.
꽈꽝!
맹렬한 천둥이 사위를 떨어울리며 포효했다.
세찬 비바람과 함께 천지가 새파란 섬광으로 물들었다.
『아버님!』
단말마의 외마디 부르짖음이 곽승고의 입에서 터져나왔다.
번갯불이 아니라도, 등잔불빛이 아니더라도 그가 그처럼 존경했던 사람의 뒷모습을
어찌 몰라보랴!
『아버님, 아버니임…!』
한달음에 달려가 엎어진 사람을 부둥켜 안은 곽승고가 피를 토하듯 울부짖었다.
그의 품안에 몸을 누인 그 사람은 정녕코 그의 아버지였던 곽천수. 대장군 곽천수
그 사람이었다.
그의 주검 또한 다른 사람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스, 승고야아…』
그런데 문득 그의 귓전으로 끊어질 듯 들리는 말소리.
『!』
그를 부둥켜 안고 오열하던 곽승고의 전신이 벼락을 맞은 듯 격렬히 진동한다.
믿을 수 없게도 곽천수가, 그의 눈까풀이 곽승고를 향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덩이피가 쏟아진 그의 입에서 핏줄기와 함께 가는 숨결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아, 아버님! 정신이 드십니까?』
『스, 승고… 너, 너는…』
곽천수가 떨리는 손을 들어올리려 발버둥을 쳤다.
그의 손길은, 떨리는 그 손가락은 그가 기어가고자 했던 맞은편 벽을 가리키고
있었다. 벽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벽을 장식하듯 걸려 있는 산수화 한폭 외에는.
그는 그렇게 전신에 남은 힘 가닥가닥을 다 쥐어짜면서 한마디를 더 했다.
『너는… 고…려… 컥!』
그의 입에서 덩이피가 울컥 쏟아져 나왔다.
『아버지!』
곽승고의 입에서 외마디 비명이 터져나왔다.
그가 그처럼 격렬히 곽천수를 흔들어대며 외쳐도 그는 이제 대답하지 않았다.
못다한 말이 그처럼 가슴에 사무치는 듯 두눈을 부릅뜨고서….
『천고지독에 중독되어 죽은 자가 그렇게 흔든다고 눈을 뜰 수 있다면 천하의
기문(奇聞)이 되겠지!』
느닷없이 곽승고의 뒤쪽에서 싸늘한 음성이 들려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이 돌연한 목소리는 천둥 벼락보다 더한 위력이 있었다.
곽승고는 전신을 부르르 떨면서 고개를 돌렸다.
그가 들어왔던 대청의 문턱에 한 사람이 우뚝 서 있었다.
일신에는 어둠보다 더 짙은 흑포(黑袍)를 걸치고 그 검은 휘장에서 불쑥 튀어나온
머리는 어둠 속에서 검은 두건으로 가리워져 있다. 그 두건 속에서 눈이 있음직한
곳으로부터 두줄기 섬뜩한 녹광이 곽승고에게로 쏘아지고 있었다.
문이 활짝 열리자, 비바람이 더 거세게 대청 안으로 휘몰아왔고 흑포괴인의 흑포는
악마의 광란과도 같이 펄럭거렸다.
저승사자가 존재한다면 바로 저러한 모습이리라.
『누, 누구요?』
그를 본 곽승고의 음성이 절로 떨렸다.
『네놈 또한 이미 저승사자의 최명부(催命簿)에 명단이 올라 있거늘, 그것은
알아서 무엇하랴?』
말과 함께 흑포괴인이 한걸음을 내딛었다.
『그럼… 이 변괴가 당신의…?』
곽승고의 전신이 벼락을 맞은 듯 격렬하게 떨렸다.
『켈켈켈켈…! 내가 아니고 또 누가 이런 하독(下毒)의 능력이 있단 말이냐?』
흑포괴인이 소름끼치는 웃음을 터뜨렸다. 까마귀가 일제히 울부짖는 것 같았다.
흑포가 바람에 펄럭이는 순간에 그는 이미 곽승고의 앞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놀라운 신법이었다.
그 순간이다.
『윽!』
그가 다가옴을 보고 몸을 일으키던 곽승고가 돌연 신음과 함께 몸을 가누지 못하고
비틀거렸다.
그것을 보고 흑포괴인이 음산하게 웃었다.
『켈켈켈……! 이제야 중독현상이 나타나는 것을 보니, 아주 내성이 강한 체질을
가진 모양이로군. 크크크흐흐… 하지만 죽음이 이미 도래했다는 것은 돌이킬 수
없는 사실이지!』
「내게도 독을?!」
곽승고의 전신에 전율이 달려갔다.
『어차피 죽게 될 것! 내가 고통을 덜어주마』
흑포괴인의 음성과 함께 곽승고는 자신의 눈앞으로 그의 손이 뻗어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아니, 손을 내뻗는가 싶더니 그 뼈만 남은 것 같은 손은 이미 그의 면전에
도달해 있었다.
바로 그 순간 곽승고의 신형이 바닥으로 뒹굴었다. 그 앞에는 검가(▦架)가 있었다.
곽승고는 전광석화와 같이 반바퀴를 회전하며 몸을 일으켰다. 그는 그 도는
탄력으로 검가에 걸린 한 자루 장검을 뽑아 그대로 검을 앞으로 찔러냈다.
곽승고가 땅바닥에 뒹굴 듯이 반바퀴 회전을 하게 되자, 그는 흑포괴인의 손길을
허공중으로 흘려보낼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 순간에 곽승고의 수중에 들린 검은 허탕을 친 흑포괴인의 배를
찌를 수 있었다. 방심을 하고 있었던 흑포괴인은 미처 어떻게 된 것인지 알기도
전에 지독한 고통이 배를 파고듬을 통감해야 했다.
『흐으윽?!』
그는 두눈을 부릅떴다. 불신의 빛이 충만했다.
곽승고의 수중에 들린 검은 그의 배에 깊숙이 박혀 있었다.
순간, 그의 남아 있던 왼손이 뻗어나가 곽승고를 쳤다.
『와아악!』
일진 폭음과 함께 곽승고는 외마디 비명을 터뜨리면서 가랑잎과 같이 날아갔다.
흑포괴인의 일장에는 가공할 내경(內勁)이 깃들어 있는 것이다.
선혈이 폭포수와 같이 그의 궤적을 따라 뿜어졌다.
요란한 소리와 함께 곽승고는 마치 휴지조각처럼 벽에 내동댕이쳐졌다가 바닥으로
나뒹굴었다.
『크으으으…!』
곽승고를 날려보낸 흑포괴인이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리며 어이가 없다는 눈빛으로
자신의 배를 꿰뚫고 있는 장검을 내려다 보았다.
그런데 그때였다.
그의 일격에 가랑잎과 같이 날아갔던 곽승고가 신음과 함께 꿈틀거리고 몸을
일으키고 있지 않은가.
결코 일개 백면서생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무공을… 지니고 있었단 말인가? 크으흐흐흐… 그렇다면 더더욱 살려둘 수
없지…』
흑포괴인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자신의 배에 박혀 있는 검의 검날을 덥석 움켜잡아
빼버렸다. 그 순간에도 그의 발길은 조금도 쉬지 않고서 쓰러진 곽승고를 향하고
있었다.
『으으윽…!』
곽승고의 입에서 저절로 신음이 흘러나왔다.
목이 타는 듯했다.
상대의 내경에 입은 상세로 말미암아 입에서는 계속해서 선혈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하지만 옥조여 오는 목은 내상으로 인해서가 아니었다.
가쁜 숨을 몰아쉬지만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억지로 숨을 들이켤 때마다 목이 타는
듯하고 선혈이 울컥울컥 올라왔다.
절명의 순간 나타난 회색빛 승인의 여승
흑포괴인은 그 순간에도 무서운 기세로 한걸음씩 그에게 다가서고 있었다.
보국청이 넓다 한들 얼마나 될 것인가.
「이대로 저 자에게 이렇게 허무하게 죽어가야 한단 말인가? 아버님을 죽이고 !」
등을 벽에다 붙이고 밀다시피 하면서 억지로 몸을 일으킨 곽승고는 흉신악귀와도
같은 모습으로 이미 자신의 앞에 당도한 흑포괴인을 보고 절망에 빠져야 했다.
『풀을 뽑되, 뿌리까지 제거함은 귀왕혈의 율법!』
악마의 신음과도 같은 음산한 외침이 흑포괴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의 손이 쳐들리며 한줄기 막강한 장세가 일어났다.
평소의 곽승고라 할지라도 저 일장에 맞게 되면 뼈도 추리지 못할 것이
틀림없었다. 비록 그가 문약한 서생과는 달리 무예를 연습했던 몸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전쟁터에서 소용되는 일반 외가무예(外家武藝)일 따름이었다.
바로 그 순간이다.
『악적! 손을 거두지 못할까!』
천둥과 같은 외침이 흑포괴인의 등 뒤에서 터져나왔다.
흑포괴인은 내심 크게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의 응변은 비할 바 없이 신속하여 옷자락이 휘날리는 가운데 이미 그는
곽승고를 공격하던 손을 휘둘러 그 장세를 뒤쪽으로 쳐냈다.
펑!
맹렬한 폭음이 일어나면서 일진 광풍이 장내에 일어났다.
그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흑포괴인은 어깨를 들썩거리다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나야
했다.
『누구냐?』
그는 놀란 눈으로 앞을 바라보며 소리쳤다.
입구, 그의 정면에는 회색빛 승의를 입은 여승 한 사람이 나타나 노한 눈길로 그를
쏘아보고 있었다. 자애로웠던 얼굴에 분노를 떠올린 그 얼굴은 바로 방약란의
사부인 금정신니였다.
『아미타불… 인명을 이처럼 마구잡이로 도살하다니, 하늘이 두렵지 아니한가?』
노한 음성으로 소리친 그녀는 흔들거리는 신형을 억지로 벽에 기대고 서 있는
곽승고를 쳐다보았다.
『그대가 장군부의 곽대공자인가?』
『그걸 어떻게…?』
곽승고의 얼굴에 일순 의혹의 빛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것뿐, 그는 더이상 버티지 못하고 하늘과 땅이 하나로 달라붙는 것을
느끼며 정신을 놓아버려야 했다.
그가 돌연 쓰러지는 것을 본 금정신니는 놀라 그를 부축하려고 신형을 날렸다.
원래 곽승고와 흑포괴인이 한바탕 어우러지는 바람에 그들은 입구와 비스듬히
위치해 있게 된 상태였다. 그러니 나중에 나타난 금정신니는 그들의 중간에 있게
된 셈이었다.
금정신니는 곽승고를 부축하려고 한걸음 신형을 옮겨놓는 순간에 소리도 없이
암경(暗勁)이 자신을 습격해옴을 경각해냈다.
『간교한 도적! 감히!』
금정신니는 노해 부르짖으며 몸을 팔랑개비처럼 부운일전(浮雲一轉)의 형상으로
차돌리는 가운데 양손을 휘둘러 막강한 장세를 쏟아냈다.
거대한 소맷자락이 펄럭이는 가운데 손 그림자가 대청을 가득 메울 듯이 일어났다.
펑!
맹렬한 광풍이 다시 휘몰아치는 가운데 그나마 위태롭게 방안을 밝히고 있던
등잔불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죽어버리고 말았다.
대청이 순식간에 흑암의 미로 속에 빠져버린 듯했다.
그 가운데 금정신니는 미간을 찡그린채 우뚝 서 있었다.
마치 고약한 냄새를 맡은 듯한 얼굴이었다.
「장풍에서 어떻게 이렇게 지독한 냄새가…?」
그때, 등잔불빛이 꺼져버림과 함께 천지를 진동하는 포효와 함께 번갯불이
작열하면서 사위를 밝혔다. 대청 내부 또한 일순간 정경을 드러냈다.
금정신니의 장세를 견디지 못한 흑포괴인은 처음보다 더 심한 충격을 받은 듯,
신음을 토해내면서 연신 뒤로 물러나고 있었다.
『복호금강장(伏虎金剛掌)! 이제 보니 아미산의 금정 늙은 계집중이었구나!』
놀란 외침을 토해낸 흑포괴인은 이내 괴이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 얼굴에는 득의의
빛이 드러나 있었다.
『켈켈켈… 그러나 나의 천독장(千毒掌)에 중독이 된 이상, 금정 아니라
옥정계집이라도 살아날 재간은 없다!』
그 말에 금정신니의 안색이 굳어졌다.
「천독장? 그렇다면 이 자가 바로 귀왕혈에서 가장 무섭다는
오대천왕(五大天王)중의 하나인 앙천사독이란 말인가?」
저 흑포괴인이야말로 곽천수를 죽이기 위해 귀왕혈에서 파견된 앙천사독인 것이다.
금정신니는 무거운 안색으로 자신과 몇 걸음 떨어진 곳에 쓰러져 인사불성이 되어
있는 곽승고를 일별(一瞥)했다.
「저 자의 독이 숨결만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 하나 못 싸울 바는 아니다.
하지만 저 자와 싸운다면 곽대공자는 살릴 길이 없게 된다…」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
몰랐다면 모르되, 안 이상 그것은 쥐를 잡기 위해 독을 깨는 어리석음에 다름이
아닌 것이다.
찰나간에 생각을 스쳐보낸 금정신니는 갑자기 호통을 치면서 양손을 풍차처럼
휘둘러 앙천사독을 향해 덮쳐갔다.
아미파의 복호산수(伏虎散手)를 아미산 금정봉(金頂峰) 일출을 보고 재창안해낸
그녀의 손에서 펼쳐지는 금정산수는 이미 강호일절(江湖一絶)로 소문나 있었다.
그러니 그 위력이야 불문가지였다.
소맷자락이 파도처럼 펄럭이는 가운데 한가닥 금빛을 띤 손 그림자가 어둠 속에서
노도와 같이 일어났다.
그것을 보고 앙천사독이 미친 듯이 웃어댔다. 마치 올빼미가 깊은 밤에 피를
토하는 것 같은 괴이무쌍한 웃음소리였다.
『켈켈켈… 발악을 하면 독성이 더욱 빨리 퍼지는 것을 모르는 모양이군!』
하지만 그의 말소리는 채 끝나지도 못했다.
무서운 기세로 그를 향해 덮쳐오던 금정신니가 자신이 몸을 피하는 것을 본 순간에
돌연 손을 거두고는 쓰러진 곽승고를 낚아채는 것을 보았던 것이다.
그가 그것을 본 순간에 금정신니는 곽승고의 뒤쪽에 있던 창문을 박살을 내면서
그곳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감히, 거기 서라!』
돌변한 사태에 앙천사독의 얼굴이 흉하게 일그러졌다.
한가닥 외침과 더불어 그의 신형도 허깨비와 같이 창문을 빠져 나갔다.
쏴아아…
장대처럼 쏟아지는 빗줄기는 여전히 거셌다.
그렇지 않아도 어두운 밤하늘은 먹구름에 덮여 칠흑과 같다.
이따금 천지를 찢어발기는 번갯불만이 사위를 노호하며 떨어 울릴 따름이었다.
그 가운데, 하늘에서 뭔가 밝은 빛이 터졌다.
빛은 일순 섬광을 터뜨려 그 칠흑 같은 장대비의 어둠 속에서도 선명하였다.
앙천사독은 방금 자신이 쏘아올린 신호탄이 터지는 것을 보고는 싸늘히 중얼거렸다.
『절대로… 귀왕혈이 노린 자는 죽음의 손을 벗어날 수 없다!』
한바탕 음산한 웃음을 터뜨린 그는 금정신니가 사라진 곳을 향해 방금까지 그가 서
있던 장군부의 대청 지붕 기왓장을 힘차게 굴렀다.
그의 신형이 어둠을 가르며 쏘아가기 시작했다.
남은 것은 주검뿐이었다.
그리고 쏟아지는 빗줄기… 천둥…
* * *
산상에 자기(紫氣)가 떠돈다 하여 자금산(紫金山)이라고 불리는 종산(鐘山)은
모산(茅山)의 지맥으로 기상(氣象)이 만천(萬千)하며 웅위장려(雄偉壯麗)하여
아래로 드넓은 남경을 한눈에 굽어볼 수 있다.
그러하여 응천부의 제일산이라 칭한다.
쏴아아! 번쩍!!
쏟아지는 빗줄기와 밤 하늘을 가르는 번개.
그리고 천지를 뒤흔드는 천둥소리.
종산은 무섭게 쏟아지는 빗줄기에 전신을 내놓고 있었다.
『으으으…!』
곽승고의 입에서 희미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를 바위에 기대놓고서 그 머리 백회혈에다 장심(掌心)을 붙여 진기로 그를
도와주고 있던 금정신니는 그가 신음을 흘려내자 안도의 숨을 불어내면서 손을
떼었다.
곽승고는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일단 탁한 숨을 몰아낸 것으로 일시지간의 위기는 넘긴 것이다.
「란이의 배필이 어떤 사람인지 살펴보기 위해 장군부에 갔다가 부처님의 가호로
이 사람의 목숨만은 건질 수 있었다」
금정신니는 창백한 곽승고의 얼굴을 보면서 암암리에 고개를 저었다.
『아미타불… 대체, 무림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장군부가 무엇 때문에 귀왕혈의
습격을 받은 것일고?』
심중의 의혹은 가득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 그것을 알아낼 수는 없다.
『으음…』
그때, 다시 나직한 신음과 함께 곽승고가 눈을 떴다.
『정신이 드시는가?』
금정신니의 자애한 음성에 잠시 얼떨떨한 듯 그녀의 노안(老顔)을 바라보고 있던
곽승고는 쏟아지는 빗줄기에 제정신이 드는 듯 갑자기 벌떡 몸을 일으키려 했다.
『여기는?』
『아미타불…! 잠시, 잠시만 그대로 있으시게. 노니(老尼)가 비록 본문의
해독영약(解毒靈藥)을 쓰고 본신의 내공으로 잠시 독의 발작을 눌러 놓았으되,
아직 해독이 된 것은 아니니까…』
금정신니가 조용히 그의 어깨를 누르며 말하는 순간에 저 멀리서 날카로운
호각소리가 빗속을 뚫고 은은히 들려왔다.
그 소리에 금정신니의 자애한 얼굴이 굳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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