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0주일설교 고린도전서15:1-11)
본문: 고린도전서15:1-11
제목: 복음의 핵심
오늘은 고린도전서15:1-11의 말씀을 가지고
“복음의 핵심”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오늘 말씀 제목이 무엇입니까?
“복음의 핵심”
우리의 믿음의 핵심은 무엇일까요?
무엇이 믿음의 핵심일까요?
그 답은 복음입니다.
복음은 교리가 아닙니다.
복음은 신자들이 삶 속에서
살아 가야 하는 실제 모습입니다.
바울이나 믿음의 선배들은 가는 곳마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 복음을 듣는 곳마다 교회가 세워지고
우리 율리교회가 세워지고
우리들도 변화되어 예수를 믿고 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복음은 저와 여러분의 삶을
지탱하게 되는 힘이고 길이고 기둥입니다.
그리고 복음이 선포되고 받아들여지는
실제 삶의 현장에서 소통되어 세상으로 나가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복음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처음 복음을 전하고 들었을 때의
감격스러운 경험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왜 옛날이야기를 합니까?
그것은 지금 그것을 누릴 수 없기에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누리기를 원하는 마음 때문에
옛날이야기를 합니다.
고린도 교인들이 복음을 들었던 때와
지금의 모습이 다르고 차이가 있기에
옛날 처음 복음 들었던 때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복음은 분명하고 선명합니다.
그러나 고린도라는 현실을 살고 있는 신자들의 행보는
복음의 모습과 어긋났습니다.
복음에서 벗어나 비틀린 모습을 파헤치고 교정하고자
처음 주고받았던 그 복음을 되새깁니다.
복음은 구원을 약속합니다.
자판기는 커피를 마시고 싶다면
가격에 맞는 돈을 넣고 누르면 커피가 나옵니다.
하지만 구원은 어떤 조건을 맞추면
오는 것이 구원이 아닙니다.
구원은 오직 은혜로 다가옵니다.
구원은 은혜로 오기에 세상 사람이 구별하는
온갖 차이와 차별을 건너뜁니다.
그렇기에 누구나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구원이
아무렇게나 주어진다는 말은 결코 아닙니다.
은혜가 허무는 것은 사람들 사이의 장벽입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세우신 기준이 아닙니다.
안타깝게도 우리에게는 믿으나 마나 한
헛된 신앙이 존재합니다.
모양은 있지만
구원을 가져다 주지 못하는 짝퉁 믿음이 있습니다.
믿음처럼 보이는 모양은 있지만
정작 그 속에 알맹이는 없는
믿음의 포장을 쓴 위선적 믿음입니다.
제대로 된 믿음은 전해진 복음의 말씀을
우리 삶에서 굳게 붙잡고 살아야 합니다.
믿음과 삶이 동떨어져 있다면
그것은 위선적인 믿음이 됩니다.
믿음과 삶이 하나가 되어야
구원의 약속이 현실로 만드는 신앙이 됩니다.
바울이 헛된 믿음을 거론하는 이유는
구체적으로 몸의 부활과 관련된
치명적인 오해 때문입니다.
몸의 부활을 향한 소망이 없다면
우리의 믿음은 불 꺼진 등대 같은 것입니다.
그런 상황이면서도 아무 문제 없는 것처럼
살아가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심장 없이 생존할 수 없듯이
부활 소망을 무시한 채 복음과 구원을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 몸의 부활은 새로운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이 새로운 존재가 복음이 약속하는
구원의 핵심입니다.
고린도 교인들이 처음부터
복음을 엉터리로 믿었던 아니었습니다.
처음은 바울이 선포한 부활의 소망을
정확하게 알고 믿었습니다.
우리가 부활의 소망을 굳게 계속하여
붙잡는 삶을 계속 이어갈 때 구원이 완성됩니다.
약속된 구원에 이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부활 소망을
견고히 붙잡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바울이 전한 복음(3-11)
바울이 오늘 본문에서 우리에게 말하려는
핵심은 무엇입니까?
몸의 부활 곧 죽은 자의 부활이 사실이라는 것을
재확인하는 것입니다.
죽은 자의 부활은 어디에서 출발합니까?
그것은 우리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라는
특별한 역사적 사실에서 출발합니다.
이 부활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기본적인 사실입니다.
이 부활은 모든 사도가 함께 선포하고
모든 교회가 함께 고백하는 복음의 핵심입니다.
교회의 복음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두 사건으로 집약합니다.
그리스도는 우리 죄를 위해 죽으셨고
죽은 지 사흘 만에 살아나셨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우리가 고백하는
핵심 내용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 모두
성경에 기록된 대로 이루어졌다고 고백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은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된 역사적 우연이 아닙니다.
이는 오래전부터 약속되고 드러난
하나님의 계획의 성취하는 일이자
그 약속의 유효성을 재확인하는 사건이었습니다.
교회의 고백 속에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하나의 역사적 사실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그로 인해 모든 것이 달라지는
현재 우리 삶에 나타나는 사건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는 죽었다가 부활하셨고, 지금 살아 계십니다.
부활은 그저 과거 사건에 대한
역사적 고백 그 이상입니다.
이는 지금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자들이 하는
현재 삶에 대한 고백이기도 합니다.
바로 이것이 바울이 받아서
고린도 신자들에게 전해준 복음은
그들이 받아서 그 안에 굳게 선 복음입니다.
그들이 이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헛되이 믿지 않고
굳게 붙잡을 때, 그들은 구원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고린도 교인들이 그러하듯이
우리 또한 그러합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예수님의 부활은
신앙고백을 넘어 실제 삶의 무대에서 일어난
하나의 체험이었습니다.
부활을 역사와 동떨어진 종교의 상징으로 생각하고
관심을 그 영적 의미에서만 가두려는 시도가
계속 이루어져 왔습니다.
하지만 부활의 영적 의미는 실제 사건이라는
현실적 토대 위에서 생겨납니다.
물론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현실의 경험에서
부활은 사실상 믿기 불가능한 주장입니다.
그래서 불신자에게 전도할 때 부활의 이야기를
복음의 핵심으로 잘 이야기 하지 않습니다.
부활이 믿기 어려운 것은
비단 현대인의 이야기만 아닙니다.
사실 예수님의 시대나 바울의 시대의 고대인에게도
부활은 터무니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복음서를 보면 베드로 같은 제자들조차도
부활을 믿기 어렵다는 것을 보여주었지만
그럼에도 부활은 사실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이야기는 부활의 심오한 해석보다
부활이라는 사실 자체에
집중하고 있음은 의미심장합니다.
교회는 부활이라는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사실로 선포합니다.
부활을 선포하는 증인의 역할을 하는 것이
교회이고 우리 같은 그리스도인 입니다.
증언의 출발은 예수님의 부활을
직접 목격한 자들입니다.
처음부터 그리스도의 부활은
이들 증인의 목격담 형태로 선포되었습니다.
사도행전 2장은 오순절 성령강림 때 성령 충만한 제자들이
우리가 부활의 증인이라고 선포하였습니다.
따라서 그러한 목격자들이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났던 이야기를
교회가 기억하고 고백하는 복음의 사건의 일부로
정착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5절부터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연결 되어져서 나오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부활 사건이 부활의 목격담이
같은 무게를 가질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났던
이들의 생생한 목격담은
사실상 교회가 선포하고 고백하는
복음의 유일한 원천이자 통로였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사도들의 증언 속에서
곧 그들의 생생한 부활 목격담이라는 형태로
선포되었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먼저 게바 곧 베드로에게
그 다음 열두 제자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후 500여 형제들에게 일시에 보이셨습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편지를 보낼 때
이들 중에 죽은 자들도 있지만
다수가 아직 살아 있다고 합니다.
여기서만 언급된 이 놀라운 사건은
역사적 확인이 불가능하지만
그렇다고 바울이 마음대로
지어낼 수 있는 이야기도 아닙니다.
더욱이 그들 가운데 상당수가
아직 살아 있다는 주장은 더욱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육신의 동생 야고보에게
나타나셨다는 사실이 여기서만 알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은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 후,
사도들이 예수님의 어머니 및 그분의 형제들과 함께 모여 기도에 전념하는 모습과 나중에 예수님의 육신의 동생 야고보가 예루살렘의 지도자로 활동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구체적인 정황은 알 수 없지만 야고보 역시
부활한 형을 새로운 모습으로 만나면서
그분의 제자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후에 다시 모든 사도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바울이 이런 말을 하고 있는 것은 바울 자신도 이 특별한 증인 중 하나라는 사실을 말하고자 함입니다.
하지만 바울이 예수님을 만난 것과
제자들이 예수님을 만난 것은 다릅니다.
바울이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상당한 시간이 흐른 후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에서 만났습니다.
그것도 이미 승천하신 주님을 대면하여 만난 것이 아니고
환상 속에서 만났습니다.
그와 같은 환상 체험이 바울만이
독특한 경험이라도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그 이후 아니 그 전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이들은 많았습니다.
스데반도 그런 인물 중의 하나입니다.
그런 점에서 다른 부활의 증인들의
대면 접촉과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하지만 바울은 그 차이를 부정합니다.
자신의 체험 역시 부활하신 예수님이
그의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던 일의 연장으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8절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일 마지막에
“나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고린도 성도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목격한
산증인에게서 부활의 복음을 들었습니다.
그들이 받았던 부활의 복음은 바울이 전해 받은 것입니다.
하지만 그 전달자 또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던 사람입니다.
당시 상황에서 이는 결코 손쉬운 주장이 아니었습니다.
바울 자신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다른 사도와 다른 상황에서 사도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중 가장 하찮은 존재라고 말합니다.
비정적으로 태어난 만삭되지 못한 자신이라고 말합니다.
도저히 사도가 될 수 없었는데 되었다고 말합니다.
바울 자신은 부활의 증인은커녕
그야말로 하나님의 교회를 없애려 날뛰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바울이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이는 달리 설명할 수 없는 그야말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내가 하나님의 은혜로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서신서를 보면 자신의 직분에 대해서
하나님의 은혜라고 자주 표현합니다.
괜히 하는 말이 아닙니다.
은혜는 무자격자에게 주어지는 값없는 선물입니다.
하지만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은혜라고 해서
그 은혜가 아무렇게나 주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 은혜는 하나님의 은혜,
곧 하나님의 생명을 품은 강력한 선물입니다.
이 은혜는 우리의 새로운 삶을 가능하게 하는
삶의 공간이 되고 터전이 되고
우리의 삶을 통치하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나타납니다.
바울의 삶에도 하나님의 은혜는 헛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도보다 더 수고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놀라운 결과가 무자격자인
바울 자신의 업적일 수 없습니다.
이 수고의 원천은 내가 아니라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일 뿐입니다.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바울 자신도
그리스도의 부활의 산 증인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전하는 복음도 다른 사도들이
선포한 복음과 똑같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나나 사도들이나 우리는 모두
이렇게 부활은 선포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렇게 선포한 것은 먼저 받은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다 전해 받은 것입니다.
적어도 부활에 관한 한 교회에 다른 복음은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명백한 역사적 사실로서
모든 교회가 고백하고 전하는 복음의 핵심입니다.
바울이든 다른 사도들이든
모두 죽었다가 살아나신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
그리고 신자들은 이렇게 믿었다고 고백해야 합니다.
복음을 붙잡고 확실히 믿는다고 고백해야 합니다.
교회의 토대가 되는 이 복음을 부정하는 것은
아주 잘못된 일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이 분명히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온 교회가 고백하는 복음의 핵심이자
부정할 수 없는 하나와 사실로 확증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신앙은 예수님의 부활이
나에게도 일어나는 일이라고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죽음을 앞에 두고도
실망하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고
소망을 가지고 기쁨을 가지고 대합니다.
이 부활 신앙은 말로만 하는 신앙이 아니라
삶에서 일어나는 신앙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썩어지는 것에 소망을 두지 않고
부활하여 새 몸을 입는 것을 소망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 사람과 같지 않습니다.
세상이 바라는 것을 바라지 않으며
세상이 두려워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세상이 욕심내는 것을 우리는 욕심 내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는 우리의 썩어질 몸이 죽게 되면
하나님께서 주신 새로운 몸으로 부활하기에
그렇게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한 믿음으로 지금을 살고
그러한 믿음으로 사람을 만나며
그러한 믿음으로 세상을 대하게 됩니다.
이러한 부활의 신앙이 여러분의 것입니까?
아니면 알고만 있고
여러분과는 동떨어져 있는 것은 아닙니까?
부활의 신앙이 고백을 넘어 삶이 되는
성도님이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