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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 평안 7장 21절- 23절
7장21절-23절은 본문은 하나님의 아들이 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의 가장 진지한 주의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성경의 모든 말씀을 믿으면서도 실제로는 성경을 가끔 무시함으로 성경의 많은 부분을 부정하고 있는 사실로 해서 우리 모두 회개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본문은 머지않아 하나님 앞에 서서 최후의 심판을 받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의식하는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말씀인 것입니다.
주는 거짓 선지자에 관하여 백성들에게 경고하였습니다.
이것이 매우 중대한 문제이므로 다시 한번 주제를 반복하시는 것입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명제입니다.
즉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 '라고 하셨습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사람이 무엇을 믿고 있는 것인가가 아니라 무엇을 행해야 하는가를 주님이 여기서 실제로 가르치고 계시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신앙과 행위를 대립 관계로 두려는 사람들이 흔히 사용한 인용구입니다.
그들은 주께서 '나더러 주여 주여하는 자마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라고 묻습니다.
그들은 여기서 행위가 강조되어 있다고 주장합니다.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의 행위입니다.'라고 말입니다.
이 성구의 목적은 자기 기만과 자기 미혹의 무서운 위험에 대해서 다시 한번 우리들의 눈을 열게 하는 것입니다.
거짓 선지자들이 양의 옷을 입는 것과, 그들의 기만적이며 교묘한 교리의 매혹적 성격 때문에 우리가 미혹되기 쉽다는 관점에서 고찰된 위험이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한걸음 더 나가서 거짓 선지자 중에서뿐만 아니라 우리들 자신 속에도 같은 것이 있음을 보여주려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 위험성, 즉 자기 기만과 자기 미혹이라는 무서운 위험성입니다.
이것을 적극적으로 표현해 보면, 하나님 앞에서는 참된 의와 참된 성결 이외에는 아무것도 쓸모가 없음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히 12:14).
우리가 무엇을 말하고 행하든 우리가 진정으로 의롭고 성결하지 않다면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음을 경고하고 계십니다.
이것은 사람이 만든 율법주의가 아닙니다. 주는 참된 신앙의 의미를 다시 한번 보여주시되 새로운 방법으로 보여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 교훈 배후에 일관되어 있는 원칙은 각자의 영혼과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의 우리의 자기 기만위에 우리들이 거짓된 구원의 증거에 의지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주는 최종적으로 버려져 저주를 받을 사람이 경험하는 일들이 어떤 것인가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계십니다.
주는 결코 사람들이 '주여 주여'라고 말하는 데 대해서 비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든지 '주여 주여'라고 불러야 할 것입니다.
주님이 강조하시는 것은 주님의 본성이나 인격에 관해서 바른 교리를 가지고 있고 주를 인정하고 주 앞에 나와 '주여 주여'라고 외치는 사람들을 일컫는 것입니다.
그들은 주님을 향해서 바른 일을 말하고 주에 대해서 바르게 믿고 있습니다. 우리 주는 이런 것들로는 그들을 비판하시지 않습니다.
주님이 그와 같이 말하는 자들이 반드시 모두는 천국에 들어가지는 못하리라는 것입니다.
'주여 주여'라고 부르지 않는 사람들은 결국 천국에는 들어갈 수 없습니다. 이것이 구원의 문제 전체의 출발점인 것은 물론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서 '주여 주여'라고 말하지 않는 한 그 사람은 기독교인이 아닙니다. 바울 사도는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으면 누구든지 그런 말을 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고전 12:3).
우리의 구원의 전체와, 우리의 영원한 운명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전적으로 의지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참된 기독교인이 '주여 주여'라고 말하는 이유도 이런 까닭입니다.
그러나 야고보는“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 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약 2:19).
그 한 예를 '귀신들이 나가며 소리 질러 가로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라고 말입니다(눅 4:48). 8:28).
우리 모두 진리에 대한 지적인 동의로 만족해 버리는 위험이 있습니다.
그 진리에 승복하여 '나사렛 예수야말로 바로 하나님의 독생자입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말은 하면서도 거듭나지 못한 자요 기독교인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행위란 무엇입니까?
우리 주님에 의하면 행함이 있었으면서도 그 나라 밖에 있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까?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지 않았나이까?'입니다.
선지자 노릇은 영적인 메시지 전달을 의미합니다.
여러분은 신약 성경에서 예언에 대해서 많이 보시게 됩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교회에서 행해진 여러 가지 은사들에 관해서 말씀했습니다(고전 12장).
주는 심판날에 많은 사람들이 주 앞에 나와 '주여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했습니다.'라고 할 사람들이 많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들 자신들의 이름으로 가 아니라 주의 이름으로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에게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이는 바른 교리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설교했다고 하지만 설교자 자신은 천국에 들어갈 수 없는 일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에서 자주 가르치신 것입니다. 예를 들면 발람과 같은 사람의 위치가 이와 같지 않습니까?
그는 바른 메시지를 말했으나 삯꾼 선지자로 버림받은 자였습니다(벧후 2:15, 24. 유 !;11. 민 22:24. 참조).
그는 어떤 의미에서 바른 메시지와 가르침을 전했지만 그 자신은 천국 밖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사울 왕도 이 같은 방법으로 사용하지 않으셨습니까? 선지자의 영이 가끔 그에게 임했지만(삼상 10:10) 사울도 역시 천국 밖의 사람이었습니다.
신약성경에 오면 이 일들이 더욱 분명히 기록된 것을 발견하실 것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두려운 위험을 알고 다음과 같이 말씀했습니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 9:27).
그가 내 몸을 '쳐'라고 말할 때 그는 일부 사람들이 자주 생각하는 대로 혈육의 죄를 염두에 두고 있을 뿐 아니라 자기의 생활 전체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거리에서와 마찬가지로 강단에서 설교할 때에도 자신을 쳐서 복종시켜야 합니다. 몸을 친다는 것은 혈육이 열심히 하려는 일체의 일을 통제하고 지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혈육은 앞으로 밀고 나가려고 합니다.
사도 바울은 바로 복음 전파하는 대목에서 자기의 몸을 치고 때리고 상하게 한다고 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면서 자기는 버림받는 자 되는 것을 면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 사실의 고린도전서 13:1-3절을 생각해 봅시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그리고 다시 계속해서 '내게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라고 말입니다.
결국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는 셈입니다.
'나는' 천사같이 설교할지 모릅니다. 나는 매우 놀라운 웅변과 용어를 구사할지도 모릅니다.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이 세상에서 들어본 중 최고의 설교자라고 생각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렇게 하고서도 천국밖에 있을 수도 있습니다.
이같이 예언을 하면서도 천국에 들어갈 수 없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빌립보 1:15절 바울은 거기서 어떤 사람의 일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 떤 이들은 시기와 분쟁으로 그리스도를 전하나니'라고 말입니다.
그들의 동기는 악하고, 그들의 생각은 잘못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전파하고 그리스도에 대해서는 바른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그들이 바르게 전파하는 내용을 기뻐했지만 그들 자신은 잘못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바른 교리를 말하면서도 천국에 들어갈 수 없는 일이 현실적으로 가능할 수 있음을 자각해야 합니다.
어느 땐가 주님은 바리새인에 대해서 말씀했습니다. 즉 '너희는 사람들 앞에서 자기를 옳다 하는 자들이나 하나님은 너희의 마음을 아신다. 사람들에게 높임을 받는 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니라'(눅 16:15)라고 말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가공스런 내용입니다.
심판 날에 우리는 모두 크게 놀라리라는 의미로 이것을 이해하는 바입니다. 그날에 우리들은 일찌기 설교자로서 극구 찬양을 받은 사람들이 천국밖에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바른 것을 말하고 멋있는 말들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속에 생명과 진리를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런 것은 모두 육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들은 예언을 할 뿐 아니라 귀신들도 쫓아냈습니다. 다시 여러분은 '주의 이름으로'라는 말씀이 여기서도 반복된 것과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들을 쫓아내지 않았나이까? 란 말을 보십니다.
이렇게까지 하고도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일이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증명하기는 간단한 일입니다.
주는 천국 복음을 전파하고 귀신을 쫓아내기 위해 제자들을 파송하셨습니다. 그들은 돌아와서 의기양양하게 주께 '주여 주의 이름으로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라고 했습니다(눅 10:17).
우리 주님이 이 능력을 어떤 사람에게 주실 수 있으나 그 사람 자신은 버림받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사도행전 19장을 보면 '꼭 같은 힘을 가진 스게와의 일곱 아들도 이 일을 행하더니'라고 되어 있습니다(행 19:14).
그런즉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면서도 천국에는 들어가지 못할 사람들도 있는 것입니다.
끝으로, 우리 주는 클라이막스에 도달하면서 이것을 다음 형식으로 표현하셨습니다. 이 사람들은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사' 곧 능력 있는 행위, 기적, 경이로운 일들, 거의 믿을 수 없는 일들을 주의 이름으로 행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불가사의한 것과 기사를 많이 행했습니다. 그래도 그 나라밖에 있습니다.
이 같은 일들이 가능할 수 있음을 어떻게 증명하겠습니까?
그 증거의 일부를 애굽의 마술사들의 경우에서 볼 수 있음은 물론입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들을 해방시키려 기적을 행하기 위해 보내심을 받았을 때 애굽의 마법사들도 어느 정도까지는 흉내 내어 같은 일을 반복할 수 있었음을 여러분은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들은 많은 기사를 행했습니다(출 7:11-12). 그러나 증거는 이것만이 아닙니다.
우리 주님은 마태복음 24:24절'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서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라고 말입니다.
데살로니가 후서 2:8절에서 바울의 말씀을 봅시다. '그때 불법한 자가 나타나리니 주 예수께서 그 입의 기운으로 저를 죽이시고 강림하여 나타나심으로 폐하시리라 악한 자의 임함은 사탄의 역사를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하리니' 이미 이런 것이 예언된 바 있습니다.
무엇보다 우리는 마귀의 힘을 기억해야 합니다.
마귀가 사람에게 주여 주여라고 말하게 함으로써 그를 천국밖에 머물게 할 수 있다면 그가 그렇게 할 것은 확실합니다.
마귀는 사람을 천국밖에 머무르게 하는 일이라면 무슨 일이나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릇된 신앙 조항이나 혹은 바른 신앙 조항이라도 그릇된 방법으로 지킴으로써 사람을 천국밖에 있을 수 있게 한다면 사탄은 그것을 그에게 가지게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에게 표적이나 기사를 행할 수 있는 능력을 줄 것입니다.이것이 모두 예언된 바 있습니다. 이것이 모두 성경에 있습니다.
주님은 이것을 간단하게 제자들에게 요약해 말씀하셨습니다.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눅 10:20).
천국밖에 있는 사람들이 내 이름으로 설교할 수 있고 귀신들을 쫓아내고 많은 기사를 행할 수 있다고 산상설교에서 너희에게 말하지 않았더냐? 이런 일들로 미혹되어서는 안 된다.
너희 자신을 확인해라. 문제는 너희들의 마음이다.
너희의 이름이 천국에 쓰여 있느냐?
너희가 진정 내게 속해 있느냐?
너희는 내가 가르치고 있는 성결[거룩]과 의[진리]를 갖고 있느냐? '나더러 주여주여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라고 말입니다.
놀라운 일과 신기한 일을 보지 말고 그가 팔복에 일치하는가 아니한가를 찾아내야 합니다.
그가 심령이 가난한가, 온유한가, 겸손한가, 이 세상을 보고 심령으로 신음하는가, 그가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인가,
이상은 팔복에 의한 시금석이요, 산상설교에 의한 시금석입니다. 외관뿐만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모습, 이것이 하나님 앞에 중요한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말씀한 분은 주님이시고
머지않아 심판하실 이는 주님이시라는 것을 기억합시다.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에게 이르기를 ...' 이라고 한 이 말씀을 주님은 심판주가 되실 심판 날을 가리킨 것입니다.
그러므로 속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주님은 다시 한번 '너희는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하는 자이나 너희 마음을 하나님께서 아시나니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니라'(눅 16:15).
이것들을 전부 다음 한 마디로 요약할 수 있겠습니다.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이 무서운 진리를 대면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정직함을 주시도록 기도합니다.
'땅의 모든 영화가 사라지고' 그리스도 앞에 서서 그의 얼굴을 대할 때에 우리는 이 진리에 대해서 대답을 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