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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여행이야기(국내) 스크랩 서울 덕수궁(10.20)
설악산 추천 0 조회 45 07.11.05 13:09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덕수궁(10.20)


안양에서 덕수궁을 가기 위해서는 안양역에서 전철을 타고 시청역에서 내리면 된다.

아마도 시간은 50분 정도 걸린 것으로 기억된다.

대한문의 원래 이름은 대안문이었는데 대한문으로 개칭되었다.

언젠가 사진을 보니 구한말에 대안문이라는 사진이 있는 것이다.

대한문도 다포식이고 홍살문과 안상문양이 있다.

조선은 유교가 정치적 이념이지만 문화는 불교문화라는 것이 실감이 난다.

왕의 어좌도 절의 보좌와 거의 같고 닫집도 그러하고 다만 조금 유교식으로 응용이 되었을 뿐인 것같다.

언젠가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하시고 석보상절을 지은 것이 백성들이 불교문화에 젖어 있으니 한글을 백성들이 빨리 익히기 위해 만들었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유교에서 연꽃이 군자를 상징한다고 하지만 그것도 알고 보면 불교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 지도 모르겠다.

어찌되었든 대한문을 지나면 금천교를 건너게 되어 있다.

따지고 보면 절에 들어가는 곳에도 이런 류의 다리가 있는 경우가 많다.

선암사 들어가는 입구에도 승선교가 있지 아니한가? 취사선택이란 말이 실감이 난다.

유교고 불교고 간에 사람이 사는 것에서 좋은 것을 본뜨는 것이다.

불상도 그리스의 영향을 받았다고 하는 것이다.

왕릉에 있는 양도 따지고 보면 그리스에서 건너간 풍습인 지도 모르겠다.

양을 제물로 받치는 것은 그리스나 로마의 전형적인 제물이다.

동양과 서양의 문물이 다른 것도 있지만 비슷한 것도 많은 이유가 이러한 것일 것이다.

오늘 자세히 보니 대한문의 홍살문 끝이 다른 곳의 홍살문은 모두 붉은 색인데 여기는 끝이 파란 색이다.

이것은 무슨 이유인 지 모르겠다.

어찌된 일인지 날이 갈수록 모르는 것 투성이고 점점 많아지는 것같다.

대한문의 잡상은 세어 보니 7개이고 기둥 앞에 있는 석상은 해치인지 먼지 모르겠다.

대가리는 있는데 몸뚱이는 만들어져 있지 않다.

천정은 우물천정도 있고 연등천정도 있다.

예전에 금천교 밑에는 물이 있었고 사람들이 동전을 던지기도 한 것같은데 언제부터인가 물이 없어진 것같다.

금천교의 석조난간은 약식인 것같다.

보통은 위는 앙련, 밑은 복련이고 중간은 매듭인데 여기는 그냥 모양 흉내만 낸 것같다.

금천교 들어가기 전에 여기는 특이하게 하마비가 있다.

덕수궁의 원래 이름은 경운궁이다.

정확히 말하면 덕수궁은 상왕이 거처하는 궁이란 뜻이란다.

고종이 순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경운궁에 머물렀기 때문에 덕수궁이란 이름은 얻은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이런 덕수궁이 4개가 있었다고 한다.

덕수궁은 예전에도 여러번 갔었는데 그 때는 미처 관심이 없었는데 덕수궁에 세종대왕의 동상도 있고 측우기, 신기전기화차도 있다.

중화전의 꽃살은 빗살무늬인데 색깔이 노란색이다.

경복궁은 녹색인데 여기가 노란색인 이유는 고종이 황제였기 때문에 황제의 색을 칠한 것이라고 한다.

중화전의 잡상의 수는 10개이고, 경회루보다 1개 적은 수치이다.

중화전 천정에는 우물천정 중앙에 보개천정이 있는데 용이 2마리이고 발가락은 세어보니 5개이다.

닫집과 천정의 단청은 많이 낡았는데 과거 화려했던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다.

중화전 앞 좌우에는 청동향로가 있는데 이것도 뚜껑은 없는 것이 있다.

언젠가 사진을 보니 향로 위에는 뚜껑이 있었던 것이다.

아마도 복원을 한 듯한데 뚜껑까지 했으면 좋았을 것같다.

향로에 당초문과 모르는 문양이 있었다.

중화문도 다포식건물이고 부시가 설치되어 새가 집 짓는 것을 막고 있었다.

향로 앞에는 드므가 있는데 만세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고 만자도 세겨져 있었다.

광명문 안에는 흥법사종과 자격루 그리고 신기전기화차가 있었고 예전의 돌들이 여기 저기 있었다.

덕수궁 미술관에는 김보현 화가의 전시회를 하고 있었다.

미술관의 석조기둥의 상단에는 특이한 조각이 있었다.

미술관 앞에는 분수도 있고 해시계, 앙부일구도 있었다.

오늘 자세히 보니 석조전 기둥 상단에는 대한제국 황제의 문양이 오얏문양이 있었다.

석조전의 기둥위의 조각, 난간 조각이나 꼭대기의 조각도 볼만 했다.

석조전 창문속에도 문양이 있었는데 살펴보니 만자문양이다.

만자문양은 아시는 바와 같이 길상만덕의 문양이다.

휴일날이라서 그런 지 덕수궁에는 많은 학생, 연인들, 관광객, 사진찍는 사람들이 와 있었다.

정관헌 난간에 무늬가 있다더니 정말로 사슴, 소나무, 박쥐, 인동덩굴 문양이 있었다.

여기서 박쥐는 부귀영화를 의미하고 사슴, 소나무, 인동덩굴은 장수를 뜻할 것같은 느낌이 든다.

정관헌에서 내려오는 담장의 문양도 만자문양으로 길상만덕의 문양이다.

건물의 난간은 아자난간이 있었고 우물천정에는 복자, 주작문양과 용문양도 있었다.

건물의 합각에도 여러 가지 우리 고유의 문양이 있었어 아름다움을 느끼게 해주었다.

심지어는 아자난간의 경첩에도 만자문양이 있었고 문옆에도 아름다운 문양이 있었다.

현재 우리나라에 가장 많은 전통이 남아 있는 것은 궁궐이다.

덕수궁도 자세히 보면 다른 궁궐에서 볼 수 없는 여러 가지 특색이 있다.

근대화의 물결이 이곳 덕수궁에 스며든 것을 볼 수 있고 우리 전통의 각종 문양, 조각들이 있는 곳이었다.


아래 자료는 덕수궁 홈페이지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1592년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의주로 피난 갔던 선조가 1년 반만에 한양으로 돌아왔으나, 한양의 모든 궁궐은 왜군에 의해 불타 없어져 머물 궁궐이 필요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당시 황화방(皇華坊)에 위치한 월산대군(月山大君) 후손의 집과 인근의 민가 여러 채를 합하여 임시 행궁(行宮)으로 삼고 '시어소(時御所)'로 머물게 되었으니, 이것이 훗날 덕수궁(경운궁)의 시작이었다.

선조는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궁궐을 재건하려 했으나, 당시의 궁핍한 국가재정 상황 등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결국 1608년 2월 정릉동 행궁 정전(석어당 추정)에서 승하하고 만다.

선조의 뒤를 이어 이 곳에서 즉위한 광해군은 1611년 창덕궁을 재건하여, 그해 10월 창덕궁으로 이어(移御)하면서 '경운궁(慶運宮)'이란 이름을 비로소 짓게된다.

병조판서 이항복을 시켜 경운궁의 담장을 두르고 궁궐로써의 면모를 가다듬는 것도 이 무렵의 일이다.

하지만 광해군은 곧 다시 경운궁으로 돌아와 머물다 1615년 창덕궁으로 아주 이어(移御)를 한다.

한편 1623년 인조반정의 성공으로 광해군을 폐위시킨 인조는 광해군에 의해 경운궁에 유폐되어 있던 인목대비로부터 왕으로 인정을 받고, 경운궁 별당(즉조당 추정)에서 즉위한 뒤 인목대비를 모시고 창덕궁으로 이어하게 된다.

이때 인조는 선조가 머물던 즉조당과 석어당 두 곳만 남기고, 나머지 경운궁의 가옥과 대지를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고 경운궁을 아주 떠나게 된다.

이로써 경운궁은 왕이 공식적으로 머물며 국정업무를 보던 궁궐로써 기능을 마감하였다.

이후 영조때(영조 49) '선조가 경운궁(덕수궁)에 거처를 정한 3주갑(180년)과 선조의 기일(승하일)을 맞이해, 영조가 세손(정조)과 함께 경운궁 즉조당에서 추모 사배례(四拜禮)를 올리는' 등 기념의식을 갖기도 하였고, 고종 30년(1893)에 '선조가 경운궁에 거처를 정한 5주갑(300년)을 맞아 고종이 세자(순종)와 함께 경운궁 즉조당에서 추모 사배례(四拜禮)를 올리기도 하였다. 그리고 난 후 1897년 고종이 다시 이곳으로 환어(還御)하기 전까지 비어있게 된다.

경운궁의 정문은 원래 정남쪽의 인화문이었으나, 다시 지으면서 동쪽에 있던 대안문을 수리하고 이름도 대한문(大漢門)으로 고쳐 정문으로 삼았다. 1906년에는 화재로 불탔던 중화전이 복구되었다.

석조전은 1900년에 착공하여 1909년에 완공되었다. 1907년 7월 20일에 일본침략자들의 강압에 의하여 고종이 순종에게 제위를 전위 하자 선제가 거처하는 궁이 되어 덕수궁이라 하였다. 

1.중화전(보물제819호)  규모:125평

연혁:1902년 광무(光武) 6년에 창건된 목조 건물로 화재로 손실되었다가 1906년 광무(光武) 10년에 중건됨. 고종황제께서 1897년 광무원년에 러시아공사관에서 덕수궁으로 이어하신 후부터 재위 기간동안 정전으로 사용. 본래는 증층건물이었으나 광무(光武)8년(1904년) 4월 14일 화재로 소실된 후 현재의 단층건물로 중건됨. 앞뜰에 조회, 기타의식이 있을 때 문무백관의 위치를 표시하는 품계석이 좌우에 있다. 정문으로 중화문이 있다 

2.중화문(보물제819호)  규모:25.3평

연혁:중화전의 정문으로 1902년 창건된 목조건물이며 (당초에는 앞에 흠명문과 동편에 선춘문이 있었다.)

3.함녕전(보물제820호)  규모:97평

연혁:1897년 (광무 1년) 창건된 목조건물. 1904년 광무(光武) 8년 화재로 불타버려 화재직후에 중건. 고종황제의 침전으로서 광무(光武) 8년(1904년) 4월 14일 화재로 소실된 것을 동년 12월에 복원 중건하였다. 1919년 1월 21일 고종황제가 이 침전에서 승하하셨다.

4.석조전(등록문화재 제80호)  규모:1,245.9평

연혁:조선시대 궁중건물 중에서는 최초로 유럽풍의 석조로 건립된 건물이며 영국인 기사 "하딩"의 건물설계와 영국인 "로벨"의 내부 장치로 영국인 "데빗손" 감독하에 1900년 광무(光武) 4년에 기공되어 1909년 융희(隆熙) 3년에 준공되었으며, 특별한 건물명칭은 없이 "석조전"으로만 전해 온다. 제26대 고종(高宗)은 이곳을 고관대신과 외국 사절들을 접견하는 곳으로 사용하였다.

1933년 미술품을 진열하기 위하여 건물 내부를 일부 수리하여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되기 이전까지 현대미술품을 진열하였으며 1946년~1948년까지 미·소 공동위원회가 사용했고 1948년~1950년 동란이 일어나기 전까지 유엔한국위원단이 이곳을 사무실로 사용하였다.

1950년 한국전쟁시 건물일부가 파괴되어 1955년 육군공병단에 의해 수리되었으며 그후부터 국립중앙박물관 궁중유물전시관으로 사용하기도하였다.

1954년 국립박물관으로 처음 사용

5.미술관(등록문화재 제81호)  규모:1,037평

연혁:1938년 3월 일인의 손에 의해 건축하여 이왕가 박물관 소장품을 진열하던 곳. 석조 건물로 1936년 8월 21일 기공하여 1938년 6월 5일 준공 됨, 현재는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덕수궁 미술관으로 사용중임

6.정관헌(등록문화재 제82호)  규모:77.7평

연혁:1900년 (광무 4년)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서양식 건물은 고종황제께서 다과회를 개최하고 음악을 감상하시던 곳이며 한때 이곳에 태조(太祖)의 어진(御眞)을 봉안하였다.

설계는 사바찐이 하였으며, 규모는 정면 7칸, 측면 5칸으로 내·외진으로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내진 공간 위에는 팔작지붕이 덮여있고 외진공간은 차양칸처럼 된 특이한 형태이다.

지붕에는 동판을이었으며, 외진에 두른 철제 난간에는 사슴, 소나무, 당초, 박쥐등 전통문양을 넣었다.

7.석어당  규모:46.3평

연혁:창건 연대는 확실치 않고 1904년 광무(光武) 8년 화재로 소실된 것을 동년에 중건하였음. 덕수궁의 유일한 목조중층 건물로 선조대왕(宣祖大王)께서 임진왜란 중 의주로 몽진하셨다가 환도한 후 이곳에서 거처하셨고 1608년 2월 선조가 승하한 곳으로 추정되기도한다. 인복 왕후가 광해군에 의해 유폐되었던 곳이기도하며, 인조반정이 성공한 뒤 광해군(光海君)을 석어당 뜰 아래 꿇어앉히고 인복왕후가 죄를 책한 곳 이기도하다. 단청을 하지 않은 "백골집"으로 아래층은 정면 8칸, 측면 4칸이며 상층은 정면 6칸, 측면 1칸으로 겹처마에 팔작지붕을 하고 있다.

8.덕홍전  규모:44평

연혁:함녕전을 침전으로 사용할때 일반 빈객들을 접견하기 위하여 1906년 건립한 후 1911년에 개조하였다.

용도는 주로 외국사신이나, 대신들을 만나던 접견실로 쓰였다.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4칸이며 겹처마 팔작지붕의 단층 건물이다. 측면에는 좌우 툇간이 있어서 전체의 평면은 정사각형에 가깝다. 이건물 주위에는 행각들이 있었으나 지금은 남행각만이 함녕전 남행각에 연접되어있다.

9.준명당  규모:83.9평(즉조당 포함)

연혁:이 건물은 창건년대는 미상이나 고종(高宗) 광무 원년(1897년)에 중건된 것으로 추측되는 목조건물로 즉조당과는 복도로 연결되어 있다. 고종황제께서 한때 이 집에서 거처하셨으나 귀빈엄씨가 돌아간 뒤에 고종은 함녕전으로 이어하였다. 정면 6칸, 측면 5칸의 겹처마 팔작지붕집이며 높은 기단위에 세워졌다. 좌우 툇간에 쪽마루를 두고있다. 1916년 4월에는 덕혜옹주 교육을 위해 이곳에 유치원을 개설하기도 하였다. 

10.즉조당  규모:83.9평(준명당 포함)

연혁:준명당(俊堂)과 복도로 연결되어 있는 이 건물도 15대 광해군(光海君)과 16대 인조대왕이 이곳에 즉위하였으며, 고종 광무 8년(1904년) 화재로 손실된 것을 그해에 다시 석어당, 함녕전과 같이 복원 중건한 것이다. 고종의 후비인 순헌귀비 엄씨께서 1907년부터 1911년 7월 승하할때 때까지 이곳에서 거처하셨다.

정면 7칸, 측면 3칸의 겹처마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다. 

11.귀빈실 연혁:함녕전의 행낭 

12.대한문  규모:29평

연혁:덕수궁(德壽宮)의 정문으로 1904년(광무 8년)에 소실되고 1906년 중건된 목조로 소실전에는 대안문(大安門)이던 것을 1906년 7월 15일 중건시 대한문이라 개칭하였다. 서울시 도시계획에 의한 제2차 도로확장 공사시 담장만을 궁내로 이전하여 도로상의 한복판에 분리 폐쇄되어 있다가 1970년 8월 21일 현 위치로 이설 공사를 착공하여 1971년 1월 2일 준공을 보았다.

2005년에 보수공사를 하였다. 

13.광명문  규모:10평

연혁:1897년(건양 3년)에 창건 1904년(光武 8년)에 소실되었다가 중건된 목조건물로 당초 함녕전의 정문이었으나 1938년 미술관 개관시 흥천사종과 보루각 자격루를 진열하기 위하여 현 위치로 이전한 것이다.

14.자격루(국보 제229호)

연혁:1536년 (중종 31)에 만들어진 물시계

물을 보내는 파수호(播水壺)가 3개, 물받이인 수수통(受水筒)이 2개 남아 있는데, 시계가 처음 만들어진 것은 1434년(세종 16) 장영실(蔣英實)에 의해서였다. 장영실의 물시계는 정해진 시각이 되면 격발장치를 건드려 쇠알이 굴러가서 여러 운동을 하게 만든것이다. 종·북·징이 울리고 인형이 나타나는 장치는 정교한 움직임을 보여주었다.

장영실에의해 처음 만들어진 물시계는 경복궁에 보관되었는데 남아 있지 않고 중종 때 이를 본떠서 다시 만든 것이 창경궁 보루각에 보관되었다가, 일부가 지금까지 전해 오는 것이다.

대파수호와 수수통은 청동으로 만들어져 있다. 수수통에는 하늘로 솟아오르는 용의 모양을 양각해 놓았는데 중종 때 이를 만든 우찬성 유부(柳溥), 공조참판 최세절(崔世節) 등 참여자 이름이 적혀 있다. 

15.흥천사종(보물 제1460호)  규모:높이:2.82 직경:1.70 두께:3

연혁:이 종은 1462년 7월 이태조(李太組)의 후비 신덕황후를 추모하기 위하여 만든 것이다. 이 종은 덕수궁(德壽宮) 근처에 유폐된 신덕황후의 왕실무덤 근처 흥천사에 있었으나 흥천사가 중종 5년(1510년)에 화재로 소실되어 영조 23년(1747년)에 경복궁(景福宮) 정문인 광화문으로 옮겼다. 한일합방 후 일인들이 이 종을 창경궁으로 옮겼다가 후에 덕수궁 현 위치에 다시 옮겼다.

16.중명전

중명전은 러시아의 건축가 사바찐(Seredin Sabatin)의 설계로 1897년부터 1901년에 걸쳐 황실도서관으로 건립된 지하1층, 지상2층의 벽돌조 건물로 처음에는 수옥헌(漱玉軒)이라 불렀다.

1904년 4월 14일 경운궁 대화재로 인해 고종황제의 편전이자 외국사절들의 알현실로 사용되었으며 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이 체결된 근대사의 중요한 유적이다.

또한 1907년 4월 20일 이곳에서 고종황제로부터 친서를 받은 이준은 이상설 · 이위종과 함께 만국평화회의가 열리는 네델란드 헤이그에서 을사늑약의 불법성을 알리고 대한제국의 주권회복을 호소하였으나 이것이 빌미가 되어 일제에 의해 고종황제는 강제 퇴위 당하였다.

건축학적으로는 우리나라 근대건축의 가장 초창기 풍모를 간직하고 있으며 1925년 3월 12일 일어난 화재로 외벽만 남기고 내부는 대부분 소실되어 원형을 잃었다.

해방이후 여러 차례 건물의 용도와 소유주가 변경되었으며 2006년 9월 20일 문화재청으로 소유권이 이전되었고, 2007년 2월 7일 사적 제124호인덕수궁에 포함되어 사적으로 추가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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