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723 가해 연중16주일
창세 28:10-19 / 로마 8:12-25 / 마태 13:24-30, 36-43
잠자는 동안
인간을 포함한 많은 생물은 무한히 활동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피로가 누적되면 주기적으로 뇌의 활동을 회복하기 위한 생리적인 의식상실 상태 즉 ‘수면’ 상태로 전환됩니다. 이런 이유로 잘 먹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잘 자는 것’입니다. 수면은 우리가 활동하고 건강을 유지하는데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며 인간은 대체로 인생의 약 3분의 1의 시간을 잠을 자는데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잔다고 해서 우리의 정신상태가 완전히 상실되는 것은 아닙니다. 의사들의 연구에 의하면, 뇌는 우리가 자는 중에도 활동합니다. 특별히 눈동자가 빠르게 움직이는 상태를 ‘REM(Rapid Eye Movement)수면’이라고 하는데, 이 단계에서 우리는 꿈을 많이 꿉니다. 그러나 현대의학은 우리가 왜 꿈을 꾸는지 그 원인에 대하여 여러 가지 가설로 설명하고 있긴 하지만 아직 정확히는 모릅니다.
꿈은 종교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꿈은 신과 소통하는 수단으로 도, 또한 신성한 계시를 전달하는 것으로 믿기도 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꿈은 인간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창으로 여겨졌고, 꿈을 통해 자신의 무의식적인 생각과 감정을 이해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종교에서 꿈을 해석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게 여깁니다. 꿈을 해석함으로써 자신의 내면을 더 잘 이해하고, 자신의 삶을 더 풍요롭게 만들 수 있습니다.
오늘 제1독서는 이것에 대한 전형적인 예라고 하겠습니다. 오늘 독서 앞부분을 보면, 동생 야곱은 형 에사오가 받을 축복을 대신 받는 바람에 형에게 노여움을 사 피신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피곤하고 지쳐서 돌을 베개 삼고 잠이 들었습니다. 그는 꿈에 땅에서 하늘까지 닿는 층계가 있고 그 층계를 하느님의 천사들이 오르락 내리락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때 야훼 하느님께서 나타나시어 그가 누운 땅과 그의 후손을 축복해 주셨습니다. 그는 잠에서 깨어나 “야훼께서 여기 계셨는데 내가 모르고 있었구나 …… 여기가 바로 하느님의 집이요, 하늘 문이로구나(창세 28:16-17)”라고 외치고, 그곳에 제단을 쌓고 하느님의 집이란 뜻을 지닌 ‘베델’이라고 하였습니다. 야곱의 이러한 체험은 앞서 제가 언급한 꿈을 통하여 신과 소통하고 신성한 계시를 전달받은 전형적인 사례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이러한 축복의 확언을 받기 전, 야곱의 내면은 어떠했을까요? 오늘 독서 앞부분에서 야곱은 형 에사오와 갈등관계였습니다. 우선, 그는 동생이라서 장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가문의 정통성을 계승할 수 있는 권리가 없었습니다. 설령, 그가 형의 배고픔을 이용해서 장자권을 넘겨받았지만 자유분방한 형 에사오의 성격 상, 그것은 언제든지 휴지조각이 될 수 있는 약속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 리브가의 도움으로 형 흉내를 내어 늙고 눈 먼 아버지 이사악을 속여서 축복을 받긴 했지만, 이를 뒤늦게 안 형의 분노로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결과적으로 집을 떠나 멀리 도망치는 신세가 된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는 자신의 앞날에 대한 불확실함과 막막함으로 심한 불안감에 휩싸였던 것입니다. 그런 그에게 하느님은 꿈을 통해 그와 함께 해 주실 뿐만 아니라 땅과 후손을 축복해 주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참으로 극적인 인생의 반전이 일어납니다. 그는 이러한 하느님의 약속을 믿고서 희망과 용기를 갖고 인생의 난관을 헤쳐 나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제1독서 야곱의 잠이 우리에게 긍정적 의미를 주는데 반해서,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잠은 우리에게 부정적인 상징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복음을 보면 주인이 밭에 밀씨를 뿌렸는데, 그 밭을 관리하는 사람들이 잠든 사이에 사탄이 몰래 와서 가라지씨를 뿌리고 갔습니다. 시간이 흘러 밀 이삭이 팼을 때 가라지도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관리인들은 도대체 이게 무슨 영문인지 몰라 어리둥절해 합니다. 그리고 급한 마음에 가라지를 뽑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가라지와 밀의 뿌리가 서로 얽혀 있기 때문에 자칫 밀도 손상당할 것을 염려한 주인은 추수 때까지 놔두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추수한 후에 분리해서 가라지를 태울 거라고 하십니다.
이 비유에서 잠은 부정적인 의미를 띠고 있습니다. 사실, 가라지의 비유는 마태오 교회 공동체가 겪고 있는 당혹스러운 현상이 반영된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교회 공동체 안에 거짓제자들이 들어와 교회 공동체를 오염시키고 있는 것에 대하여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성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잠들었다’라는 의미는 참 제자들이 자신들의 본분을 충실히 수행하지 못했다는 의미입니다. 그런 맥락에서 옛 교부(敎父)들은 악마가 자는 사람들 가운데 가라지를 뿌리므로 주님을 충실하게 기다리는 이는 불신앙의 잠을 쫓아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이와 같이 가라지가 이미 밀밭에 뿌려서 함께 자란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아마도 마태오 교회는 이에 대하여 강경하거나 온건한 두 노선이 공존했던 것 같습니다. 강경한 신자들은 오늘 복음에 등장한 관리인들처럼 “저희가 가서 그것을 뽑아 버릴까요?(마태 13:28)”라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온건한 노선을 택한 것 같습니다. 그들은 세상 끝날(마태 13:39, 40)”이라는 주님의 말씀을 상기했던 것입니다. 그것은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태우는 것은 종말에 이루어질 일이므로 그동안 지켜보면서 인내할 필요가 있다고 봤습니다. 이런 태도를 지닌 또 다른 이유는 성 어거스틴(St. Augustine)의 말씀처럼 교회에서는 밀이 가라지가 되고 가라지가 밀이 되기도 하므로, 밀인 사람은 수확 때까지 견뎌내고 가라지인 자들은 밀이 되도록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는 늘 회개의 가능성을 열어 놓아야 하며, 밀과 가라지가 서로 바뀔 수 없다고 단정하기 보다는 언제든 처지가 바뀔 수 있음을 의식하면서 끝까지 성실해야 할 것입니다.
친애하는 교우 여러분!
주님은 우리가 야곱처럼 인생의 막다른 상황 속에 몰려 고단함에 지쳐 잠들 때, 위로와 방향을 주시면서 우리에게 다시 삶을 개척할 용기를 주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의 제자라는 본분을 망각하고 잠에 빠져서 아무런 것도 하지 않는다면, 가라지와 같은 갖가지 유혹과 기만이 우리의 눈과 귀를 어지럽혀 내 자신은 물론이거니와 우리가정, 우리교회, 나아가 우리사회를 혼탁하게 만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잠을 잘 때, 주님과의 진정한 소통을 위하여 주님께 의탁하는 쉼인지, 아니면 영적 게으름인지 잘 분별하는 능력을 길러야 할 것입니다. 또한 가정과 교회 공동체에서 내 형제자매들의 가라지를 볼 때, 판단과 단죄에 앞서서 주님의 은총으로 밀로 변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면서 인내롭게 기다려주는 관대함을 갖도록 노력합시다. 그럴 때 마태오 교회 공동체가 그랬던 것처럼 교회는 더욱 주님의 몸된 모습으로 되어 갈 것이고, 우리 가정도 주님의 작은 교회로 변해갈 것입니다.
밀과 가라지를 잘 식별할 수 있는 능력의 원천인신 주님의 이름으로 말씀드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