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진 교수의 전쟁과 미술]
자크 다비드의 ‘사비니 여인들의 개입’
화해와 평화 위해 전장에 뛰어든 사비니 여인들
그리스 조각 같은 인물상 신고전주의적 명료함·견고함 돋보여
ROMA의 다른 이름 AMOR대제국 건설의 정신적 토대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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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말연시’란 말은 뫼비우스의 띠를 연상시킨다. 한 해의 끝은 또 다른 시작으로 이어진다. 끝과 처음이 맞닿아 있는 역설적 상황. 전쟁 역시 마찬가지다. 모든 전쟁은 전쟁의 종식, 평화를 추구한다. 전쟁과 평화는 정반대의 말이지만 서로 맞닿아 있다. ‘평화를 원한다면 전쟁을 준비’해야 하듯 전쟁 역시 평화를 가져오기 위한 것이다.
이러한 이념을 가장 극적으로 표현한 작품이 자크-루이 다비드(Jacque-Louis David, 1748~1825)의 ‘사비니 여인들의 개입’이다.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전쟁 시기를 대표하는 화가 다비드가 소재로 삼은 것은 고대 로마인 이야기다. 로마 전설에 의하면 젊은 사나이들로 건국한 로마에는 여자가 절대 부족했다. 건국자 로물루스(Romulus) 왕은 이웃 부족 사비니인들에게 간청했지만 거절당하자 여자들을 납치할 계획을 세우게 된다. 그들은 축제를 열어 사비니인들이 놀러오게 한 후, 강제로 여자들을 빼앗았다. 여기에는 사비니 왕의 딸 헤르실리아(Hersilia)도 포함돼 있었다. 분개한 사비니인들이 로마를 공격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 싸움의 중단을 호소하는 헤르실리아
그림에는 흰 가운의 헤르실리아를 가운데 두고 나체의 두 전사가 서로를 노려보고 있다. 왼편에 방어적 자세로 주춤하고 있는 이가 사비니 왕인 타티우스(Tatius)다. 갑작스레 뛰어든 딸의 저지에 움찔하는 모습이다. 또 다른 여인이 그의 왼발을 붙잡고 싸우지 말 것을 간청하고 있다. 그 맞은편에서 창을 겨누고 있는 이가 로마의 로물루스다. 그가 움켜쥔 황금빛 방패에는 로마를 상징하는 늑대 그림과 ‘ROMA’란 글씨가 새겨져 있다. 다소 혼란스러운 상황에서도 로물루스의 자세는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견고하다. 적을 향해 금방이라도 창을 던질 기세이지만 헤르실리아의 출현으로 멈칫한 상황이다. 그림 전면의 인물들은 마치 그리스 신전의 프리즈 조각처럼 옅게 돋을새김 된 듯이 명료하다. 다비드는 전사들의 알몸을 그대로 드러냄으로써 ‘조각 같은’ 몸매를 사랑했던 그리스의 예술정신을 보여준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두 전사의 싸움을 말리고 있는 헤르실리아다. 사비니 왕의 딸인 그녀는 로물루스의 아내로서 벌써 아이들의 엄마가 돼있었다. 그녀의 흰색 가운은 여성의 순결을 상징함과 동시에 ‘싸움의 중단’을 의미한다. 그녀는 자신의 아버지와 남편 사이에서 싸움의 중단을 온몸으로 호소하고 있다. 그녀가 내뻗은 두 팔은 싸움을 막아내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담고 있다. 남편 로물루스에게 ‘이제 그만 창을 내려 놓으라’는 듯 애절한 눈빛으로 간청하고 있는 것이다.
이 전쟁이 더욱 참혹한 것은 가족 간의 전쟁, 즉 ‘내전’이기 때문이다. 폭력적인 방법으로 이뤄진 결혼이지만 이미 가족을 이루고 아이까지 둔 상황에서 이들 간의 전쟁은 친족살육의 비극에서 벗어날 수 없다. 전쟁의 고통은 여인들과 아이들이 감당해야 한다. 푸른 옷의 나이든 여인은 자기부터 죽이라는 듯이 가슴을 내밀고 있고, 다른 여인은 풀어헤쳐진 옷을 추스르지도 못한 채 아이들을 보호하려 팔을 내밀고 있다. 놀람과 두려움으로 가득 찬 아이들의 눈빛에서 전쟁의 참혹함을 발견할 수 있다.
● 프랑스 혁명이 가져온 살육과 보복
다비드가 이 그림을 착상한 시기는 프랑스가 혁명(1789)의 여파로 정파 간의 살육과 보복에 시달리고 있을 때였다. 혁명 초기 공포정치를 자행했던 급진세력이 몰락하고 새 정권이 들어서자 이전 세력을 제거하는 반동정치가 펼쳐졌다. 급진파와 가까웠던 다비드 역시 구금됐다. 밖으로는 오스트리아 등 반혁명 세력이 프랑스를 위협하고 있었다. 대립과 갈등을 넘어 화해와 공존이 절실히 필요한 상황이었다.
그림에서 알 수 있듯이 여인들의 출현으로 전투는 순간 중단됐다. 여전히 무기를 잡고 있지만 로물루스와 타티우스 모두 멈칫하고 있다. 그림 오른편의 말을 탄 군인은 이미 칼을 거두고 있고 다른 한 명을 말을 돌려 전장을 떠나려고 한다. 로물루스 뒤로 군인들이 투구를 벗어든것도 이제 전쟁이 끝났음을 의미한다. 여인들의 절규가 먹혀든 것이다. 전설에서는 여인들의 개입으로 평화를 이뤘을 뿐 아니라 하나의 국가로 통합하게 됐다고 한다. 이후 사비니인들은 어떤 차별도 없이 로마 시민으로서 동등한 권리와 지위를 보장받았으며 위대한 로마 건설의 주역으로 활동하게 된다. 화해는 평화만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국가 발전의 원동력이 됨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다.
화해의 주인공은 헤르실리아를 비롯한 여성들이다. 남성의 강고한 결의를 강조했던 이전 작품인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1784)와는 판이하게 다른 설정이다. 그 그림에서 여성들은 감정적이고 개인주의적인 존재로 묘사됐다. 하지만 이 그림에서 여성은 복수심에 불타는 맹목적인 남성보다 더욱 이성적이고 미래지향적인 존재로 등장한다. 개인의 감정보다 가족을, 정파적 이해보다 국가의 미래를 위해 이제 칼을 내려놓으라고 명령하고 있는 것이다.
● 평화와 화해의 여성상 구현
여성성과 남성성이 이처럼 극적으로 대비된 작품도 찾아보기 어렵다. 두 전사의 눈길은 오직 서로를 향하고 있지만 여인들의 손길은 남편과 아버지, 그리고 아이들까지 두루 닿아 있다. 헤르실리아의 흰색 슈미즈가 순결과 평화를 눈부시게 상징하고 있다면 갈색 빛깔의 전사들은 강인해 보이지만 생기가 없다. 두 발을 내딛고 굳게 서있는 로물루스의 견고함이 여인들의 생동적인 움직임에 대비되면서 오히려 경직돼 보인다. 그림은 큰 브이(V) 자 구도를 그리며 백옥 같은 헤르실리아를 중심으로 집중되고 있다. 그리 크지 않은 그녀가 그토록 또렷이 각인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신고전주의 화풍을 주도했던 다비드답게 균형 잡힌 구도와 명료한 윤곽선, 그리고 절제된 색채로 신고전주의의 특징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작품이다. 전장의 혼란스러움에도 두 전사의 자세와 표정은 견고하고 절제돼 있다. 주변 여인들을 지배하고 있는 고통과 절망에 찬 표정에도 불구하고 헤르실리아의 몸짓은 그리스 조각을 가져다 놓은 것처럼 고전적이다. 당시 프랑스는 그리스풍의 슈미즈 차림이 유행했다. 부드럽게 흘러내리는 옷매무시와 가슴까지 올려 맨 허리띠는 여성의 육체를 자연스럽게 드러낼 수 있었다. 일체의 장식을 배격하고 짧게 땋아 올린 머리는 프랑스 혁명기 여성들의 정신세계를 보여준다.
이 그림은 역사상 처음으로 유료로 전시된 작품이다. 가로 3.85m 세로 5.22m의 장대한 작품을 전시할 당시 개인화랑에서는 이 그림 맞은편 벽에 큰 거울을 가져다 두었다고 한다. 방패에 쓰인 글씨(ROMA)가 유리에 비치면서 ‘AMOR’(사랑)로 읽힌다. 끊임없는 전쟁으로 대제국을 건설했던 로마의 바탕에는 가족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 깔려 있었던 것이다. 진정한 전사는 전쟁을 끝내고 평화를 가져오는 자들이다. 2015년 새해에는 사랑과 평화가 가득하길 기원한다.
중앙대 정치국제학과 교수
다비드의 서명
타티우스의 발 뒤쪽 제단 모서리에 다비드의 서명과 함께 제작연도가 쓰여 있다. 다비드가 구금돼 있는 동안 정치적 이유로 결별한 부인의 도움을 받았는데 이 작품을 통해 전처와의 화해를 모색했다는 주장도 있다. 싸움의 중단을 호소하는 헤르실리아
두 팔을 벌려 싸움을 막고 서있는 헤르실리아는 몸짓과 표정, 선명한 흰색 가운으로 보는 이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여인의 육감적 몸매가 선명히 드러나지만 그녀의 몸짓에서는 평화를 위한 경건함을 느낄 수 있다. 그녀의 얼굴이 새겨진 우표가 발매되기도 했다. 방패에 새겨진 ‘ROMA’ 글씨
로물루스가 들고 있는 둥근 방패 한가운데는 어린아이에게 젖을 먹이는 늑대 그림과 함께 ROMA란 글씨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거울에 비추면 AMOR(사랑)로 읽힌다. 로마가 이웃 간의 사랑에서 발전했음을 암시한다. 타르페이아 바위
사비니인의 금팔찌에 매료된 타르페이아(Tarpeia)가 성문을 열어줌으로써 사비니인들이 성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그녀는 이 바위 절벽에서 떨어져 죽었는데, 이후 로마의 반역자를 여기서 떨어뜨려 죽이는 전통이 생겼다. 창에 달린 늑대와 볏짚단
로마 건국자 로물루스가 볏짚단 위에서 늑대 젖을 먹고 자랐다는 전설을 알려주듯이 로마인의 창에 늑대상과 볏짚단을 달아 두었다.
중앙대 정치국제학과 교수
즐겁고 행복한 나날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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