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쪽 땅 끝 마을 하면 으레 해남을 떠올리기
십상이다. 하지만 척박한 땅 쪽빛 남쪽마을 사람들은
여자만의 자궁을 품은 벌교를 그리 그렇게
칭하였다.
그렇게 생각하는 된 것은 딱히 내세우고 자랑할만한 것이 없었기에 그 동네 사람들에겐 웬지 마지막 남은 유일한 자존심같은 것이었는 지
모를 일이었다.
"벌교!"
대동여지도를 볼라치면 그 지명은 돋보기로
보아도 겨우 포도시 찾아 볼 수 있는 아주 쬐끄만
지명이었다.
임금님의 수랏상에 올라 갈만한 진상품이
있는 것도 아니고 풍광 또한 수려한 곳이 아니라서 낙안 읍성마을 변방에 지나지 않았던
곳이라는 건 삼척동자도 다 아는 주지의 사실이었다.
선수 뚝방에서 철다리를 바라보면
어촌같기도 하고 들몰평야에서 낙성을 바라보면 농촌같기도 해서 발전을 할래야 할 수 없는
가난한 남도 땅이었다.
역사는 반전이 있기에 역사라고 하였던가.
강점기와 해방공간을 통해 그 땅 벌교는 사통팔달 교통요지가 되었고 사람들이 점점 모여들기
시작하자 제법 이름이 한양도성까지 알려지기
시작했다.
인간지사조차도 새옹지마라고 하지 않았던가.
벌교지사 아니지 벌교지서(경찰서)도
발전하는 그 마을의 상징성을 띄는 건물이었다.
소화다리 또한 일제강점기의 치욕스런 아픔을 지닌 이름인데도 어른들이 그냥 그렇게 불렀기에
어린 우리들조차 쉽게 그리 불렀었다.
성균관의 고국훈장님이 들었으면
큰일 날이었지만 그래도 우린 천황의 상징을 지닌 다리 이름을 "소화"라고 불러야만 했다.
그렇지만,
벌교 오일장은 그런 세속적인 시류완 상관없이 우전으로 발디딜 틈 없이 문전성시를 이루었고
우전옆의 무슨 무슨 "옥"이란 이름의 색시집 또한 소 판 누런 돈냄새를 기막히게 간파해서, 호기 있고 객기 어린 그라고 뭐시다냐
조강지처에게서는 결코 맡을 수 없었던
젊은 분내음이 그리운 남정네들에게는 우골탑같은 그 돈을 아주 찔끔 골마리에서 꺼내 주었던 상부상조하고 다다익선 해야만 했던 사실은 , 함께 동고동락했던 착하고 눈 큰 영물인 소를 떠나 보내는 슬픈 이별잔치였는 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래도,
아주 어린 우리들에게는 세계7대 불가사의 같은 아주 요상시런 느낌으로 다가 온 것 또한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 날만은 부락민들에겐 하릴없이 장날에 갈만큼
명절 못지 않은 큰 날같은 대목날이었다.
장터는 동동구르므 약장수와 원숭이 우뭇가사리 새알 팥죽 그리고 또 뭐시다냐 어쩌면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모든 세상사의 희노애락을 다 품고 있어서 5일장을 기다리는 데는 아무런 아낌이 없었다.
그런데,
그런 거 보다도 벌교땅이 유명해진 진짜 이유는
거기가서 주먹자랑 하지 말라는 소문이 파다해 팔도 어느 곳에서 다 알 정도로 모르는 이가 없었다.
외지에 나갔을 때 " 나 벌교여!" 딱 그정도만 이야기 해도 타향살이 하는 데 큰 보탬이 될 정도로 일단은 주먹이 우는 사람으로 치장되고 있었다.
심지어 대종교 나철 못지 않게 유명한 벌교사람
한창기라는 사람이 만들었다는
"뿌리깊은 나무"라는 서책에까지 그 내용이 들어 있었으니 ...
굳이 일러 무삼하는 것조차 부족했다.
소문이라는 게 한번 나면
거의 정설로 굳어 지는 게
세상 인심이자 세태였다.
먼 훗날 꼬막으로 다시 유명세를 탔지만
그 시절엔 " 꼬막이 뭐시다냐?" 할 정도로
별 볼일 없는 조개류에 불과 했다.
지금이야 벌교의 먹거리를 만들어 준
일등공신이 된 소백산맥의 작가도
소설 내용중에 왈패가 등장한다.
소설이야 "소설 쓰네" 라고 치부해버리면
그만이지만 사실을 어느정도 근거로 한 역사소설은 조금은 다르다.
여기서 조작가는 벌교를 다 아는 것처럼 보여도
벌교를 자세히 모르는 듯 하였다.
그 굴곡진 과거사를 다시 재조명 해본들
무슨 소용이 있겠냐마는 우리들만이라도 제대로
알아야 " 벌교가 애시당초 그런 데가 아니었구마 잉!" 하고 후손들에게 알려줄 게 아닌가.
사실 잘 알려지지 않았어도
아주 그 옛날부터 벌교마을은 절세 미인들의
고장이었다.
꼭꼭 그 사실을 감춘 진짜 이유는 타지로 시집가는 것을 한사코 말려야 한다는 벌교사람만의 암묵적인 명분의 이유가 분명히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머리 좋고 셈이 능한데다( 우리 어릴 적 방만석의 이름은 이미 전설이 되어 있었다. 다음엔 우리와 같은 학동 선채 형인 김동현) 억척스럽고 뻘배를 쉬지않고 십리를 간다는 생활력이 아주 강한 벌교 사람들은
벌교가 아닌 순천가서 인물 자랑하지 말라고
소문을 퍼뜨렸단다.
대단한 안목과 선견지명이 아닐 수 없다.
외지인들은 벌교주먹 소문에 지레 겁을 먹고
벌교 미인들을 언감생심 쳐다보는 일 조차 ,
차라리 연목구어보다도 더 어려운 일임을
처절하게 각골난망 해야 했다는 사실은
두 말하면 어림 반푼없는 소리였다.
소문이 소문을 낳은 괴소문이 사실처럼 둔갑한 것은
시쳇말로 굳이 싸우지 않고도 아리따운 미녀들을 보호하고 방어하는 데 있어서만큼은 손자병법의 계략이 무색할 정도의 촌철살인 같은 병법중에 병법임이 자명해 졌다 .
삼십육계 중 소문줄행랑이었던 셈이었다.
만약 왈패의 고장이 정설이라면 유명한 깡패의 이름이 사람의 입에서 구전되어야 할텐 데
전설만 전해져 올 뿐 증거는 없다.
사실이 아니라는 거다.
미인들의 고장인 벌교에 관한 증거는
역사의 고전에서도 수 없이 많이 인용되었다.
벌교 제각 현부자집 봉놋방에서 발견된
벌교 미인도와 수많은 미인열전을 보면 더욱 더 확실해진다.
그래서 역사적 사실이라는 게 분명해진다.
이해관계가 있는 분들에게는 넓은 혜량으로
삼가 이해를 구하는 바이다.
그리고 이름이 거명되지 않은 처자들에게도
역불러 그리 한것이 아니니 엄니같은 마음으로
이해해 주시길 삼가 부탁드ㅡ린다.
시망골에 사는 약간의 덧니가 있어 무화과처럼 예쁨을 감추고 사는데다 선한일도 자랑하지 않고 뒤로 숨기는 예지적인 윤씨 낭자.
횡교 윗마을 키가 훤칠하며 해바라기같은 예쁜 김씨 낭자.
선근교 인근 한의원 따님인 서씨 낭자는 좋은 인성과 재색을 겸비한 처자였던지라 마음으로만 짝사랑했던 인근 총각 박봉석이란 자가
이 여인을 끝내 차지하지 못해 분을 삭히지 못하고 소리소문없이
새벽녁 길을 떠나 그 이후에 아무도 그의 관한 소식을 듣지 못한것도 안타까운 일이였으나,
예나 작금이나 뭇사내의 능력은 동서고금을 무론하고 뭐니뭐니 해도
상평통보가 으뜸중에 으뜸이었다
미인의 마음을 차지하기에는 오직 마음 하나만을 가지고는,
혼신의 힘을 다해
열번 찍어도 넘어가지 않는 나무가 있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게 한 아주 슬픈 사건이었다.
봉림가는 길에 똑똑하고 이쁘기 그지없는 예진아씨보다도 침술이 뛰어난 그러나 서당에는 잘 오지 않는 박씨처자.
그 옆 부락에 사는 그림과 어머니에 대한 사모곡을 구구절절 남긴 그 문장은 당대뿐 아니라 후대에서도 널리 읽혀졌고
그리고 수예까지 능할 뿐 아니라
수줍음이 많아 나팔꽃같은 이씨 낭자.
장도 섬마을에도 이쁜 처자가 있었는 데
바로 동백꽃처럼
어려움과 고난을 쉬이 헤쳐나간 강씨 낭자.
옳고 그름을 분명히 해서 더 예쁘다고 소문난 경국지색의 칠동 박씨 낭자.
신사임당 보다 문학의 조예가 하늘의 이치가 닿을만큼 뛰어났다고 소문난 치자꽃같은
정씨 처자.
늘그막에 미모하나로 팔자를 고쳤다고 소문난
박꽃같은 한씨 낭자는 매사에 활달하고 적극적이어서 뭇 사내들의 애간장을 태웠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복분자가 유명한 곳에 일찍 시집가서
" 그 새댁이 벌교처자여서 이쁘구마" 라는 소리를 입이 닳도록 들었던 굳이 이름을 말하지 않아도 되는
금강초롱꽃같은 처자.
새침하지만 기품의 너비가 십리밖에서도 환하게 표시가 날 정도로 군계일학이었으며, 학문과 서예의 깊이가 있다고 소문난 회정에 사는 달맞이 꽃같은 청초하기 이를데 없는 백씨 낭자.
맏며느리감으로 손도 크고 마음도 온유하다고 소문난 장좌리 서당 출신인
민들레 꽃같은 김씨처자에 대한 소문은 동부육군은 물론 도성 인근 복사꽃 마을(소사 ㅡ 부천) 그리고 삼라만상 온 땅에까지 널리 널리 두루 두루 퍼져 있었다.
아 그라고 신여성처럼 쨘하고 나타난 물망초같은 구 낭자.
일일히 열거하는 게 차라리 부족하다.
지면관계상...
그런데,
달이 차면 기울고
비가 계속 오면 해마져 식는다 하지 않았던가.
그 미인의 고향이 점점 시들어 간다는
소문이 나 마을 인심이 흉융해졌다.
제석 마을에서 운영하는 제석주막에
미인들이 없어 인근 동네사람들이 찾지 않는다는 거다. 헐!
" 그럴리가" 했어도 아니 땐 굴뚝에 연기나지
않는것처럼 화룡점정같은 결정적 사실이었다.
정기 뜬 제석을 이어 받은 우리들이 잘해야
전통에 빛나는 후배미인들이 청출어람이 되고
후생가외의 모습들을 보여줘야 되는 게 아니던가.
인근 삼광서당에서 운영하는 삼광주막이
찾는 이 없어 황성옛터처럼 폐점했다는 안타까운 소식을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될 듯 싶다.
그리하여,
다행스럽게 천재일우처럼 제석서당에는
절세가인 뿐 아니라
성균관출신의 머슴지기도 있고 ,
활달하기가 두번째라면 서운할
배꽃마을로 이사간 무던하기 그지없는 처자도
있으니 ,다시 한번 심기일전하고 고진감래 하다 보면
" 초심을 잊지 말자"라는 초지일관의 서당훈칙처럼 모든 문동(경상도 버젼 문뎅이)들이 돌아와 무슨 무슨
꽃반하며 반배정을 받았던
그 때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는 생각을 갖는 것도 결코 무리는 아니겠지..
기왕지사 말 나온김에,
십시일반 힘과 뜻을 모아 권토중래하여,
제석서당이 운영하는 제석주막에서 질펀한
마당놀이로 한판 신명나게 놀아 보면
어떨런지요 .
"아따 겁나게 조아불제 옴매..!"
"얼쑤~~~^^^ ! 조~오~ 타!"
그리고 나서 벌교 오일장에 모여
목소리가 쉬도록 허벌나게
외쳐 보자.
"제석서당만세!"
" 제석주막만세!"
더 크게
" 제석서당 만세!"
첫댓글 친구야 넌 어떻게 이런걸 다 기억하고 생각하고 그런다냐.
제석주막,제석서당, 진짜 있는거냐??
항상 건강하고 행복하시게나!
아침 일찍 일어나 댓글을 올렸네.
몸은 원상으로 점진적 돌아 오는 겨.
글을 마무리 하는 무렵 한국시간으로
새벽 4시에(여기 시간 정오12시)
네사람이 내 글을 방문 하였는 바..
그 이른 시간에 무얼 하였기에..
아리송해도 ...
이유를 알 수 없지만 참 바삐 사는
우리네
중생들이여..
수고혀..
사실 미국 시간으로 어젯 밤9시 30분 쯤
어둠만이 내려 앉은 제석서당의 구월하고도
첫째 날이 아련해서 두시간 시간을 허비하고
난 뒤에야 글을 마무리 할 수 있었다.
근데 세시 삼십분에 일어나니 밖에 나가
뜀박질 하기에는 너무 이른 시간이라 잠깐 눈을 붙이고 일어난다는 게 아뿔사 일곱시 가까히
되고 말았다.
허둥되면 불상사라고 그리 내 자신에게
이야기 했건만 기왕 늦은 김에 카페에 들러 네번째 댓글이 " 잔다"이여서 삭제를 누르고 나니
본문까지 바람과 함께처럼 날아 가는 게 아닌가. 상습범이란 누명을 쓰기 싫어 흘러간 물레방아 물을 돌리려 하니 힘들긴 하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단은 뛰고 집으로 온 뒤 조반을 대하고 난 다음 글을 쓰는 게 아니라 어제의 생각을 조립하려 하니 두배나 힘이 들었지만 마음의 부담은
훨씬 줄어 들었다.
비슷하지만 결국은 다른 글이 되고 말았으니
그 누구를 탓하리까.
이 장문의 적폐를 스스로 결자해지 하는 수 밖에..
이 사연을 알아쓴 즉
그냥 외면하지 마시고 적선하는 셈치고
글 동냥을 해주신다면 가문의 영광으로
족함을 알고 고마움으로 간직하겠습니다.
부디.
이제는 조금씩 좋아지고 있는 느낌이다.
오늘도 병원 다녀왔는데 열심히 재활치료 잘하면 된다고 한다.
항상 건강의 대명사처럼..
완전한 쾌유를 빈다.
보통 4시에서 5시 사이에 눈이 자동으로 떠진다오, 그래야 또 하루가 시작 되는구나 하고 내몸이 기지개 를 편다나 어쩐다나 그렇다.^^
왜 나이들면 다들 어릴 적
늦잠 자는 버릇이
사라지지..
조금 있으면 일어나지 않고
영원히 푹 잠을 자기 때문일까
나는 그 전엔 카페에
올라온 새 글이 있으면
싫든 좋든 꼬박꼬박
댓글을 달아 주었다.
그게 예의범절 인 줄 알았다.
눈팅하는 사람이야
기대를 하지 않지만
글을 올리는 사람은
조금은 다를 거라는
편견을 아직은 갖고 있다.
나의 편견이
이제서야 잘못된다는 걸
폐부 깊숙히 깨닫게 된다.
다시 중언부언할라치면
그 상호교환이란
상식이 저만치 가는 게 아닌가.
나도 점점 그러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눈치 파악하는 데
이제서야 비로서 알았다.
글로서 대하는
친구의 만남이다.
카페안에서는..
유행가 가사처럼
너는 상행선
나는 하행선.
우리의 전통인
품앗이가 점점 사라지는
것처럼..
이젠 나도 굳이 해야만 한다는
그 느낌이 숙제로 다가 오지 않는다
자기 글 마치고 훌훌 미련없이 떠난다해도..
하긴 머슴마저
자취인종멸이니
그 누구를 탓하랴.
이마저도 안하면
황성옛터의 봄바람이 분들
그 무슨 소용이 있으랴.
누구나 글을 쓰고 올리게 되면 되도록이면 많은 사람들이 읽고, 답글을 달아주고, 소통을 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그러나 서운할 때가 더 많지요. 그저 글이란 것이 자신의 마음을 표현한다는 그걸로 만족하고 기다리면 그걸로 되는 것 아닐까싶네. 하나를 줬으니 꼭 하나를 받아야한다는 생각까지 버리는 것이 그나마 서운함을 덜 느끼지않을까? 그리고 뭔가를 표현하고 보인다는게 주저되고 망설여진다는 것이 솔직한 내 마음.
운영자가 그럴진 데..
하물며..
재밌는 글이네 ...
원고료는 없지만
그래도 종종 올려라 .
눈팅만 해줘도 고마운 거라고
생각해주문 안되끄나 ?
ㅎㅎㅎ
주막 찾는 사람들이
갱년긴가 보다
( 나만 그렇게 느끼는지도 모르지만 )
그래 남태 말처럼 카페에 들어와 주는것도, 눈팅만 해주는 친구도 너무 반갑고 고맙네.세상사 모든 일이 어거지로 되는게 아니더라고.
ㅎ~
신태백산맥을 읽은것 같구나.
웅호의 글은 예나 지금이나 맛깔 하나는 여전하구나~^^
옛같음 바쁜생활에 긴 문장을 다 읽을 새가 없어 중간에 넘어가곤 했으나...
3월부터 가끔 올라온 웅호가 직접 쓴 소식이
요즘도 계속되고 있었구나.
나도 2013년부터 종수가 만들어준 "세상구경 자연구경"란을 보든 말든 꾸준히 올리고는 있지만...
아뭏튼 나이 만큼 늘어지지 말고~
제석마을, 제석서당이
옛처럼 다시 풍성 해 지면 좋겠단다.
"제석마을 만세~~"
정작가의 말을 빌어 ㅡ이이제이 하고픈 마음은
티끌 만큼 없으니ㅡ 글을 올리는 처지의 동병상련의 뜻을 공유하고자 함니다.
나는 그 정도의 필력은 아니기에 그 말을 공감하기에는 아주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정작가는 글을 쓸 때보다 글 뒤에 이어지는
칭구들의 댓글 하나에 일희일비가 되어진다고
개인적인 소회를 밝힌적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은 그리하기 쉽지 않지만 제가
그녀를 높이 평가하는 이유는 일인칭 싯점을
훨씬 뛰어넘는 자신의 아픈 이야기를 당당하게
들어낸다는 것이외다.
거기에 환호하고 그녀의 감칠맛 나는 필력에
우린 아연실색하리만큼 호응을 했다.
그 호응이 세월따라 더디어 갈 때
그녀의 필력도 무디어 가는 것을 장삼이사의
필부인 저도 느끼기에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녀가 잠시 몇달동안 카페자리를 비운사이에도 나는 댓글을 끊임없이 달아 주었다
그녀가 등장하면 머스메들조차도 조심스레
댓글을 달곤 하였으니.
너도 댓글 안달면 절필할겨 그 애교어린 무뚝뚝한 협박에 못이기는 척 하지만 사실 적극적인
댓글을 달고픈 욕망이 생긴다
현실에 많이 기죽긴 하였지만 그 언젠가는
그녀의 글에 풍선 터질것 같은 댓글이
대추나무 사랑걸렸네 처럼 소박한 꿈을
꾸는 건 비단
나만의 느낌이 아니리라고 감히 장담할 수
있습니다.
각기 한사람이 한세상을 갖고 있으니
서로 다른 의견들이 dispute(큰 논쟁)에 이르지 아니하고
Argue( 작은 논쟁같은 의견교환)로 끝난다면 그것 또한 뜻밖의
소중한 일임을 알게 됩니다.( 마땅한 단어를
찾기 어려워 ㅡ 토론문화에서)
스텝이 아닌 사람은 댓글을 생각하지 않고,
부부싸움같은 내면의 글과
일상의 해프닝을 마음껏 쓰고 ,
독려하는 사람은 실무자의 몫이긴 해도,
그것 또한 전체멤버들의 몫임니다.
잘쓰는 글보다, 한글을 처음 배운 할머니들이
한 자 한 자 정성들여 침을 묻혀 옮기는 글이
찐한 여운을 주는 울림이 있습니다.
그래도,
나는 카페지기와 운영자가 있어
이만큼 왔다는것에 무한감사를 드림니다.
조금만 더 했으면 하는 바램은, 벌써 운명처럼
꺽인 걸 알기에 그 소박한 욕심은 이젠,
버리려 함니다.
욕심이 잉태하면 작은 사망에 이른다는 사실
또한 알기에 ....
감히 절필의 아쉬움으로 글을 마무리 하고자
함니다.
아주 가까운 미국에서
모처럼 들어왔더니 장문에 글이 있어 너무길면 읽기도 귀찮아서 대충 눈팅하고 나가야지 했더니 끝까지읽게되는 마력이있네요
호기심 ? ?씨 누구지?
궁금하기도 하지만 나름대로 표현도 잘하네
자주접하지도 않했을텐데
어찌그리 잘도 표현하는지
ㅎㅎ
제석마당에서 잘 놀다 갑니다
코로나로인해 답답하고 막막한 시기에 좋은글 감사해요
친구도 건강하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