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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론적 본질론
아날로그 시대가 가고 디지털 시대가 오고 있다. 디지털 시대의 수는 0과 1 뿐이다. 0과 1 두 가지 수로 인간을 능가하는 인공지능을 만들어 낸다. 0과 1이라는 수도 사실은 허구의 개념이다. 음과 양, 유와 무, 블랙 엔 화이트로 나타내도 된다. 인간이 십진법의 수를 만들어 낸 것은 손가락이 열개인 때문이다.
고인돌 시대의 태초의 인간이 수에 눈을 떴을 때는 당연히 가장 가까이 있는 도구인 손가락으로 셈을 했을 것이다. 열개가 넘어가는 수를 대하니 손가락 수로는 모자라서 비로소 손가락 밖의 세계로 넘어가서 11이 된 것이다. 그런데 시간은 12진법이다. 달이 열두 번 차고 기우니 해가 제자리에 오더라는 것을 알아낸 것이다. 인간 몸의 수(손가락의 수)와 자연(하늘)의 수(시간의 수)를 결합시키니 갑자을축이 된 것이다. 왜 결합시켰을까? 자연에 의지해서 살아야 하는 게, 생명을 가진 인간이니, 당연히 그렇게 의식이 진보해 갔을 것이다. 60년이 되면 1갑자로 돌아오니, 인간의 삶이 한 바퀴의 시간을 살았다는 것이다. 10진법과 12진법의 세계는 자연의 세계이자 아나로그의 세계다. 디지털 세계는 초자연의 세계다. 0과 1로서 무한의 세계를 열어가고 창조해 낸다. 음악도 소설도 시도 판사의 판결문도 아니 인간의 건강관리까지 이제는 디지털이 단 1초도 걸리지 않고 해결 해낸다. 디지털 세계에서는 덧없음을 느끼지 못한다. 생수(시작의 수)와 성수(완성의 수)를 느낄 시간(=달이 자라서 만월이 되었다가 그믐달로 다시 소멸되어 가는 시간)이 디지털 세계에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역사이래로 수많은 철인들이 진리를 탐구해 왔고 또 그 진리를 알기 쉽게 정리하여 후학들에게 남겼고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영향을 미쳤다. 오늘 내가 알고 있는 지식과 지혜는 내 스스로가 무에서 노력하여 얻은 게 하나도 없고, 각자 자기 나름으로, 선인들이 남긴 책과 가르침을 통해서 고민하고 성찰하여 얻어 낸 것이니, 결국 지식과 지혜라는 것도 내 소유물이 아니라 모두의 것인데, 꼭 재벌이 돈 많이 모은 것을 오직 자기 것인 양 하듯이 지식과 지혜조차도 다들 자기 것인 양 여긴다. 그래서 지적소유권이니 창작권이니 하면서 법적 보호를 받으려고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아무튼 공부를 하는 이가 "대학지도"를 망각하니 세상이 어지럽고 혼탁한 것이 아닌가 한다. 문학 역시도 마찬가지고.
근원을 밝히려는 노력은 물리학에서 지금도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 응축과 빅뱅이론이 그것이다. 끝없는 응축은 블랙홀을 만들고, 끝없는 우주의 팽창은 빅뱅에서 일어난 것이라는 학설이 현재로서는 정설이다. 우주의 본질을 이(理)와 기(氣)로 본다면, 이는 물질이고 기는 작용이다. 물질이 변화하지 않으면 팽창이나 수축이 일어나지 않는다. 물질을 작용시키고 변화 시키는 에너지가 기(氣)다. 이 에너지의 작용으로 세상만사가 변한다는 것이다. 에너지가 물질이 되고 물질이 에너지가 되는 등식을 아인슈타인이 찾아냈다. 그게 저 유명한 E = MC² 이다. 모든 물질은 응축의 궁극에 달하면 초 질량의 에너지로 응축이 되고, 더 이상 응축이 되지 않으면 폭발한다. 그건 지구 속의 마그마가 폭발하는 이치와도 같다. 서구철학과 동양철학이 근원을 밝히려는 근본은 같지만 그 소통의 방식은 전혀 다르다. 그래서 서구철학은 과학으로 발전했고, 동양철학은 실용이 못되고 형이상학에서만 맴돌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의 우리는 서구자연과학의 절대적인 영향아래 살고 있다. 디지털 시대를 두고 인류의 4차 산업혁명 시대라고 부르고 있다. 물론 디지털을 초월하는 시대도 올 것이다. 중력의 영향을 벗어나는 시대, 물질에서 에너지로 에너지에서 물질로의 변화가 자유자재로 이루어지는 시대, 같은 것이 이미 공상과학 소설에서 등장하고 있다. 책상 앞에 앉아 컴퓨터로 글을 쓰던 내가 순간적으로 서울 명동에 나타나는 일도 이론적으로는 가능하다는 것이다.
서양의 자연과학과 동양의 사유가 융합되는 일도 일어나고 있다. 근원을 밝히려는 정신이 동일하니 결합은 당연한 현상이다. 그걸 온고이지신이라 한다.
나이 들어감에 온고이지신을 이해하면 후학들과 잘 소통할 수가 있다. 아는 일 보다 전하는 일이 백배 천배나 더 어렵다. 솔직히 필자는 아는 게 별로 없으며 궁금한 게 참으로 많은 사람이다. 오래 전에 선학이 후학에게 간장막야 이야기를 들려준 바가 있다. 필자는 간장막야가 뭔지도 몰랐지만 인터넷에 검색해 보고 바로 간장막야를 이해했다. 간장막야 시대는 철기시대의 아주 초기에 해당한다. 제련기술이 초보적인 수준이어서, 쇠로 칼을 만들어서 전장에 차고 나가면, 한두 번 부딪히면 댕강 부러지는 수준이었다. 간장, 막야가 댕강 부러지지 않는 검을 만든 것이다. 현대의 철 제련기술은 간장막야시대를 어마어마하게 뛰어 넘어 있다. 보통의 철로는 불가능한 우주선을 만드는 시대다. 문제는 간장막야가 남긴 정신이다.
“신기술을 개발하려는 정신, 그것으로 세상을 구하려는 정신!”
당연히 디지털도 세상을 구해 내려고 애를 쓸 것이다. 현대는 인터넷이 지식의 보고이자 창고다. 모르는 단어는 스마트 폰에서 검색하면 바로 알려 준다. 그 지식을 활용하여 창조적 융합을 해낼 줄 아는 인간이 미래를 리드하게 된다. 과거처럼 암기력이 뛰어난, 한 개인의 머리에서 융합되어 나오던 지혜는 이제 큰 힘을 쓸 수가 없는 시대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는게 많다고 유식한 체 할 수 없는 시대라는 것이다. 알파고가 바둑의 천재 이세돌을 이긴 것은 천재 기사들이 남긴 수많은 기보를 알파고가 활용할 줄 아는 능력을 지닌 때문이다. 0과 1의 디지털 세계에서 순식간에 연산해 내는 능력은 인간의 직관력을 이미 뛰어 넘고 있다. 외로운 인간의 감정을 위로해 줄, 개나 고양이보다 더 친밀하게 인간의 서정을 달래줄, 감성적이고 예쁜 인형도 이미 출시되고 있다. 물론 이런 과학의 근본 이데올로기는 인간을 더욱 인간답게 하는 길이 되어야 마땅하겠지만, 미래 사회 역시도 흑과 백이 반반씩 있을 것이다. 그건 인간인 내 마음이 늘 그러하기 때문이다.
동양의 철학서인 주역은 공자조차도 홀 딱 반해서 가죽 끈이 세 번이나 끊어질 정도로 읽었다는 책이다. 그 사유의 깊이가 만만치 않다는 뜻일 것이다. 필자가 주역은 공부한 바가 없지만, 역은 변화의 이치를 다룬 책이라는 생각을 한다. 세상만사가 변화 속에 있으니, 어떤 규칙성이 있다는 생각에서 출발하여, 그 규칙성을 찾아내려는 노력을 하여 얻어낸 결과를 집대성한 철학서가 아닌가 여겨진다. 변화란 말 그대로 변화무상이 아닌가? 무상한 그걸 100% 정확하게 예측한다는 게 정말 현실에서 가능한 일일까?
변하는 것 중에서 오직 변하지 않는 것이 무엇인지 인류는 아득한 고인돌 시대 때부터 고민 했을 것이다. 그래서 태양이 변하지 않는다고 여기고 태양의 운행질서를 찾아낸 것이고, 어둠을 주관하는 달이 또 있으니 달의 운행질서와 태양의 운행질서를 연관 지어서 생각해 보고 하면서 천문학이 발달하고 달력이 나오고, 농사짓기에 좋은 씨 뿌리는 시절, 기르는 시절, 수확하는 시절을 알아내고, 측우기를 만들고 했을 것이 아니겠는가.
“천명지위성(天命之謂性)”이라 했을 때, 과연 천명(天命)이 성(性)이 출현하기 전의 세계에서 있기는 있었던가? 하는 의문이 남는다. 성(性)이 절대 근본이라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수사법의 하나로 천명을 사용한 경우와 성이 나타나기 이전에 천명이 이미 존재했다고 믿는 경우는 그 결과가 전혀 다르게 나타난다. 사물의 성(性= 변하지 않는 유일 신)을 궁구하려는 노력은 물리학이나 천문학이나 모든 자연과학에서 줄기차게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결국 수의 세계로 들어가면 유와 무 두 가지로 나뉘는 것이다. 그게 0과 1로 기호화 되거나, 음과 양이란 문자로 표현된 것이 아닌가? 인류 최초로 발견된 숫자는 있음과 없음, 존재와 부존재 곧 0과 1이었음이 틀림없다. 문자나 숫자는 소통을 위한 기호 일 뿐이다. 팔팔이 64나 구구는 81이나 하나 다른 게 아니다.
수의 세계는 사물과 사물의 인과성과 규칙성을 말한다. 문제는 수는 생명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생명은 살기위해서 변화할 뿐 수의 규칙대로 변화하지 않는다. 수에 얽매이면 하나 뿐인 내 생명을 잃는다. 그렇다고 수가 무용한 것은 아니다. 인간은 수의 세계를 이해하고 나서, 그 수를 빌어 와서 끊임없는 창조를 이루어내고 있다. ‘다리의 버팀목을 강도 얼마의 철근과 콘크리트로 며칠을 양생하면, 25톤 덤프트럭 몇 대가 몇 년을 통행해도 무너지지 않는다.’ 같은 공학적 수치를 만들어 내고, 그렇게 다리를 놓고 건물을 짓는다. 내가 하루에 돈을 얼마를 벌면 직원들 월급을 얼마를 주고, 원재료는 얼마를 새로이 구입하고, 얼마가 남으며, 그 남는 수의 금액으로 내가 사고 싶은 얼마짜리 고급승용차를 사고 또 친구들과 술을 얼마치를 먹을 수가 있고 같은 계산이 나오는 것이다. 산(算)이란 천하 만물의 이치를 수치화 시켜 이해(소통)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그걸 아무리 수치화 하면 뭘 하나? 내게 유익이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결국은 유익이 있도록 응용하는 기술이 중요하다. 디지털 세상은 인간이 지금까지 이룩해 놓은 지식을 원형으로 삼아서, 새롭게 융합해내는 세상이다. 그건 하나의 원색에서 수많은 다른 색들을 창출해내는 행위라고 설명할 수도 있다. 이걸 가능하게 하는 시스템이 바로 “빅데이터”와 “클라우드” 다. 세상의 모든 정보와 지식을 데이터화 한 것이 빅데이터이고, 그걸 모아서 전 인류를 하나로 연결시켜서 응용하게 하는 키가 크라우드라고 이해하면 쉽다. 이제는 개인이 방송도하고, 뉴스도 만들고, 영화도 만든다. 개인의 창작물이 광케이블을 타고, 실시간으로 전 세계의 인류에게 영향을 미친다. 이걸 비디오 아트라는 새로운 예술장르를 개척한 백남준이 이미 보여 주었고, 싸이라는 청년이 "강남 스타일"이란 춤으로 보여 주었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창궐하자, 미스터 트롯은 언텍트시대를 선도하며, 디지털 세상을 우리 눈에 보여주며 방송을 리드하고 있다. 수많은 관중들을 한자리에 모아 놓고서 쇼하던 시대에서 탈피하여, 대면하지 않고도 더 많은 독자와 시청자를 끌어 모아서, 돈을 버는 것이다. 공중파 방송은 시대에 뒤쳐져서 시청자들을 다 빼앗기고 있다. 각 개인은 이제 디지털 소비자에서 디지털 정보 생산자로 변화하게 되었다. 일방적 소통에서 쌍방적 소통과 교감의 시대가 열리고 있다. 그걸 통해 서로가 서로의 존재감을 인정받고, 행복감을 누린다는 것이다.
이제 정치인들도 무리를 모아 놓고 대중 연설하던 시대가 지나갔다. 목사나 신부님도 교회당에서 신자들을 모아 놓고 강론하던 시대가 지나갔다. 전부 디지털 세상으로 모여 들게 될 것이다. 우리는 그 속에서 필요한 정보와 지식을 마음껏 얻어가고, 대화를 나누고 사랑을 나누게 될 것이다. 신발 끈의 매듭을 풀기 어려워서 내 발바닥의 간지러운 곳을 긁고 싶어도 긁지 못하고 가죽구두 위를 긁을 수밖에 없었던(격화소양) 시대에서, 아예 신발을 벗어버리고 맨발로 드론을 타고 훨훨 날아다니는 시대를 만들어 간다는 것이다. 시회대중(時會大衆)은이해가 되는가?^^
세상의 모든 지식과 정보를 빅데이터화 시키고 응용하는 수(數)는 복잡하고 느려 터진 아나로그 숫자로는 불가능한 것이다. 단순한 두개의 숫자, 아니 기호 0과 1만 있으면 되는 것이다. 십진법이 아닌 이진법의 단순한 세계가 모든 복잡한 것을 대체하고, 새로운 시대를 리드하는 것이다. 우리는 내게 필요한 것만 거기서 추출하여 잘 활용하여 내가 행복한 삶을 만들어 나가면 되는 것이다. 빅대이터가 파괴되면 인류문명이 암흑이 되는 게 아닌가하고 걱정하지 마시라. 지구상의 종자란 종자 씨앗을 남극 대륙 지하 저장고에 보관하듯이, 빅데이터도 별도로 예비로 보관되고 있을 것이니 걱정 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다. “연작이 봉황의 뜻을 알겠는가?” 하고 묻는다면 "아직도 연작과 봉황이라는 외모의 크기와 신분차별이라는 의식에 갇혀 있는가?"하고 되묻고 싶어진다. 연작이나 봉황이나 모두 다 나무아미타불 나무관세음보살이다. 말장난이 아니라 살아 있는 것들은 죄다 살아 있는 것들을 사랑해야만이 살아갈 수가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인간의 죄를 무한 용서하는 관세음 보살이 가장 중하다는 뜻이다.
조선시대는 성리학이 지배하던 시대였고, 아예 신을 부정한 정신세계가 5백년을 통치했던 시대였다. 그러나 민중의 절대 다수는 신을 믿었고, 민중의 신은 조왕신이나 삼신할매 같이 늘 우리 가까이서 우리를 보살펴 주던 애정이 듬북 담긴 신이었다. 먹을 것, 입을 것이 몽땅 지배계급에게 수탈당하고, 고쟁이 하나 달랑 걸친 민중이 위로 받을 곳이라곤 정화수 한 사발 떠놓고 두 손을 비비며, 그저 살려 주십사고 빌수 있는 자애로운 신이라도 있어야 희망을 가지고 살수가 있었을 것이 아닌가?
글 깨나 읽었다는 자칭 선비라는 자들은 말라빠진 성리학의 이념 논쟁에 빠져서, 자신도 알지 못하는 이발기발을 읖조리며 물질의 세계에 초연한 척하며 살았지만, 계집질과 노략질은 앞장서서 했고, 청렴결백은 한강 백사장에서 바늘 찾기만큼 귀했던 역사가 아닌가. 오늘의 대한민국을 만든 것도 민중이고, 민중이 이 땅의 주인이고, 민중이 본질이고, 존재가 바로 본질이다. 존재에 앞서는 이(理)나 기(氣)가 있다고 설하는 자는 “나는 생각 한다 고로 존재 한다”고 한 데카르트의 말도 모르는 자다. 우주만물의 근원은 존재가 시작되면서 우주가 시작되는 것이고 존재가 사라짐으로서 우주도 사라진다. 점을 끌어와서 선을 만들고 선을 끌어와서 면을 만들고 면을 끌어와서 공간을 만든다. 만들기 시작하면 처음과 나중이 생기니 그게 시간이다. 시간은 그렇게 탄생한다. 그러면 태초란 무엇이던가? 점도 없던 무(無)의 세계다. 무의 세계에서 점은 또 어떻게 나타났는가? 점 그게 에너지의 응축이라면 "빛이 있으라" 하면서 비로소 빅뱅이 시작되고, 그 빛이 어둠과 광명을 가르니 빛 따라 선이 만들어지고, 면이 만들어지고 공간이 만들어 지고, 시간이 출발한 것은 알겠는데 그러면 에너지는 어디에서 왔을까?
에너지가 물질이 되고 물질이 에너지가 되는 이치는 핵발전소만 봐도 이해가 되는데, 태초의 빅뱅이 에너지가 고도로 응축된 한 점에서 출발했다면 그 에너지는 어디서 왔는가? 원래 있었다는 말과 당연히 있다는 말과 아예 아무것도 없었다는 말은 전혀 다른 개념이 아닌가? 내가 도사인가? 도사는 무슨 개똥 같은 도사인가! "존재가 본질에 선행한다", 존재가 있기 전에는 우주도 없고 무(無)도 없다. 그래서 내 존재는 우주 보다 귀한 것이고, 당신의 존재도 역시 그러하다. 그래서 하늘의 저별은 나의 별이기도 하고 너의 별이기도 한 것이다. 이성이 별처럼 빛나길 바라며, 자기 존재를 소홀히 하지 말일이다. 그래서 모든 존재는 존재하는 것들을 아끼고 사랑해야 하는 것이다. 영혼이 불멸하고 윤회한다고 하더라도 전생을 지워버리고 완전히 새롭게 태어난 나는 완전히 새로운 사람인 것이다. 전생을 기억할 필요도 알고자 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그런 허황된 소리에 홀려 다니지 말고 오늘의 내 삶을 아름답게 가꿀 일이다. 존재하는 이 순간이 삶이고 우주인 때문이다.
세상이 혼탁하고 저마다의 욕심의 세계로 빠지는 것은 자기 존재조차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때문에 일어난다. 내 존재가 바로 이해되면 타인은 물론 삼라만상의 존재가 이해가 되는 것이다. 서로 사랑하면서 살 일이다. 가장 이기적인 사람이 가장 깊이 사랑할 줄 알게 된다. 내 존재를 존재케 하기 위해서는, 삼라만상이 내 곁에서 나를 보호하고 지켜줘야 하는 때문이다.
사랑하는 이여!
유리알로 유희하든 쇠구슬로 유희하든 삶을 유희하라!
먹고! 자고! 놀고!
그 보다 더 위대한 삶이 있다고 외치는 자를 믿지 말라! 고상한 유희는 인간 정신을 천국으로 이끈다. 먹고! 자고! 놀고! 하면 생산은 누가 언제 하느냐고 되묻는 분들이 있을 듯하여 사족을 단다. 생산을 하더라도 먹는 것, 안락하게 자는 것, 즐겁게 노는 것을 생산하라는 말이다. 총칼이나 신을 위한다는 그런 거짓된 것들을 만들지 말고. 신이 쩨쩨하게 인간으로부터 상납 받고 사는 신분이가?(인간은 상납받는 것을 좋아 하지만, 신은 그런 인간의 속 마음을 감찰하신다)
삶에서 유희보다 즐거운 일이 어디 있던가? 경로당의 할아버지 할머니들에게 고스톱이라는 유희가 없으면 그 지루한 하루를 어떻게 보낼 수 있다는 말인가? 요즘 개발되는 게임기를 아이들이 너무너무 좋아하지 않는가? 재미나는 오락도구나 오락프로그램을 만들어 내는 회사마다 모두 떼돈을 벌고 있지 않는가? 유희를 죄악시 하는 사람들의 의식은 언제 어디서부터 형성되었는가? 삶과 죽음은 무엇이며 마지막까지 삶을 긍정하는 힘은 어디서 나오는가?
헤르만 헷세는 생의 마지막에 <유리알 유희>라는 책을 남겼다. 그 책을 구해 놓고서도 나는 아직 다 읽지 못했다. 헤르만 헤세쯤 되는 분이라면, 그리고 그분이 마지막으로 남긴 소설이라면 그 제목에다 생을 성찰한 의미 있는 함축을 담았을 게 아니겠는가? 당시로서는 장수라 할 만한 85세의 나이까지 살면서 그는 무슨 생각을 후세인들에게 들려주려고 문학이라는 도구를 사용했을까? 줄기차게 깊은 사유를 토해낸 그의 문학에 대한 열정은 어디서 왔을까? 끊임없이 사유하고 성찰하고 탐구하려한 삶을 대하는 그의 올곧은 정신자세 덕분이 아니겠는가?
나는 왜 헤르만 헷세 같은 문장을 짓지 못 하는가? 정신이 일도(一到) 해야 하는데, 정신이 엉뚱한 데로 자꾸 팔려가서 제대로 사유가 안 되는 탓이 아닌가? 진정하게 자기 내면을 들여다보는 눈이 없기 때문이 아닌가? 자기 자신이 어떻게 생겨먹은 것인지도 모르면서, 남을 어찌 이해하며 세상을 어찌 통찰하며, 삶이 무엇인지를 어찌 아는가? 우리는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주어진 시간이라는 오선지 위에서 자기 삶을 연주하는 자여! 삶(존재)을 아름답게 연주하라!"
이 마지막 문장은 필자가 남기는 문장이지만, 헤르만 헷세가 하고 싶은 말이기도 할 것이다. (2020. 6.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