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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 가장 큰 화두는 무엇보다 ‘사랑’이다.
우리의 현대시사를 아름답게 장식한 시인들의 사랑 이야기는
엄청난 운명이 되어 시인의 문학과 삶에 커다란 울림을 남겼다.
이상, 김영랑, 백석, 유치환, 모윤숙, 박목월, 한하운… 세속적 연애를 넘어서 문학적
승화에 이른 이들 시인의 사랑과 사랑의 시들은
최상의 아름다움에 이르려는 이카루스의 날개와도 같다.
사랑은 다다를 수 없는 영원한 환상임을 알기에... 편집자
이상 ⓒ계간 시인세계 |
이상
연심이! 혹은 치명적인 사랑 (이재복 문학평론가)
이상의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너무 가혹하지 않은가. 젖떨어져서 나갔다가 이십삼 년만에 돌아온 친가, 그에게 가정이란 이미 오래전에 상실한 낙원과 같은 곳이었고, 그가 발딛고 사는 땅은 불모의 그림자만이 짙게 드러워진 식민 치하였으며, 게다가 그는 결핵이라는 치명적인 병을 앓고 있지 않았던가. 온갖 불행을 숙명처럼 가지고 있는 그에게 과연 사랑이 있었던가.
아이러니컬하게도 그는 이 사랑에 대해 누구보다도 많은 말을 하고 있다. 그의 문학의 내적인 파토스는 이 사랑으로부터 나온다고 할 수 있다. 그의 글 속에 직접적으로 혹은 암시적으로(상징적으로) 등장하는 금홍, 권순옥, 변동림 같은 여인들과의 관계 속에서 그의 사랑은 모습을 드러낸다. 대상이 바뀔 때마다 사랑의 모습(쾌락 → 질투 → 원한)도 바뀌고, 글쓰기의 형태도 바뀐다. 그는 이 여인들과의 애정 놀이를 글쓰기의 유희로 연결시키면서 어둡고 고통스러운 삶을 견디어 냈던 것이다.
이 세 여인들 중에서 금홍과의 만남은 다른 누구와의 그것보다도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그에게 드리운 죽음의 그림자만큼 그와 금홍과의 사랑은 치명적인 것이었다. 만 스물의 나이에 찾아온 객혈은 그의 사랑을 병들게 했고, 도저히 그 속에서 그를 헤어나지 못하게 했다. 이때 만난 여인이 바로 ‘금홍’이다. 객혈로 인한 고통을 덜기 위해 찾은 배천온천에서 열여섯에 머리 얹고 열아홉에 첫딸을 낳았다는 경산부 경력의 작부인 금홍을 만났던 것이다. 그리고 그녀를 경성으로 데리고 와서 함께 살림을 차렸다. 요양차 간 온천지에서 우연히 만난 작부와 스스럼없이 살림을 차린 그의 이러한 행위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이 대목이야말로 그의 사랑 혹은 글쓰기의 진면목이 드러나는 지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왜 금홍을 취한 것일까? 그녀는 일개 작부이다. 더욱이 첫딸까지 낳은 그런 작부이다. 당대의 인텔리 시인과 작부의 동거란 어울리지 않는다. 하룻밤 정도의 즐김의 대상으로 족할 일이다. 일반적인 기대를 배반하는 이러한 동거의 이면에는 타자의 시선(사회적인 관습이나 법칙 및 질서)을 삼켜버리는 강한 자의식이 도사리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자의식은 객혈의 공포에서 비롯된 것이며, 이로 인해 그는 이성과의 정상적인 만남 혹은 사랑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평범한 이성보다 금홍과 같은 작부가 자신에게 더 잘 어울릴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의 생각은 온전할 수 없는 것이다. 자의식에는 언제나 틈이 있기 때문이다. 금홍과의 동거가 거듭될수록 그의 의식은 분열된다.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간주한 금홍이 차츰 그의 의식 속에 하나의 존재로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이 그를 더욱 혼란스럽게 한다. 그에게 금홍은 현실(일상)이면서 비현실(탈일상)이고, 아내이면서 애인, 창녀이면서 성녀, 육체이면서 정신, 독毒이면서 화花인 존개가 된 것이다. 금홍에게 자발적으로 간음을 권하면서도(그의 글에 보면 금홍을 우禹씨나 C변호사에게 매음의 상대로 제공한다) 막상 그녀의 간음 장면을 보고는 적지 않은 감정의 동요를 느낀다.
그는 자신을 속이는 금홍의 허위적인 행위에 괴로워하기도 하고(「추구追求」), 금홍과의 불구적인 부부관계 혹은 허위적인 부부관계로부터 떠나고 싶어하기도 한다(「시제6호詩第六號」). 하지만 그는 떠나지 못한다. 생활의 터전을 마련할 길이 없어 다시 매춘의 길을 떠나는(「광녀狂女의 고백告白」) 그녀의 고백에 결국 귀기울이게 된다.
이러한 사랑의 양가감정, 다시 말하면 독화의 구조는 그의 문학의 중심 메타포라고 할 수 있다. 의식이 항상 경계에 놓이기 때문에 그는 괴로울 수밖에 없다. 이 괴로움은 밖을 향하는 것이 아니라 점점 자신의 안을 향하면서 자의식을 낳게 되는 것이다. 이 양가감정은 그가 의도했든 아니든 사랑에 대한 어떤 진정성을 드러낸다고 할 수 있다. 온전한 사랑이란 존재하지 않으며(깨어진 거울 반쪽의 결합으로 상징되는 남녀간의 사랑의 신화는 환상이다.) 여기에는 언제나 틈이 있고, 이 틈은 우리를 한순간에 파멸로 몰고 갈 수 있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이런 점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그의 사랑은 치명적인 것이 사실이다. 객혈로 인해 그는 점점 죽음에 가까이 다가갈 수밖에 없는 운명에 처하게 되고 이것이 그를 더욱 심한 자의식 쪽으로 몰고 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그가 진정한 사랑을 하기 위해서는 이 자의식으로부터 벗어나야만 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결코 쉽지 않은 어쩌면 자신의 온 존재를 던져야 하는 이 지난한 일을 그는 단행한다.
그는 자신의 온몸을 던진다. 이것이 바로 ‘연심이!’(「날개」)라는 한 마디의 외침이다. 연심이란 금홍이의 본명이다. 그는 금홍이를 작부로 부른 것이 아니라 금홍이라는 존재 그 자체로 부른 것이다. 비록 그가 금홍이를 존재 그 자체로 불렀지만 이것은 달리 보면 자기 자신을 자의식에 입각해서 호명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벗어난 맨얼굴의 상태로 그 자신을 부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연심이라는 이름은 그의 글 전편에 걸쳐 단 한 번밖에 나오지 않는다. 진정한 사랑(진정한 소통)을 위한 이 간절한 외침은 ‘날자 날자 한번만 더 날자꾸나’ 속에 투영된 의미와 다른 것이 아니다. 또한 그것은 임종시 그가 애타게 찾았던 멜론의 의미와도 다른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절름발이에다가 불구적인 사랑을 넘어 나와 너의 호명만으로도 진정한 사랑이 가능한 세계가 그가 꿈꾼 세계였던 것이다. 이런 진정한 사랑에 대한 회복은 「이런 詩」에서도 드러난다.
역사를하노라고 땅을파다가 커다란돌을하나 끄집어내어놓고보니 도무지어디서인가 본듯한생각이들게 모양이생겼는데 목도들이 그것을메고나가더니 어디다갖다버리고온모양이길래 쫓아나가보니 위험하기짝이없는 큰길가더라. 그날밤에 한소나기하였으니 필시그돌이깨끗이씻겼을터인데 그이튿날가보니까 변괴變怪로다 간데온데없더라. 어떤돌이와서 그돌을업어갔을까 나는참이런처량한생각에서 아래와같은 작문作文을지었도다.
총독부 기사 시절의 이상. 오른편의 여자는 유리코인지 금홍인지 분명하지 않다. ⓒ계간 시인세계 |
「내가 그다지 사랑하던 그대여 내한평생에 차마 그대를 잊을수없소이다. 내차례에 못올사랑인줄은 알면서도 나혼자는 꾸준히생각하리다. 자그러면 내내어여쁘소서」어떤돌이 내얼굴을 물끄러미 치어다보는것만같아서 이런詩는 그만찢어버리고싶더라.
-「이런 詩」 전문
이 시는 잃어버린 애인에 대한 그리움을 간절하게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비록 알레고리적인 형식과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고는 있지만 애인의 매음까지 제공한 저간의 태도로 보아서는 그의 애인에 대한 이런 식의 간절함은 낯설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금홍이를 연심이로 부를 수 있는 시인의 간절함을 헤아린다면 이 정도의 표현은 그다지 낯설지도 또 놀랄 일도 아니라고 본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입만 열면 사랑타령하는 연애시에 식상한 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사랑이 가지는 그 내적인 파토스의 감응력은 그것을 오래오래 장전해 두었다가 어느 한 순간에 터뜨릴 때 최고조에 달한다. 연심이라는 이 한 마디의 절절함은 건조한 스타일리스트로 굳어져버린(이것이 잘못된 규정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우리 시사에서 가장 탁월한 스타일리스트이다.) 그의 존재를 단번에 내적인 열정으로 들끓는 영혼의 소유자로 만들어버린다. 그는 스물여덟의 나이에 종생을 맞았다.
그의 종생은 이미 생의 의지를 포기한 자의 안온함과는 거리가 멀다. 그는 종생에 맞서 ‘자기시체화’를 단행할 정도로 그 공포와 불안에 정면으로 맞섰던 존재이다. 생에 대한 니힐과 시니컬함 이면에 이렇게 생 혹은 사랑에 대한 집착도 강하게 존재한다는 사실은 이상이라는 이름이 쉽게 사라지지 않고 끊임없이 우리의 의식을 충동하는 힘의 실체로 살아남아 있게 하는 그 무엇인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가 혼신의 힘을 다해 부른 연심이야말로 시인이 가장 사랑한 대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대상은 금홍이면서 또한 금홍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그가 부른 연심이는 그가 욕망하는 세계에 대한 눈물겨운 호출일 수도 있다. 그것은 사이비 근대가 아닌 진정한 근대의 모습을 한 어떤 세계일 수도 있고, 모순되고 분열된 거울의 세계를 넘어 주체와 객체가 행복한 합일을 이룬 그런 온전한 세계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이재복 1966년 충북 제천 출생. 한양대 국문학과와 동대학원 박사과정 졸업. 1996년 《소설과 사상》으로 등단. 계간 《한국문학평론》 기획위원으로 활동한 바 있으며, 현재 한양대, 추계예대, 한겨레문화센터에서 강의하고 있다. 비평집 『몸』과 『몸과 몸짓문화의 리얼리티』, 편저 『몸속에 별이 뜬다』가 있다.
김영랑
꿈 속의 사랑 (이숭원 문학평론가)
김영랑의 삶은 전라남도 강진을 거의 벗어나지 않았다. 그가 강진을 떠나 있었던 것은 서울로 올라와 휘문의숙에 재학한 1917년부터 1919년까지의 2년 동안과 1920년 일본으로 건너가 청산학원에 입학하여 학업을 밟다가 1923년 관동대지진으로 귀국할 때까지 3년간의 기간이 전부다. 이 5년간의 수학 기간을 제외하면 그는 해방이 될 때까지 고향 강진에 뿌리를 박고 생활하였다. 이렇게 생애의 대부분을 고향에서 거주하였기 때문에 서울에 거주하는 사람들과는 달리 이성과 교제를 한다든가 사랑을 나눌 기회가 많이 제공되지 않았다. 다만 그가 일본에서 귀국하여 잠시 서울에 머물던 1924년경 숙명여학교에 다니던 최승희와 교제하였다는 사실이 풍문으로 전해 온다.
최승희는 1911년 서울에서 출생하였으며 1922년부터 염군사의 멤버로 활약한 좌파 문인 최승일의 동생으로 숙명여학교 4학년에 재학중이었다. 최승일을 통해 최승희를 알게 된 김영랑은 대단한 호감을 갖게 되었고 결혼까지도 생각할 정도로 연정이 깊어졌지만 양쪽 집안의 반대로 결혼은 성사되지 못하였다.
ⓒ계간 시인세계 |
김영랑은 조혼의 풍속에 따라 1916년 14세의 나이로 두 살 위인 김해 김씨 가문의 여인과 결혼을 하였다. 그러나 그 이듬해에 부인이 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사춘기 때 겪은 첫 결혼과 상처의 아픔은 그의 가슴에 꽤 진하게 남아 있었던 것 같다. 그는 십 년이 지난 1925년에 와서야 호수돈여고 출신의 김귀련과 재혼을 하게 되었고 그 이전에 최승희도 재혼의 대상으로 한때 마음에 두었던 것이다. 다음의 시는 그가 일찍 세상을 떠난 아내를 생각하고 쓴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쓸쓸한 뫼앞에 후젓이 앉으면
마음은 갈앉은 양금줄같이
무덤의 잔디에 얼굴을 부비면
넋이는 향맑은 구슬손같이
산골로 가노라 산골로 가노라
무덤이 그리워 산골로 가노라
「쓸쓸한 뫼앞에」 전문
화자는 산골에 있는 누군가의 무덤을 그리워하고 있다. 쓸쓸한 무덤 앞에 호젓이 앉아 옛 생각에 잠기면 마음은 가라앉은 양금줄처럼 맑은 소리를 내는 듯하고 무덤의 잔디에 얼굴을 비비면 영혼은 맑은 향기를 지닌 구슬손처럼 싱그럽게 피어나는 것 같다고 했다. 무덤의 잔디에 얼굴을 비빈다는 것으로 보아 무덤에 묻힌 대상이 그가 간절히 그리워하는 대상임을 짐작할 수 있다. 무덤이 그리워 산골로 간다고 한 것으로 볼 때 화자가 위치해 있는 공간은 도시일 것이다. 따라서 이 시는 그가 서울이나 일본에 유학한 시기에 씌어졌을 가능성이 많다.
김영랑이 최승희와 어떻게 교제하였으며 서로의 마음을 어느 정도 공유하였는지 알 길은 없다. 김영랑의 시에서도 시인의 사랑을 엿보게 해 주는 작품은 발견되지 않는다. 이성에 대한 사랑의 감정을 표현한 시도 거의 없다. 다음의 시가 사랑의 감정을 다룬 거의 유일한 작품이다.
내 마음을 아실 이
내 혼자ㅅ마음 날같이 아실 이
그래도 어데나 계실 것이면
내 마음에 때때로 어리우는 티끌과
속임없는 눈물의 간곡한 방울방울
푸른 밤 고히 맺는 이슬 같은 보람을
보밴 듯 감추었다 내여드리지
아! 그립다
내 혼자ㅅ마음 날같이 아실 이
꿈에나 아득히 보이는가
향맑은 옥돌에 불이 달어
사랑은 타기도 하오련만
불빛에 연긴 듯 희미론 마음은
사랑도 모르리 내 혼자ㅅ마음은
-「내 마음을 아실 이」 전문
김영랑의 시가 외부의 현실세계보다는 ‘내 마음’의 영역에 집중했다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지적한 사실이다. 이 시도 그리움의 대상에 대한 관심이라든가 어떤 대상에 대한 사랑의 지향을 보여주는 것 대신에 스스로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는 미묘한 마음의 영역에 관심을 표명한다. “날같이 아실 이”에서 ‘날같이’의 뜻은 ‘날’을 낮의 뜻으로 보면, ‘대낮처럼 환하게’의 뜻이 되고, ‘날’을 천이나 돗자리를 짜는 날실의 뜻으로 보면, ‘낱낱이 세세하게’의 뜻이 된다.
즉 자기의 마음 구석구석을 환하게 알아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는 것이 1연의 의미내용이다. 그런데 자신의 마음을 ‘내 혼자ㅅ마음’이라고 강조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냥 내 마음이라고 해도 될 것을 왜 ‘나 혼자의 마음’이라고 고립의 의미를 강조했을까? 그것은 자신의 내면 깊숙이 도사리고 있어 스스로도 파악하지 못하는 미묘한 마음의 기류에 대한 화자의 특별한 관심을 표명한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보통사람들이 잘 모르는 미묘한 내면의 움직임을 제대로 알아낼 수 있지 않겠느냐는 하나의 소망을 담아낸 것으로 보인다.
2연은 그렇게 자신의 깊은 마음을 속속들이 알아주는 사람이 있다면 자신의 마음에 보배처럼 감추어져 있는 티끌 같은 번민이라든가, 순수한 눈물 방울, 곱고 맑은 보람을 그대로 다 내어드릴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자신이 보배처럼 귀하게 내장하고 있는 속성들이 정말로 귀한 것인지 이 문맥만으로는 알 수 없고, 그 속성의 구체적인 내용 또한 드러나지가 않아서, 사랑과 그리움이 지극히 추상적인 상태에 놓여 있음을 알 수 있다. 구체적인 대상을 설정해 놓고 그 인물을 그리워하고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지극히 관념적이고 모호한 상태에서 자신의 비밀스러운 마음을 드러내고 있고 그 마음을 이해해 줄 상대를 희구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시는 최승희라든가 또 누구라든가 하는 구체적 대상을 전제로 한 사랑의 시라고 규정하기에는 대단히 불리한 조건에 있다.
3연에서 화자의 그리움이 갖고 있는 몽환적 속성이 구체적 시어를 통해 드러난다. 화자는 자신의 혼자 마음을 환하게 알아줄 사람에 대해 “꿈에나 아득히 보이는가”라는 의문형의 어사로 불확실하게 언급하였다. “아! 그립다”고 탄식은 하였으나 그리움의 대상은 꿈 속에서나 아득하게 떠오를 뿐 현실의 국면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현실 속에 수용될 수 없는 사랑과 그리움이라면 그것이 갖는 의미는 무엇일까? 사람의 미묘한 내면을 세밀하게 파악하는 것이 현실에서는 불가능하고 따라서 현실의 삶 속에서 절대 순수의 사랑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일까?
4연을 보면 위의 추측이 이 시의 문맥에 부합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때로는 사람의 마음에서 사랑의 불길이 향기롭게 솟아오르기도 한다. 그러한 사랑의 열도를 시인은 “향맑은 옥돌에 불이 달어”로 표현하였다. 아름다운 옥돌이 불에 달구어져 향기를 뿜어내는 것처럼 사랑의 기운이 보이지 않는 마음에 열기와 향기를 불어넣는다. 그렇게 사랑의 열기가 타오른다고 해도 “불빛에 연긴 듯 희미론 마음”으로 표현되는 내면적 심성의 정체는 여전히 모호한 채로 남아 있다. 그러니 “사랑도 모르리 내 혼자ㅅ마음은”이라는 구절이 마지막에 배치되는 것이다.
요컨대 아무리 뜨겁고 향기로운 사랑의 불길이 솟아오른다 해도 내 마음 속에 숨어 있는 비밀스러운 속성은 알 수 없을 것이라는 뜻이다. 내 혼자 마음을 환하게 알아줄 사람이 있으면 그에게 마음 속의 가장 보배스러운 것을 내어드리겠다고 했으나 그런 사람이 없으므로 마음을 내 줄 필요가 없다. 마음의 미묘하고 신비로운 영역은 사랑도 모른다고 했으니 애를 써서 사랑할 필요도 없다.
이것은 마음의 영역을 모든 것의 우위에 두고 마음을 허물 수 있는 사랑의 가능성까지 차단하는 수세의 방법론이다. 절대의 차원으로 부상된 마음도 나 혼자의 마음일 뿐 타자와의 소통이 처음부터 차단되어 있다. 사랑은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과 접촉을 전제로 하며 마음의 교류를 전제로 한다. 나 혼자의 마음으로 고립되어 있을 때에는 사랑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러기에 이 시는 실제적인 사랑의 시가 아니라 허구 속의 사랑의 시다. 꿈에서나 겨우 아득하게 보이는 비현실적인 존재에게 자기의 속내를 보여주겠다고 했으니 결국 자신의 속마음은 자신도 모르기 때문에 드러낼 수 없게 된다.
이렇게 자기를 감추고 있는 한 사랑은 성사되지 않는다. 자아의 신비로움을 고립 속에 유지하는 것이 아무리 순수한 행위라 하더라도 그것은 소통을 배제한 것이기에 소외된 존재의 자기 미화에 불과하다. 김영랑과 최승희의 연정이 풍문의 차원으로 떠돌듯 김영랑이 쓴 사랑의 시 역시 비현실적인 꿈 속의 독백처럼 다가온다.
이숭원 1955년 서울 출생. 서울대학교 국어교육과 및 동 대학원 국문학과 졸업. 현재 서울여자대학교 한국어문학부 교수. 1986년 《한국문학》 신인상으로 등단. 시와시학상, 김달진문학상 수상. 저서로 『원본 정지용 시집』, 『정지용 시의 심층적 탐구』, 『초록의 시학을 위하여』, 『서정시의 힘과 아름다움』, 『20세기 한국시인론』, 『한국 현대시 감상론』 등이 있다.
백석
낙백落魄한 청춘의 초상 (박주택 시인)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백 석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내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를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여성》 3권 3호, 1938년 3월
백석은 1935년 그의 나이 24살 때 시 「정주성」을 《조선일보》에 발표하며 문단에 나온 뒤 그 이듬해 시집 『사슴』을 상재함으로써 일약 문명을 얻는다. 『사슴』은 차고 또렷한 시각적 효과를 거두며(박용철) 시인의 기억 속에 쭈그리고 있는 동화와 전설의 나라를 그리되 실로 속임 없는 향토의 얼굴을 담아내고 있다(김기림)는 평처럼 그의 시는 당시 유행하던 이미지즘과 깊은 연관을 맺으면서 혼혈주의적混血主義的인 시류에 맞서려 하는 의지를 지녔던 것으로 판단된다.
형식적인 의장意匠으로서의 이미지즘과 내용적 의미로서의 전통이 서로 충돌하며 모더니티와 리얼리티를 동시에 담아내고 있는 그의 시는 가난과 고독, 유랑과 공포 등의 불모의 자의식을 명징하게 담아내며 시대와 사회 속에서 겪는 갈등을 문화사적으로 그려 놓는다. 풍속과 풍물을 구체 공간 안에 고스란히 복원시켜 놓고 있는 백석의 시는 이런 의미에서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아스라한 향수와 아픔을 절절하게 전해준다.
백석은 두 번의 결혼과 두 번의 연애를 겪는다. 두 번의 결혼은 그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그의 부모가 정해준 것이고 두 번의 연애는 ‘난蘭’이라는 여자와 ‘자야子夜’라는 여자와 관련이 있다. ‘난’이라는 여자는 알려진 바에 의하면 1935년 6월 백석의 절친했던 친구인 허준의 결혼식 피로연에서 만난 통영 출신의 이화고 학생이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그녀는 백석의 친구와 결혼하여 버린다.
‘자야’는 조선 권번의 기생으로 1936년 백석이 함흥 영생고보 영어 교사로 부임한 뒤 그해 가을 교사들의 회식 자리에서 그녀를 처음 만나 이후 3~4년 동안 애정 관계를 지속하다 1939년 백석이 만주의 신경으로 떠나게 된 후 이별한다.
백석의 가정 생활은 그리 순탄하지 못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는 부모가 정해준 강제혼이라는 것 외에 백석의 유랑의식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데 실제로 그는 직업뿐만 아니라 가정에 있어서도 한군데 붙박혀 있는 성품은 아니었다. 그의 시에서 여행시편이 유난히 많다는 것 외에도 번듯한 직장이 있었음에도 훌쩍 만주로 떠나 측량 보조원, 측량 서기, 세관원, 소작인 생활을 전전했다는 것도 이를 뒷받침해준다. 백석이 마음 깊숙이 품었던 ‘난’은 통영 명정明井 사람으로 백석과 사랑을 나누지 못했지만 백석은 그녀를 끝내 잊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자야’와 열애하는 중에도 ‘난’이 사는 마을을 찾아간다거나 그녀의 고향인 통영을 동일 제목으로 하는 시를 무려 3편이나 쓴 것도 이를 반증한다.
백석이 ‘난’을 만난 1935년 6월 이후 1935년 12월 《조광》 1권 2호에 발표된 「통영」과 1936년 1월 23일 《조선일보》에 발표된 「통영」, 그리고 1936년 3월 6일 《조선일보》에 발표된 「통영」이 바로 그것으로 이들 시에서는 쓸쓸한 소회와 들떠 있는 감정이 오가고는 있지만 같은 제목을 집요하게 쓰고 있는 것으로 보아 백석의 마음 속에 자리하고 있는 ‘난’에 대한 감정이 지속적이었지 않았는가 싶다.
1936년 1월 23일 《조선일보》에 발표된 「통영」에는 이에 대한 감정이 잘 드러나 있어 주목을 끈다.
집집이 아이만한 피도 안 간 대구를 말리는 곳
황화장사 령감이 일본말을 잘도 하는 곳
처녀들은 모두 어장주漁場主한테 시집을 가고 싶어한다는 곳
산너머로 가는 길 돌각담에 갸웃하는 처녀는 금錦이라든 이 같고
내가 들은 마산 객주집의 어린 딸은 난蘭이라든 이 같고
난蘭이라는 이는 명정明井골에 산다든데
명정골은 산을 넘어 동백나무 감로 같은 물이 솟는 명정샘이 있는 마을인데
샘터엔 오구작작 물을 긷는 처녀며 새악시들 가운데 내가 좋아하는 그이가 있을 것만 같고
내가 좋아하는 그이는 푸른 가지 붉게붉게 동백꽃 피는 철엔 타관 시집을 갈 것만 같은데
긴 토시끼고 큰머리 얹고 오불고불 넘엣거리로 가는 여인은 평안도서 오신 듯한데 동백꽃 피는 철이 그 언제요
옛 장수 모신 낡은 사당의 돌층계에 주저앉어서 나는 이 저녁 울 듯 울 듯 한산도 바다에 뱃사공이 되어가며 녕 낮은 집 담 낮은 집 마당만 높은 집에서 열나흘 달을 업고 손방아만 찧는 내 사람을 생각한다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는 백석과 ‘자야’가 함흥에서 사랑을 나누다 ‘자야’가 서울로 종적을 감추었을 때 백석이 불쑥 ‘자야’를 찾아와 하룻밤을 보낸 뒤 학교의 출근 때문에 서둘러 가면서 ‘자야’에게 준 시였다. 그때의 정황과 심정을 ‘자야’는 백석과의 사랑을 담은 책『내 사랑 백석』, 문학동네, 1995)에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다.
가면서도 한 마디 남기는 말도 없이 총총히 당신은 봉투 한 장을 떨어뜨리고 떠나면서 뒤를 돌아다보고 또 한참을 가다가 다시 뒤를 돌아다보곤 하였다. 기어이 당신의 발걸음은 아득히 멀어졌다. 섭섭하고 아쉬운 마음 새삼 그지없었다.
누런 미농지 봉투를 뜯어보니 당신이 친필로 쓰신 한 편의 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가 들어 있었다. 그것을 단숨에 찬찬히 읽고 나니 몸과 마음이 야릇한 감격에 오싹 자지러졌다. (p. 99)
함흥의 영생보고에서 영어교사로 재직시 모습 백석. 1937년경 ⓒ계간 시인세계 |
겨울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이 시는 사랑의 쓸쓸함과 삶의 적막함을 담백하게 노래한다. 푹푹 눈이 내리는 밤 아름다운 나타샤를 그리며, 홀로 소주를 마시는 모습에서는 사랑에 대한 애절함이, 그리고 “흰 당나귀를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라는 구절에서는 삶에 지친 낙백落魄한 청춘의 초상肖像이, 그러면서도 ‘흰당나귀’ ‘출출이(뱁새)’ ‘마가리(오막살이집)’ 등과 같은 어휘에서는 고요한 밤의 적막 속에서 풍겨 나오는 사랑의 감정이 은은하면서도 순결하게 파동을 일으킨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시를 돋보이게 만드는 것은 다음과 같은 구절이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서 버리는 것이다.” 비록 잠언적 색채를 띠고 있어 다소 위험스러운 기운을 보이고는 있으나 백석의 속내를 솔직하게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 또한 백석의 심리적 정서를 압축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구절은 백석 시를 이해하는 데 있어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나타샤와 함께 살고 싶다던 백석이 꿈꾸었던 ‘산골’은 과연 어디였을까? 불행하게도 백석은 나타샤와 함께가 아니라 그 자신 홀로 1939년 그의 나이 28세 때 《조선일보》의 계열사였던 《여성》지를 그만두고 훌쩍 만주 신경시新京市 동삼마로東三馬路 시영주택 35 황씨방黃氏方에 거처를 정한다. 그리하여 친족 공동체나 민족 공동체에서 분리된 백석의 처지는 그로 하여금 ‘혼자 외로이 앉아 이것 저것 쓸쓸히 생각하’게 하고, ‘어늬 먼 외진 거리에 한고향 사람의 조그마한 가업집’에나 가서 ‘떡국이라도 한 그릇 사먹으리라’라는 객고에 빠져들게 하고 있다. 절망의 극지에서 ‘외로이 앉’아 ‘쓸쓸한 생각’에 빠져 있는 그에게는 『사슴』에서 보이고 있던 풍요로운 기운은 이제 보이지 않는다. 대신 「수박씨 호박씨」, 「북방에서」, 「힌 바람벽이 있어」, 「조당操塘에서」, 「귀농歸農」, 「남신의주南新義州 유동柳洞 박시봉방朴時逢方」에서와 같이 슬픔과 시름, 가난함과 쓸쓸함, 한탄과 눈물 등이 장문의 요설조에 섞여 파동을 이루고 있을 뿐이다(졸고, 「낙원의 原象과 영혼의 풍경」《문예연구》, 2001, 가을). 결국 그는 그곳에서 갖은 고생 끝에 해방이 되자 그의 고향인 정주에 머무르게 되고 이로 인해 영영 ‘자야’와는 이별하게 된다.
박주택 1959년 충남 서산 출생. 경희대 국문과 및 동 대학원 졸업. 1986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꿈의 이동건축』 『사막의 별 아래에서』. 시론서 『낙원 회복과 민족정서의 복원』 등이 있음. 현재 경희사이버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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