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0424. 묵상글 ( 부활 제3주간 월요일. - 없어질 것과 남을 것. 등 )
----------------------------------------------------
230424. 부활 제3주간 월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없어질 것과 남을 것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
꽃과 나무가 있습니다.
꽃을 좋아하는 사람과 나무를 사랑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꽃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많이 볼 수 있는 것이 제게는 슬픈 것입니다.
꽃이 좋아 화분을 사서 키우다가 꽃이 지고 나면 버려버립니다.
꽃이 피는 나무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 꽃만 좋아한 것입니다.
제가 슬픈 것은 버림받은 나무 때문만은 아닙니다.
나무를 버리는 그 사람 때문에 슬픈 것입니다.
어쩌자고 꽃만 보고 나무는 보지 못하는 건지.
어찌 꽃은 좋아하고 나무는 사랑하지 못하는 건지.
어찌 사랑하지는 못하고 좋아하기만 하는 건지.
좋아하기만 하고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은 불쌍합니다.
‘아이 좋아’는 쉬어도 ‘사랑해’ 하는 것은 쉽지 않지요.
그래도 우리는 좋은 것만 너무 좋아하지 말고 사랑할 줄 알아야지요.
좋은 것만 좋아하면 그 좋은 것이 빨리 사라지잖습니까?
꽃이 나무보다 일찍 사라지잖습니까?
꽃은 한철이고 그중에서도 벚꽃은 불과 며칠입니다.
좋은 것도 빨리 사라지고,
좋아하는 것도 이내 싫증으로 바뀝니다.
그러나 사랑은 좋아하는 것을 사랑하는 것은 물론이고,
싫어하는 것까지 사랑하기에 싫증이 없고 오래 가지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 힘쓰지 말고
길이 남을 양식을 얻으려 힘쓰라는 주님 말씀이 이 뜻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
230424. 부활 제3주간 월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도록 힘써라.”(요한 6,27)
오늘 <복음>에서 호수를 건너 가파르나움으로 몰려 온 군중은 대체 무엇을 찾아 온 것일까요? 우리 또한 오늘도 무엇을 찾아 헤매고 있는지요?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찾은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요한 6,25)
그렇다면, 대체 “빵”은 무엇이며, “표징”은 무엇인가? 사실, 우리의 관심사 중의 하나는 ‘먹는 일’일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우리는 ‘맛 집’을 찾습니다. 맛이 좋은 음식, 혹은 몸에 좋은 음식을 찾습니다. 그렇게 군중들은 이미 빵을 배불리 먹었습니다. “빵”은 이와 같이 배를 채우기 위해 먹는 것, 곧 육신을 생명을 위해 먹는 것 말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육신의 생명을 살리는 “빵”을 통해 당신의 ‘말씀’과 ‘당신의 몸’(살이 된 말씀), 곧 성찬을 ‘영원한 생명을 위한 빵’이라는 “표징”으로 드러내십니다. 그러나 군중들은 “빵”으로 육신의 배를 채웠만, 여전히 배고팠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현세적 음식과 자신들의 이익에만 매달릴 뿐, “참된 생명”인 표징을 알아보지는 못했던 것입니다. 혹 우리가 여전히 육신의 안전과 보장, 편리와 유익만을 바라고 참 생명을 주시는 ‘말씀’과 당신 목숨을 건네시는 ‘예수님’께 목숨 걸고 있지 않다면, 바로 우리가 그러한 군중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도록 힘써라.
그 양식은 사람의 아들이 너희에게 줄 것이다.”(요한 6,27)
그렇습니다. 하루를 사는 양식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 바로 그 양식을 지닌 “우리 주님”으로부터 우리는 그것을 얻습니다. 바로 당신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나오는 ‘양식’(βροσισ)이란 단어는 사마리아의 우물가에서 사용되었던 단어입니다. 곧 마을에서 돌아온 제자들이 예수님께 “무엇을 좀 잡수십시오.”라고 하였을 때, 예수님께서는 “내 양식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고, 그분의 일을 완성하는 것이다.”(요한 4,34)라고 대답하셨습니다. 그러니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고 하느님의 일을 완성하는 것”이 바로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참된 양식’이라는 말씀입니다.
군중들은 “우리가 하느님의 일을 하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요한 6,28) 하고 질문하자,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요한 6,28)
여기에 나오는 ‘일’(εργα)이란 단어는 ‘음식의 소화’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 ‘양식’은 눈앞에 두고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입에 넣고 잘 씹어 삼켜야만 비로소 양식이 되듯, “하느님의 일”은 하느님께서 보내신 예수님과 그분의 뜻을 ‘믿고’ 받아들여 우리 안에서 흡수하고 ‘실행’하는 일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양식을 소화시키는 일은 그 양식을 믿고 받아먹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 진정 이것이야말로 양식을 얻는 ‘하느님의 일’인 것입니다. ‘믿는 일’, 이것이야말로 생명의 양식인 ‘말씀’을 소화시켜줍니다. 결국, 우리는 ‘믿음’ 안에서 보내신 분의 뜻을 이루고, 그분의 일을 완성해 나갑니다. 그래서 믿음은 행위가 되고 실현이 되는 ‘양식’이 됩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도록 힘써라.”(요한 6,27)
주님!
당신이 주시는 양식을 눈앞에 두고 바라만 보고 있지 않게 하소서.
입에 넣고서 잘 씹어 삼키게 하소서.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고 완성하는 것이 제 양식이 되게 하소서.
오늘도 당신께서 저와 함께 하시는
당신의 말씀을 이루는 일, 바로 그 일을 하게 하소서.
당신의 사랑하는 일, 바로 그 일을 하게 하소서. 아멘.
----------------------------------------------------
230424. 부활 제3주간 월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참된 믿음과 행동은 구분이 되지 않습니다
끼니조차 채우기 어려운 갈릴래아 사람들의 처지에서 예수님의 등장은 배고픔과 가난에서의 해방을 의미합니다. 빵의 기적을 본 군중은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면 더 이상 끼니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래서 허기를 채워줄 예수님을 찾아다녔습니다.
그런 군중을 향해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 이 말씀은 사람은 밥을 먹어야 산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러나 아무리 많은 밥을 먹어도 그 당시만 만족을 줄 뿐 일정 시간이 지나면 또 배고파집니다. 따라서 영원히 배고프지 않을 음식을 먹어야 합니다. 단순히 육신의 배를 채우기 위해서 힘쓸 것이 아니라, 근본적인 영혼의 배고픔을 채우기 위해서 힘쓰라는 의미입니다. 기억하시죠?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마태4,4). 밥도 필요하지만, 하느님의 말씀이 우선입니다.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은 근본적인 배고픔을 채워주는 영적 음식입니다.
더더욱 말씀이 사람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예수님께서 성체성사를 통해 우리를 배부르게 하십니다. 지상의 양식도 필요하지만, 천상의 양식이 더 소중한데 그 천상 양식은 소홀히 하고 현세적 배고픔만을 채우려 애쓰는 것이 문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이미 말한 대로, 너희는 나를 보고도 나를 믿지 않는다”(요한6,35). 하고 안타까워하셨습니다. 미사 안에서 영성체가 얼마나 중요한지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사람들은 “하느님의 일을 하려면 저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 하셨습니다. 군중의 마음에는 하느님이 요구하는 일을 많이 해야만 영원한 생명을 얻어 누리게 될 것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구원은 인간의 공로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해 보내주신 구원자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고 섬김으로써 구원을 얻게 됩니다. 선행이나 공덕은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 참된 믿음에 자연히 따라오는 것입니다. 실천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요, 참된 믿음과 행동은 구분이 되지 않습니다.
노아가 구원받은 것은, 믿음 때문일까요? 행동 때문일까요? 노아는 배 한 척을 준비하라는 하느님의 말씀을 믿었기에 방주를 만들었습니다. 믿음은 곧 행동이었습니다. 이렇듯 우리에게도 예수님에 대한 믿음, 곧 신앙이 필요합니다. 신앙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선물이기도 하지만 인간의 동의를 통해서 완성됩니다. 하느님의 선물인 자유의지를 가지고 인간이 거부할 수 있으니 신앙은 하느님의 일인 동시에 인간의 일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싶어 하는 만큼, 기도 시간을 챙기고 성경을 읽으며 미사참례를 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 되어야 합니다. 성경을 하느님의 말씀으로 믿는다면 왜 그 말씀을 듣기를 주저하고 실천하기를 두려워합니까? 아마도 그것은 현실적인 득이 되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현세의 축복이 풍성하게 주어지면 기도하라 하지 않아도 매달릴 것입니다. 그러나 현세의 축복도 좋지만, 천상의 축복이 더 귀합니다. 영광의 특권을 누리기 위해 믿음의 특권, 곧 고난의 특권을 감당할 수 있는 은혜가 함께하기를 기원합니다.
성 베르나르도는 “하느님의 위안은 다른 위로를 찾는 사람에게는 있을 수 없습니다. 진실한 것이 헛된 것과, 영신적인 것이 육신적인 것과, 최고의 것과 최저의 것과 혼동되기도 하지만 천상의 것과 지상의 것을 똑같이 맛볼 수는 없는 것입니다.”하고 말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은 풍부하지만, 인간의 협력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협력을 통해서 선한 열매를 맺어 주십니다. 그러나 썩어 없어질 세상 것에는 눈이 번쩍 뜨이면서도 천상의 것인 영원한 생명에는 굼뜬 우리의 모습은 아닌지요?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230424. 부활 제3주간 월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하느님께 순종한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자손들은 ‘이스라엘’이 되어서 하느님께 선택받은 민족이 되었습니다. 거대한 장벽이 가로막혀 있는 것처럼, 무서운 호랑이 앞에 있는 토끼처럼 이스라엘의 주변에는 찬란한 문명을 가진 국가가 있었습니다. 굶주림을 피해서 갔던 이집트는 굶주린 이스라엘 백성을 충분히 먹일 수 있을 만큼 부유한 나라였습니다. 지금의 기준으로 봐도 엄청난 피라미드를 건설할 정도로 과학이 발전하였습니다. 요나가 회개를 선포했던 아시리아의 수도 니네베는 규모가 엄청 컸습니다. 아시리아는 강한 군사력으로 이스라엘을 침략했습니다. 예루살렘의 성전을 파괴하였습니다. 바빌로니아는 이스라엘 백성을 포로로 잡아갔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망국의 슬픔을 느끼기도 전에 바빌로니아의 공중정원에 감탄해야 했습니다. 바빌로니아를 멸망시킨 페르시아의 왕 고레스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해방시켜서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페르시아 왕 고레스를 하느님께서 보내 주신 메시아라고 생각했습니다. 페르시아를 멸망시킨 로마는 이스라엘을 식민지로 통치하였습니다. 힘과 권력으로 이루어지는 로마의 평화가 시작되었습니다.
문화와 사회 구조에서는 당대의 선진국을 따라갈 수 없었지만 이스라엘은 야훼 하느님을 믿는 신앙을 굳게 간직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깊은 성찰을 통해서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하느님의 의로움이 드러나는 새로운 하늘과 새 땅을 꿈꾸었습니다. 비록 강대국의 힘에 의해서 나라를 빼앗기고, 포로로 끌려갈지라도 하느님을 믿고 의지하면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지켜주시리라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억울하게 목숨을 잃을지라도 하느님께서는 그런 이스라엘 백성을 다시 살려주시리라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그것이 영원한 생명으로 이어지는 ‘부활신앙’입니다. 2000년 전에 베들레헴에서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힘과 권력으로 남을 침략해서 얻는 평화를 이야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겸손과 나눔을 통해서 얻는 평화를 이야기하셨습니다. 십자가와 희생을 통해서 얻는 자유를 이야기하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비참하게 죽으셨지만 예수님께서는 미리 예고하신대로 부활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공동체는 교회가 되었고, 그 교회가 온갖 박해를 받았지만 로마의 국교가 되었고 십자가와 부활로 이어지는 그리스도의 평화가 시작되었습니다.
단군 할아버지가 이 땅에 터를 잡고 ‘홍익인간’의 이상으로 나라를 세웠습니다. 거대한 장벽이 가로막혀 있는 것처럼, 무서운 호랑이 앞에 있는 토끼처럼 우리 민족의 주변에는 찬란한 문명을 가진 국가가 있었습니다. 강한 힘을 가진 국가가 있었습니다. 중국에서 전해진 유교는 우리 민족의 전통과 문화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중국으로부터 전해진 불교는 오랜 동안 우리 민족의 정신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우리는 중국에 사절을 보내기도 했고, 조공을 바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중국의 침략은 막아냈습니다. 일본은 임진왜란으로 우리의 국토를 침략하였습니다. 한일합방으로 36년간 우리민족을 식민지로 통치하였습니다. 근대화의 과정에서 우리는 일본을 따라가야 했습니다. 냉전 시대에 러시아는 공산주의의 맹주가 되었습니다. 그 러시아는 바로 우리와 국경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민주주의의 수호자를 자처하는 미국은 1950년 한국전쟁 당시 연합군과 함께 참전하였습니다. 미군은 아직까지 대한민국에 주둔하고 있으며 우리의 경제, 문화, 사회의 많은 것들은 미국으로부터 영향을 받았습니다.
박은식은 한국통사에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옛사람이 이르기를 나라는 멸할 수가 있으나 역사는 멸할 수가 없다고 하였으니, 그것은 나라는 형체이고 역사는 정신이기 때문이다. 이제 한국의 형체는 허물어졌으나 정신은 홀로 존재할 수 없는 것인가. 이것이 통사(痛史)를 짓는 까닭이다. 정신이 보존되어 멸하지 아니하면 형체는 부활할 때가 있을 것이다.” 5000년을 이어오는 우리 민족은 많은 외세의 침략이 있었지만 굳건하게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한강의 기적을 이루었고, 세계 10위의 경제력을 가진 나라가 되었습니다. 보릿고개를 넘으며 굶주림을 참아야 했지만 이제는 가난한 나라를 도와 줄 수 있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K Culture"는 한류라는 이름으로 당당하게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비록 나라를 빼앗기는 슬픈 역사가 있었지만 우리는 ‘홍익인간’이라는 우리 민족의 정신을 굳게 간직하였습니다. 우리의 얼과 혼을 빼앗기지 않는다면, 우리의 얼과 혼을 지켜낸다면 우리는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 널리 세상을 이롭게 하는 우리 민족의 정체성이 하느님의 말씀을 만나면 우리가 사는 이곳이 바로 새 하늘과 새 땅이 될 것입니다.
----------------------------------------------------
230424. 부활 제3주간 월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쉬면 뇌는 휴식 상태에 들어갈까요? 소위 ‘멍때리기’를 하면 뇌의 활동이 없어서 푹 쉴 수 있을까요? 미국 신경과학자 마커스 라이클도 처음에는 아무런 과제를 주지 않을 때는 뇌의 모든 부위에서 활성화 정도가 줄어들다가, 다시 과제를 주면 뇌의 여기저기가 활성화되고 에너지도 더 많이 사용하고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fMRI를 이용한 뇌 영상 연구를 통해 놀라운 점을 발견했습니다.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을 때도 뇌는 열심히 일하고 있는 것입니다. 목표 지향적 행위나 과제를 수행할 때와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 뇌가 사용하는 에너지 차이는 5% 미만에 불과했습니다. 하긴 매일 먹고 자고 하는 일 없이 빈둥거리는 사람도 피곤하다는 말을 많이 하지 않습니까?
목표지향적 행위를 하는 것이나, 아무것도 하지 않으나 똑같이 뇌가 열심히 활동해서 피곤함을 느끼게 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사는 것이 유익할까요? 아무것도 하지 않아서 피곤하지 않고 개운한 상태가 된다면야 그렇게 살라고 하겠지만, 똑같다면 기왕이면 창의적인 일을 하는 것이 훨씬 낫지 않을까요?
하느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신 목적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어떻게든 또 무엇이든 하면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는 삶을 사는 것이었습니다.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 후에 군중은 예수님을 어떻게든 따라다니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참 하느님이심을 알았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보다 예수님과 함께하면 삶의 많은 부분을 걱정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었지요. 모든 것을 예수님께서 해결해주실 테니까요.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
성경에서 빵과 음식은 생명을 상징합니다. 유다인들은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합당하게 얻으려면 정해진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지요. 그러나 예수님께서 유일하게 바리시는 것은 사람의 일이 아니라 사람 안에서 이루시는 하느님의 일, 곧 아버지께서 보내신 분을 믿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그분을 이미 생명을 주는 빵으로 여기게 됩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삶을 살지 않습니다. 그저 ‘알아서 먹고살게 해주시겠지.’라면서 세상의 일을 무시하는 삶을 살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즉, 사랑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
돈은 내 것이 아니며 돈은 행복의 원천이 아니다. 내 꿈은 행복하고 평범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주윤발).
------------------------
----------------------------------------------------
230424. 부활 제3주간 월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위로부터의 삶
-영원한 생명이신 주님을 찾는 삶-
“행복하여라,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 사는 이들!”(시편119,1)
이런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 사는 행복한 사람들이 바로 위로부터의 사람들입니다. 주님을 찾는 삶은 아름답습니다. 바로 영원한 생명을 추구하는 삶이기도 합니다. 사실 누구나 마음 깊이에는 이런 열망이 있습니다. 어제 아름다운 분과의 만남이 참 좋았습니다. 유난히 친화력이 뛰어나고 붙임성이 좋은 분으로 시간될 때 마다 수도원을 찾아 주방에서 봉사하는 분입니다. 주고 받은 내용입니다.
“본당 신부님의 소개를 받아 수도원에 왔습니다. 와서 봉사하다 보면 치유되는 느낌입니다. 수사님들은 순수하셔서 세상에 섞여져도 곧 구별되는 분들입니다.”
“요양원에서 일한다는데 힘들지 않습니까?”
“아닙니다. 요양원 근무하기 7년인데 오히려 어르신들을 좋아하고 어르신들이 저를 좋아하기에 오히려 에너지를 받습니다. 즐겁습니다.”
참 좋으신 분이라 칭찬했습니다. 세상 한 복판에서도 하느님을 찾으며 참 맑은 기쁨으로 사시는 자매님이였습니다. 사실 세상 곳곳에는 영원한 생명이신 주님만을 추구하며, 세상에 희망을 두지 않고 하느님께 희망을 두고 ‘파스카의 꽃’처럼 청초하게 사는 분들도 많습니다.
요즘 담쟁이가 한참 담장을 타오르고 있습니다. 수십년이 지난 지금도 선명히 떠오르는, 자주 인용했던 “담쟁이”란 시입니다. 주님을 찾는 구도자적 열정을 지닌 분들이 좋아하는 시입니다.
“이제부터 다시 시작이다
작년가을 붉게 타오르다 사라져 갔던 담쟁이
어느새 다시 시작했다
초록빛 열정으로
힘차게 하늘 향해
담벼락, 바위, 나무 타오르기 시작했다
마침내
붉은 사랑으로 타오르다
가을 서리 내려 타오르는 날까지
또 계속이다
해마다 반복되는
제자리 삶에도
지칠줄 모르는 초록빛 열정
다만 오늘
하늘 향해 타오를뿐
내일은 모른다
타오름 자체의 과정이
행복이요 충만이요 영원이다
오늘 하루만 사는 초록빛 영성이다”-1998.6.3.
무려 25년전 이 자리에서 쓴 시이지만 읽을 때마다 늘 새롭습니다. 젊음은, 영적 건강은 나이에 있는게 아니라 하느님을 찾는 열정에 있습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찾는 열정이 한결같으면 늘 영원한 청춘이요, 지금과 같은 늘 신록의 계절, 신록의 기쁨, 신록의 아름다움을 살 수 있습니다. 바로 이런 이들의 삶을 일컬어 “위로부터의 삶(the life from above)”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위로부터의 삶(the life from above)”과 “아래로부터의 삶(the life from below)”이 극명한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제1독서 사도행전부터 드려다 봅니다. 은총과 능력이 충만하여 백성가운데에서 이적과 표징들을 일으키는 스테파노는 분명 위로부터의 사람입니다.
반면 스테파노의 적대자들은 아래로부터의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스테파노와 논쟁을 벌였으나 그의 말에서 드러나는 지혜와 성령에 대항할 수가 없자 사람들을 선동하여 악의적인 거짓 증언으로 스테파노를 곤경에 빠뜨립니다. 마지막 구절이 스테파노가 위로부터의 사람임을 입증합니다. 6장15절 말씀은 7장55-56절로 연결해보면 스테파노의 위로부터의 삶임이 환히 드러납니다.
‘최고 의회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모두 스테파노를 유심히 바라보았는데, 그의 얼굴은 천사의 얼굴처럼 빛났다. 스테파노는 성령이 충만하였다. 그가 하늘을 유심히 바라보니 하느님의 영광과 하느님 오른쪽에 서 계신 예수님이 보였다. 그래서 그는 “보십시오, 하늘이 열려 있고 사람의 아들이 하느님 오른쪽에 서 계신 것이 보입니다.”하고 말하였다.’
늘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님을 추구했던 스테파노 삶의 비밀이 잘 드러납니다. 바로 스테파노의 지혜와 성령은 위의 주님으로부터의 선물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빵의 기적을 보고 예수님을 찾은 사람들이야 말로 전형적인 아래로부터의 사람들이요 바로 우리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은 이들을 향해 위로부터의 삶으로 전환할 것을 촉구합니다. 바로 우리 모두를 향한 말씀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 그 양식은 사람의 이들이 너희에게 줄 것이다.”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는 아래로부터의 삶에서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는 삶으로 전환을 촉구하는 말씀입니다. 저절로 은총의 선물이 아니니 우리 또한 하루하루 영원한 생명이신 주님에 가까이 이르고자 분투의 노력을 다하라는 말씀입니다. 끊임없이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영원한 생명 자체이신 주님을 찾아 일치의 삶을 살라는 말씀입니다. 이래야 비로소 위로부터의 삶입니다. 마지막 대목의 주고 받은 대화도 깊은 가르침이자 깨우침이 됩니다.
“하느님의 일을 하려면 저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
참으로 우리가 청해야 할 바 믿음의 은총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사랑하여 일치가 깊어질수록, 주님을 닮아갈수록 우리는 위로부터의 삶을 살게 될 것이고 우리가 하는 일은 모두 하느님의 일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의 부족한 믿음을 도와주시며 영원한 생명이신 당신 만을 찾는 위로부터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주님, 파스카의 영약으로 저희의 본성을 새롭게 하셨으니, 저희가 옛 삶에서 벗어나 그리스도를 따라 살게 하소서.” 아멘.
----------------------------------------------------
230424. 부활 제3주간 월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주님께서 오천명을 먹이신 기적을 베푸신 뒤 사람들은 주님을 더욱 추종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주님을 따라다니면 빵을 배불리 먹을 수 있다는 것을 사람들이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주님의 사랑과 자비를 다른 방향으로 보기 시작했습니다. 영적인 분을 영적으로 보지 않고 오히려 더욱 육적인 눈으로 보기 시작한 것입니다. 어느 정도는 이해합니다. 우리는 선거를 치를 때 민생안정, 즉 서민의 경제를 위해 헌신할 사람을 찾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잘 먹고 잘사는 나라를 꿈꾸는 것은 비단 우리만이 아닙니다. 다른 나라의 사람들도 같은 것입니다.
만약 지금 이 시대에 주님처럼 빵 몇 개로 오천 명을 먹일 수 있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수많은 사람은 그를 따를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이런 군중을 향해, 이런 우리를 향해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영원한 생명을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
그리고 이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
즉 믿음이 바로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참 지혜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찾아 나섭니다. 그리고 믿음이 바로 영원한 생명임을 찾아냅니다.
오늘 독서는 그러한 지혜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지혜는 성령 안에서 드러남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우리도 썩어 없어질 것을 찾아 나서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주는 참으로 살아있는 빵을 찾아 나서기를 희망합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지혜이신 성령께서 우리의 믿음을 더욱 굳세게 해주시기를 바랍니다.
용땡산
어릴 적 저는 할아버지, 할머니와 살았습니다.
산속 깊숙한 시골에 살았는데
가끔 두 분은 제게 심부름시키셨습니다.
할머니는 박땡스와 사땡돈.
할아버지는 베땡밀과 용땡산.
오늘 미사를 봉헌하기 전
저는 용땡산을 입에 털어 넣었습니다.
물론 지금의 용땡산은 더욱 먹기 좋게
하나씩 포장되어 나옵니다.
할아버지처럼 담배를 피워서(저는 담배를 피우지 않습니다.)
용땡산을 먹는 것은 아닙니다.
그저 미사를 더욱 좋은 목소리로 하기 위해서 먹습니다.
그때마다 할아버지 생각이 납니다.
미사 전 용땡산을 먹을 때마다
할아버지에게 기도합니다.
오늘도 열정과 열의로 하느님을 전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말입니다.
----------------------------------------------------
230424. 부활 제3주간 월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먹으니 먹히는 것>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밥으로 오시는 분을
믿음으로써
하느님의 일을
한다는 것은
먹는 것만도
아니요
먹히는 것만도
아니요
먹으니
먹히는 것입니다
----------------------------------------------------
|